근대 사회에서 권력은 주권의 공법과 규율의 다형적 기제 사이의
이런 이질성의 놀이 자체를 통해, 이 놀이에서 출발해,
이 놀이 속에서 행사되는 것입니다.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난장, 2015), 57.
상상의 크기
이 글의 목적은 일단 쓰이는 것이다. 질문으로 글을 연다. 어떻게 비상계엄이 가능했을까? 간단한 대답이 떠오른다. 윤석열이 파시스트였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의 행보는 기행 그 자체였다. ‘바이든 사건’과 ‘입틀막 사건’을 상기해 본다. 본인 입에서 나온 실언을 부인하고 차이를 빚는 의견을 무력으로 틀어막았던 그(들)의 ‘정치’를 돌이켜보았을 때, 파시즘이라는 말이 솟는 걸 막을 수 없다. 이건 분석도 무엇도 아니고 차라리 비난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윤석열은 이승만에게 역사의 한 자리를 다시 내어주려고 했고, 5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재개했다. 파시스트 아닌가? 그러니까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건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잠시 질문을 바꾸어 본다. 어쩌면 계엄, 아니 친위 쿠데타 내란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체 어떻게 상상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할지 모른다. 윤석열과 그가 관계 맺은 정치적 연결망은 어떻게 계엄을 상상해 낼 수 있었을까? 계엄이 발생시킨 힘은 군경의 무력뿐만이 아니었다. 그 힘은 분명 상상력의 힘이었고, 그렇기에 모욕적이었다. 지금 좌파 정치가 혁명 혹은 테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치는 소진되었고, 이론은 절망 중이다. 그런데 윤석열의 내란은 느닷없이 반혁명의 가능성을 발생시켰다. 뒤이어, 윤석열이 구속된 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일어난 극우 시위대의 난동은 집회의 한계 지점을 벗어나 반란과 테러로 연결되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했다.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 따위로 대표되는 좌파 정치의 오랜 상상이 불가능성으로 취급되며 보다 안전하게 길들여지는 사이, ‘우리’는 ‘저들’에게 상상의 크기를 줄곧 빼앗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멸감이 든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르겠다. 내란과 극우 시위대의 난동으로부터 포착된 모종의 힘을 전유하여, 좌파 정치 또한 상상을 현실화하는 역량을 계발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실제로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다. 내가 혼자서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다. 그러나, 일단 쓰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글에서, 나는 윤석열 퇴진 요구 집회에서 발생한 (말하자면) 비폭력, ‘평화’1의 형태야말로 반란에 준하는 힘을 가시화하며, 내란이라는 반혁명과 극우 시위대의 폭력이 표시한 힘은 오히려 권력의 안정적 배치와 관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해 보고자 한다.
법치의 크기
다시, 윤석열은 파시스트일까?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윤석열은 군국주의자도, 군국주의자의 후계도 아닌, 엘리트 법 관료의 모습으로 현실 정치에 등장했다. 윤석열이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한 건 아마도 2013년이다. 당시 그는 ‘국정원 댓글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이었고, 공식적인 보고 절차를 무시하고 국정원 대북심리전단 직원을 압수 수색한 건으로 직무 배제당했다.2 이후 윤석열은 사건과 관련하여 국정감사장에 불려 나가는데, 거기서 황교안(당시 법무부 장관)과 조영곤(당시 서울지검장) 등이 수사를 방해하고 외압을 행사했음을 증언하며 이목을 끌었다. 이때 이 인간이 남긴 말이 “나는 조직을 사랑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였다. 그 시기 서울대 교수였던 조국은 “윤석열 검사의 오늘 발언, 두고두고 내 마음속에 남을 것 같다”라는 트윗을 남기며 호응하기도 했다. 3 일련의 사태를 논평하면서, 누군가는 윤석열이 “누구의 검사도 아”닌 “그냥 검사 윤석열”이라고 강조한 적 있다.4 이는 그를 현실 정치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강직한 법 관료로 서사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윤석열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국의 법치가 관료적 원칙과 양심에 의하여 정상 작동하고 있다는 상상을 증언하는 것에 있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내란은, 법치주의자였던 “그냥 검사 윤석열”이 군국주의적 파시스트로 난데없이 변신한 끝에 일어난 사건처럼 여겨진다. 윤석열은 법치주의자에서 군국주의자로 갑작스러운 단절을 겪었고, 그 결과 과거의 자신을 등지고는 불법 친위 쿠데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때 우리는 내란이 발생한 역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모종의 단절 지점을 찾기 위한 계보학을 진행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어쩌면 윤석열은 법치주의자에서 군국주의자로의 단절을 겪은 적이 없으며, 내란은, 그것이 불법적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음에도, 어디까지나 법치주의자의 세계관에서 수행된 것이라는 가능성 말이다.
윤석열이 대선 운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경제와 인터뷰를 한 적 있다. 여기서 그는 갑자기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을 인용하면서, "먹으면 병 걸리고 죽는 것이면 몰라도 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5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도저히 숙고를 거친 발언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매일경제는 인터뷰를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했지만, 이후 지면 기사로는 옮기지 않았다6). 하지만 프리드먼을 어설프게 전용한 윤석열의 시장 논리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대신, 놀랍(지 않)게도 그의 통치 논리에 전면적으로 반영되고 만다.
정치학자 이관후는 내란 이전에 쓰인 칼럼에서 윤석열 정부의 통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아무렇게나 통치되거나, 아예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7. “박근혜 정부가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라면, 윤석열 정부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할 줄 몰라서 안 한다기 보다는 일부러 하지 않는”8다는 것이다. 이관후는 통치하지 않음으로써 통치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정치가 “경제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인생의 책'으로 27년이나 끼고 다녔다는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에 따”른 것이며, 이는 곧 “80년대에 한국에 이식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최종 버전, 혹은 세계적으로는 이미 폐기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후진적 재현”9에 가까운 무엇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통치를 돌아본다면, 내란 자체를 포함하여 해당 정부의 통치 내내 돌출되었던 무지와 폭력이, 파시스트의 것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법치주의자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10
신자유주의적 법치주의자는 무슨 일을 하는가? 그들은 대중민주주의로부터 정당성을 박탈하고, 경제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며11,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법률전(lawfare)의 형태로 엄호하는 역할을 도맡는다. 내란이 발생한 뒤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일 『내전, 대중혐오, 법치』에서, 저자들은 법치를 신자유주의를 유지, 보수하기 위한 목적의 전쟁 기계라고 이론화한다(위에 인용한 이관후의 칼럼 역시 같은 책에 기댄다). 법은 정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법률전에서의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무기다. 그리고 법률전이란, 범죄로부터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법률전 자기 자신을 법치국가를 지지하는 도구로 가장하지만, 실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적으로 지목된 이들을 제거하는 법의 정치 전략을 가리킨다.12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법률전을 통하여 어디까지나 합법성의 영역에서 적을 제압하고 제거한다. 또한 법 엘리트들은 민주주의를 성장시키거나 정의를 고려하는 일에 신경 쓰기보다는, 정치, 경제 엘리트 혹은 외국, 다국적 기업과 같은 ‘신엘리트’들과의 동맹을 성사시키는데에 주력하는데, 이들 법 엘리트들은 국가기관 공무원을 순수한 기술자로 표상하는 탈정치적 관습에 의존하여 기성 정치인과 달리 자신이 유능하고, 중립적이며, 부패하지 않은 전문가임을 내세우며 권력을 획득한다(법 엘리트가 ‘신엘리트’와의 동맹을 통하여 사회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계급적 편견을 다수 강화한다는 사실은 흔히 은폐된다). 사법 권력이 그나마 활발히 기능하는 때는 좌파 정치인이나 사회 운동의 지도자들이 법적 소송이나 처벌의 대상이 될 때뿐이다. 13 14
책에서 묘사된 법치의 작동 방식은 법 관료 윤석열이 대권주자 윤석열로 서사화될 수 있었던 경로를 명료하게 가시화한다. 물론 『내전, 대중혐오, 법치』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이들에 의하여 쓰인 책이다.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을 경유한 보다 밀접한 연구가 덧붙여진 것이 아니기에, 위의 인용을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와 관련한 이론화 작업은 그 자체로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비판은 사태를 정확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이론 틀에 끼워 맞추어 지식장에 발언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전술로 활용된 바가 있고, 내란이라는 지금 여기의 사건을 돌아보며 ‘신자유주의’를 발판 삼을 때 이러한 추상화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 만큼, 사태를 덜 추상화된 형태로 다루기 위하여, 비판적 이론 틀의 작동 과정 바깥에서 한국의 법치를 논의한 사례를 한 가지 더 참조해 본다. 형법학자 이호중은 한국 검찰의 담론 권력을 분석한 연구에서, 검찰이 이미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성장”했고, “자본 및 신자유주의 정치권력과 구조적으로 긴밀한 유착 내지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15었다고 짚으며, 그들이 정치적 독립성 아래 기능해 온 중립적 도구라는 명제를 기각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한국의 검찰은 정치경제적 지배계급/이데올로기로부터 요청되는 신자유주의적 법담론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역할을 맡아 왔기에, 근본적으로 정치적 편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기관이라는 게 그의 요지다. 특히 한국 검찰이 정치적 편향을 직접적으로 현실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핵심적 권력인 기소/불기소의 사전처리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16 한국 검찰은 불기소 처분으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는 권한을 유용(流用)해 “다양한 방식의 조건부 기소유예를 적극적으로 활용”17하는 편법으로 사회적 사건의 법적 실체를 규정해 왔다는 것이다. 기소권 덕분에 검사는 피고인과 대립되는 소송당사자의 지위를 갖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법담론과 법집행의 주도적인 생산자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18 특히 검찰은 과거 이명박 정부 당시 ‘법질서 정책’을 강력하게 표방하면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집회, 시위, 언론 등에 대하여 수사와 공소제기권한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며 시민이 행사하는 민주주의적 권리 행사를 적극적으로 불법화해 온 전력이 있는데, 이는 사회적 사건을 실체화하는 검찰의 담론 권력이 불공평하게 분배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주요한 사례다.19
여기까지 살펴 보았을 때, 한국 검찰이 갖는 법의 이데올로기를 ‘신자유주의적 법치’로 가정하는 것이 지나친 억측은 아닐 듯하다. 아무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법치주의는 윤석열의 내란에 의하여 망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망가진 채였으며 한 번도 정상적으로 작동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쟁 기계화’된 법치가 노골적인 폭력의 기술로 외화된 사건이 있었다. 2009년 용산에서 발생한 ‘용산 참사' 이후의 기소 과정에서였다. 참사를 사법처리하면서 검찰은 경찰 측에 불기소 처분을 내린 반면, 철거민들만을 기소 대상으로 삼아 책임을 물었다. 이에 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는 경찰과 용역을 대상으로 고소 고발 운동을 진행했지만, “문제는 이들을 어디에 고발해야 하느냐”20에 있었다. 검찰은 이미 경찰의 무죄를 선언했고 당시 국회는 2/3 이상이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정당 의원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철거민은 불법을 합법화하고 합법을 불법화하는, 무기화된 법치의 ‘정당한’ 폭력 아래 “존재 자체가 불법”21화되었다.
“참사로 인해 철거민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죄’다. 즉, 경찰 한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철거민 다섯 명의 생명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 용산범대위의 모든 행사는 불법이 되었다. 평화적인 추모대회마저 모두 금지통보가 내려졌고 경찰력을 동원해 행사장을 봉쇄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없었고 표현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유족들이 경찰에게 폭행을 당해도 거꾸로 경관폭행죄로 연행해 갔다. 이처럼 모든 국가기구가 철거민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 이들의 호소조차 들어줄 곳이 없는 철저한 무권리의 상태가 되었다.”22
법치주의라는 것은 예컨대 용산 철거민에게 2009년 이래 구멍 뚫린 것이었으며 법이 대리할 생각이 없었던 소수자들에게도 내내 그러한 것이었다. “그냥 검사 윤석열”은 정의의 대리자가 아니라 법의 대리자이며 이때 법이란 신자유주의 독트린을 유지하기 위한 전술 자원을 가리킨다. 엘리트 법 관료였던 윤석열이 일으킨 내란은, 신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논리와 관성에 따라 발발한, 법치주의적 불법 내란이라는 모순어법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순어법이 가능한 이유는 법치주의 그 자체가 이미 내적 모순을 포함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1월 15일 한남동 관저에서 경호 인력을 불법 동원해 공성전을 펼치던 윤석열은 결국 공수처 측에 체포되었는데, 체포 직전 공개한 영상메시지에서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법이 모두 무너졌다”며, “국민들을 기만하는 불법의 불법의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고 개탄했다.23 논리 전개를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발언이었지만, 이는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의도적 궤변이 아니라 정말 언어 그대로의 발화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법이 모두 무너졌다”는 말을 정의가 고갈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법률전에서 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전술이 고갈되었다는 뜻으로 읽는다면 정말로 그렇다.
그러니까 아마도…
지난 2011년, 당시 노무현 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24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명 계좌가 발견되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발언했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시위였다. 그리고 2017년,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선 문재인의 사진은 다시 한번 주목 받는다. 박근혜 탄핵 후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가 검찰 개혁을 국정 과제로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검찰 개혁을 준비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발탁한다. 윤석열은 전임이던 문무일 검찰총장보다 다섯 기수나 아래였기에, 이는 파격적인 인사라는 평을 들었다.25 모두 검찰 개혁을 위한 인선이었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조국이 자녀들의 대입 관련 부정을 위시하여 각종 의혹에 휩싸이고,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이 이를 수사하기 시작하면서 검찰 개혁은 파행에 이른다.26 이후 벌어진 일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같다. 사건의 사실 관계 및 진행은 여기서 다룰 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다만 윤석열로 대표되는 법 엘리트는 법치 권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소권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고, 조국으로 대표되는 (일단은 이렇게 말하자) ‘리버럴’ 엘리트는 계급 재생산을 위하여 ‘열심히’ 살았으며, 그렇게 법 엘리트와 리버럴 정치 엘리트의 자기모순이 맞부딪힌 결과 일종의 사후적 지연으로서 당도한 것이 다름 아닌 내란이었던 것은 아닐까, 질문하는 것으로 화제를 닫아 보려고 한다.
유튜브를 매체 삼아 각종 담론을 전개하며 내란을 합법의 영역으로 포섭하려는 윤석열 퇴진 반대 집회 측의 전술은 불기소 권한을 활용하며 법리를 유용하는 검찰의 익숙한 전략을 상기시키고, 그렇기에 법률전에서 법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어쭙잖은 패러디처럼 보인다. 극우 시위대의 난동을 반란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이들의 폭력은 아직은 윤석열을 매개 삼아 진행되고, 그럴 수밖에 없으며, 윤석열이라는 매개 지점을 잃는 순간 일단 형해화될 가능성이 높다. 극우 시위대의 폭력은 윤석열을 수호하기 위한 매개된 폭력, 그러므로 법치를 수호하기 위한 폭력, 그러므로 권력에 의하여 꾸준하게 ‘합법화’되고 허용되어 온 형태의 폭력이며, 경찰과 법원을 대상으로 행사된 폭력임에도 차라리 사회 운동을 향하여 흔히 겨누어지는 경찰의 폭력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힘의 행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의 폭력을 물질화하고 있는 것은 정의도, 오인된 정의도 아닌, 오인된 법치이며 그들 상상의 크기는 법치의 크기와 완전히 일치하기에 조금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벗어날 수도 없다. 그들이 취하는 상상의 크기는 법치가 정교화한 권력의 흐름을, 주체의 모양을, 폭력의 형태를 줄곧 그대로 따른다.
윤석열 퇴진 요구 집회에서 등장한 ‘평화’는 민중이 비폭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규범에 규율화된 결과였을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게 작용하는 법치의 폭력을 인지한 채로, 법에게 무력하게 포획당하는 대신 나름의 방법으로 싸움을 지속하기 위하여 투쟁 전술을 현실화한 결과였을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나는 집회에서 가시화된 힘이 후자의 사례에 가깝지 않나 생각하고 싶다. 설령 그것이 규율화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규율화가 법치의 폭력과 호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에 맞서는 모양새로 (우연히도) 배치될 때, 일시적으로 물질화되는 이질성의 틈새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규율화된 신체일지언정 법의 불공평한 분배에 맞서는 순간 그것은 법에 대한 해체 작업을 초래하며 법이 갖는 힘과 관련한 반란 작용을 유발한다. ‘저들‘이 저들의 방식으로 법치를 사용한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방식으로 법치에 관여함으로써 그것을 사용한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말해 본다. 상상의 크기가 법치의 크기를 넘어서고자 할 때, 법치를 넘어 정의를 희구할 준비가 된 그때, 상상은 자연히 매개되지 않은 폭력을 요청할 것이며 폭력은 그렇게 진정으로 수행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상상의 크기에 준하는 법의 정초 역시 그렇게 준비될 것이라고. 아마도…
1 물론 이 ‘평화’는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하나의 집회 역시 온갖 이질성과 갈등이 뒤섞이는 현장이다. 이 글에서는 실질적 폭력이 윤석열 퇴진 요구 집회에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화’라는 말을 임시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2 「'직무배제' 윤석열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 국감 출석」, 『법률신문』, 2013년 10월 21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3 최경준, 「윤석열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2013년 10월 22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4 임찬종, 「[취재파일] 누구의 검사도 아닌 '그냥' 윤석열 검사」, 『SBS 뉴스』, 2013년 10월 24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5 윤주영, 「윤석열 '불량식품' 논란..."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한국일보』, 2021년 8월 2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6 조현호, 「매일경제, 왜 윤석열 ‘부정식품’ 발언을 지면에 뺐을까」, 『미디어오늘』, 2021년 8월 2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7 이관후, 「윤석열 통치의 비밀, 하이에크」, 『프레시안』, 2024년 5월 4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8 같은 글.
9 같은 글.
10 이쯤에서 잠깐 짚어두고 싶은 건, 내가 윤석열이라는 용어로 윤석열 개인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관련되어 있는 다양한 연결망을 환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주장한다고 글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일단 지금 내 마음은 그렇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11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르, 오 게강,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정기헌 옮김(원더박스, 2024), 59-60.
12 같은 책, 270.
13 같은 책, 273-276.
14 다만 이는 신자유주의화된 법치 뿐만 아니라, 법 그 자체가 지닌 역량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법의 정초와 정당화의 순간에 법은 이미 일정한 권위가 기입된 수행적, 해석적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내가 기술하고 있는 법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데 (…) 법 바깥에 또는 법 너머에 있는 정의 그 자체(…)는 해체 불가능하다.”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문학과지성사, 2004), 33.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이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같은 책, 37.
법을 다루는 데리다의 관점에 대하여 김성민, 「법의 (불)가능성과 정의의 우선성 - 데리다의 『법의 힘』에서 해체적 기획을 중심으로」를 참조했다.
김성민, 「법의 (불)가능성과 정의의 우선성 - 데리다의 『법의 힘』에서 해체적 기획을 중심으로 -」, 『철학논집』, vol. 40(2015).
15 이호중, 「담론권력으로서 검찰」, 『법과사회』, vol. 37(2009), 56-57.
16 같은 글, 56-57.
17 같은 글, 57.
18 같은 글, 58.
19 같은 글, 63.
20 홍석만, 「용산참사의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주의 연구』, vol. 6(2)(2009), 21.
21 같은 글, 21.
22 같은 글, 20-21.
23 조현호, 「[속보] 윤석열, 합법 영장에 “법 무너지고 수사 불법” 일방 주장」, 『미디어오늘』, 2025년 1월 15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24 홍석재, 「문재인, 첫번째로 ‘1인 시위’」, 『한겨레』, 2010년 12월 20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25 박현익, 「윤석열, '고검장 건너뛰고' 첫 검사장급 검찰총장 후보 '파격 발탁'」, 『조선일보』, 2019년 6월 18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
26 이춘재, 「조국과 윤석열, 어긋난 ‘환상의 조합’」, 『한겨레』, 2019년 10월 19일, 2025년 1월 31일 접속,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