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

유진영



1.

올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부담스럽겠지만 절대로 슬픈 분위기를 조성해 이상한 동정표를 얻고 시작하려는 서두는 아님을 밝힌다. 아무튼 이 죽음이 내가 마지막으로 겪는 조부모님과의 작별이었다. 시골 할머니라고 불렀던 친할머니와는 사실 그 물리적 거리 만큼이나 마음의 거리도 멀어졌던 터라, 그와의 이별 앞에서 깊은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이제는 세상을 모두 떠나신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떠올리며 내 인생의 짧고도 길었던 한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헛헛한 생각에 잠겼다.


이틀간 아빠의 고향이자 할머니의 터전에 머물며 일평생 들어본 적도, 관심 가져본 적도 없었던 할머니의 삶에 관한 몇 가지 조각들을 들을 수 있었다. 허술한 낭만과 함께 내 머릿속에 어떤 의미로는 죽은 상태로 존재하던 ‘할머니’가 몸과 목소리를 얻었다.


그보다 한 달 전에는 뉴욕에 다녀왔다. 일주일 여의 시간 동안 많은 전시를 봤지만 좋았던 전시는 뉴욕현대미술관(이하 MoMA)에서 하고 있던 조안 조나스(Joan Jonas, 1936-)의 대규모 회고전 ⟪Good Night Good Morning⟫ (2024. 3. 17. – 7. 6.)뿐이었다. 내내 작가와 작품이, 그리고 전시가 보석같이 반짝인다는 생각을 했는데, 당시에는 그 반짝임이 무엇 때문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 뒤, 할머니를 보내며 할머니와 조나스를 겹쳐 보다가 나이가 든 여성의 삶과 모든 삶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2.

전시는 연대기적 구조로, 조안 조나스의 전성기였던 1960-70년대 작품부터 2024년 근작까지 60여 년에 걸친 작가의 세계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1970년대 비디오 매체의 등장과 함께 퍼포먼스와 비디오를 축으로 전위적 활동을 전개했던 조안 조나스는 여성에서 출발한 신체적,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뤄왔다. 경계에 서서 그 안팎을 오가는 방법론을 통해 관습화된 규범과 사회적 질서를 타계하는 실천을 이어왔던 그는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서 나아가 타인,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들여다보고 포용하는 일로 작품 세계를 자연스럽게 확장해 간다.


제인 갤럽(Jane Gallup, 1952-)은 퀴어 시간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노화를 재생산의 도열 바깥으로 벗어난 비생식적, 비전형적 삶에 접어든 것이라 설명하고 이를 곧 퀴어함(queerness)으로 연결한다.1 역설적이게도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 모두에게 노화는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우리 모두는 종국에 공평하게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퀴어함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정상성과 모종의 궤도를 함께 하는 이 비정상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나만큼은 예외인 것처럼 우리는 노인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으며, 외면하고, 곧 사회 안에서 지워 버린다.


방대한 조나스의 작업 세계를 보며 스스로 노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타인에 의해 거친 방식으로 뭉뚱그려진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인, 욕구나 의지가 삭제된 채 생의 주기 끝에 서 있는 노인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취향과 시선이 드러나는 세계말이다. 물리적인 시간이 마련해준 고유한 독특함(queer)이 발산하는 순간과 그것이 촉구하는 자연스러운 정치성. 그리고 이것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 퍼포먼스를 매개로 자꾸 등장하는 그와 작업을 통한 눈 마주침, 모종의 교류가 일어났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이 전제에는 이미 너무 많은 비약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퍼포먼스는 시간을 담는 시간 기반 매체이다. 이때의 시간은 말 그대로 유한한 단위로서 러닝 타임과 연결된 것이자, 물리적 흔적을 남기는 단위로서의 시간이기도 하다. 한시적 시간 동안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퍼포먼스에는 필연적으로 퍼포머의 현존이 전제된다. 이때 신체의 직접적인 등장은 그 신체를 매개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그것이 반드시 노화하는 신체를 감각하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신체가 작품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 혹은 자신의 일부를 작품 안에 그대로 접촉시킨다는 점에서 일시성이 전제된 퍼포먼스는 역설적으로 시간의 흐름으로써 노화(aging)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기 좋은 사례가 된다.


특히, 조나스의 퍼포먼스와 같이 작가의 신체가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인 일련의 예시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것의 존재론적 변화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조나스의 실제 퍼포먼스를 보지 않은 상황에서, 퍼포먼스의 현존성과 일시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적확하게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전시에서 본 것은(그리고 웹 상에서 본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으로서 비디오, 혹은 비디오 아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나스의 작품 세계에서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비디오가 구조적 차원에서 갖는 동등한 위상을 생각할 때, 거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퍼포먼스의 일시적 현존을 발생시키는 주체에 관한 것으로, 자신이 만든 퍼포먼스와 연루되어 현존하는 작가를 들여다보는 일에 가깝다.


몸은 어떤 방식으로 작품과 관객과 세계와 연결될 수 있을까?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 그 시대적 배경과 출발점이 그러하듯 조나스의 퍼포먼스에서 신체를 통한 주체의 전환은 중요한 요소였다. 그의 퍼포먼스에는 하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정체성에 관한 다시점적 접근이 이루어져 왔다. 조나스의 퍼포먼스에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는 퍼포먼스와, 퍼포머를 중심에 세우는 퍼포먼스 두 갈래가 있다. 두 퍼포먼스에는 교차하는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서로 간의 연관성을 유추하게 만든다.


먼저, 그에게는 가면을 통해 자신을 감추거나, 위장하는 ‘Organic Honey’라는 페르소나가 있다. 1972년 ⟨Organic Honey’s Visual Telepathy⟩라는 비디오 퍼포먼스 작품을 통해 처음 ‘Organic Honey’로 분한 그는 카메라를 직시하며, 비디오라는 기계적 시선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자아와 실제 자신 간의 간극을 드러내기도, 은폐하기도 했다. 가면을 쓴 Organic Honey는 위장된 자아인 동시에, 가면 뒤에서 자유를 얻는 존재로, 그는 시선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신체와 정체성을 대변하듯, 화면 앞에서, 무대 위에서 거울과 가면 사이를 오가며 위장과 개방의 전술을 교묘하게 오간다.


한편,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 연작(mirror piece)은 확장된 방식의 연결을 제안한다. 카메라의 폐쇄회로와 거울의 반사성은 작가자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구조였는데, 1969년 ⟨Mirror piece I⟩으로 시작된 이 연작은 그 장소와 시간을 달리함에 따라 의미를 거듭해서 갱신한다. 이 연작에서 그는 직접 퍼포머로 출연하는 대신 타인을 초대해 단순하고 정돈된 움직임을 제안하고, 거울을 들게 하여 관객과 무대 곳곳을 비춘다. 연속적인 거울의 반사를 통해 물리적 한계를 넘어 거듭해서 확장되는 퍼포먼스의 공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담아 내던 조나스의 세계를 넓고 유연하게 바깥과 연결시킨다. 퍼포먼스를 경유해 발생하는 행위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은 조나스가 지속적으로 추구한 몸을 통한 세계와의 연결을 직관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이 몸이 갖는 강력한 정치성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레 확장되거나 변화하는 의제를 그 몸에 고스란히 담는다. 조나스는 반복적으로 오래된 작업을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와 재활용, 혹은 재구성해 왔는데, 관객은 근작 곳곳에서 숨은그림찾기처럼 과거의 이미지와 기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면을 이용한 위장의 전술 역시 그가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방법론으로, 50여 년 전 마치 성인물에 나올 듯 화려한 꾸밈새의 마스크에서 시작된 위장은 삐에로, 남성, 동물까지 다양한 주체로 얼굴을 갈아 끼우며 그때그때의 자신의 관심사를 마스크와 퍼포먼스에 투영한다. 2000년 대에 들어서며 점차 전면화된 생태계에 관한 진진한 관심은 그를 바람, 물과 같은 지구의 원소로 변신시킨다.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된 오래된 몸의 아이러니한 화합은 보는 이의 감상을 더욱 극대화 시킨다. 거울이라는 창 역시 온 세상을 담는 그릇으로 확장되어 세계의 곳곳을 비추고 모든 것에 연루되기를 자처한다. 원시적인 제의 의식과 유사했던 거울 연작의 움직임은 비인간 동식물의 몸짓을 모사하고 체화하는 것으로 나아가, 비인간 객체와의 연결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나스의 움직이는 몸은 어떤 면에서든 능숙하지도, 유려하지도 않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에 능숙해지거나, 익숙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4.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ide, 1935-2003)는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시작보다 끝이 더 가까워진 예술가의 예술 양식이 갖는 감각적, 혹은 본능적 특성에 대해 논의한다.2 그러나 이때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을 언급하는 지점은 단순히 두터운 세월의 더께를 딛고 작업을 이어가는 노익장을 향한 찬사가 아닌, 다양한 시간과 끄트머리에서만 발현될 수 있는 본능적이고 충만한 균열과 모순, 오류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이는 분명 정돈된 언어로 설명되거나 개념화될 수 없다.


충동성, 미완의 상상력이 으레 젊음의 몫으로만 여겨져 왔다면, 우리는 사이드와 갤럽의 논의를 빌어 불확실성과 충동성이 노년의 작가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심지어는 더욱 강한 강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조나스의 미완성 세계는 그 불일치/불완전함이 갖는 순수한 힘을 보여준다. 노화한 신체가 거둬낸 신비성은 역으로 더 많은 미지의 것들을 비언어적인 형태로 끌어들이며 아름다운 공명을 만들어낸다. 이는 곧 퍼포먼스가 갖고 있는 일시성, 불확실성과도 연결된다. 또한 퍼포먼스가 담보하는 일시성이 젊음의 어떤 것과 치환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여전히 끝을 예지하지 않은 채 움직이고 헤엄치는 조나스를 통해 나이 듦을 그려내는 매체로서 퍼포먼스의 연속적인 가능성을 긍정하게 된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여성을, 노인을, 세계를 지우고 살아왔는지, 나이 든 여성의 깊어지는 미완의 세계를 보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세계를 둘러싼 모든 불확실성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5.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지혜, 경험, 성숙 등 그와 동반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정확한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더듬어가며 하나씩 맞춰가는 미지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또렷하고 분명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조금 더 다양한 모습의 나이 듦의 모델이 필요하다. 물론 이들은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도, 엄숙할 필요도, 신중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말년의 양식을 찾는 과정에서 시간은 각기 다른 방향과 속도로 흐르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 서로의 시간이 닿지 않을 수도 있으니 트루먼처럼 미리 한 번에 인사를 건넨다.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1 제인 갤럽,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섹슈얼리티, 장애, 나이 듦의 교차성)』, 김미연 옮김(현실문화, 2023)

2 에드워드 W.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곁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과 예술』, 장호연 옮김(마티,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