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원영과의 대화

황재민


나원영 대중음악 비평가이자 인터넷 사람. 2016년에 [weiv]에서 글쓰기 활동을 시작했고, 2022년에 ma-te-ri-al에서 『대체 현실 유령』을 출간했다. 고독의 시대에서 함께 파이팅하기는 계속됩니다...


황재민(이하 재민) 인터뷰를 위해 시간 내주심에 감사드린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나원영(이하 원영) 2022년도에서 온음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소개를 준비하면서 그걸 다시 봤다. 거기서 ‘나는 나원영이다’라고 소개하고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본명이다’라고 덧붙였더라. 아무튼 나원영이고, 2016년부터 [weiv](웨이브)에서 대중음악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고, 대중음악 비평가라는 직함을 공식적으로 많이 쓰려고 하고 있다. 2022년도에 『대체 현실 유령』(이하 『대현유』)이라는 책을 썼고, 가끔 ‘인터넷 사람’이라는 소개를 쓰기도 한다.


재민 말한 것처럼, 공식적으로는 자신을 대중음악비평가라고 소개한다다. 하지만 오늘은 인터넷 문화를 주제 삼아 나원영 평론가의 글과 생각을 꿰어 보면 어떨까 했다. 나는 나원영을 트위터에서 처음 보았다. 흥미로운 글을 남기고 있어 블로그까지 방문하게 되었는데, 왕성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깊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블로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이것을 빼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이 인터넷 자아 저장소(?)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살펴보니 공개된 초기의 글이 2011년자로, 벌써 운영한 지 10년이 훨씬 넘은 것 같던데. 어떻게 시작했고, 어떤 힘으로 지속하고 있는가?


원영 블로그를 오래 운영하다 보니, 여기에 얽힌 개인적인 시기들이 많다. 학생 시절이었던 2011년부터 2014년까지는 정말 사적인 성격의 블로그였다. 그냥 아무거나 스크랩하고, 잡생각 적고, 이런 데여서 사실상 방치를 해둔 상태였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해보자고 생각했던 게 2015년이었다. 그 즈음 해외 음반에 대해 리뷰하는 블로거들이 많았다. 지금도 많긴 한데, 어쨌든 그런 걸 보면서 나도 비슷한 걸 같은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리뷰를 쓰며 활동했다. 또 2015년에 디시인사이드 인디밴드 갤러리에서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이하 「우포찾」)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글을 조금 수정해서 블로그에도 올렸다. 그걸 보고 현재 [weiv] 편집장인 정구원 평론가가 연락을 줘서 2016년부터 [weiv]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다음 2017년도부터 군 복무를 했는데, 「우포찾」을 입대 때문에 쫓기듯이 끝을 냈다. 원래는 조금 자세하게 얘기하게 싶었는데, 시간에 쫓기다 보니 거칠게 묶어서 얘기하고 끝을 낸 게 있다. 내가 이 당시에는 비평을 쓴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다. 2016년 말쯤에 비평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도 하고, 공부도 하고 사람도 만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직후에 입대를 해버리니까 모든 게 그냥 끊겨버린 느낌이었다. 군대에 가서도 블로그를 하긴 했지만, 군대에는 도서관도 없고 인터넷도 오래 못하니까 되게 많은 비약을 하면서 음모론처럼 글을 썼다. 그러다 2018년부터는 시간이 조금 더 생겼는데, 시간이 생기니까 글쓰기 연습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때 주마다 재밌게 들은 싱글 5개를 골라서 「지극히 주관적인」이라는 이름으로 한 바닥 정도 글을 썼다. 그런 식으로 연습을 계속하면서 블로그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우포찾」을 꼭 제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 「우포찾」을 100페이지 정도 새로 썼다. 「우포찾」을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부, 2006년부터 2016년까지 2부로 구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1부 분량을 작업하는데, 쓰고는 있지만 마음에 전혀 안 드는 거다. 과거에 썼던 걸 반복하는 것 같고. 제대 직후가 겨울이었는데, 궁금하던 걸 알아보고 사람을 만나고 쓸 거를 쓰고 있는 데도 되게 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멘탈이 좀 안 좋았고, ‘이걸 계속 쓸 수 있을까?’ 싶으면서 힘들어지는 게 있었다. 그렇게 멘탈이 안 좋다 보니 블로그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9년 가을부터 한 반 년 동안 재미삼아 글을 많이 썼다. 스피드런에 대한 글도 쓰고, 듀나에 대한 글도 쓰고. 이 시기를 ‘프로토-일지’라고 부르는데, 지금 블로그에서 일지라는 제목으로 계속 쓰고 있는 글의 프로토타입을 썼던 시기다. 일지는 2020년 4월 1일에 처음 썼는데, 거의 만우절 장난 느낌으로 썼다. 일기 같은 걸 남기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 쓴 건데, 천 삼백 며칠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웃음). 지금은 공식적인 매체에서 쓰는 글 뿐만 아니라 일지도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다. 일지를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해두는 곳으로 쓰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선에서 지속하고 싶어서 고민을 하고 있다. 요즘에는 일지에 썼던 게 원고의 기초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블로그로 계속해서 돌아왔던 것 같다.


재민 커뮤니티 활동을 한 적은 없었나? 나 같은 경우 내 동년배들이 그러하듯 어려서부터 인터넷 문화와 친숙했는데, 인터넷에서도 내향인이라서 커뮤니티 활동에 깊숙이 참여한 적은 없었다. 대신 남의 블로그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인터넷을 주로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었나?


원영 어렸을 땐 플래시 게임 많이 했다(웃음). 주전자닷컴, 플래시365 이런 데 가서 게임 엄청 하고. 또 중학생 때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인 활동을 했다. 모바일 추리 게임인 ‘검은방 시리즈’를 친구가 추천해줘서 했는데, 그러다 공식 팬카페에서 개그 추리 팬픽 이런 걸 쓰고 그랬다. 중학생때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1958-)나 우타노 쇼고(歌野晶午, 1961-) 같은 추리 소설을 좋아해서 그런 걸 썼던 것 같다. 또 나무위키의 전신인 리그베다위키를 되게 많이 봤다. 거기서 해외 문물들, 그러니까 영미권 인터넷 문물을 많이 접했다. SCP 재단도 봤고, 텀블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도 봤고. 관심사 위주로 인터넷을 떠다니다가 인디밴드 갤러리에서 유동닉으로 뻘글을 쓰고 그랬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포찾」을 2015년도에 썼는데,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유별나게 재미난 포스트록과 슈게이즈가 많이 나왔다고 느껴졌다. 지금은 활동을 안 하시는 분들이 많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인디락들이 많이 나오던 시기여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가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기 이전 시기가 매우 궁금하기도 했다. 〈아워 네이션〉(1996) 같은 최초의 인디 음반에도 크라잉 넛의 '조선 펑크' 뿐만 아니라 옐로우 키친의 실험적인 곡들이 수록되어 있었고. 옛날에 불싸조라는 밴드가 있었대, 속옷밴드가 있었대, 이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만선이라는 플랫폼 겸 사이트가 설립되기 전이라서, 불싸조나 속옷밴드는 거의 전설이었다. 피지컬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컬트라고 할 수 있는 밴드나 음원을 알음알음 알아보았고, 역사라는 것을 배우고 했다. 이런 식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weiv]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이미지1) 불싸조 2집,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잠언 1:26)〉(2006). 영상.


그런 한편 영미권 인터넷도 많이 봤다. 고등학생쯤 돼서 영어도 대충 알아먹을 수 있게 되자 유튜브 같은 데를 적극적으로 돌아다녔다. 내가 호러 게임을 좋아하는데, 당시에 ‘암네시아 시리즈’라는 호러 게임이 화제가 돼서 스트리머들이 자주 방송을 했다. 마키플라이어(Markiplier, 1989-)처럼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때 많이 봤다. 이 시기 크리피파스타(Creepypasta)라고 알려져 있는 영미권 괴담도 알음알음 보았다. 이렇게 영어로 된 이상한 것들을 조금 일찍 보며 온라인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영미권 인터넷에서 여러 문화들이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가 대안우파 음모론과 게이머게이트(Gamergate) 논란이 만들어진 때이기도 하다. 게이머게이트와 동일하거나 더욱 극심한 사건들이 거의 분기마다 거대하게 일어나는 지금 한국 인터넷을 배경으로 두고 봐도 너무 의미심장한 사건인데, 그런 사건들을 일찍 엿보며 인터넷을 했다.


*게이머게이트 논란: 비디오 게임 문화를 둘러싼 여성혐오를 대표하는 사건이자, 인터넷 극우주의의 확산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다. 2013년, 인디 게임 개발자 조이 퀸(Zoë Quinn)이 제작한 〈디프레션 퀘스트(Depression Quest)〉(2013)가 좋은 평론을 받자 게이머들 사이에서 '조이 퀸이 여성 개발자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좋은 평을 받았다'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 후 2014년 8월, 퀸의 전 파트너였던 에런 조니(Eron Gjoni)가 자신의 블로그에 퀸이 비디오 게임 포럼 '코타쿠'의 저널리스트인 네이선 그레이슨(Nathan Grayson)과 바람을 피웠다는 폭로를 게시했다. 이를 본 몇몇 게이머들은 '퀸이 그레이슨과 사귀었기 때문에 좋은 평론을 받았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사실 그레이슨은 〈디프레션 퀘스트〉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없었으나, 음모론을 사실로 받아들인 게이머들은 포챈(4chan) 등 인터넷 극우주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퀸에 대한 잔혹한 수위의 증오 포스트를 도배했고, 개인 계정을 해킹하는 등 온라인 괴롭힘을 시작했다. 그들의 온라인 괴롭힘은 이후 페미니스트 게임 저널리스트, 게임 개발자에게로 번지기도 했다. 이 사건과 그 여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인싸를 죽여라』(2022), 『인셀 테러』(2023) 등을 참조할 수 있다.


근데 이와 더불어, 내가 어떤 걸 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커뮤니티 운영진이 되어서 뭘 했던 것도 아니었고, 커뮤니티에 소속감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비슷하게 지금도 나는 디스코드를 안 한다. 요즘은 내가 처음 인터넷을 할 때 지배적이었던 게시판이나 포럼 문화가 전부 디스코드로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디스코드를 안 하니까 요즘 인터넷에 적응이 안 되더라. 게시판 같은 건 내가 시간 날 때 가서 밀린 게시물을 정독하면 되고, 이 게시판에서 저 게시판으로 자유롭게 옮겨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디스코드는 그게 아니다. 실시간으로 늘 접속해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하는 포맷이다. 나는 그게 적응이 안 됐다. 그래서 요즘엔 ‘내가 좀 다른 시기의 인터넷 사람이구나’ 하는 걸 많이 느끼고 있다. 내가 아는 인터넷은 열려 있는 인터넷, 게시판, 포럼, 소셜미디어에 가까운 인터넷인데, 이제 이것보다 더 폐쇄적이고 내부적으로 순환하는 곳이 기본값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나는 항상 유동적인 상태에서 여러 플랫폼을 돌아다니거나 검색어를 활용해서 특정한 사이트로 하이퍼링크를 타고 들어가던 인터넷에 익숙했는데, 2020년대에 들어서 내가 하는 인터넷 방식이 슬슬 사라지고 있고, 웹 2.0 플랫폼들은 과거의 인터넷을 계속 없애려고 하고 있으니까. 아직은 인터넷을 왔다 갔다 하고 있지만, 아무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재민 사실 커뮤니티 활동에 대한 질문은, ‘왜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면서도 인셀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과 비슷하기도 하다.


원영 그게 지금도 유효한 질문인 것 같다. 나는 인터넷 이야기를 할 때는 나보다 이후에 인터넷을 접한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들의 시기는 인터넷 자체가 이미 남초 문화의 논리에 잡아 먹힌 이후의 시기인 것 같다. 만약 인터넷을 많이 하는 누군가가 남초 문화에 익숙했다면,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남초적 문화와 언어들, 규칙들에 쉽게 노출됐을 거다. 물론 그런 커뮤니티에서 나가는 건 자기 마음이다. 문제는 그렇게 나가면 갈 데가 없어지는 경우일 거다. 나는 어떤 커뮤니티를 나가더라도 어쨌든 갈 데가 있었다. 남의 블로그 구경하면 되고 영어권 웹을 구경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곳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플랫폼들이 웹을 구획화하면서 홈페이지라는 것 자체가 줄어들고, 블로그도 서비스가 종료되고 폐쇄됐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디스코드에 많이 가는 것 같다. 거기는 닫혀 있는 커뮤니티라서 내부의 논리를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게 진짜 난국인 것 같다. 지금 한국 인터넷은 남초 문화를 배양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으니까 나도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계속 도망치곤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냥 그렇게 ‘사람들 이상해, 싫어’하고 떠나기보다는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하고, 거기서 나오는 불만이나 무력감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자세히 말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찐따라는 단어를 한때 속으로 배척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슈게이즈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이 단어를 어떻게 다시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요즘 밴드캠프에 기반해서 슈게이즈를 하시는 분들이 ‘찐따성’이라는 걸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면서 다시 배우는 게 있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찐따의 진정성이 줄어든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웃음), 어쨌든 그런 식의 구분 짓기를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할 것 같다.


재민 그렇게 말씀하시니 파란노을이 떠오른다. 파란노을이 「우포찾」의 독자라고 밝힌 적 있는 것 같은데.


원영 그 사실을 조금 뒤늦게 알게 되고 많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파란노을의 두 번째 음반인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2021)이 나왔을 당시에는 마음이 좀 극단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좋아했던 한국의 인디 록을 비롯해 인터넷을 오가며 들을 수 있던 다양한 사운드가 뒤섞인 게 좋긴 한데 〈청춘반란〉의 '찐따무직백수모쏠아싸병신새끼' 같은 노랫말을 과하게 밈화하는 것처럼 이걸 굳이 ‘찐따니스’로만 생각하기가 너무 싫었다. 그때 내가 매체나 사운드에 특히 관심이 있던 시기여서 더 그렇기도 했다. 그런데 ‘디지털 던(Digital Dawn)’ 공연을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고 그 이후로 어떻게 활동했는지 보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 ‘디지털 던’ 공연 후 브로큰티스 같은 분들이 음반을 내고, 왑띠 님이 레이블을 차리고, 피아노 슈게이저 님처럼 오래 활동하신 분이 직접 음반도 발매하시고 피아노 세션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디지털 슈게이즈가 점점 더 하나의 씬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미지2) ‘디지털 던’ 공연 포스터. 영상.

내가 인디록을 처음 들었을 때 메인이었던 이른바 '홍대' 씬은 인디밴드 성폭력 공론화 이후 자성하지 않고 무너졌고, 그 후 2010년대 후반은 그냥 텅 빈 상태였던 것 같다. 그 이후에 혁오와 새소년으로 대표될 테고 20년대엔 신기하게도 실리카겔까지 포함하게 될 몇몇 밴드가 등장하긴 했지만, 그런 밴드 같은 경우, 90년대를 예시로 들자면 주류 댄스 가요와 DIY풍 인디의 중간 지대를 차지했던 가요, 이를테면 윤상이나 015B 등의 역할을 맡아준 느낌이었다. 그런데 '인디'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홍대의 주변부나 바깥이라 할 수 있을 온라인에서의 슈게이즈 씬과 창원, 울산, 부산, 그리고 대구까지 포함하는 경남의 인디록 씬을 보면서 내가 얼핏 알았던 인디라고 하는 게 다시 만들어지고 있고,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경남 씬에서 서로 샷아웃을 해주고 슈게이즈 밴드들이 밴드캠프에서 컴필레이션을 만들고, 서로의 음악에 참여하고 레이블을 만들고 하는 것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건 브로큰티스 음반 소개글을 썼을 때 생각했던 부분인데, 1990년대 초 영국에서 장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당시 사람들이 슈게이즈 신을 까려고 ‘서로 자화자찬하는 씬(the scene that celebrates itself)’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그게 되게 중요한 거라고 느꼈다. 주류적인 가치 체계에 의지하지 않고 새롭고 대안적인 가치 체계를 만들어서 거기서 자화자찬을 하고 서로를 인준하는 과정이 어쨌든 필요한 거다. 그걸 하기 위해서라도 자화자찬하는 시스템을 건강한 형태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민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나원영 평론가가 써온 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대현유』로 넘어가자. 잠시 책을 소개하겠다. 『대현유』은 마테리알에서 간행하는 ‘스루패스 총서’의 일환으로 나왔고, 발표된 설명글을 빌자면 2000년대 이후 인터넷 호러를 다룬 일종의 역사서(?)다. 나는 책을 두 덩어리로 나누어서 보았다. 첫번째 파트에서는 ‘점프 스케어’ 호러부터 〈마블 호넷〉, 〈벤 드라운드〉 등 2000년대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걸친 인터넷 호러를 살핀다. 이 시기의 인터넷 호러는 아직은 예외적 장소였던 인터넷을 매개 삼아 ‘로어’를 집단 공유, 이를 토대로 대체 현실의 생성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반면 두번째 파트는 2010년대 이후 ‘로어’라는 인터넷의 행동 양식이 어떻게 보다 매끈해지고 보다 픽션화, 콘텐츠화되었는지 짚어낸다. ‘로어’가 인터넷 게시판 유저의 담화 속에서 탈출해 유튜브에서, 인디 게임에서, (로어라는 규칙을 이미 알고 있는) 유튜브 리뷰 채널에서 순환하며 점차 “안정화”되는 양상을 살펴 보는데, 이 과정에서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익숙한 우울 중 하나를 불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예외적 장소에 해당하던 인터넷이 어떻게 플랫폼화되며 자본화되었는지, 호러 만들기의 시스템이 어떻게 ‘로어’를 공허하게 반복하면서 무의미해지는지, 자연화된 자본 바깥을 상상하던 무서운 이야기의 힘이 어떻게 기성화되는지. 『대현유』을 쓰며 이와 같은 우울을 일부 감각했는지 궁금한데.


원영 어떤 우울에 대해 직접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우울보다는, 나는 어쨌든 뭔가가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는 인상이 있었다. 크리피파스타로 출발해서 로어로 이동하는 과정이 이미 끝났는데, 그 이후에도 비슷한 과정이 커스드 이미지(Cursed Image)라는 밈을 경유해서 다시 한번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선 하고 싶었다. 이게 어떤 과정에서 이렇게 안정화되었고, 왜 그럼에도 다시 한번 돌아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미지3) 커스드 이미지의 사례.

이 글을 쓸 때 참조한 존 보이스(Jon Bois, 1982-)의 영상이 있다. 애틀랜타 팰컨스라는 풋볼팀에 대한 시리즈다. 이게 어떤 내용이냐면, 애틀랜타 팰컨스라고 50년 역사가 있는 팀이 있다. 그런데 되게 부진하고 못한 팀이었다. 그러다 팀 역사상 두번째로 슈퍼볼에 진출했는데 슈퍼볼 역사상 최악의 역전패를 당한 거다. 존 보이스의 영상은 슈퍼볼에서 이 팀이 가장 빛나고 있던 때, 역전패 직전의 순간에서 시계를 되돌려서 ‘우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대현유』의 첫 계기가 되어준 것은 6장에서 다루는 '아날로그 호러'를 보면서였다. 이 양식이 내가 지난 10-15년 간 오며가며 보았던 온라인 호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그렇지만 이 모든 걸 종합한 듯 느껴졌다. 여기서부터 어떠한 계보를 꿰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글을 쓸 때 비슷하게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인터넷은 왜 또 이런 호러를 만들었지?’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작성하면서 보니, 보이스의 다른 참여작인 〈고독의 시대에서 싸우기(Fighting in the Age of Loneliness)〉(2018)와 훨씬 더 닮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 시리즈는 종합격투기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작품인데, 예외적인 장소였던 곳이 바깥으로 기능하다가 안쪽에 먹혀서 잠식당하고, 자본화가 되고, 안정화가 돼서, 결국에는 다른 모든 곳과 다를 바 없이 부식되는 과정을 쫓는 내용이다. 이와 비슷하게 나는 인터넷이라는 예외적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도피적인 행동을 하고, 주류 공간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상한 것을 만든다는 게 좋았다. 그런데 갈수록 도피 장소에 뭔가 계속 들어오고, 안정화가 되고 자본화가 되고, 그런 상황인 것 같다. 나는 어쨌든 로어나 인터넷 호러가 좋은 게, 처음 봤을 때 전혀 뭔지 모르겠는 것들뿐이라서 그렇다. 사람들은 이걸 이해하고 싶어서 계속 말을 만들어 붙이고 특정한 규칙을 만드는데, 이런 과정이 오히려 호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호러가 무의미해졌을 때 누군가는 또 다시 호러를 새롭게 무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물론 그래도 자본은 이런 로어나 호러를 가져다가 자본의 논리가 통하도록 교환한다. 슬렌더맨을 가지고 망한 영화를 만들고 로어를 가지고 패러디 게임 프랜차이즈를 만들고.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교환된 것에 지루함을 느끼고, 여기서부터 온라인에서 호러를 재발명하는 방법이 가능해질 것 같다. 근데 나는 이걸 우울이라고 부르는 게 되게 묘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우울이라는 단어에 거리를 두고 있다. 스스로 진단을 받는 걸 꺼리는 편이기도 하고. 이런 개인적인 상황과 더불어 우울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아직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k-펑크 1』(2023) 같은 마크 피셔(Mark Fisher, 1968-2017)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을 해보고 있다. 피셔 같은 경우 『자본주의 리얼리즘』(2018)을 비롯해 「반-치료(Anti-therapy)」(2015),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Good For Nothing)」(2014) 같은 글에서 정신병 혹은 우울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짚는다. 개인이 사회 자체를 버틸 수 없어서 만들어지는 게 우울이라고 설명하는데, 단지 자본이 정신병을 개인화해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는 거다. 자본이 도피할 수 있거나 대안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사라지게 만들고 있고, 이렇게 억눌린 우울감이 공포로 표출된 게 인터넷에서 나온 호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대현유』를 두 파트로 쪼개면 첫 번째 파트는 빠르게 세계화되고 자본화되는 세계에서 주체가 우울을 느끼고 거기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인터넷에 접속해 공포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그리고 두 번째 파트는 인터넷 자체가 현실과 다를 바 없게 마찬가지로 세계화되고 자본화되는 공간이 되면서 인터넷 자체에서부터 도피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인터넷을 써먹는 이야기가 담긴 것 같다. 인터넷 자체가 현실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달라진 인터넷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 관련해서 최근에 쓴 원고에서는 모의한다, 시뮬레이션한다는 단어를 많이 썼다. '현실'에 가깝게 안정화된 인터넷 공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터넷을 다시 도피처가 될 만한 '가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인 거다. 과거에는 인터넷 자체가 가상 현실이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제2의 내가 되는 것이라고 홍보를 했었는데, 이젠 현실의 직접적인 일부가 되었으니까. 이걸 다시 한번 가상화를 하면서 도피처를 만드는 전략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어떻게 플랫폼에 의해 재개발된 인터넷을 가상화할 수 있는지가 지금의 공포, 혹은 우울에 대응하는 방식인 것 같다.


재민 하지만 『대현유』는 인터넷 호러 실천을 세심하게 살피며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 중 하나는 ‘로어’와 노스탤지어의 상호 작용을 분석하는 세 번째 챕터 「호러는 방영되지 않을 것이다」에서 볼 수 있다. 해당 챕터는 〈캔들 코브〉, 〈벤 드라운드〉, 〈펫스코프〉 등의 작업물을 살피는데, 이들은 대개 특정 시기의 노스탤지어를 호출해 오염시키는 작동법을 취한다. 이 작업물은 지역 방송국에서 송출된 어린이 TV 프로그램, 젤다의 전설을 비롯한 비디오 게임과 같은 익숙하고 으스스한 노스탤지어를 불러 들이지만, 그것은 노스탤지어를 미학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염시키고 붕괴시켜 공포/으스스함이라는 정동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다. 나는 『대현유』가 이 지점을 짚으며 과거를 영원히 미학화하는 시대를 탈출할 수 있는 대안 서사를 스케치한다고 느꼈다. 혹시 이와 같은 독해가 유효할까?


원영 질문에 오염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재밌었다. 나 같은 경우 오염보다는 살균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음악으로 예를 들면 주변부, 아니면 지하에서 나온 걸 자본의 가치나 주류적인 가치에 맞춰 미학화하고 팔아먹기 위해 살균하는 과정이 있다. 그래서 살균되고 반짝반짝해진 것을 우리가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 챕터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인터넷 호러가 노스탤지어를 불러들여서 무섭게 만들지만 그게 사실 공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공포가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낯선 옛날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 낯섦이 공포로 오인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과거에 실재하던 낯섦을 현재로 가지고 와서 공포, 혹은 무서움의 형태로 보여주는 유령적 행위가 노스탤지어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우리가 과거를 낭만화하는 방식이 있다. 어떻게 하냐면, 먼저 현재를 과거와 확실히 구분한다. 과거의 것들은 다 끝났고 현재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거리를 둔다. 그런데 과거의 낯섦을 낭만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재로 가지고 올 경우, 알고 보니 과거가 아직까지도 현재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고, 더불어 과거는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유령으로 만들어서 가져오는 작업물들이 대안적인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쓴 원고에서 프루티거 에어로(frutiger aero)라는 ‘에스테틱’을 다루었는데, 이게 재미있는 점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온라인에서 모의해서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노스탤지어 자체에서도 노스탤지어를 느끼고, 나아가 노스탤지어를 가상화하는 거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존해서 유령으로 돌아오게 하는 게 관건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과거가 멋졌어, 좋았어, 이런 식으로 가져오는 것들이 싫다. 인터넷 호러를 보면 ‘과거에는 사실 항상 좀 이상한 게 있었고 나아가 섬뜩한 게 있었다’, ‘우리가 미처 모르고 넘어갔던 이상한 장면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서사화를 한다. 그런 실천이 매력적이다. 나는 존 카펜터(John Carpenter, 1948-)의 《괴물 (The Thing)》(1982)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우리가 괴물을 물리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직 남아있었어’ 같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H. P.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 1890-1937)도 ‘알고 보니 조상이 괴물이었어’라는 식으로 과거가 아직까지 현재에 남아 섬뜩한 영향을 끼치는 측면이 매력적이고, 우리가 살균하고 낭만화했던 과거가 알고 보니 현재에도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서사에 매력을 느낀다.


(이미지4) 프루티거 에어로.

요즘 한국의 옛날 것들, 정말로 옛날에 있었던 것들을 찾아가는 실천에 관심이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발라드나 트로트처럼 통속적인 장르를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하는. 참신하다는 의미에서 '새로움'에 대해 언제나 양가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데, 어쨌든 우리가 계속해서 새로운 걸 만들고 진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되게 착취적이다. 디지털/아날로그라는 단어가 좋은 게, 생각보다 아날로그가 아직까지 남아있고 생각보다 디지털은 더 오래됐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서 그렇다. 사실 우리는 엄청나게 긴, 거의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아주 긴 전환기를 겪고 있다. 우리가 이런 전환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재민 또 하나의 가능성이 책의 결말 즈음에 위치한다. (세 번째 챕터와 제목 차원에서 짝을 이루는) 여섯 번째 챕터 「호러는 방영될 것이다」는 ‘아날로그 호러’를 주제 삼는다. ‘아날로그 호러’는 TV 등 아날로그 미디어 특유의 매체성을 재현하며 ‘진짜 같은 가짜’를 구현하는 인터넷 호러의 작동법을 말하는데, 여기서 아날로그 미디어의 매체성은 디지털적 합성이나 변형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지표성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에 쓰인다. 책의 문장을 빌자면, ‘아날로그 호러’는 디지털 미디어와 아날로그 미디어 사이의 시차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2020년대를 전후해 〈LOCAL58〉과 같은 ‘아날로그 호러’의 대표 시리즈가 디지털 전환을 선언한다는 부분이다. 『대체 현실 유령』은 이 지점을 짚어내며 ‘아날로그 호러’가 ‘디지털 호러’로 전환하는 지점에서 또 하나의 시차와 글리치, 틈새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책을 마친 뒤 1년 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질문을 함께 돌아보면 어떨까 싶다.


원영 책을 쓰면서 가장 공을 들인 것 중 하나가 6장이었다. 나는 아날로그 호러라는 단어가 온라인 호러를 전부 종합하는, 그러면서도 어긋남이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온라인 호러는 대부분 컴퓨터로 만든 DIY니까 디지털 환경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날로그 호러는 디지털 환경에서 아날로그 환경에서 존재했던 기술이나 시각을 모의하고, 그래서 어긋남이 발생한다. 다시 『대현유』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인터넷이 노화되는 과정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시차 자체를 미학화하는 것에 성공했고, 그렇게 온라인 호러가 발생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도 어쨌든 시간은 지나가니까, 또 무언가가 한 바퀴를 돌아서 시차가 만들어진 것 같고, 이렇게 존재하지만 아직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시차를 어떻게 하면 다시 미학화할까 하는 욕망이 생겨난 상태인 듯하다. 최근에 본 것 중 흥미로운 건 자동화에 대한 호러였다. 〈넥스트봇(NextBot)〉 AI라고, 〈게리 모드(Garry's Mod)〉라는 물리엔진 시뮬레이터에서 파생된 게임 모드가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무서운 이미지에 AI를 부여해서 사용자를 쫓게 만든 게임이다. 되게 ‘리미널’한 온라인 공간, 온라인의 비장소를 대표할 수 있을 듯한 공간을 무대 삼아서 AI들이 쫓아오는 그런. 다른 호러 게임에서 등장하는 크리처가 아니라, 진짜 그냥 무서운 이미지 하나가 2D 평면을 유지한 상태로 쫓아온다. 그게 지금의 온라인을 호러화하는 방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요즘 AI 가지고 말이 많고, 기계학적으로 합성되고 무기물화된 몸체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걸 묶어서 자동화의 호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동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게, 그냥 버튼 하나 누르면 기계가 모든 걸 다 해준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자동화에는 서버부터 시작해서 실제 사람들이 그린 그림과 같이 실제 사물과 데이터를 착취하는 과정이 있다. 그런 게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게 필요하다. 근데 〈넥스트봇〉 같은 게임들은 AI를 돌려서 아예 잡탕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걸 진짜 팔아먹을 수 없고 돈이 될 수 없다는 게 중요하다. AI를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게 중요한 것 같다. AI가 인간의 창의성을 결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딱 이 정도의 도구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서, 이걸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이미지5) 넥스트봇 AI 캡쳐 화면.

재민 조금 가볍게 화제를 돌려보자. 『대체 현실 유령』은 200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의 인터넷 호러가 놀라울 정도로 촘촘하게 담겨 있는 역사서다. 여기 담긴 수많은 작업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영 책의 내용이랑 직접적인 상관은 없는데, 4장에 나오는 〈우리 집 소개(My house walk-through)〉라는 작업물을 좋아한다. 피로피토(PiroPito)라는 사람이 만든 건데, 나는 피로피토가 옛날에 만든 작품을 실제로 초등학교에 봤었다. 컴퓨터 시간에 모여서 봤던 기억이 있어서, 옛날에 내가 봤던 그걸 만든 사람이 아직까지도 인터넷에서 이런 걸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놀라움이 있었다. 그리고 형식도 흥미로운데, 루프물 같은 성질이 있다. 내가 루프물을 되게 좋아하는데(웃음). 〈우리 집 소개〉는 낮은 화질이나 이상한 잡음처럼 아날로그적인 성질을 끌어온다. 여기서 『대현유』를 엮어 보자면 아날로그 호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다른 아날로그 호러는 어디까지나 컴퓨터를 이용해서 만들어지고, 그래서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시차가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 집 소개〉는 영상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정말로 썩어 들어가는 집 한 채를 사서 무슨 80년대 특수효과 분장팀처럼 하나 하나 다 손으로 만든 건데, 그런 수작업이 주는 힘이 아직도 강하다는 걸 알려준다. 그렇게 구체적인 물성을 지닌 허구를 현실에 가져다 붙이는데, 그걸 다시 한번 인터넷에 맞춰 가져오기 위해서 노스탤지어를 오염시키는 작업이 잘 섞여 있어서 이 작업물을 좋아했다. 또 요즘 온라인 놀이를 가장 재미있게 하고 있는 건 케인 픽셀즈(Kane Pixels)인 것 같다. 백룸 밈에 기초해서 자신만의 영상을 만드는 사람인데. 나는 작년 가을에 나온 ‘올디스트 뷰(The Oldest View)’라는 시리즈가 좋았다. 그 시리즈 같은 경우 백룸이 아니라 백룸에서 파생된 공간 중 하나인 쇼핑몰을 다룬다. 실제로 텍사스에 위치한 폐장 직전의 쇼핑몰을 참조해 디지털 공간을 만들고, 그 쇼핑몰에 실제로 설치되었던 기괴한 동상을 가져다가 호러스러운 크리처로 만들어서 영상을 찍는다. 파운드 푸티지부터 핸드헬드 기법까지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는데, 백룸이나 아날로그 호러 같은 인터넷 호러를 최대한 실사처럼 느껴지는 영상을 통해서 다시 한번 메타화한다는 게 매력적이다. 실제로 여기서 주인공이 ‘이거 진짜 백룸 같아’라는 말을 아예 하기도 하고.


이미지6) 케인 픽셀즈, 〈더 롤링 자이언트 (올디스트 뷰 파트 3)〉(2023). 영상.

이 둘의 사이에 있는 게 영화감독 카일 에드워드 볼(Kyle Edward Ball)의 작품인 거 같다. 이 사람은 ‘바이트 사이즈드 나이트메어(Bitesized Nightmare)’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다가 2022년에 〈스키나마링크 (Skinamarink)〉(2022)라는 공포 영화로 데뷔를 했다. 섬뜩한 노스탤지어와 매체적인 잡음을 매우 적극적으로 합친 '느린' 호러를 제작하는데, 픽셀 알갱이가 보일 정도의 저화질이 가진 애매모호함을 활용하는 게 특징이다. 새벽에 내 방 불을 다 꺼놓고 침대에서 랩탑 화면으로 〈스키나마링크〉를 보며 온라인 호러에만 국한된 줄로만 알았던 양식이 실제 장편 영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고무적이란 느껴졌다. 언젠가는 국내에서 수입이나 공개가 되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재민 『대현유』를 쓰며 참조한 책이 있는가? 이 책이 어디에, 어떻게 놓일 거라고 생각했는가? 예컨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19)을 의식하며 썼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원영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뿐만 아니라 유진 새커(Eugene Thacker)의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2022)도 흥미롭게 보았다. 두 책의 공통점이란 대중 문화를 통해서 공포를 이해하고, 나아가 대중문화를 통해서만 이해 가능한 공포를 이론화했다고 생각한다. 또 이건 북토크에서 얘기했던 건데, 책 자체의 물성을 생각했을 때는 마크 Z. 대니얼레프스키(Mark Z. Danielewski, 1966-)라는 미국 소설가가 쓴 『잎들의 집(House of Leaves)』(2000)이라는 책을 많이 참조했다. 이 책은 바깥보다 안이 더 큰 집에 대한 내용인데, 서식 같은 걸 활용하고, 중간에 거대한 주석을 집어 넣는다든가, 빈 공간을 넣는다는가, 하는 식으로 미궁 같은 구조를 만들었다. 나도 이런 식으로 픽션스러운 구조를 구현하고 싶었다. 다행히 마테리알의 류한솔, 이나하 디자이너가 아름답게 제작을 해주셔서,책 표지에 미로가 그려져 있고 책 내부에 글리치 같은 선과 유령 캐릭터들, QR코드가 있는 등 안이 바깥보다 큰 구조를 비슷하게나마 구현할 수 있었다.


(이미지7) 마크 Z. 대니얼레프스키, 『잎들의 집』 (부분).

또 책을 쓰면서 픽션 같은 단어를 많이 떠올렸다. 예전에 CCRU를 통해 '이론-허구(Theory Fiction)'라거나 하이퍼스티션(Hyperstition)을 봤을 때는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나도 현실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와서 비약을 하고 나만 알아먹을 수 있는 이론을 만드는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되더라. 어렸을 때 비평을 쓰겠다는 생각이 없을 때는 진짜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론 픽션’에 준하는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써야만 가능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현유』에서 다룬 이야기들이 진짜 과거의 일이 된다고 한다면 이후의 인터넷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내용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인터넷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나 이후에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스마트폰을 정말 어렸을 때부터 쓴 사람들이나, 인터넷이 플랫폼에 잠식된 이후부터 인터넷을 시작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보았을 때 『대현유』에서 어떤 게 가장 시대착오적일지, 아니면 뭔가가 살아남는다고 하면 무엇일지 궁금하다.


재민 『대현유』 발간 이후 비디오 에세이 〈대체 현실 유령: 사이렌헤드의 경우〉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비디오는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던 걸까? 혹시 유튜브에 비디오를 올리다든지, 인터넷 생산자로서의 충동도 있는가?


원영 비디오 같은 경우 사실 마테리알 웹사이트에 올라온 〈대체 현실 유령: 사이렌헤드의 경우〉 후기에 쓴 내용을 반복한 것 같아서, 그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유튜브 비디오에세이라고 하는 게 좀 웃기긴 하다. 그런데 난 『대현유』를 쓸 때 그렇게 좀 웃긴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는 감각으로 글을 썼다. 옛날에 한국어 자막이 달린 AVGN 영상을 재밌게 보기도 했고, 나중에 청소년 시기에는 〈제로 펑츄에이션(Zero Punctuation)〉이라든가 요즘은 스콧 더 워즈(Scott the Woz)나 비디오게임덩키(videogamedunky)를 보고 있고... 그런 게임 리뷰어들이 스스로의 캐릭터를 구축한 뒤 잡설과 인상과 연기와 주장을 뒤섞는 게 비디오 에세이의 덜 학술적인 면과 연결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지금도 비평을 쓴다고 말은 하지만, 비평가의 느낌보다는 유튜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보여주는 사람처럼 글을 쓴다는 느낌이 있다. 『대현유』를 쓸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체 현실 유령: 사이렌헤드의 경우〉는 내가 좋아하는 비디오에세이가 어떤 유형이고 그게 또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기 위해 만들었다. 그런데 내가 인터넷 생산자로서 뭔가를 한다면 그게 비디오 에세이는 아닐 것 같다. 인터넷에서만 읽어야 하는 글을 쓰고 싶다. 종이 지면의 연장으로써 인터넷 지면이 아니라, 정말 인터넷에서밖에 쓸 수 없는 것들을 쓰고 싶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에서 블로그에 일지를 쓸 때 적극적으로 음슴체나 약간의 사투리를 섞어서 글을 쓴다. 좀 웃기긴 한데… 아무튼 지금 당장은 유튜브에 비디오를 올리는 것보다는, 온라인을 지면 삼아서 글을 쓴다면 그 형식이 무엇이어야 할 지를 고민하는 것 같다. 이미지 같은 걸 올릴 수도 있고, 중간에 영상을 삽입할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뭔가 재미있는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을 항상 한다.


재민 존 보이스 차례다. 나는 존 보이스를 나원영 평론가의 헌신적인 소개/홍보 활동을 경유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존 보이스의 작업물을 번역하고 있고, 그를 소개하는 채널을 따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존 보이스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어떻게 마주치게 되었으며 왜 그를 소개하게 되었는가?


원영 존 보이스를 소개하자면, 일단 이 사람은 스포츠를 주제로 뭔가 다양한 것을 만든 사람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프로그레시브 보잉크(Progressive Boink)라는 팀 블로그를 운영했다가 2000년대 후반부터 SB 네이션(SB Nation)이라는 스포츠 웹진에서 글을 썼다. 그러다 2015년부터 영상 작업을 시작했고 2020년대에 들어와서는 시크릿 베이스(Secret Base)라고 하는 곳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한다. 또 지금은 ‘도크 타운(Dorktown)’이라고 하는 시리즈를 동료인 알렉스 루빈스틴(Alex Rubenstein)이랑 같이 만들고 있고. 내가 존 보이스를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좀 길어진다. 우선 처음 본 건 2017년도 9월쯤이다. 이 시기에 보이스는 초창기 영상 작업들을 만든 다음 「17776」(2017)이라고 하는 픽션을 냈다. 당시 나는 과거에 알고 있던 '홈스턱(Homestuck)'이라는 웹코믹이 완결됐다는 소식에 텀블러에 검색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홈스턱’을 좋아한다면 이런 걸 보라’는 추천 게시물을 올린 걸 보게 됐다. 거기에서 나온 것들을 체크를 하다가 「17776」을 보게 됐고, 보이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 뭔가 새로운 거를 보면 검색을 꼭 해보고, 한국어 웹에도 검색을 해본다. 그러면 웬만한 게 다 나온다. 내가 보는 게 어쨌든 한국 사람들이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다 이미 논의가 됐던 거라서 그렇다. 근데 존 보이스는 한국어로 검색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다. 이런 적이 처음이어서, ‘왜 이게 없지’ 싶어서 되게 열심히 찾았다.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져 봤는데도 없어서, 어쩌면 한국에서 이걸 아는 사람이 나 혼자인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책임감까지 가지고 좋아하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번역까지 하게 됐다. 근데 「17776」이 처음에는 되게 낯설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나는 인터넷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스포츠를 안 좋아하는 편이었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스포츠를 싫어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건 내가 모르는 미국의 미식축구라고 하는 스포츠였으니까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외의 것들을 감싼 이야기가 되게 신기했다. 내가 전혀 관심 없는 주제를 가지고도 정말로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만든다는 점이 좋았다. 내가 대중음악이라던가 온라인 호러 등을 매우 좋아하고 그를 통해 대부분의 것들을 생각하듯이, 보이스에게는 야구와 풋볼 같은 스포츠가 그의 '요점'인 셈이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제일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안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인데, 나마저도 보이스의 이야기에 낚인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번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던 것 같다. 일단은 이 사람을 소개해보자 싶은 생각이 있었고, 나도 어쨌든 번역을 하면서 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2017년도부터 시작해서 거의 5년이 지났고, 그 과정에서 온라인에 감사하게도 같이 번역을 하고 작업을 하는 분들이 생겼다. 지금은 정글심 님, 그리고 구이 님과 함께 보이스를 번역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보이스를 봐주고 더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하더라. 동시에 영미권에서도 보이스가 주목을 받아서 뉴욕타임스에서 인터뷰도 하고, 어디에서 상도 타고 그랬다. 어쨌든 내 생각에 존 보이스는 지금 온라인에서 무언가를 제일 재미있고 독창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다.


재민 「17776」이라는 거대한 저작을 번역해냈다. 애정과 관심이 깊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17776」이 어떤 텍스트인지 잠시 소개해줄 수 있을까?


원영 「17776」은 1만 5천년 후의 세계가 배경이다. 그런데 1만 5천년 동안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죽지 않은 채 유토피아를 만들었고, 거기서 미식축구를 하면서 생존보다는 지속을 도모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1만 5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공적인 지능을 갖게 된 우주 탐사선들이 사람들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면서 떠드는 이야기다. 「17776」은 인류가 정말로 모든 것을 성취하고 지루함 밖에 남지 않으면 지루함에 대응하기 위해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질문하고,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고 몰아 붙이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걸 픽션 차원에서 과장해서 보여준다. 그런 배경은 SF적이지만, 여기에는 다큐멘터리적인 부분도 있다. 「17776」은 전 미국 국토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는다. 보이스가 실재하는 대학교 풋볼 경기장들에 기이한 규칙을 직접 적용해 만든 거대한 경기장에서 미식축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등장인물이 위치한 조그마한 필드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한다. 이 선수가 지금 이 동네를 지나쳤는데, 이 동네는 사실 알고 보니까 이런 재밌는 일이 있었다더라라는 식으로. 그리고 이렇게 말해지는 미국의 사소하고 자그마한 역사는 사실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이며, 이것이 만 년 뒤 미래에서 벌여지는 허구적인 풋볼 경기와 겹쳐진다. 이렇게 「17776」은 허구와 사실을 묶어서 보이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이게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의 형식과 비슷하다. 현실을 가져와서 허구를 만들고 이론을 허구적으로 꾸며보는 식의 글쓰기와 흡사한 것 같아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또 최근 SF들이 많이 겪고 있는 문제라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인공지능 같은 테마에 환장하고 ‘포스트 휴먼’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결국 계속 모종의 인간중심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17776」은 SF라는 장르가 원래부터 잘하는 것, 낯설게하고 기이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며 그런 인간중심주의를 조금씩 벗어나는 것 같다. 물론 최근에는 작품을 몇 번씩 다시 읽으며 이러한 ‘유토피아’에 숨겨진 보수적인 측면을 여럿 눈치채는 한편, 보이스가 이걸 쓰게 된 계기가 트럼프의 당선 이후의 무력하거나 공허한 감정 때문이었다는 점도 많이 생각하고 있다.


재민 존 보이스는 스포츠 평론을 하고, SF를 쓰고, 유튜브를 한다. (그런 것으로 안다.) 나원영 평론가가 소개한 그의 비디오를 보았는데, 3D 게임 그래픽, 구글 어스, 인터넷 캡쳐 이미지, 파운드 푸티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등으로 구성된 화면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존 보이스는 웹진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인터넷 기반의 평론가인데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유튜브 비디오 제작자로 커리어를 확장했다. 그의 비디오는 말하자면 인터넷 미학이라고 할까, 유튜브 특정적 화면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포함하고 있어 예외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는 평론가인데, 심지어 매우 성공적으로 올드스쿨 유튜버다! 그것이 나에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원영 평론가에게도 그가 유튜버라는 점이 중요했던 것인지, 그것을 묻고 싶어졌다.


원영 보이스가 올드스쿨 유튜버라기보단 올드스쿨 인터넷 사람인 것 같다. 이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영상을 만들기 전부터 SB네이션이라는 사이트에서 되게 오랫동안 이미지를 짜깁기하고 도표를 만들고, 밈 같은 걸 만들고 했었다. SB네이션이라는 '직장'에서 일하면서 농담이나 밈으로 이루어진 기사를 만들고, 「17776」을 쓰기 이전에도 웹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소설도 쓴 적이 있고, 그러니까 2000년대부터 되게 오랫동안 인터넷에 있던 사람이다. 2000년대에 인터넷 자체가 웹페이지 위주로 돌아가고, 사람들이 짤 같은 걸 만들면서 실없는 농담을 하고, 진짜 수공업으로, 핸드메이드로 인터넷 생산물을 만들었던 시기에 인터넷에 있었던 사람인 거다. 그 시기에 어떤 인터넷 노하우들을 많이 익혀서 작업물을 만든 사람인데, 다만 변화하는 인터넷 환경에 맞춰서 작업을 바꾸다 보니 영상까지 만들게 된 거다. 근데 존 보이스는 영상 편집을 배운 적이 없어서 프로그램도 최근까지 아이무비를 계속 썼다고 한다. 그래서 유튜버라고 하기는 어렵고, 수작업으로 하나씩 뭘 만들어서 웹에 올리며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독특한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인터넷 사람이라는 단어를 따온 사람이 이제 닐 시시에레가(Neil Cicierega, 1986-)라고 하는 음악가인데, 그 또한 보이스와 비슷한 나이대이기도 하고 조금은 다른 구석에서 이것저것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근데 그 사람도 정말 어렸을 때, 90년대 후반부터 이상한 플래시 애니메이션 짤 같은 걸 만들다가 갑자기 매쉬업 음악을 하고 그랬다. 존 보이스도 그렇고, 플랫폼이 사용자에게 친숙하거나 편리하게 짜맞춰진 도구를 제공하지 않을 때 과거에서부터 인터넷에서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 어쩌면 오래 살아남고 있는 것 같다. 또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보이스가 그렇게 인터넷 수공업으로 작업을 하면 돈을 주는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글을 썼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누군가 만약에 나한테 ‘웹에서 보이스 같은 걸 해라, 그러면 돈을 주겠다’라고 했으면, 나도 그냥 하고 싶은 걸 했을 것 같다. 보이스는 그런 게 되게 예외적으로 보장되는 시기에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했다는 게 또 중요한 것 같다. 이건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모델 같다. 짤 올리고 헛소리를 하는데 누가 돈을 주겠나(웃음). 그런데 적어도 영미권 인터넷에서는 가능했던 거다. 그런데 당장 얼마 전에도 피치포크(Pitchfork)가 GQ에 편입돼서 사람들이 잘리고 사이트 자체를 수익화 하려고 하는 걸 보면 이젠 영미권 인터넷에서도 불가능해질 것 같다. 내가 제일 바라는 건 온라인에서 헛소리 아니면 재밌는 소리 같은 걸 할 수 있는, 레거시 미디어나 학술장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중간지대가 생겼으면 하는 거다. 만약 과거 인터넷의 실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이렇게 플랫폼에서 보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핸드메이드로 뭔가를 하는 실천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이런 모델을 한국에서 가능하게 한다면 ‘사람을 어떻게 모아야 할까’, ‘뭘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개인적으로 많이 하기도 했다.


재민 보통 어떻게 글을 쓰는가? 어떤 태도로 글쓰기에 착수하는가?


원영 아까 이야기한 거랑 좀 비슷한데, 인터넷 사람, 아니면 비디오 에세이를 만드는 사람처럼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단어가 싫지는 않지만 온라인에서 글을 쓸 때는 비평가라기보다는 인터넷 사람으로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런 태도를 ‘공식적인’ 글을 쓸 때 어떻게 끼워 넣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한다. 윤아랑 비평가가 예전에 쓴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라는 글을 보면서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서브컬처를 제물로 바쳐서 주류에 입장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서 서브컬처든 대안적인 것이든 하위적인 것이든 아무튼 그런 것을 주류에 입장시키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주어진 조건과 환경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인터넷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공식적인’ 이야기들을 오염시키고 두 개의 차원을 섞어버리는 것을 위해서. 문체나 형식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거나 부족하거나 이상할지라도 좀 내 맘대로 써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 듯 싶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 따위로 쓰지? 그럼 나는 이 따위로 써야지’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재민 요즘은 뭐가 제일 좋고, 무엇에 대하여 쓰고 있는가/쓰고 싶은가?


원영 관심사가 항상 바뀌긴 하는데, 요즘엔 정신 분산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 1962-2008)가 ‘완전 소음’이라는 단어를 얘기한 걸 좋아했는데, 인터넷이 그런 완전 소음으로 이루어진 환경인 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서 계속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즈음 집중력이나 생산력과 관련해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면서 한 동안 정신 분산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어떤 걸로 여겨졌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글쓰기라는 것 자체가 완전 소음을 환경으로 일종의 분열-편집을 하며 같은 것에 의거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괜한 마음에 트위터에다가 ‘정신 분산은 시대 정신이다!’라는 트윗을 남겼다. 그런데 말해 놓고 보니 이걸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싶더라. 그래서 왜 우리가 인터넷이라는 완전 소음 속에서 정신 분산된 상태로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1초마다 각종 밈 이미지나 소리, 영상 같은 것을 정말 콜라주 하듯이, 분열적으로 편집해놓은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거다 싶었다. 관련해서 최근에는 이런 유튜브 영상이나 인터넷에서만 가능한 분열적인 음악들, 그리고 인터넷에서의 글쓰기 방식 같은 것들을 『대현유』에서 했던 이야기들과 엮어서 맥락화를 하고 있다. 그것과 관련된 원고를 조금씩 쓰고 있다. 또 한국의 대중음악사 자체를 다시 한번 짚어보고 싶어서 긴 글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 블로그 일지를 통해서 좀 쓰긴 했는데, 여러 필자들에게 원고료라던가 연재 환경 등이 보장되는 공식적인 지면에서 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 말한 맥락에서 한국의 과거나 통속성과 같은 것을 오염시키고 유령처럼 출몰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를 탐구하고 있다.


(이미지8) “정신분산은 시대정신이다!!!!”

재민 『대현유』,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글인 〈열죽음〉(2021)이라는 연재를 살피며 나원영의 중심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노스탤지어화되는 세계, 나아가 노스탤지어가 자본화되는 세계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이것은 오래 되풀이된 질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도 특정한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기도 하다. 혹시 이 질문에 대하여 관심이 있을까?


원영 노스탤지어가 이제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노스탤지어 자체를 자본화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그게 지금의 인터넷을 통해 더 강화되고 있다는 느낌은 갖고 있다. 나 같은 경우 도피라는 단어를 되게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것도 대부분 도피를 위해서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허구의 세계를 만들고 소설을 쓴다는 느낌으로 글쓰기 하는 게 있는데, 2010년대 중후반까지는 정말 그렇게 도피를 하면서 글을 썼다. 그런데 20대 후반이 되고 2020년대에 들어온 지금 시점에서는 도피처가 진짜로 나의 집이 되고 거주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작년에 쓴 글 중 가장 완성도 있게 썼다고 생각하는 게 『k-펑크 1』 에 대한 리뷰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2023)인데, 거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도 이런 생각과 관련이 있다. 집과 도피처에 대한 느낌은 나 혼자만 가진 게 아니라 인터넷이든,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자기만의 대안적인 공간을 찾은 사람이라면 다 겪은 감정일 거다. 그런데 이런 도피처가 전부 거대한 플랫폼이나 후기자본주의에 흡수된 게 지금 시기일 텐데, 그런 게 오늘 이야기한 것처럼 우울이나 공포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가 다 같은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자본주의 아래서 이른바 개별화되고, 인터넷에서도 다 같이 개별화되어서 각자 자기만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자기 혼자서만 알아 먹는 방식으로 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기후든 파시즘이든 인터넷의 자본화든 노동이든 간에 어쨌든 큰 문제에 함께 직면하게 되니까 이 개별화된 상황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게 있다. 나는 이 상황을 글로 잘 풀어서 집단적인 문제로 제기해보고 싶다. 학술적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건 인터넷에서 하는 글쓰기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제기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스탤지어 자체에는 양가 감정을 갖게 된다. 나는 복고적인 양식을 정말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매혹되는 과거의 대상들이 있다. 만약 복고적인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의미 있는 노스탤지어와 그렇지 않은 노스탤지어를 잘 구분해서 이렇게 뒤틀린 시간 속에서도 무언가를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지, 시공간을 어떻게 작동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 1963-)가 포스트 펑크의 역사에 대해 다룬 『찢어버리고 다시 시작해(Rip It Up and Start Again)』(2005)라는 책이 있는데, 아무래도 나는 한국에 살다 보니 이러한 어구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해'라는 한국만의 문제계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한국은 정말 재개발을 잘하는 나라고, 스스로를 재개발해서 정말 그럴싸한 나라를 만들었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가 지금 매우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나는 다른 나라로 가지는 않고 또 못할 것 같고, 한국 안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기이함과 이상함과 익숙함과 낯설음에 대해서 계속 생각할 것 같다. 그러니 그걸 바탕으로 어떻게 이 나라에서 한국인들이 느끼는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최대한 괜찮은 방식으로 지속할 수 있을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가끔 정말 끔찍하지만, 그 끔찍함을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걸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재민 긴 시간 함께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많은 사람들이 나원영 평론가의 활동을 궁금해할 것 같은데, 혹시 앞으로 예정된 활동이 있거나 공개되는 프로젝트 등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린다.


원영 올 겨울 동안 인터뷰 내용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 글을 많이 썼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노스탤지어를 모의하는지,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가 어떻게 개별화된 채로 무언가를 파고 있는지, 그리고 정신 분산이 어째서 시대 정신인지,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글을 썼다. 공개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 작년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번역을 한 게 있는데, 인터넷과 음악과 노스탤지어가 엮이는 지형도에 대한 글이다. 나도 여기에 맞춰 원고를 더 써야 될 것 같긴 해서 직접적으로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포스트락을 찾아서」를 진짜 쓰고 싶다. 정말 좋은 책이 될 수 있는 글을 쓰려고 계속 준비 중이다. 머릿속으로 정말 계속 오랫동안 고민 중이어서, 혹시나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기회를 빌어서 진짜… 다 함께 파이팅이다. 뭐라도 파이팅할 게 있으면 좋겠다. 어쨌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