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당신은 요즘 좀 잘한다 싶은 국내의 모 전시장에서 영어가 주 언어인 작품들을 전시한다. 코로나 종식으로 하늘길이 열리면서 수많은 외국인 미술 관계자들이 당신의 전시를 위해 이곳에 방문할 것이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 또한 방문할 것이다. 당신은 토종 한국인이지만 영어를 구사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대충 팔개국어 정도는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는 유능한 큐레이터라고 하자. 원한다면 어떤 텍스트든 사람들이 전시에 온전히 접근할 수 있게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만 하면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두에게 어떤 의미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번역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왜일까? 덕분에 당신의 전시에 방문할 몇몇 관객들은 모든 게 다 영어로 되어 있는 키오스크 앞의 영포자처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던 전시라며, 영어 잘하는 건 유세가 아니라며, 이러다 한국 미술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며, 그야말로 모자란 전시였다며 악평을 쓴다. 그럼에도 당신은 번역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판단이 가능한가?
전시에는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있는 상태로 보고 먹고 이해하기 좋게 놓여 있어야 하는가? 더 엄밀히 따지자면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겹쳐 있다. 첫째로, 전시는 이해를 위한 장소인가?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 공공 기관에서의 전시는 교육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이때의 정보들은 교육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게, 정보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신체적, 비신체적 조건들을 고려하여 조직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지식 생산 구조를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전시들 또한, 앞서 짚은 어떤 경우와는 다른 의미에서 교육의 기능을 수행한다.
근래에는 이러한 교육의 기능이 ‘폐기학습(unlearning)’이라는 용어로 개념화되고 있는 듯하다. 폐기학습이란 무엇인가? 언러닝, 탈학습, 재배움 등의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개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나는 최태윤의 강연에서 소개된 정의에 동의한다. 그는 언러닝을 탈학습이라 지칭하고 이를 “학습의 반대”, 즉 배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학습 밖의 배움”이라고 이야기한다. 제도권 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지식의 학습이란 일차적으로 지식의 습득을 뜻하지만,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지식을 생산하는 구조 자체를 익히는 것이다. 점점 더 과열되어 가는 입시 전쟁은 지혜로운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 지식 생산 구조를 완전히 내재화한 사람을 길러낸다. 이 학습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교양이고 무엇이 정상성인지, 혹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배운다. 그 긴 시간 동안 정규 과정에서 영어를 배운다고 해서 정말로 영어를 잘하게 되는 것인지, 수능 영어를 풀 수 있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폐기학습은 그러므로 학습은 학습이되 기존의 상식과 교양과 정상=해당 지식을 생산하는 물적, 비물질적 구조와 토대를 폐기하는 학습이다(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서 거론한 최태윤의 정의와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는 정돈된 정보들이 다시 뒤섞이고, 명징하게 직조되지 않으며, 기존의 지식 체계 안에서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교사든 학생이든 배우는 자는 분명한 체계에서 벗어나 주어진 데이터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합해 보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고정된 시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사물, 하나의 인물, 하나의 사건, 하나의 장면에 숨겨진 것들이 드러난다. 이렇게 밝혀진 것들은 원래 거기에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원래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폐기학습이라는 용어가 이러한 활동에 적절한 용어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그것이 이 애매모호한 새로운 시점을 위한 역(逆) 고고학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식의 장막, 체계를 드러냄, 구조의 가시화 및 분해, 그리고 재구성. 이 재구성된 것은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후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와서, 전시는 이해를 위한 장소인가?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 전시들은 이해를 위한 장소라기보다 이해하지 않기 위한 장소, 지금까지 이해했던 것을 버리기 위한 장소이다. 나아가 관객의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인식의 체계와 도식을 드러내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내가 몰랐던 것, 잘못 알고 있던 것,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착각이었던 것, 그러니까, 고루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지평을 넓히는 경험, 그것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미적 경험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전시에는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아져야 한다. 전시는 관객 스스로 자신의 인식적 장막을 구성하는 구조를 깨닫는 장소로, 이미 아는 것을 재확인하며 ‘음, 좋아, 나의 지적 수준 정말 좋아’라고 깨닫는 곳이 아니다.
말하기 지겹지만, 모든 전시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전시는 이미 아는 것을 어떻게 더욱 즐겁게 만들어 볼 수 있을지 상상하며 그것으로 유의미하다. 오히려 이것 또한 하나의 탈학습이다. 매일 똑같은 전시만 반복하는 미술관에 누가 방문하고 싶겠는가?
둘째로, 그렇다면 전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를 버리게 하는가? 그전에, 전시 자체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전시를 만들까? 왜 우리에게 전시라는 형식이 필요할까?
전시는 예술 작품을 보여 주기 위한 때이자 곳으로 특히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상징이 고여 들기 쉽다는 천성을 가진다. 이때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상징은 앞서 짚은 것처럼 제도권의 형태를 그 본성에서부터 내재한 것이며 그중 어떤 것들은 이 내재를 물화한 것이기도 하다. 제도권의 형태는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자율기계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깃들 수 있다.
이 글에서 무엇을 현실이라 칭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뭉뚱그려져 있다. 바로 앞 문단에서 나는 ‘제도권의 형태’라는 진짜 글 쓴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이해 못 할 것 같은 말을 쓰기는 했으나, 이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다른 글들에서 설명해 나가고자 애쓸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제도권의 형태이든, 현실이든, 상징들의 점철이든 그것이 명확히 설명될 수 없지만 예감처럼 감각되어 오는 무엇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상견례에서 정상인처럼 보이는 법, 일반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법, 지하철에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법, 성공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들에 대한 본능적 감각, 우선은 이것을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자율기계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깃든 것’이라고 가정해 둔다. 현실과 리얼리티도 의미에서 조금 더 섬세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길의 선배들이 미리 적어 놓은 이야기를 더 깊게 파헤쳐야 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현실이 리얼리티보다 조금은 의미가 좁다. 리얼리티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 현실, 현실성,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할 수 있다. 현실이라고 지칭할 때는 우리의 물질적 일상생활을, 리얼리티라고 할 때는 현실이라는 용어에 얹힌 개념적 측면들까지를 포괄하고자 한다.
어쨌든 말하자면, 우리의 리얼리티와 그것을 재현하는 리얼리즘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리얼리티의 실존 여부와 리얼리즘이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리얼리즘을 통해 그려진 세계가 정말로 현실인지,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빨간 약 섭취 후 만나는 진정한, 리얼리즘 없는 리얼리티 그 자체인 세계라는 의미에서의 현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다. 중요한 것은 리얼리즘 없이는 리얼리티 자체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시는 리얼리티를 대하는 일종의 태도인 리얼리즘을 문제 삼는다. 그러므로 이 공간 안에서는 기존의 상식 체계와 인식의 장막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전시 서문이나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관해 ‘이것은 영화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전시장 안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느냐 아니냐는 불투명하다. 관객은 기존의 체계와 장막을 사용하지 않는 우회로를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새로운 방법의 리얼리즘을 실험하고 미래에 다가올 리얼리티를 창안하는 것. 우리에게 전시가 필요한 형식이라면, 전시의 바로 이 측면 때문에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그 구체적인 형태에 상관없이 추상적이다. 이때 추상은 형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며,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도 아니다. 추상에는 관객이 우회하거나 해킹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의미이다. 엄청나게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관객이 뜯어 버리고 들어갈 여지가 언제나 있다(사실 여기서 나는 또 하나의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기존의 체계와 장막을 사용하지 않는 우회로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비단 전시에만 국한되는 설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래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나 리자〉(c. 1503-1506)다.
모나 리자는 웃는가? 우는가? 그림의 배경은 어디이고, 모나 리자는 어디 있는 것인가? 모나 리자를 왜 그렸을까? 눈썹은 어디 갔을까? 이 모든 정답은 작품을 자세히 보면 도출될 수 있는 것인가? 작품은 주어지는 것일 뿐 합리적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작품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시장에 있는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있는 명시적 지식의 형태로 주어질 필요가 없다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때 ‘그 작품은 이런저런 거에 대해서 말한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품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주제가 다양하고 판단의 근거들이 가득해 단 하나의 답을 추출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그림을 보자.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절규〉(1893-1910)다.
화면 안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 멀리까지 다리가 있고, 화면 하단 가운데 선 남성이 양손을 뺨에 대고 있고, 다리 너머로는 해 질 녘의 풍경이 호수에 비치고 있다. 색상이 ‘절규’라는 작품의 제목에 어울린다. 빨강과 주황과 파랑은 절규나 경고, 우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대표하는 색이니까. 우리가 소위 사실주의나 극사실주의로 분류하는 것들만큼 ‘사실적’이지는 않아도, 우리의 눈은 이러한 화면 내 사건을 구분하고 연결하고 유추해 낼 수 있다. 조금 더 미술사적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뭉크의 작업이 표현주의라는 용어로 범주화되는 것을 바탕으로 다른 표현주의 작품들과 비교하며 이것이 어떻게, 왜 표현주의인지 설명하려 시도할 수 있다. 뭉크의 발작, 일상생활과 트라우마, 죽음 본능, 정신분석학을 떠올릴 수도 있다. 또 다른 한편에는 이런 이미지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것도.
가능한 미래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 미래 중 어느 것도 틀리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떠올리든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이다. 자유라기보다, 누가 그것을 통제하거나 막을 수 있는가? 뭉크의 그림이 표현주의로 범주화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 또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바를 상상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을 재설정하자는 주장이다. 우리가 우리 몸 바깥에 있는 자율 기계가 생산하는 체계를 내재화할 수 있다면, 자율 기계가 생산하는 체계 자체를 바꾸면 된다. 자율 기계가 생산하는 체계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몸 바깥에 있는 자율 기계가 생산하는 체계 자체를 바꾸면 된다. 자율 기계가 생산하는 체계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몸 바깥에 있는 자율 기계가 생산하는 체계 자체를 바꾸면 된다. 자율 기계가…….
그렇다면 자율 기계가 생산하는 체계는 언제, 어떻게 바뀔까? 해킹, 글리치, 바이러스 등 수많은 이론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런 류의 이론들에서 중요한 것은 다르게 보는 방법,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개발해 내는 데에 있다. 이 새롭게 보는 일이 완전히 무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서 있는 세계를 바탕으로 도출된다는 점은 이 주장을 반지성주의 찬양처럼 보일 여지에서 벗어나게 한다. 탈학습은 학습과 메타 학습에 선행하지 않는다.
여러 번 본 예술 작품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할 때,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그러므로 당신 같은 아브락사스에게 영어 실력은 필요하지 않다. 모국어만 할 줄 아는 사람과 바이링구얼이 살아가는 세계는 물론 다를 것이다. 우리의 사회에서 언어 능력은 명확한 스펙이고, 취업 시장에서는 바이링구얼이 유리할 것이며, 유리하다는 말은 그 아래에 우열을 가리는 잣대가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시가 그러한 우열을 무효화할 때, 즉 언어를 언어가 아니라 조형과 형식으로 ‘격하’시킬 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훼손할 때, 전시 안은 반(半) 픽션으로, 현실의 간악함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면서도 현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어떤 시공간이다. 그러므로 전시장 안의 모든 내용은 관객이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꾸며질 필요가 없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가 거기 있다는 것은 이 재구성을 다이나믹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이제 나는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할 것 같다. 그럼 어떤 것이 ‘좋은 전시’가 될 수 있을까.
당신은 번역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당신은 번역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전시가 오만하다 평가하겠지만 누군가는 자신이 읽을 수 없는 텍스트가 거기 있음을 인지하고 전시를 보는 우회로를 만들 것이다. 관객은 당신을 뛰어넘는다. 여기서의 뛰어넘음은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아니다. 관객은 당신을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 볼 것을 구축한다. 관객은 당신이 제시한 환경을 넘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낼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진정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