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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테마가 있다. 뱀에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저승으로 갔던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다. 환상적인 리라 연주로 저승의 신인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를 감동시킨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함께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하데스가 내건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지상에 완전히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조건에 따라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오르페우스는 아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어 마음을 졸이며 저승 밖으로 향한다. 지상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 여전히 지하에 속해 있던 에우리디케는 곧장 저승으로 끌려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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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옥의 본질적인 장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파놉티콘(panopticon)이라고 부를 것이다.” -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파놉티콘은 그리스어 ‘pan(모두)’과 ‘opticon(보다)’이 합성된 단어로, 소수의 감시자가 다수의 피감시자들을 관리 및 감독하는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물리적 구조를 가리킨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이를 감시자의 실질적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함으로써 피감시자가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도록 강제하는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한 바있다. 푸코의 파놉티콘 해석은 파놉티콘형 감옥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는 죄수들이 어떻게 직접적인 감시 없이도 규율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독하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감시와 통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글은 파놉티콘을 처음 구상한 벤담의 인용구로 돌아가, 파놉티콘의 가장자리에 놓인 죄수들이 아니라 중앙에 위치한 감시자에게 조금 더 주목해 본다. 파놉티콘 안에서, 감시자는 정말로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까?
벤담은 파놉티콘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구조라고 제안했지만 이 감옥이 원형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감시자가 인간이라면, 사실상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하는’ 감시자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눈은 정면에만 달려 있다. 즉, 파놉티콘에서도 감시자가 한 방향을 보고 있다면 그의 후면은, 설령 그것이 단 1초라 하더라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사각지대가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르고스나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4차원 존재가 아니고서야 사방을 동시에 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인간은 자기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거울과 같은 광학 장치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볼 수 없는 곳을 보게 하는 여러 가지 장치들은 점차 발전했고, 거울, 창문, 망원경, 카메라 옵스큐라, 그리고 카메라에 이른다. 카메라는 단순히 볼 수 없는 곳을 보게 하는 정도의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보지 못한 순간, 과거를 보게 하는 장치,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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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연 예술 관람의 전통적인 형태 중 하나인 ‘프로시니엄(proscenium)’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프로시니엄은 어둠 속에 기대어 있는 관객이 밝은 무대를 바라보는 형태의 극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 무대 안에서는 배경과 사건의 구분이 명확하고, 관객이 무엇을 볼지, 어떤 흐름을 따라서 볼지, 언제 어디를 봐야 할지 등의 시각적 동선이 철저하게 구성되어 있다. 파놉티콘의 감시자에게는 사각 지대가 있을지 몰라도 프로시니엄의 감시자에게 사각 지대란 없다. 보이기 위한 것만이 무대로 올라오며, 애초에 보일 필요 없는 그 외의 것들은 무대 밖에 위치한다.
현대 예술이 시작되면서 공연 예술(performing arts)에서나 미술 분야의 퍼포먼스(performance)에서나 무대와 객석의 물리적 경계가 허물어지고 관객의 보는 역할이 보다 적극적인 방향으로 강화되었다. 감시자들과 보는 사람들, 그러니까 관객이 무대 안으로 포섭되거나, 역으로 무대가 현실, 즉 관객의 자리로 스며드는 등 관람 형태에 여러 변화가 도입되기도 했다. 미술 분야에서의 퍼포먼스는 해프닝, 이벤트, 바디 아트 등으로 분화되었고, 그 최종 형태처럼 보이는 ‘관객 참여형 예술’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새롭지 않다. 창작자와 관객이 함께 작업을 만들어 가는 구조의 작업을 일컫는 관객 참여형 예술은 예술 작품에서 관객의 역할을 대폭 확대하며 그를 창작자와 동등한 선상에 놓고자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예술은 모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서로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잘 부합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이 계산된 환대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는 개인적인 인식도 있다.
그런데 최근 퍼포먼스의 한 경향은 더 이상 관객 참여형 예술을 지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퍼포먼스들은 어떤 상황에 관객을 내던지고, 관객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구축하고, 관객이 물리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러한 차단을, 파놉티콘의 중앙에 선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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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보기 방식을 전제하는 두 작업, 민혜인, 장영해의 퍼포먼스 〈블랙 마리아〉(2023)와 콜렉티브 야광의 퍼포먼스 〈Lick My Heart〉(2022)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 두 작업은 동시에 볼 수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연이어/동시에 혹은 연속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 이후 이를 기록한 결과물로 영상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민혜인과 장영해의 〈블랙 마리아〉는 두 작가가 각자의 영상 작업을 만들었기에 최종적으로는 세 개의 작업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각각의 작업이 서로 다른 두 부분을 하나의 전체로 구성하는 구체적인 방법인데, 이를 위해 각 작업의 구조를 먼저 살핀다. 미리 언급해 두자면, 이하의 내용은 어떤 답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해 두었다는 공통점이 퍼포먼스를 비평하는 일에 수반되는 어려움들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해 본다.
민혜인과 장영해의 퍼포먼스 〈블랙 마리아〉는 스스로의 구성을 ‘2인 3각’이라고 칭한다. 그러니까, 둘은 합동하여 걷되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인 ‘블랙 마리아’는 토마스 에디슨과 윌리엄 K. 딕슨이 1893년 고안한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를 가리키는 이름이다(에디슨과 딕슨은 외부의 광원을 철저히 차단한 죄수 호송차를 지칭하던 속어에서 이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블랙 마리아〉는 빛과 광학 장치, 초기 영화와 연극 등 블랙 마리아에서 출발한 민혜인과 장영해가 각자의 서사로 각자의 시간선을 만든 뒤 두 공연을 동시에 무대로 올린다. 그러므로 퍼포먼스 〈블랙 마리아〉는 자기 안에 병치된 두 개의 시간선을 가진다. 다만, 영화나 연극에 대한 레퍼런스인 ‘막’의 개념을 살려, 총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었다.
서로의 사건을 훔치거나 상대의 사건을 자기 시간선의 진행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엉켜 있는 두 시간선 때문에 관객은 하나의 사건을 보는 즉시 다른 사건을 보는 일에 연루된다. 민혜인의 시간선에 놓인 인물들은 대부분 정지하지만 사실은 정지하지 않는 몸짓, 정지할 수 없는 몸짓으로 주춤거린다. 이들의 부자연스러운 몸짓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딘가 괴로운 구석이 있다. 퍼포먼스 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장영해의 인물들에게는 배우와 배역 사이 반-픽션 상태가 드러나는 커튼콜의 상황을 연기한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대사와 상황이 주어지는데, 세 번의 커튼콜에 걸쳐 대사와 상황을 부식된 방향으로 반복한다(설정상, 배우들의 알콜 의존증 때문이다). 이들의 움직임에도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보기 괴로운 부분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상황이나 상대 배역을 장악하려는 낌새가 도드라지는 편이었다. 움직이는 것도 정지하는 것도 아닌 민혜인의 인물들과 달리 장영해의 인물들은 최선을 다해 내달린다.
다른 한편 야광의 퍼포먼스 〈Lick My Heart〉는 야광 개인전 《윤활유: Lubricant》(2022)를 위해 고안되었다. 전시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을 가로지르는 레즈비언 문화를 바탕으로 동시대 레즈비언들이 통과하는 여러 관문을 제시했다. 인터뷰의 형식으로 구성된 영상 작업 〈랜턴(Lantern)〉(2022)은 같은 배우가 다른 배역을 반복해 연기하면서 ‘퀴어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퀴어의 위치는 어디인가 혹은 무엇이 퀴어로 취급되는가’로 바꾸어 놓는다. 이 영상의 인터뷰와 인터뷰 무대 뒤를 무대 앞으로 끌어온 퍼포먼스 〈Lick My Heart〉는 여러 개의 막을 동시에 보여 주는 것 같은 형태로 구성되었다. 한 쪽에서는 라텍스 옷을 입은 청소 노동자의 섹슈얼한 춤 노동을, 다른 한 쪽에서는 두 명의 퍼포머가 연쇄된 움직임을,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영상 촬영을 위한 스테이지와 백스테이지를 그대로 노출하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이 모든 일을 생중계 해 주는 2채널 영상과 디제잉이 진행된다. 관객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퍼포머인지 아닌지 모를 사람들. 관객은 일어나는 상황 전체를 모두 파악하기 위한 장치(실시간 중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들 사이의 명확한 인과성이 파악된다기보다 일종의 분위기로만 상황을 인지할 수 있다.
두 퍼포먼스를 본 관객이라면 아마 자연스럽게 보고 싶은 사건을 좇아 이동했을 것이다. 물론 이동하지 않는 것도 이동의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두 퍼포먼스 안에서, 관객은 이 작품이 도무지 어떤 시각적 동선을 예비했는지 알 수 없고, 무엇이 중요한 사건이고 무엇이 넘겨도 되는 사건인지 알 수 없는 채 상황 안에 버려진다. 이런 상황에서의 파놉티콘 중앙 감시자는 안락한 어둠 속에 파묻혀 존재가 가려져 모든 것을 관망할 권력도 잃고, 존재가 드러나며 창작 과정에 개입하는 권력도 잃는다. 보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관객은 관객을 버려 두는, 놓아 두는, 나아가 방치해 두는 퍼포먼스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버려 둔다, 놓아 둔다, 방치해 둔다는 표현은 모두 약간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나조차도 아직은 이러한 퍼포먼스들의 양태를 설명할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다고 부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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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의 사례는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지만, 상기한 두 작품은 모두 영상으로 기록되면서 작가가 자기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적 동선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무엇을 보여 주고자 했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이번엔 각각의 영상 작업을 살펴 보자.
핸드헬드 캠으로 촬영된 야광의 퍼포먼스 영상 〈Lick My Heart〉는 시간 순서에 따라 퍼포머들을 따라 다니며 퍼포먼스 현장을 두루 조망한다. 현실인 백스테이지의 시간선과 픽션인 스테이지의 시간선이 뒤엉켜 흐르고, 거기에 처해진 관객들 각자의 시간선이 휘말려 최대한 균등하게 시선을 분배하려는 카메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발췌하여 보여 주는 영상 매체의 특성은 결국 ‘수고하셨습니다’로 끝나는 플롯을 구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두 번에 걸쳐 진행된 퍼포먼스 각각의 시간을 꿰어 하나의 시간으로 완결된다.
〈블랙 마리아〉는 두 개의 영상으로 분기된다. 야광이 스테이지 위의 정돈된 시간선과 백스테이지의 혼란한 시간선을 동시에 보여 주고자 했다면, 장영해의 〈블랙 마리아〉는 픽션의 시간선과 현실의 시간선이 맞붙는 커튼콜의 혼재된 시간선을 보여 준다. 인물들은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을 달성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 발, 두 발, 모퉁이를 돌면……. 동전 하나, 두 개, 세 개를 바닥 위에 세우면……. 화면이 보여 주는 것은 한 번에 하나의 사건처럼 보이는데, 아마 촬영을 위해 특정 장면만을 반복하여 촬영했을 것이다. 퍼포먼스에서는 불가능한 관람, 예컨대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눈물의 모습, 이것은 퍼포먼스를 볼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산재한 사건을 소화할 수 있는 동선과 리듬을 제공한다. 퍼포먼스 내에서의 인과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과가 축적된다. 막이 반복되는 동안 주어진 동일한 제스처를 다른 배우가 수행하는 것은 다시 야광의 〈랜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민혜인의 〈The Doghouse〉 또한 마찬가지로 두 개의 세계를 엮는데, 앞선 두 작업이 시간을 꿰었다면 이 작업은 그 엮음을 빛으로 다룬다. 약 십 분부터 등장하는 명암 반전 이미지들은 앞에서 설명한 두 작업이 스스로의 규율로 가져가는 픽션과 현실 사이의 이분할이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처럼 앞과 뒤, 안과 밖이라는 서열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닌 다른 배치로 보게 하는 토대를 제안한다. 명암 반전은 형상이었던 것을 배경으로, 배경이었던 것을 형상으로 끌고 오는 광학적 효과이다.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이 빛 속으로 끌려나온다. 스테이지 위로 끌려나온 백스테이지처럼. 3막의 타이틀이 나오면서 잠시간 이어지는 장면에는 백스테이지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몇 마디 말들이 포함된다. 퍼포먼스 현장에서는 명확하게 보였던 것들이 오히려 영상 안에서 불분명해지기도 한다. 스모그가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인물들이 연기 안에 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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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밝힌 것처럼 이 글은 질문을 구체화하기 위한 글이지만, 나름의 답을 내어 보자. 나는 두 퍼포먼스에서 사건들이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쏟아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퍼포먼스에는 관객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두 작업의 핵심에 있는 것 아닐까? 소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몸을 규정하는 피부 아래로는 무엇이 있는지, 서로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는 것. 내 머리 뒤로 시선이 가닿는 방법은 없을 거라는 것. 그렇기에, 광학 장치를 위시하여 보는 방법을 만들어 내는 미술이 계속해서 재창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래의 글이 이 답의 근거를 보태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인간 이후’의 세계는 인간이 소멸한 후의 세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세계도 가리킨다. 인간의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장소를 사유하고자 하기ㅡ커다란 모순을 잉태한 이 모험을 그럼에도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것이 현대 사회에 내재하는 뒤틀림의 감각과 공명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 세계의 건너편을 동경하는 우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인 것일가? 모든 것이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 계산될 수 있다는 현재의 세계 이미지에 그저 상대주의적이지 않은 (실재로서의) ‘사유될 수 없는 영역’을 대항시키는 것이다.” - 이와우치 쇼타로 저, 이신철 역, 『새로운 철학 교과서 - 현대 실재론 입문』(b, 202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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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이 글은 퍼포먼스와 영상을 만든 작가들에게 주목했지만, 모든 퍼포먼스에서 상황을 조성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퍼포머의 위상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블랙 마리아〉의 박지현, 김액스, 박설헌, 김솔이, 홍성기, 백은진, 이지우 퍼포머, 〈Lick My Heart〉의 추키만달, 모호, 우지안, 이름, 성아, 뭍, 박지현, 하은빈, 현호정 퍼포머와 촬영자-퍼포머로 참여한 김예솔비, 박세영, 박정연, 허윤의 수고를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