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작업을 할수록 안무가 어디에, 어떻게, 어떤 질감으로 존재하는지 점점 더 희미해졌다. 안무가 어떤 모습인지를 상상할 때면 무대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뿌연 포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형상은 있지만 형체는 없는, 뭉게뭉게 떠다니다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그렇게 안무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변적인 무언가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안무의 존재를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혹은 오해)들이 있기도 했다. 안무와 춤을 같은 것으로 여기거나, 스코어를 기록으로 치부하거나, 안무와 춤을 붙잡아 둘 수 있다거나, 퍼포먼스의 부산물에 퍼포먼스가 담겨 있다고 여기는. 사실 안무는 이런 오해와 믿음을 의심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B.
대개의 퍼포먼스 관련 전시는 퍼포먼스 전후로 생성된 사진과 영상, 스코어, 오브제나 소품, 의상을 포함하여 작업자와 작업에 참여한 인물들의 사진과 기록까지 작업 과정 중에 발생된 다양한 양태의 부산물들을 전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컨대 2022년 1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는 미국 안무가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1936-2017)의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로 꼽히는 〈Set and Reset〉(1983)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렸다.2 1983년 브루클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초연된 이 작업에서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1947-2008)은 음악을 작곡했고 로버트 라우쉔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는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했다. 전시에는 공연 초연 영상, 브라운의 텍스트 스코어(‘단순하게 하기’, ‘경계에 머무르기’,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고려하며 작업하기’ 등), 리허설 영상, 라우쉔버그의 조각이 매달려 있던 무대를 재현한 설치물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로리 앤더슨의 음악도 한켠의 스피커를 거쳐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시 기간 중 며칠 동안은 〈Set and Reset〉을 복원한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또 다른 사례로, 2021년 3월 11일부터 6월 27일까지 경기도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몸 짓 말 Corpus Gestus Vox》이 있다. 이는 2019년부터 퍼포먼스의 ‘개념’을 소장하기 시작한 경기도 미술관의 소장품 수집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였다.3 ‘개념’을 수집하고 소장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작가들이 직접 작성한 지시문, 스코어 등이 전시 목록에 포함되었고, 퍼포먼스 기록 사진과 영상들을 포함하여 퍼포먼스 현장에서 발생된 부산물들이 함께 전시되었다.
하지만 이 부산물들 안에 안무와 춤, 퍼포먼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퍼포먼스에서 파생된 부산물은 그저 그때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는, 납작하게 누워있는 기록일 뿐이다.
C.
비물질로 여겨지는 안무와 춤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전시하는 행위 역시 복잡한 층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무와 춤이 담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사례를 찾아보기로 했다.
《정다슬파운데이션 소장품전》(2021, This Is Not a Church)은 무형문화재 춤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작업이다. 무형문화재는 국가가 춤을 소장, 보존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으로 춤의 전형을 체득하고 실현할 수 있는 보유자를 지정, 춤을 전승시킬 수 있는 사람을 승인하는 제도다. 즉 무형의 춤을 유형의 신체에 담아 ‘춤의 원형’을 보관해두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렇다면 살풀이춤, 처용무, 학연화대합설무, 진주검무와 같은 무형문화재 춤은 국가 제도의 승인을 통해서만 소장 가능한 것일까? 춤의 형태를 스스로 체득하는 것만으로 전통 춤을 보유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인가? 애초에 ‘춤의 원형’을 소장하는 것 그리고 이를 전시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작업은 실제로 ‘전승자’에게 춤을 전수받고,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는 ‘보유자’의 춤 강습을 듣고, 궁중무용보로 남겨진 춤을 체화하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춤을 입력한 두 개의 신체-임은정의 신체와 유지영의 신체-를 전시하며 아래와 같은 캡션을 사용했다.
〈진주검무〉,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디지털 영상을 입력한 두 개의 신체, 167×41×24.5cm, 170×42×25.5cm, 2021. 정다슬파운데이션 소장품.
두 개의 신체에 춤의 형태를 ‘입력’하는 과정을 흔히 춤에서는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마스터의 춤을 전수 받는 인고의 시간, 물리적 형상을 넘어 정신을 체현하는 과정으로 여겨지는 시간. 거기에서 ‘정신’이라고 불리며 받들어지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믿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원형이라고 여겨지는 춤, 춤을 추는 신체, 신체에 축적된 시간에 들러붙어 있는, 비물질 매체에게만 부여되는 환영 같기도 했다.
D.
보이지 않는 것을 호명하고 지시함으로써 존재를 가시화 시킬 수 있을까? 앞선 작업에서 목격한 기이한 형태의 믿음이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정다슬파운데이션 회고전: 기연 1951-1988》(온수공간, 2022)은 37세에 생을 마감한 안무가 기연을 회고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기연의 역사를 따라가며 리허설 영상, 기행 영상, 작업 노트를 포함, 기연의 삶과 작업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그녀의 작업을 목격한 증인들의 녹취가 전시되었고 이러한 사료들을 통해 ‘복원’된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드러내기 보다는 ‘사라지기’에 몰두했던 기연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있지 않았고,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연의 초상을 복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연의 존재는 픽션이다. 전시장에 배치된 믿어 볼만한 사료와 오브제들이 지시하고 있는 것은 비물질 매체에 부여되는 환영, 원형이라는 존재의 환상, 저자라는 신화이다. 위에서 언급된 테이트 모던과 경기도 미술관의 전시가 퍼포먼스에서 발생된 부산물들을 배치하고 이를 퍼포먼스가 발현되었던 ‘증거’로 삼고 있었다면, 여기에 배치된 것들은 역으로 안무 스코어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춤을 구성하는 ‘재료’로 작동한다. 고고학적 방법론이 기존의 역사를 깨트리고 새로운 역사 쓰기를 가능하게 하듯, 기연과 그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은 전시 공간 안에서 교차하며 기연이 안무했을 법한 춤을 상상하게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 존재를 가시화 시키며 그럴싸한 믿음의 구조를 구축하기. 전시의 형식을 통해 구축된 믿음의 구조가 드러내는 것은 결국 비물질 매체를 소장하고, 복원하는 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퍼포먼스가 가진 ‘상실’이라는 매혹적인 존재론이었다.4
E.
그렇다면 스코어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처럼, 춤을 기록하는 무보가 있다. 그리고 기록하기 위한 규칙과 방법론을 기보법(Notation)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무보와 비슷한 듯 다른 스코어(Score)가 있다. 본래 스코어란 악보를 칭하는 영단어이지만 음악에서의 악보(Musical Score/Partitur)와 구분지어 안무와 춤의 영역에도 스코어-좀 더 정확하게는 코레오그라픽 스코어 (Choreographic Score)-가 있다.
스코어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래의 시제를 품고 있는 가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보와 무보가 과거 즉, 이미 만들어진 음악과 이미 추어진 춤을 붙잡아 두기 위한 기록이라면, 스코어는 미래 즉, 아직 발생하지 않은, 아직 추어지지 않은 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여기 악보에 관한 매혹적인 정의가 있다.
“악보는 작곡가와 연주자를 매개하는 중간자이자 음악 작품이라는 유령같은 대상을 찾아가는데 꼭 필요한 단서이자 음악을 소환해내는 일종의 주문서이다. 악보는 음악의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선택적으로 기록된 악보, 그리고 선택적인 수행 혹은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복원 혹은 창작해 내야 하는 수행.”5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2019)에서 신예슬은 악보가 음악 작품의 전부가 아님을, 연주라는 것 자체가 결국 악보를 거쳐 음악을 만들어 내는 행위임을 설명한다.6 악보에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않은(못한) 것 그리고 수행의 관계는 결국 종이 위에서 온전히 포섭될 수 없는 음악이라는 모호한 존재의 속성을 가르킨다. 스코어에 대한 저자의 흥미로운 관찰은 안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악보는 여전히 ‘기록’을 떠나보내지 않으며, 여전히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미리암 반 임슈트(Myriam van Imschoot, 1969-)는 그녀의 글 「Rest In Pieces: On Scores, Notation and the Trace in Dance」(2005)에서 무용 실천에서의 스코어는 음악의 전통과 달리 특정한 대상, 즉 종이 위에 기보법으로 암호화 되어있는 작품이 아니라 퍼포먼스 안에서 발화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7 스코어가 기록이라는 역할을 져버리고 있음은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 1955-)와 데보라 헤이(Deborah Hay, 1941-)가 스코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 두 안무가는 안무를 ‘무용수가 춤을 추는 동안 발생하는 일련의 질문들에 대한 지속적인 지각과 교섭’으로 정의하면서 퍼포먼스 동안 실시간으로 번역되는 스코어와 퍼포머라는 번역 주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8
동시대 무용에서 스코어는 정확히 수행해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스코어에 담겨 있는 것은 기록되지 못한/않은 춤이며, 그곳에 드러누워 있는 것은 아직 일으켜 세워지지 않은 춤이자 끊임없이 갱신되고자 하는 안무의 잠재성이 아닐까.
F.
비물질 매체를 수집하고 소장하고 이를 다시 전시하는 일, 회화나 조각이 박제된 전시 공간에 신체적 현존, 움직임이라는 유동적 재료들을 이용한 안무를 배치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비튼다. 물질과 비물질의 자리 바꾸기. 무대가 필요한지 좌대가 필요한지부터, 고정된 관람성과 상호 작용하는 관람성의 관계, 선형적으로 흐르는 전시의 시간과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공연의 시간을 설정하기 그리고 긴 전시 시간 동안 온전히 유지되어야 할 오브제이자 신체인 전시품의 가변적 상태까지. 이렇게 세부적 요소와 미학적 요소를 결정하는 것을 포함하여 미술관과 박물관이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제도적 맥락과 힘의 논리를 고려하는 일은 분명 특수한 예술 지형을 드러내는 실천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이루어지는 안무적 실험들이 이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안무를 전시하고, 전시를 안무하는’ 안무적 전환과 수행이 어떤 지형을 그려나가고 있으며 어떤 의미를 발생시키는지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자 안무의 존재론이 갖는 또다른 잠재성을 상상하는 일일 것이다.
4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의 1995년 저서 『Archive Fever:A Freudian Impression』를 통해 퍼포먼스가 남지 않는 것, 따라서 “상실(Loss)”임을 언급하고, 퍼포먼스 이론가 페기 펠란(Peggy Phelan) 역시 그녀의 1993년 저서 『Unmarked: The Politics of Performance』에서 퍼포먼스의 존재론적 독특함으로 일시성과 “상실”을 분석하면서 비영속성과 일시성이야말로 부족이나 결핍이 아닌 정치적 저항을 구성하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5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9.
6 위의 책, 22.
7 Myriam Van Imschoot, 「Rest In Pieces: On Scores, Notation and the Trace in Dance」, Choreographing Exhibition(La Ferme du Buisson and Kunst Halle Sankt Gallen, 2013), 37.
8 Jeanine Durning and Elizabeth Waterhouse, “Out-score/In-score workshop - Teaching Artistic Agency in Contemporary Choreographic Practice”, CONTACT QUARTERLY JOURNAL Winter/Spring 2014, 2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