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7일, 가을과 겨울 문턱 사이에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미미(Mimi)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철물점과 자동차 정비소가 들어서 있는 건물. 크고 육중한 금속판이나 철골 따위가 미미의 아기자기한 작업과 꽤 재밌는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올라와요”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올려다보니 미미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미미를 따라 계단을 올라 복도를 이리저리 통과하니 미미의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내가 그동안 봐왔던, 만화경처럼 현란하게 펼쳐지는 미미의 작업과는 다르게 검소하고 단정한 느낌이 드는 스튜디오다. 중앙의 책상을 비롯한 스튜디오 곳곳에 미미가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작업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기로 하고, 나는 미미와 책상을 두고 마주 앉아 자기소개부터 부탁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미미는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다. 미미는 어쩌다가 뉴욕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미미는 한국에서 예술중학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는 미국에서 진학하여 드로잉이나 페인팅과 같은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후 미미는 시카고 예술대학(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 입학하여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작업을 지속할 계획을 세우고 뉴욕으로 거점을 옮기게 되었다.
드로잉과 페인팅을 좋아하던 미미는 어떻게 하여 크고 작은 재료가 모여 별천지를 이루는 작업을 만들게 되었을까? 미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을 즐겼다고 말했다. 일례로 미미는 시카고예술대학 재학 당시 패션계에 종사하는 친구들과 교류하며 직물을 만지고 엮을 수 있던 경험을 떠올렸다. 한편 미미는 중학생 때부터 전자기기에 관한 관심 또한 키워왔는데, 이 역시 완성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에서 더 나아가, 그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시카고예술대학에서의 자유로운 교과 과정 덕택에 미미는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미술적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시카고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한 뉴미디어 작업은 미미가 학부 전공으로 아트앤테크놀로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술적 혹은 기계적 부품을 다루는 일은, 손과의 접촉을 통해 집중의 상태에 도달하는 미미에게 딱 알맞은 미술 실천 방법이었다.
미미의 작품은 하이퍼링크로서 기능한다🔗물질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작가와 재료, 한 재료와 다른 재료 사이의 유기적인 물리적 연결을 의미하고🔗개념적 차원에서 그것은 작가와 한 재료, 다른 재료가 그 연결을 통한 상호 안내를 의미한다. 미미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지닌 힘, 행위성(agency)이다. 그래서 미미는 여태까지 해온 모든 작업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보다는, 이미 존재하던 것들의 만남(encounter)을 형성하는 일에 가까웠다고 말했다🔗가지고 있는 재료의 특성들을 살려 그들을 새로이 배치(arrangement)하는 것🔗한 물질과 다른 물질의 거리를 좁히고 넓히며 상호 관계를 다르게 형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행위성을 지닌 물질의 만남과 배치를 통해 미미가 한동안 실험하고자 했던 것은 운동의 구현이었다. 미미는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운동과 움직임, 즉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곧 행위자가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적인 에너지에 대한 미미의 관심은 2021년부터 더욱 커진 규모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해당 시기부터 미미의 작업 내 움직임의 단위는 한 개체–그것이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간에–에서 한 세계로 넓어졌다. 이를테면 왈락아트갤러리(Wallach Art Gallery)에서의 《컬럼비아대학교 미술대학 석사학위 청구전(Class of 2022 MFA Thesis Exhibition)》(2022)이나 루보브(Lubov)에서의 개인전 《Dawning: dust, seeds, Coplees》(2022)에서 미미의 작업은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살아있는 생태계처럼, 또 변화하는 세계처럼 보였다. 이에 대해 미미는 컬럼비아대학교 미술대학(Columbia University School of the Arts) 재학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미가 2학년일 때, 스튜디오의 창문을 통해서 스튜디오 건물 바로 옆에 새 빌딩을 짓는 공사 현장을 내려다보던 경험이다. 지하의 배수관 시스템과 전자통신망의 케이블 등이 설치되는 과정을 보면서 미미는 건물과 도시의 보이지 않는 연결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 시설에 관한 관심을 키웠다고 말했다. 이는 곧 하나의 순환, 즉 우리를 비롯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서 땅에 묻히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한 개인보다 더욱 큰 범주에서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미에게 있어 도시-생태계-세계 짓기는 신을 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미미가 만든 세계는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 이를테면 전시와 작업이 구현되는 공간과 맞물리며 함께 존재한다. 미미는 설치를 위해 전시장의 물리적 환경에서 자신의 작업과 직간접적으로 상응할 수 있는 가이드 포인트를 찾는다고 했다. 한 예로, 스위스 인스티튜트(Swiss Institute)에서의 전시 및 퍼포먼스 《Murmuring in blue kaleidoscope》(2022)에서 미미는 ‘Night Sky’라는 앱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천체도(혹은 별자리표)를 참조했다. 고대 인류가 별자리를 통해 그들의 위치를 가늠했던 것처럼, 미미 역시 전시 설치 때 중력의 크기 같은, 자신과 자기 작품이 갖는 에너지의 흐름을 고민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미가 천장으로 올려다본 모습대로 전시장 바닥에 구현된 당시 작업은, 단일 건물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 여러 순환 시스템이 중첩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따른 어려움은 없었을까? 식물이나 그것의 광합성을 위한 물 또는 직사광선은 화이트큐브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전시 환경에서 기피되는 요소가 아니었던가? 미미는 웃으며 그동안 운이 좋았다고 말을 이었다. 그간 미미가 전시를 해온 공간은 미미가 제안하는 것들을 대부분 수용해 주었지만, 미미 역시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식물의 씨앗을 전시 공간에 배치하되 전시 기간 발아시키지 않거나, 혹은 물이 가득 찬 병을 바닥에 놓되 입구를 최대한 막는 것처럼 말이다. 미미는 그러한 전시장의 제약 조건 자체도 물질의 만남, 조건의 배치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작품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미미의 조각과 설치 같은 입체 작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평면 작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미미의 회화는 〈Slipping into torn boundary〉(2022)였다. 미미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보존하고 아카이브로서 남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일환으로 해당 작업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간 미미의 작품은 전시 이후 완전히 해체되어 다음 전시의 재료로 쓰이는, 그 자체로의 순환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러나 특정한 별의 생성 주기와 지구의 공전 및 자전 주기가 겹쳐 《Murmuring in blue kaleidoscope》에서 선보인 설치가 나오게 되었듯, 미미는 전시와 작업이 만들어진 특정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 싶었다.
그런 미미에게 회화는 설치를 기록하는 임시 수단이었다. 〈Slipping into torn boundary〉는 왈락아트갤러리에서의 설치를 옮긴 지도이자 일기로, 미미는 작업에 있던 요소들을 레이저 커팅을 이용해서 도장으로 만들어 찍었다고 말했다. 미미가 사진 대신 도장을 택한 이유는 거리감 때문이었다. 사진 촬영 시 생겨나는 렌즈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는 미미가 설치를 위해 물질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과정을 반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때 캔버스에 도장을 찍는 행위는 렌즈를 통한 기록 과정에 동반되는 거리감을 줄이는 동시에, 작품 생성의 특정 순간과 그것의 지속을 함께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Slipping into torn boundary〉는 설치를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작품이었다면, 현재 작업실에서 진행 중인 작업은 미미가 오늘날-여기에서 자신의 미술 실천을 어떻게 기록할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미미는 레진이 적합한 재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액체 상태의 레진 위에 무언가를 흩뿌리면 마치 그 순간의 중력의 작용이나 우연히 불어온 바람과 같은 순간들을 그대로 보관할 수 있게 해주니까 말이다. 미미는 지난 전시에서 발생한 먼지나, 과거의 작업 사진이나 다른 작가의 작품 사진을 자르고 뚫은 조각들을 레진에 흩뿌렸다. 이 사진들은 미미가 지나온 궤적이자 또 미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서 먼지와 더불어 또 하나의 세계 지도, 별자리를 만든다.
레진 몰드의 일정 두께를 넘어서면 레진은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그 주어진 조건 속에서 미미는 먼지와 사진을 파도처럼, 은하수처럼 뿌린다. 로봇처럼 움직이지는 않지만, 레진 속에서 굳어진 것들은 여러 가지 색을 통해서 또 서로 다른 구성을 통해서 여전히 진동한다. 미미는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동안 흩어지는 작업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불꽃놀이 같은 작업을 해왔다면, 지금은 동면하듯이 화석 같은 작업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동면과 화석. 이 두 단어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내포한다. 동면이 바뀐 계절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활동을 늦추는 행위라면, 화석은 바뀐 지형과 그에 적응한 유기물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한다. 결국 미미의 만화경 같은 세계는 오늘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한 미미의 노력을 보여준다. 디지털 기반의 환경에서 많은 것들은 비가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과 네트워크, 블루투스와 RFID는 가상적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인 기반은 바닥과 해저에 매장되어 있다. 미미는 이런 세상에서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감각이라고 말했다. 미미가 손으로 만지며 만들어내는 것은 재현도, 재연도 아닌 실재 그 자체다. 매끄럽지 않더라도 감각을 일깨우게 하는 것–완벽에 가까운 코딩 대신 아날로그 트랜지스터 등으로 만들어내는 장난 혹은 놀이와 같은 것–우리가 현재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그것이 미미가 오늘날-여기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미미는 겨울잠을 잘까? 겨울이 성큼 다가온 이 시점에 미미의 계획이 궁금해졌다. 미미는 당분간은 계속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할 예정이고, 또 2024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미미는 알루미늄 포일을 두른 스티로폼 패널 뒤에 가려져 있던 식물을 보여주었다. 마치 우주정거장에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미미가 올해 초 작업실에서 발아시켜 키운 것이다. 미미는 이 식물을 로스앤젤레스 전시에 데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의 계획은 이 식물을 관람객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로부터 씨앗을 전달받아 다시 싹틔우게 하는, 일련의 순환 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미미는 식물들에 물을 줘야겠다며 물을 받으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