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리단길 초입에서 판매하는 겨우 700원짜리 꽈배기가 너무 이상했다. 동전 몇 개로 시장에서 사 먹던 꽈배기가 언덕을 넘어 집까지 배달된다는 사실이 허무한 건데… 단순히 꽈배기 가격과 배달 수수료를 비교한 게 아니라,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순진하고 잔혹한 상상이 단번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포용적 디자인(inclusive design)을 연구하는 동료가 “어떤 걸 배달받았을 때 제일 당황스러웠어?”라고 질문하기에 나는 서슴없이 꽈배기를 말했다. 배달 온 꽈배기가 맛있다는 감탄보다 어쩌다 이게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대답을 들은 동료는 한숨 쉬며 “꽈배기가 배달 오는 시대에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투쟁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라고 말했다.1 한쪽이 묶여 있는 것을 자유로운 이동이라고 하던가.
불현듯 ‘우리’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익숙한 표현이지만 글을 쓰거나 작업을 설명할 때, 그 단어를 뱉는 일만큼 다망한 것이 없다. 속 편하게 ‘우리’라고 내뱉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화자와의 물리적 거리, 계급-성별-인종부터 장애나 질환의 유무를 알아 가며, 협소한 의미의 ‘우리’가 될는지 포괄적 의미의 ‘우리’가 될는지 짚어 주어야 한다. 혹은 누구인지 묻지 않는 것으로 완전한 ‘우리’가 가능하다고 단언하든지,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뱉을 수는 없는 말이다. 더군다나, 모든 단어에 각주를 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리’의 의미는 화자의 제스처에 기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그 단어가 갖는 포용력만큼은 제스처를 취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다.
나는 ‘제때 없는 원가족’과 ‘퀴어 공동체로의 이동’, ‘유족됨’ 그리고 ‘이들과의 난잡한 미래’를 당차게 그리고 싶어서 전시 제목에 ‘우리’를 붙였다. 그 말을 선뜻 내뱉음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선 언제나 넓은 의미의 ‘우리’를 상상하고 준비해야만 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니즈(needs)가 서로에게 덧씌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동행은 기대로 부푼 경험일 뿐만 아니라, 번번이 불안하고 늘 조심스러운 선택이다. 그 동행이 전통의 환대를 받는 이들의 몫이 아닐 경우 더욱 불안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우리의 불안을 일차적으로 잠재우는 것은 제도를 재정비하는 일일 테다.2 그러나 법제도가 어떤 유형의 삶을 정리한다 한들, 한 개인의 지향은 자주 제도 밖으로 뛰쳐나간다. 나는 매번 제외되고 뛰쳐나가며, 집요하게 기대와 불안을 말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만날 뻔해서 반갑습니다〉(2021)를 제작했다.
여기 ‘환희’라는 흔한 기쁨의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다. 그의 가족들은 누군지 모를 - 어쩌면 미래에 등장하거나, 없을지도 모를 - 환희의 동반자에게 영상편지를 남겨 준다. 스크리닝 조각과 인터뷰 영상, 향료로 제작된 〈만날 뻔해서 반갑습니다〉(2021)는 ‘누군지 모를 동행인’을 위해 미리 만들어졌다. 나는 작업 안팎에서 인터뷰이들의 니즈를 반영하며 작업을 만들리라 되뇌었다. 인터뷰이들은 아름답게 보여지길 바랐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없었고, 나는 영상 속 얼굴을 변형하고 싶지 않았기에 굴곡이 심한 스크린을 떠올렸다. 결국 스크린이라고 주장하는 - 큰 덩어리의 조각이 완성되어 있었다. 한편으론 작업의 감상자가 될 ‘누군지 모를 동행인’은 정말로 누구일지 알 수 없어서… 인터뷰이의 니즈보다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높은 확률로 미술계 종사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며, 계급-성별-인종부터 장애나 질환의 유무를 가정해 보기도 했다. 가끔 환희가 혼자일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는 ‘누군지 모를 동행인’이 강아지나 고양이 혹은 앵무새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또 범죄자와의 불가피한 동거도 상상했다.
여러 상상을 거쳐 당연히 시각적 문해력의 차이도 마음에 걸렸다. 이미 혼란스러운 스크린이 있으니, 적어도 목소리는 명료하게 남겨야겠다고 판단했고, 향료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콕 집어 향료를 만든 의도를 물었는데, 나 스스로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고 자신했던 터라 향료에 대해 묻는 게 퍽 당혹스러웠다. 향료를 제작한 것은, ‘감상자가 미술 감상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쩌지?’ 또는 ‘시각이나 청각 장애, 아니면 시청각 장애가 있으면 뭘 감상할 수 있지?’, 구차하게는 ‘감상자에게 내가 알아차리길 원하는 뉘앙스를 전하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후각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상도가 낮다. 즉 후각 자극원에 대한 발생 시점과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다른 자극에 비해 민감도가 매우 높고 진동이 있거나 빛을 내지 않는 물질에 대해서도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체할 수 없는 정보를 지닌 감각이다. 때문에 시청각적 요소를 다시 설명적인 시청각적 요소로 애써 변환하기보다, 대부분에게 낯설고 억지스러운 것을 시도해 보자는 욕심이 앞섰다.3 조향사의 도움으로 완성된 향료는 ‘페스티벌이 끝난 후 남은 화약과 꽃향기’이거나 어쩌면 ‘교회 냄새에 핑크빛을 섞은’ 듯한 그윽한 향이 났다. 〈만날 뻔해서 반갑습니다〉는 결국 최소한으로 편집한 인터뷰 영상, 명료한 음성파일, 그리고 향료를 뒤집어쓴 스크린으로 서 있게 되었다.
2015년 일본의 가수 나카시마 미카는 콘서트에서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을 부르던 중, 무릎을 꿇고 아래 위치한 스피커에 손을 대고 반주를 느낀다.4 언뜻 좌절과 고립을 지나쳐 희망까지 꿰차는 가사에 어울리는 무대 매너처럼 보이지만, 팬들은 다른 이유로 감탄한다. 나카시마 미카가 양측이관개방증으로 반주를 잘 들을 수 없어서 스피커의 진동으로 반주를 체크했다는 것. 또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시 출입구의 경사로에서부터 떨림이 느껴졌다. 정은영 작가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2019)이 그 떨림의 정체였는데, 고출력 우퍼 덕분에 음악 소리보다 떨림이 먼저 몸을 긁고 있었다. 좀 더 흔한 일로는 영화관에서 4DX로 히어로물을 볼 때, 전투신(scene)에서 웅장한 저음이 흘러나올 때 의자에 진동이 가해지는 일이 있다. 눈앞에선 전투가 펼쳐지지만 진동은 나의 가랑이 밑에서 울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몰입할 만했다. 화려한 전투신이 내 작업에는 없지만, 여러모로 욕심나는 기술이 아닌가?
어떤 영상은 시간이 지나도 유의미하게 변화하지 않으며,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혹은 얼마나 자주 한눈 파는지가 치명적이지 않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영상 - 영상의 모음이 된다. 허나 어떤 영상은 시간의 흐름과 감상자의 견딤이 필요하고, 부디 감상자가 시작부터 끝까지 영상의 호흡을 따라 주길 바라는 - 연속성이 무척 중요하다. 거칠게 나눈 두 가지의 영상 분류는 각 특징을 고려하며 구현할 필요가 있다. 나의 작업에서 〈만날 뻔해서 반갑습니다〉는 전자에 가까우며, 영상의 길이가 25분에 달하는 〈확대-핵-판타지아〉(2021)는 후자에 속한다. 감상자의 견딤과 연속성이 중요한 〈확대-핵-판타지아〉에서는 향료를 더해 쓰더라도 모든 틈을 메우기엔 역부족인 부분이 있을 성싶었다. 이때 유난스러운 볼륨의 유난스러운 음악이 등장한다.
〈확대-핵-판타지아〉는 가족의 형태가 해체되는 방식으로 변화해 왔다는 걸 짚는다. 확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변화했다면, 다음은 가족을 넘어 각 개인이 되어버리는 분열에 가까운 해체가 찾아올까? 혹은 ‘확대-핵-확대-핵-확대-핵, 다시 확대’와 같이, 정치나 유행처럼 반동적인 모양새를 띠며 확대 가족으로 회귀할까? 상상해 보자. 핵이 최소 단위인 듯 자리할 때, 분열 혹은 해체하는/당하는 개인에게는 선택 가능한 상황이 온 것이 아닐까? 정치나 유행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듯하지만, 사회 구조, 경제 발전, 사람들 의식에 따라서 변증법적으로 변화한 것을 생각하면, 사실 반동이 아니라 팽창의 과정은 아닌가? 결론내 보자. 가족의 개념이 너무 좁아지면 선택의 영역이 되고, 아주 넓어져도 선택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서비스의 포화 속에서 사람들은 가족의 재생산 노동까지 외주화하는데… 각자가 공동체나 동반자를 선택할 욕구가 터져 나오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제, 가족도 형식적 제약이 없는 것을 우선적으로 표방해야 할 것이다. 〈확대-핵-판타지아〉에서는 이러한 생활 공동체의 이름을 (‘형식적 제약이 없음’을 형식으로 둔 악곡을 뜻하는) ‘판타지아’라고 부른다. 나는 ‘제때를 찾지 않는 원가족’에서 ‘친밀한 퀴어 공동체’로의 이동을 ‘전통과 자본’ 옆에 던져 보고자 영상을 제작했다. 2채널 인터뷰 영상과 음성이 있지만, 아마 유난스러운 음악과 볼륨이 감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테다.
이상화 작곡가와 협업을 할 때, 내세워 말한 것은 바흐가 작곡한 판타지아 ‘C P E Bach, Fantasia F# Minor Wq 67’(1787)였지만… 머릿속은 온통 나카시마 미카의 무대 매너와 정은영 작가의 고출력 우퍼, 그리고 나의 가랑이를 간지럽히던 토르와 헬라의 전투신 생각 뿐이었다. 이를 떠올리며 “25분 동안 모든 음이 꽉 차 있으며, 멜로디가 정주하지 않고 계속 바뀌어야 하고, 떨림을 위한 저음부터 귀가 고통스러울 지경의 고음역대까지 나오길 바라며, 레퍼런스는 악곡이지만 디스코 사운드로 느껴지거나 보깅을 하고 싶은 - 마돈나의 보그와 넷플릭스의 포즈가 생각나야 하는데… 근데 또 엇박자로 예측을 벗어나길 바란다”라는 해괴망측한 요구를 했다. 괴팍스런 요구에도 작곡가는 떡하니 그러한 음악을 만들어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 음악이 필요했다. 〈만날 뻔해서 반갑습니다〉와 다르게 〈확대-핵-판타지아〉는 영상의 시간이 지날수록 의견이 구체화되고, 어떤 순간은 작가가 인터뷰이를 배신하는 말을 뱉지만, 결국 상상했던 결과로 끌고 가는 과정을 전해야 했다. 이 과정을 따라가야 하기에 감각만큼은 선형적인 특성을 갖는 청각으로 전해져야 했다. ‘제때’와 ‘원가족’ 그리고 ‘퀴어 공동체’와 ‘삶의 동행’을 바라보는 복잡한 판단들 사이에서, 〈확대-핵-판타지아〉는 애써 구성해 낸 ‘생애 주기의 변동’이다. 이는 25분의 선형적인 시간이고, 결국 촉각을 통해 자극되는 청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난관은 촉각이 될 만큼 큰 볼륨의 음악을 어디서 틀 수 있느냐는 점이다. 특히 밀집도 높은 도시라면 더더욱… 개인전 《우리의 미래가 협소하지 않길 바라며》(2022)가 열렸던 전시 공간 Hall1은 여러 공장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종종 14톤짜리 냉동 탑차가 드라이아이스를 싣는 소음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음이 마냥 좋았던 것은… 내 작업의 유난스러운 음악도 그들이 견뎌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확대-핵-판타지아〉의 음악은 두 번의 경찰 출동과, 한 번의 앞 건물 관리인 출동, 한 번의 주민 출동이 있었다. 전시에 관객이 있을 때 경찰이 오면 - 차분하게 설명하고 조치를 취하겠다 답하며 돌려보냈고, 전시에 관객이 없을 때 경찰이 오면 -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처럼 애원하면서 조금만 참아 달라고 빌었다. 또 건넛골목의 주민이 방문했을 때는 그의 스트레스에 공감하며 20여 분을 대화해 양해를 구했다. Hall1 앞 빌딩의 관리인이 왔을 때는 “이 유난스러운 음악은 단순히 몰입도를 좋게 하자거나 신나자고 튼 건 아니고… 청각보다 촉각으로 음악을 느껴야 하는 관객이 온다면 제가 일일이 알아보기도 어려워서 튼 것이다”라고 말하자, 항의하러 온 관리인께서는 ‘나만 믿고 맘 편히 할 일 하시라’ 말하며 되돌아가셨다. 난 아직도 이런 경우에 대응할 적절한 방법을 모르겠으니, 유난스러운 음악을 만드는 일보다 유난스러운 볼륨으로 음악을 트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어렵지 않은 일을 소개한다. 어렵지 않은 일 리스트: 전시 홍보를 할 때 엘리베이터의 유무와 휠체어가 가닿을 수 있는 곳을 명확하게 알리기. 전시의 핸드아웃은 묵자 표기와 점자 표기를 병행 배포하기. 와중에 예쁜 핸드아웃을 만들고 싶으니까, 점역 웹사이트 ‘점자로’에 들어가서 유니코드로 변환한 텍스트를 용지 위에 배치해 보기. 전시장 전개도 이미지 꼭 넣기. 전시 소개의 텍스트가 길 경우, 음성 번역해서 QR코드로 제공하기. 전시와 관련된 텍스트들은 스크린 리더 기능 최적화 상태로 두기.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고령층부터 저시력인까지 고려해서 만든 온고딕 폰트 사용하기. 작업마다 대체텍스트를 준비하기. 작업마다 적어둔 대체텍스트를 지루한 음성 번역기 사용보단 본인 음성으로 녹음하기. 관객이 대여할 수 있는 전자 기기와 헤드셋 준비하기. 가능한 한 출입문의 폭이 넓고 문턱이 없는 곳을 알아보기 등등.
시도하면 결국 할 수 있고, 필요가 분명한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미술에서 자주 언급되는 배리어프리는 대개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려는 듯 보인다. 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게 맞나? 상상해 보자. 어느 날 내가 흡사 슈퍼스타(비욘세 같은) 작가가 돼서 - 막 대리석이 깔려 있는 평평한 바닥에, 출입문 높이도 막 4m에다가 콜로세움 규모의 공간에서 전시를 하면 엄청 ‘배리어프리’할 것 같다. 돈도 막 엄청 많아서 대체텍스트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써 주고, 점자 인쇄도 무한으로 뽑고, 핸드아웃에 그려진 공간 전개도 이미지도 다 형압으로 넣고 그러면 진짜 ‘배리어프리’할 것 같다. 허나 배리어프리는 늘 행정적이고 작업이 완성된 이후에 준비해야 할 - 사후적인 것인가? 미술 작가에게 배리어프리란 작업을 만든 뒤에 충실히 설명해야 할 사후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우리’가 누구인지 떠올리며 창작 과정에 포함되었어야 할 상상력이다.
운 좋게도 나는 훌륭한 예시를 만난 적이 있다.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보았던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는 수어 통역과 배우들의 호통에 가까운 발성, 무대 상단부 중간에 위치한 큼지막한 자막, 마치 관조하는 듯이 다른 배우가 음성 해설을 뱉어 주는 등… 수많은 배리어프리의 요소가 있지만, 이것들은 사후적인 것들이 아니기에 - 하나의 요소라도 빼 버리면 연극은 달라질 듯하다. 제목부터 앞서 말한 ‘우리’를 호기롭게 뱉으며, ‘이 공연이 지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시스젠더, 모든 소수자에게 닿았으면 좋겠다’고 이은용 작가는 밝혔다.5 연극에서 보여준 ‘모든 게 하루에 하나씩 사라지는 세상’에서 ‘한 음식이 사라지면, 그 음식에 관한 레시피도 사라지는 것인지’에 관해 혼동하는 장면이 신경 쓰였다. 하나씩 사라진다며 몇 개씩 사라지는 불공평한 규칙을 만든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이 촘촘한 구성의 연극은 한 요소가 없을 때 사라지는지, 모든 요소가 없을 때 사라지는지. 아니면 한 두 번 만에 사라지더라도 다시 생겨나서 그때 또 사라지는지. 스스로 만든 규칙조차 못 지키는 신이야말로 우스운 농담이 되며, 연극은 ‘우리’ 누구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상상력을 심어줬다.
언제 한 번 ‘우리’가 누구인지 떠올리다가 또 다른 상상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배리어프리도 고민됐지만, 세상을 떠난 인터뷰이와 유족이 된 인터뷰이에게 못 다 정리한 말들을 전해 주고 싶었다. 이때 미술계 종사자도 아니고, 감상이 익숙하지도 않은 상대를 고려해야만 했다. 무수한 말들을 갈무리해서 또 다른 작업으로 만드는 일은 괜한 암호를 만드는 일로 느껴졌다. 그러다 모두에게 가닿을 수 있는 형식이 떠올랐다. 앞서 말했던 어렵지 않은 일 리스트는 접근성을 높이는 일이지만, 많은 부분을 언어에 의존한다. 전할 말이 너무나 많을 경우에 텍스트만큼 만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만든다면 인터뷰도 정리하며 선물도 가능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끝에, 책의 도입을 쓰고 인터뷰집을 정리하며 182페이지의 책을 만들어 전시장에 놓았다. 한편, 미술 작가의 주 언어는 이미지라던데, 텍스트만 잔뜩 보여주는 내가 자격 미달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지를 뿜어내며 언어처럼 소통하진 못한다. 매 순간마다 이미지를 창조하는 ‘이미지 나라 외계인’이 아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게 있다면 이미지의 제약을 알고, 간혹 튀어 나가는 시청각적 상상력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한 상상력의 포기는 단순히 잃기만 하는 좌절이 아니라, ‘우리’ 누구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소망이고, 실은 또 다른 상상력이다.
결국 182페이지의 인터뷰집을 통해 만든 것은 〈눈높이 VS 낮은 곳〉(2022)이다. 다섯 개의 조각글과 이를 한데 모은 다섯 챕터의 책 한 권, 그리고 높낮이가 다른 책 좌대로 이루어진 작업이며, ‘개말라벤더 연작’(2022) 중에서 유일하게 영상이 아닌 작업물이다. ‘개말라벤더 연작’은 20세기 중반 미국 정부가 야기한 라벤더 공포를 떠올리며, 기시감이 들던 2019년 5월 초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집단 감염을 돌아본 프로젝트 작업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게이 클럽을 표적 삼은 혐오에 분노하더라도, 우리는 마냥 슬퍼하거나 공포에 질린 반응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퀴어 가족이 되든 돌봄의 공동체가 되든 앞날을 기대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앞날에 대한 기대는 특히 〈눈높이 VS 낮은 곳〉에 인터뷰 챕터로 가득 실려 있었다.
다 보고, 다 들리고, 다 느껴지는 사람은 나의 작업이 난잡한 상태라고 말할지 모른다. 또 누군가 내게 비쥬얼 스펙터클에 관심이 있어서 이러한 작업을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어디서 설익은 끼로 흠을 잡거나, 무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내는 못 감추는 어설픈 음침함이… 아무튼 내가 나의 작업을 다시 곱씹는 데 쓸모는 있다. 난잡하다는 말에 감사하며, 스펙터클하다는 말은 거절한다.
홍진훤과 안소현의 서신을 엮은 『사진에 관한 대화』에서 안소현은 스펙터클을 이렇게 설명한다. “스펙터클은 힘의 크기만 보면 시선을 사로잡는 새롭고 강한 이미지로 보이지만, 그 힘의 방향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시각적 요소들이 특정 내용을 더 강화하고, 한 이미지는 기존의 익숙한 이미지들보다 더 강해야 스펙터클이 됩니다. 스펙터클은 언제나 ‘더 큼’을 원리로 하지요. 따라서 스펙터클의 힘도 일종의 관성일 수 있습니다.”6 애틋한 인터뷰이들이 가득한 나의 작업을 허드레로 만들진 않지만, 결코 스펙터클을 꿈꾸진 않았다. 크기를 묻는다면 스크리닝 조각은 겨우 180cm 높이다. 조각 중에서는 흔하디 흔한 휴먼 스케일이며, 스크린과 비교하면 작은 축에 속한다. 어떤 ‘더 큼’을 느꼈다면 그건 영상과 조각이 난잡하게 엮이며 생긴 감각일 테다. 눈높이에 위치한 글은 책 좌대의 높이가 정말 150cm 눈앞까지 와서 불편한가? 헌데 ‘우리’를 매번 배제하는 그동안의 관성을 배신하려고 공들였는데, 스펙터클하다는 말은 서운하다. 대신 모두가 보게끔 낮은 곳에 모든 글을 담아 뒀는데 말이다.
아마도 난잡함을 말하는 사람과 스펙터클을 말하는 사람은 비슷한 걸 캐치한 듯하다. 다만 난잡함이 얽히고설킨 상태를 가리킨다면, 스펙터클은 관성에 의존한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익숙한 것이 안전하다는 것, 비슷한 관계를 맺고 비슷한 생애 주기를 따르며 비슷한 삶을 살아야만 사회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당연한’ 전제에 저항해야 하며7, 그 과정이 얽히고설켜 난잡한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면 불안해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난잡함이 추동할 기쁨과 아름다움에 한 번쯤 심취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래서 ‘제때 없는 원가족’과 ‘퀴어 공동체로의 이동’, ‘유족됨’을 그저 스펙터클하게 그릴 수 없다. ‘이들과의 난잡한 미래’를 가늠해 볼 뿐이다.
글의 시작으로 돌아가서… 며칠이 지나자 함께 꽈배기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는 다른 질문을 했다. “휠체어를 탄 배달 기사는 꽈배기 도넛을 배달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동료는 스스로 더 많은 대답을 했다. 지하철을 제때 움직이고, 꽈배기에도 배달 기사를 배정해 주지만 어떤 몸은 탑승하지 못하는 테크놀로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기술이 에반게리온처럼 자유로운 탑승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 자유로운 이동은 보장될 것 같았다며 한탄했다. 동료는 미래의 존재는 미래적인 외피를 입을 것 같지만, 현대는 그것만은 정면으로 부정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유효하게 쓰이는 제품들은 점점 외형적 특징이 흐려지는 형태로 디자인되다가, 네모난 판이 되었다.8 그 말대로 손끝으로 외형을 따라 전화를 걸 수 있는 다이얼식 집 전화도, 전면에 별별 버튼이 잡히던 TV도, 조이스틱으로 화면을 순식간에 이동하던 게임기도 모두 네모난 판이 되었다. 어떤 것들은 네모난 판 안에서 포용적 디자인으로 자리 잡았겠지만, 불친절하게 매끈한 판이 되어버린 것들을 과연 ‘우리’는 알아챌 수 있을까? 내 앞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저 동료가 더 넓어진 ‘우리’를 알아챌 수 있게끔… 아주 포용적인 디자인을 완성하길 바란다.
동료가 열중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가는 미술관에 대해 생각했다. 흔히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고 여겨지지만, 간혹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는 미술관은 오히려 스스로 네모난 판이 되길 바라는 듯이 보인다. 동료의 말대로 미래가 미래적 외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놀라운 기술이 ‘우리’를 네모난 판 위에서 봉합해 줄 거라는 기대보다… 안 보이기를 자처한 미래와 함께 소거된 ‘우리’들을 되찾는 일에 몰두해야 할 테다. 비단 미술관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근성을 고민한다는 것도 그러한 일이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가족질서 밖 소수자의 장례와 애도를 위한 사례보고서 - 퀴어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관계성을 중심으로」, 가족구성권연구소, 2023.01.31.
구자혜, 「접근성 확장, 관객을 실제로 만나는 일에 대하여」, 『웹진 믿미』 vol.5, 예술순환로, 2022 봄.
이재환, 최선영, 『우리도 해보고 있다 우연히, 작게, 문득, 계속』, 2022 비대면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개발 사업 〈만날 사람은 만난다〉 기록집, 2022.11.26.
오혜진, 「경계로서의 젠더와 “가능한 세계”」,『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터틀북스, 2020.
황두영, 『외롭지 않을 권리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시사IN북, 2020.03.16.
1 김희경, 「유령적 테크놀로지 시대 - 휠체어를 탄 배달기사는 꽈배기 도넛을 배달할 수 있을까?」, 2023.
2 오혜진, 「그 산은 나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씨네21』, 2023년 3월 19일 접속, 출처.
3 이재환, 최선영, 「우리도 해보고 있다 우연히, 작게, 문득, 계속」, 『2022 비대면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개발 사업 〈만날 사람은 만난다〉 기록집』, 2022, 17.
4 위 글에서 언급한 나카시마 미카의 콘서트 영상, 출처.
5 장영, 「완성되지 않을 유언장과 계속될 농담을 위해」, 『연극in』 제158호, 2023년 3월 19일 접속, 출처.
6 안소현, 홍진훤, 『사진에 관한 대화』(현실문화A, 2019), 63-64.
7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오월의 봄, 2022), 123.
8 김희경, 앞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