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되는 퍼포먼스
퍼포먼스와 퍼포먼스의 관람 방식은 분명히 재구성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케이트 브라운(Kate Brown, 1989-)은 퍼포먼스가 ‘최적화(optimisation)’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터키 출신 작가 괵수 쿠낙(Göksu Kunak, 1985-)의 〈VENUS〉(2023)를 관람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정작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현장에서는 작업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이야기 나누고, 플래시 터뜨리며 사진 찍는 관객들 사이에서 주의(attention)를 집중하는 ‘정상적인’ 관람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작업을 더욱 가깝게 볼 수 있었던 장소는 오히려 소셜미디어였다. 관객들이 자신의 피드에 업로드한 사진 기록에서 퍼포먼스의 세부가 드러났다.
이와 같은 관람 경험이 낯선 것은 아닐 테다. 미술관에서, 혹은 미술관이 아니더라도 미술을 보여주는 어떠한 장소에서, 퍼포먼스는 ‘주의 산만하게(distracted)’ 전개된다. 이러한 산만함은 흔히 관람 경험의 훼손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소셜미디어가 더해지면 더욱 그렇다. 핸드폰을 손에 든 관객은 이제 관람하기보다는 인증한다. 보는 것보다 보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현장에서의 경험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소셜미디어가 경험을 집어삼킨다.
브라운은 1분 이내의 숏폼 비디오가 자연스럽게 유통되는 지금, 퍼포먼스가 디지털 플랫폼에서 특히 환영받는 예술 장르가 되었다고 덧붙인다. 퍼포먼스가 갖는 다양한 힘들, 현전성이나 일시성, 일회성,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과 ‘살아 있음’ 등의 힘을 가시화하기 위해 물질화되는 요소들이 우연히도, 혹은 당연하게도, 효과적인 소셜미디어 바이럴을 위한 조건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퍼포먼스의 특정 장면이 채집되어 소셜미디어에서 순환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결과적으로 여타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피드백 루프. 이러한 되먹임 회로가 돌아가는 동안 퍼포먼스를 둘러싼 미적 기준 역시 영향을 받는다. ‘소셜미디어 이후의 퍼포먼스는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숏폼 비디오를 만들기 위한 지지체 같은 것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과장일 테지만, 어쨌든 ‘퍼포먼스가 소셜미디어 시대에 맞추어 ‘최적화’되고 있다’라는 진단에는 얼마간 동의가 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질적 전환을 기회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적화’ 되고 있는 퍼포먼스는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의 자동화 알고리즘에 의하여 미술의 미묘한 내적 가치가 좌우될지 모른다는 불안, 디지털 지대를 소유한 지주들에 의하여 감각이 점차 무뎌지고 나아가 소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연스럽게 연관된다.1
시대에 불순응하는 법
그렇기에 ‘최적화’의 시대에 불순응하기를 제안하는 언어는,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예컨대 무용 이론가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 1965-)는 ‘증인으로서의 관객(the audience as witness)’을 옹호한다. 그는 신자유주의 이후의 사회를 경험이 소멸된 사회로 진단하고, 증상 중 하나로 ‘증인’의 종말을 꼽는다. 레페키는 포렌식 아키텍쳐(Forensic Architecture)의 에얄 와이즈만(Eyal Weizman, 1970-)을 따라서 ‘증인의 시대’와 ‘과학수사(forensic)의 시대’를 구분 짓는다. ‘증인의 시대’에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건 이야기와 증언이었다. 반면 ‘과학수사의 시대’에 사건의 진실은 생화학적, 법의학적 테크놀로지와 사법 제도 등에 의해 판단된다. ‘과학수사적 미학(forensic aesthetics)’ 체제에서는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아니라 사건과 분리된 전문가들이 진실을 생산하는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은 감정적인 증인과는 달리 중립적 주체로 여겨지고, 따라서 사건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체로 간주된다.
이러한 ‘과학수사적 미학’은 사건과 주체의 정동적(affective) 분리를 요구한다.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감정적 혹은 정동적 충격을 공유하고자 하는 증인은 ‘중립적인’ 성격의 데이터에 비하면 혼란스럽고, 오류 많은 것이다. “미학(aesthetics)보다는 마취제(anaesthetics)”에 가까운 이 체제에서는 누군가가 사건의 순간에 존재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받아들여진다. ‘과학수사의 시대’는 ‘이야기하기’라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수행의 종말을 의미한다.2
하지만 레페키는 ‘증인’의 미학적 힘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면서, ‘증인으로서의 관객’과 ‘구경꾼으로서의 관객(the audience as spectator)’을 나누고자 한다. 그가 묘사하는 ‘구경꾼으로서의 관객’이란 소셜미디어 시대의 퍼포먼스 관객을 그린 캐리커처 같다. ‘구경꾼’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작업을 외면하고, 핸드폰을 바라보며 주의를 분산시키고,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소셜미디어를 확인하면서 여러 가지 정보와 증거 수집에 몰두한다. ‘구경꾼’은 가장 클리셰적인 반응을 보이며, 대부분의 경우 침묵하는데, 자칫 작업에 대하여 증언했다가 미학적 ‘취향(taste)’의 법정에서 불리한 판결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공모자가 되고, 작업에 대한 의견을 말하거나 정리되지 않은 감상을 공유하는 등 손해 볼 만한 일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반면 ‘증인으로서의 관객’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관객이다. ‘증인’은 자기 신체가 맞닥뜨린 것을 모호하고 과잉된 상태 그대로 쏟아내고, ‘과학수사적 미학’이 가정하는 중립성을 훼손하면서 체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 불리함을 무릅쓰고 ‘증인’은 작업에 대하여 증언한다. 그리고 레페키에 따르면, 증언이야말로 하나의 사건이 미래와의 능동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역량에 해당한다.3
분산된 주의를 옹호하기
오늘날 미술이 공유되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증인’과 이야기가 갖는, 이제는 불가능해 보이는 힘을 지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하지만 의견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하여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견해가 있다.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 1958-)은 ‘증인으로서의 관객’, 또는 주의 깊은 집중된 관람 행위가 모종의 규범과 같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지적한다.4
그는 주의와 지루함(boredom), 그리고 동시대 미술의 무시간성과 관련해 복잡한 논의를 펼치는데, 여기서는 일부만 편의적으로 잘라와 본다. 오스본에게 있어 동시대 미술이 관계하는 주의는 ‘관조적 몰입’이라는 초월적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루함, 그리고 산만함과의 변증법을 통하여 구성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한 산만함이란 주의를 구성하고 훈육하는데 요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산만함은 주의 집중이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며, 또한 주의의 생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잔여물이다. 약으로부터 부작용을 제거할 수 없는 것처럼 산만함은 주의로부터 제거될 수 없다. 산만함은 미술 수용의 변증법을 구성하는 조건이며, 동시대 미술관이 적대적인 다원성을 재생산하기 위한 필연적인 토대다.5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 1971-)이 저서 『무질서한 주의: 오늘날 예술과 퍼포먼스는 어떻게 관람하는가(Disordered Attention: How We Look at Art and Performance Today)』(2024)에서 펼치는 주장은 보다 직접적이다. 비숍은 레페키의 비판적 언어가 모종의 엘리트주의에 기반한다고 보고, 퍼포먼스를 둘러싼 산만한 관람 형태를 확장된 ‘퍼포먼스 전시’의 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본다. 안무 혹은 퍼포먼스가 전시 매체에 삽입되었을 때, 화이트큐브와 블랙박스의 규범적 관람 규칙은 모두 교란되고, 방해받는다.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일인칭 시점은 망가지고, 화이트큐브의 조명과 사운드 장치 등은 퍼포먼스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움직이지 않는 오브제를 가능한 오랫동안 전시하기 위하여 디자인된 화이트큐브의 인프라구조(infrastructure)는 살아있는 몸을 상대하느라 곤경을 겪는다. 주의 집중은 흐트러진다. ‘퍼포먼스 전시’가 초래한 ‘그레이 존(grey zone)’은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가 갖는 공간 이데올로기와 행동 규범을 긴장 상태로 만들고, 주의 산만한 관람 방식은 그러한 긴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집단적 현전성을 제공하면서도 사진 촬영과 이미지의 디지털 순환을 장려하기도 하는 ‘퍼포먼스 전시'의 성격은 모순의 매듭(knot of contradictions) 속에서 관객성을 재정의한다. 여기서 주의 산만에 대한 회의론은 테크놀로지가 주의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오래되고 보수적인 불안을 상기시킬 뿐이다. 6
증인이자 구경꾼, 구경꾼이자 증인
소셜미디어와 미술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건 한참 시효가 지나버린 일처럼 느껴진다. 인스타그램이 처음 공개된 것이 2010년이라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디지털 플랫폼은 변조적으로(modulation) 변화한다. 기능 추가와 인터페이스 변경, 약관 수정 등을 거듭하되, 사용자에게 멀미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인조적 수평 상태를 유지한다. 소셜미디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러한 가짜 수평 상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이애나 테일러(Diana Taylor, 1950-)는 퍼포먼스를 존재하되 사라지는 것으로, 재생산 경제의 법칙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한 페기 펠란(Peggy Phelan, 1959-)의 말을 인용한다. 펠란에 따르면 퍼포먼스는 이처럼 저장될 수 없는 것, 기록될 수 없는 것, 문서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의는 퍼포먼스가 미시 시간 단위로 채집되고 기록되고 순환되는 오늘의 풍경에 비추어보았을 때 낡은 것으로 여겨진다. 테일러는 펠란의 정의를 전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퍼포먼스가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폭넓게 재정의했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피드백 루프는 동질적인 것을 구성하지, 변화하는 것을 구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퍼포먼스는 여전히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관람 방식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질문을 남겨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주의 산만과 주의 집중의 종합은 불가능할까? “모순의 매듭”을 잘라내기보다는 매듭의 복잡한 땋음을 끝없이 확대하는 사유 방법은 불가능할까? 그러나 구경꾼이 늘 구경꾼인 것만은 아니고, 증인이 늘 증인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몸에서 이들은 맞닿는다.
1 Kate Brown, 「Performance Optimisation: Are Algorithms Changing Performance Art?」, 『artnet』, 2024년 7월 15일 접속. 출처.
2 André Lepecki, Singularities: Dance in the Age of Performance(Routledge, 2016), 174-175.
3 Ibid., 179-180.
4 Peter Osborne, Anywhere or Not at All: Philosophy of Contemporary Art(Verso, 2013), 176.
5 Ibid., 189-190.
6 Claire Bishop, “Black Box, White Cube, Grey Zone: Performance Exhibitions and Hybrid Spectatorship”, Disordered Attention: How We Look at Art and Performance Today(Verso,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