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emic writing이 제안하는 포기된 번역: 의미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 이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시도로는 아마 형태론적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단어’는 의미에 대한 의미를 고찰할 때 생각할 수 있는 용어인데, 현대 언어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일반적으로 기술 언어학이 수립한 형태론 연구 성과에 기대어 단어를 규정하고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sememe’은 의의소(意義素), 즉 의미의 최소 단위로, 익숙한 말로 바꿔보자면 ‘형태소’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언어를 음성적 표현 방식과 의미 내용의 이중 구조로 파악할 경우, 형태소는 그중 의미 내용의 최소 단위이다. 따라서 형태소와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단어의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 언어학자들의 논리다. 그러니까, 의미의 의미에 접근하려면 형태소의 집합을 파악해야 한다. 그럼 형태소가 더이상 형태소가 아니게 된다면? ‘sememe’은 ‘seme’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부정의 접두사로서 ‘a’가 붙으면 이는 곧 ‘아세믹 asemic’의 초석이 되며, ‘의미 전달 기능을 포기함’을 뜻하게 된다. 아세믹은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조어로, 그 이전에는 로고그램(logogram), 픽토그램(pictogram), 기호화법(semiographic), 단어 없는 글쓰기(wordless writing), 읽을 수 없는 글쓰기(illegible writing) 등으로 설명되어 왔다. 1997년에 결성한 전위적 예술가 집단 ‘Visual Poet’의 창시자 팀 게이즈(Tim Gaze) 그리고 짐 레프위치(Jim Leftwich)는 처음으로 아세믹 글쓰기(asemic writing)를 미술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온라인 활동을 통해 소위 ‘아세믹 운동(asemic movement)’을 선도하고 있다.1 세계 각국의 작가들이 웹사이트에 게재한 작품들은 상형문자 혹은 특정 기호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들의 글쓰기는 어떠한 의미와 내용도 담지 않고 오직 행위에 의해 파생된 형태로서 존재한다.2 각각의 개인이 만들어 낸 언어라는 점에서 영화 〈아바타 (Avatar)〉(2009) 시리즈의 ‘나비어(Na’vi) ’또는 〈듄 (Dune)〉(2021)의 ‘프레멘(Fremen)’ 언어 등 픽셔널한 언어와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아세믹 글쓰기의 본질은 ‘무의미성’에 있으며, 언어로서 기능하지도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The Rustle of Language』(1984)에서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타자기로 쓴 글에 종종 나타나는 오탈자를 ‘무의식적인 실수’라 이르고 이러한 실수야말로 무의식의 반영이자 순수한 기호, 즉 아세믹 단어(asemic word)라 했다.3 또, 그의 ‘영도의 글쓰기(Writing Degree Zero)’라든지, 중국의 한자어, 혹은 글을 배우기 전 어린아이가 흉내 낸 낱말 쓰기같이… 만약 이러한 탈기호적 글쓰기라는 것이 통용되어 문자를 기술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물과 생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이상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도 될 것이다.4 그런 세상을 꿈꾸는 미술가가 있다면 어떨까? 이탈리아 출신의 예술가 루이지 세라피니(Luigi Serafini, 1949-)의 저작 『세라피니의 서(Codex Seraphinianous)』는 문제적이다.5 1980년대에 출판된 이 책은 피를 흘리는 과일, 의자 모양으로 자라나는 식물, 사람의 눈 모양을 한 수면 위의 물고기 등 기이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삽화와 함께 알 수 없는 언어로 서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6 약 36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세계관은 대체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연약한 지지체로 삼되, 매우 기괴하고,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초현실적 패러디로 나타난다. 2009년 ‘옥스퍼드 대학 도서학회(Oxford University Society of Bibliophiles)’에서 세라피니는 해당 원고에 아세믹 글쓰기를 차용했음을 주장했다. 문제의 저작은 분명 세라피니가 구축한 세계관 내의 언어체계로 서술된 것일 터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의 모국인 이탈리아의 언어학자들이 달려들어 이를 연구하였으나 유의미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아세믹 글쓰기의 무의미성이 발휘된 것이다. 읽을 수도 없는 이 책의 무엇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가? 다시 ‘의미의 의미 탐구’로 돌아가자. 언어의 기능은 총 여섯 가지로 나뉜다.7 첫째, 지시적 기능, 둘째, 표출적 기능, 셋째, 명령적 기능, 넷째, 친교적 기능, 다섯째, 미학적 기능, 여섯째, 관어적 기능. 여기서 언어 표현의 미학적 기능은 문학이나 예술적 효과의 창조를 위해 언어가 쓰이는 것을 말한다. 시적 사용이라고도 하며, 그것은 가능한 한 모든 의사 전달의 수단과 모든 종류의 의미가 사용될 수 있도록 언어를 개방한다. 그런데 이러한 미학적 기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화자와 독자 모두 ‘의미’에 대한 고도화된 감수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로티(Richard Mckay Rorty, 1931-2007)는 현실이 언어를 매개로 은유 되고 있으며, 언어에 의한 논박은 결코 ‘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가령, ‘신은 죽었다.’가 성립되는 범위는 설명하고자 하는 진실의 표면을 어루만지는 데서 그칠 뿐, 결코 그것 자체가 진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비록 객관적 진실에 다가설 수 없겠지만 언어의 시적 사용 즉, 은유를 통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며, 상대를 알아가려 노력한다. 다소 회의적인 제스처를 자아내는 로티의 철학은 어떤 가르침과 함께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不立文字)’. 세라피니가 만든 세계는 누구에게나 납득이 가능한 참됨을 버리려는 어떤 시도일 수 있다. 이해하길 바라지도, 누군가 멋지게 읽어내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포기할 것을 제안한다. 제목은 섹시하게, 본문은 쿨하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KWCAG)에서 2022년 12월 31일 『한국형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 2.2-2』 개정안을 공시했다.8 그중, ‘인식의 용이성’을 다룬 장에서는 대체 텍스트(alternative text)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이야기한다; 5.1.1.(3). 특정 감각으로만 제공되는 콘텐츠인 경우, 해당 콘텐츠에 대한 간략한 용도를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5.1.1.(4). 단순히 장식이나 시각적인 형태를 위해 사용되는 콘텐츠의 경우, 보조 기술을 통해 해당 설명을 제공하면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공백 처리한다…그러니까, 시력이 제한된 상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무엇이 어떤 것을 위해 어디에 있다’ 정도일 것이다. 실재에 대응하는 제공되는 정보의 근사치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지침’에 의해 결정되고, 가지 쳐진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덜어냄의 미덕이랄까. ‘여기서 더 (하려면)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와 같은 미완의 상태. 제한된 서술(혹은 번역)을 통해 핵심을 전달하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에 의해 나타난 뻔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달리 질문을 바꿔서, 번역은 가능한 것인가? 통상적으로 인간 언어를 ‘자연어’라 부르지만, 자연스레 주어진 것은 언어 능력일 뿐 언어 그 자체가 아니다. 언어는 축적된 시간과 문명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유산이기에 ‘자연스러운 번역’이란 하나의 미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비언어는 어떻게 하면 수신자에 의해 ‘잘’ 번역될 수 있을까? 손짓, 몸짓, 한숨은? 휘파람, 플루트 연주, 스텔라의 블랙 페인팅(The black paintings), 그리고 옆집 강아지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번역의 가능성은 등가를 넘어서거나 등가의 비가역성을 이해함으로써 나타난다. 즉 발화자가 전하지 않았으나 전달된다고 전제한 것들을 짚어냄으로써 나타나는 가능성, 혹은 발화자가 의식하지 않고 전하는 것들과 수신자가 의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킴으로써 나타나는 가능성이다. 반면 세라피니의 아세믹 글쓰기는 당초에 포기된 번역이라면, 이들이 제시한 방법은 불필요한(혹은 누군가가 그렇게 상정한) 정보를 여지없이 제거하는 차갑고 건조한 미완의 번역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두 가지 사례 중 그 어느 것도 수신자의 의지에 의해 탐구되고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읽고자 할 것인지 마는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여지는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실효성에만 초점을 두고자 한다면 대체 텍스트에서 미학적 가능성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된다. 차별 없는 환대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견고한, 무엇보다도 공들인 시간이 필요하다. 완료되지 않은 번역과 포기된 번역 사이 남겨진 미제에 대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짧게 소개한다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서둘러 결혼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작품은 사실 작가의 생계형 원고로 쓰인 것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한 뒷이야기에서 오는 소네트의 특이점은 결혼을 거부하는 귀족 청년을 회유하기 위한 내용에서 점차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고백으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한편 셰익스피어 그 자신도 소네트의 위대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끝끝내 결혼과 출산을 외면한 청년에게 ‘나의 글쓰기와, 흘러가는 시간과, 길이 남겨질 이야기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할 것이다’와 같은 류의 이야기를 한 걸 보면. 비평적 서술도 (때로는) 위와 유사한 경로를 따라 진행된다. 시작은 회유를 목적으로 했으나 중도부턴 온갖 이유와 부연을 가져다 붙이고, 결론은 고백으로 맺음 하는 것. 실체를 마주한 (혹은 마주했다고 믿는) 대상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구체성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구체성은 과연 영원한 참이 될 수 있을까? 언어를, 번역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무너진 탑 아래 신이 남긴 미료인 것으로 감히 치부한다.
1 “asemic net”, 2023년 3월 28일 접속, 출처.
2 “r/asemic writing”, 2023년 3월 28일 접속, 출처.
3 Roland Barthes, The Rustle of Language, trans. Richard Howard(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 323.
4 Giacomo Leopardi, Zibaldone, eds. Michael Caesar, Franco D'Intino, trans. Kathleen Baldwin, Richard Dixon, David Gibbons, Ann Goldstein, Gerard Slowey, Martin Thom, Pamela Williams(Straus and Giroux, 2013), 700.
5 종종 『보이니치 필사본』, 혹은 『로혼치 사본』 과 비교되기도 한다.
6 인터넷에 떠도는 『Codex Seraphinianous』의 사본, 2023년 3월 11일 접속, 출처.
7 정종수, 「한국어 의미론」 (KOCW, 한양대학교, 2015년 9월), 출처.
8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KWCAG), 「한국형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 2.2」, KWCAG (2022),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