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로 회화 작품을 관람한다면 그것은 과연 회화 작품 관람인가? 이 질문에는 이미 일종의 모순이 있다. 시각 예술 작품을 음성해설로 경험할 때, 우리는 이것을 시각 예술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언어를 통해서 회화 작품을 경험한다면 그것을 회화 작품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회화 작품을 관람하지 않고, 관람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먼저, 회화의 관람 경험을 시각적인 경험으로 규정하는 담론의 기원을 해체하여, 회화에 내포된 비시각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후, 회화 작품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수련〉 연작(1914-1926)에 대한 두 미술관의 음성해설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회화 작품의 관람 경험에 전제된 시각성과 비장애 중심주의를 드러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회화 작품을 보고 그것을 경험했다고 할 때 어떤 것들을 통해 그것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을 관람할 때, 작품에 사용된 색과 작품에 그려진 형태가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눈은 형태와 색을 파악하여 작품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물을 알아보거나 색과 형태의 조합을 인식할 것이다. 대략적인 시각적 요소를 파악하고 난 뒤 작품에 한 걸음 다가가면 붓 터치, 기법 혹은 재료들이 눈에 띌 것이다. 어떠한 작품은 붓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 사진 같아 보일 수 있고, 어떠한 작품은 뚜렷하게 붓의 결을 남기고 지나갈 수도 있다. 어떠한 작품은 붓과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칼, 손바닥, 막대, 배설물 등을 사용하며 다른 시각적 효과를 선사한다. 다시 몇 걸음 뒤로 떨어질 때 비로소 작품의 구도 및 구성이 드러나는 작품도 있다. 어떠한 작품은 관객을 한 고정된 자리에 세워두고 세상을 눈앞에 펼쳐 보이고, 어떠한 작품은 그러한 시선을 비웃기도 한다. 어떠한 작품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야 작품 속 형태가 인식되기도 한다. 이제 정말로 다음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움직여 보자. 주변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 작품과 사진 찍는 사람들로 옴짝달싹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술 작품이 걸려 있는 공간에 대한 경험은 작품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작품을 제대로 관람하지 못해 관람 경험을 망칠 수도 있다. 이처럼 눈은 작품이 놓여 있는 시공간에서 작품의 형태와 색, 사용된 재료, 기법, 구도 등을 쫓아 예술 작품을 관람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제공하는 시각적 효과는 예술사적 배경 및 사조와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한다. 회화 작품에 대한 관람 경험은 해당 시공간에서 작품이 제공하는 시각적 효과를 포착하고, 그를 기반한 사고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회화 작품을 관람하는 일은 말 그대로 觀(볼 관), 覽(볼 람) – 즉, 보는 행위로 점철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20세기 모더니즘, 더 정확히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이란 어떠한 원리를 그것의 권한 영역 속에서 보다 공고히 지키기 위해 그 원리의 특징적인 방법들로 원리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 보았다.1 그는 칸트가 이성을 통해 이성의 한계와 범주를 정립한 것처럼 예술 또한 그의 매체적 고유성을 통해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는 회화가 그의 매체특정성을 추구하고 그 외의 특성, 즉, 이미 회화 내에 있는 문학, 조각, 음악과 같은 다른 예술 장르와 공유하는 특징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매체 특정성은 무엇일까?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1941-)는 『A Voyage on the North Sea』(New York : Thames & Hudson, 2000)에서 그린버그가 후기에 회화의 매체 특정성을 시각성으로 규정한다고 독해한다.3 크라우스의 해석을 받아들여 그린버그의 회화 작품이 시각성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달리 말하면, 그가 배제해야 한다고 했던 비-시각적인 것들이 회화에 이미 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액자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경계 안쪽에 있지 않은 것을 내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인상주의부터 1960년대 경의 서구 회화사를 모더니즘에 따라 정리하며 설득력을 얻었지만 1960년대 이후부터 그의 이론에 반기를 드는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그의 이론은 한 차례 저물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 예술이란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라는 명제가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것처럼, 사람들이 여전히 회화란 시각적인 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칸트와 그린버그는 마치 유령처럼 미술관에서 음성해설로 회화 작품을 관람하려는 사람들을 훼방 놓는다.
미술관을 여전히 떠도는 유령의 말을 다시 짚어보도록 하자. 그린버그는 여타 예술 장르와 공유하지 않는 회화의 고유성을 추구하고, 다른 예술 장르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회화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서 조각과 문학은 회화의 고유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외부로서, 회화의 비교 대상이었다. 차이를 보일 비교 대상이 없다면 회화의 고유성을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달리 말하면 그린버그가 모더니즘에 입각해 회화를 정의하기 이전에 이러한 특성들이 이미 회화에 혼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이전의 회화는 항상 문학 그리고 조각과 같은 여타 장르를 내포하면서 발달하였다. 모더니즘 이전의 회화는 캔버스에 삼차원 공간을 옮겨 마치 조각처럼 깊이를 가지려고 했고, 문학이 그러하듯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였다. 가령, 재현적인 회화 작품은 어떠한 역사를 기록하거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화는 이미 항상 조각과 문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러티브와 입체성에 기대어 회화 작품을 관람하는 것은, 어쩌면 그린버그가 주장한 시각을 통해서 관람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관람 경험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회화 작품이 시각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관람하지 않고 관람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모네의 〈수련〉에 대한 음성 해설을 살펴보자. 다음은 뉴욕현대미술관의 ⟨수련⟩의 음성 해설이다.
위의 글은 머릿속에 어떠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이미지는 아래와 유사할 것 같다.
그렇다면 다른 그림을 언어로 보도록 하자. 다음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의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이다.
윗글에서 작품의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은 볼드체로 처리한 세 문장에 불과하다. 이 세 문장으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미지를 그릴 수 있을까?
두 작품은 모두 클로드 모네의 수련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의 음성해설이다. 첫 번째 해설은 작품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작품이 해당하는 예술사조의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는 것은 물론 작품의 기법을 언어로 옮기기 위해 시적 요소를 고려했다. 먼저, 해설은 전체적으로 작품이 어떻게 보이는지, 작품에서 확실히 찾아볼 수 있는 어떠한 형태와 색채에 대해 여러 문장에 걸쳐 충실히 서술한다. 작품을 좌측, 중앙, 우측으로 나누어 어떠한 색들이 사용되었고 그러한 색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인상주의는 사물들의 경계를 깔끔한 선으로 표현하지 않고, 두터운 붓터치로 처리하여 정확하게 어디까지가 연꽃이고, 어디부터가 연못인지, 어디까지가 하늘 혹은 주변부가 반사된 것이고, 어디부터가 물인지 그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성근 붓터치 속에서 가늠할 뿐이다. 해설은 이러한 효과를 묘사하고, 작품에 가까이에 있을 때는 작품의 구성이 잘 드러나지 않고, 뒤로 물러설 때 비로소 작품 속 구성이 어렴풋이 드러난다고 소개한다. 이후 ‘암시한다', ‘떠올리게 한다',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 이러한 시각적 경험을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이 해설은 시각적 경험에만 입각하여 쓴 것이 아니라 이 해설이 언어로 작성되었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 작성한 것이다. 가운데 판넬에 대해 작성한 대목에서 ‘fl-’, ‘-ing’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반복되는 소리로 운율을 만들어 내며 입 안에서 혀를 굴리는 소리와 경험은 작품의 거친 붓 터치가 나선형의 모양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큐레이터의 추가적인 해설을 통해 이러한 효과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느낌을 받는지 또한 이야기하며 해설을 마무리한다.
두 번째 해설은 비단 세 문장으로 작품을 묘사한다는 데에서부터 제한적이다. 해설은 단호한 주어와 술어로 작품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그러나 작품이 어떠한 ‘인상'을 주는지, 그러한 시각적인 경험에 대한 해설이 부족하여 객관적인 묘사에도 실패한다. 비장애인의 시각으로 이 작품을 관람하였을 때 해설이 ‘구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명백하게 구름으로 보이지 않는다. 위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허연 물감이 뱅글거리며 뭉쳐져 있고 이는 윤슬 같아 보이기도, 인근에 있는 다른 꽃을 비추는 것 같기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하얀 꽃과 같기도 하다. 결코 어떠한 뚜렷한 명사로 가두기 어려워 보이는 이 시각적 효과를 ‘구름'이라고 간편하게 처리해 버린다. 작품 묘사에서 유일하게 ‘인상주의' 작품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문구는 ‘뒤섞인', ‘하나의 평면처럼 흐릿하게'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의 평면처럼 흐릿하게'라는 표현 또한 문제적이다. 이 문구는 두터운 물감의 사용에 대해서는 일절 말해주지 않는다. 이 설명에 의하면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혹은 케네스 놀랜드(Kenneth Noland, 1924-2010)의 작품과 모네의 작품에 붓 터치 간의 차이가 없다. 두번째 해설은 작품의 객관적인 묘사, 작품이 제공하는 시각적인 효과, 이를 전달하는 언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번역하기 위해서는 출발어에 대한 이해와 도착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시각적 경험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시각적 경험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이해와 이를 전달할 언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러한 음성해설의 차이는 시각 장애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시각장애인용 음성해설과 비시장애인용 음성해설의 QR코드를 따로 마련해 두었지만, 두 스크립트는 거의 차이가 없다. 작품의 크기, 문장의 순서, 백내장에 대한 정보 누락 그리고 다음 작품까지의 거리를 제외하면 두 스크립트는 거의 동일하다. 아래는 비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 스크립트이다.
이에 비해 뉴욕 현대 미술관은 MoMA Highlights: 375 Works fro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2019)의 부분을 아래와 같이 발췌하여 온라인상에서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해설로 활용한다. 아래의 해설에서 작품에 대한 묘사는 두 번째 문단의 두 문장에 불과하고, 그 외의 문장은 작품에 대한 작가의 기획 및 해당 작품의 수집 경로 등을 설명한다.
뉴욕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해설에서 두 기관이 어떻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간주하는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해설을 언어적 서술(verbal description)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언어적 서술이라는 명칭은 특정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는 구분이 없어 누구나 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위의 언어적 서술에서 알 수 있다시피 비장애인이 필요한 정보와 시각장애인이 필요한 정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감각 방식과 필요한 정보에 대한 차이를 기반으로, 시각적인 언어를 어떻게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할 수 있을지 고려하여 스크립트를 작성하였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형태, 색채, 붓 터치, 그리고 인상주의의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여 전달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을 견고히 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시 해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구분이 무색하게도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스크립트는 크게 구분되지 않으며, 둘의 관람 경험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보인다.
시각성에 국한하여 회화 작품을 관람하는 것이 그린버그 이후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 예술 작품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옳은' 예술 작품 관람이란 무엇일까? 미술관에서 어떠한 사람은 오래도록 예술 작품을 쳐다보고, 어떤 사람은 빠르게 지나친다. 어떤 사람은 도대체 아무렇게나 칠한 작품 같아 보이는 것이 왜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는지 당최 알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숱하게 들은 강의에서 드리핑 기법과 액션 페인팅의 의의를 단번에 떠올리고 지나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키가 작아 작품의 아랫부분을 오래도록 쳐다봤고, 어떤 어른은 업무 메일을 확인하며 작품에 힐긋거리기밖에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중 누가 ‘올바르게'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작품을 관람한 시간, 예술에 대한 지식, 정상 규범의 신체 등 그 무엇도 객관적으로 예술 작품을 ‘올바르게' 보는 데에 지표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올바르게’ 보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가 없을 때 사람들은 작품을 제작한 작가에 기대곤 한다. 일각에서는 작품의 근원을 작가로 보고, 작가가 의도한 대로, 작가가 본 것과 같이 예술 작품을 파악하였는지 판가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도주의자들의 주장에도 한계가 있다.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기 전 혹은 하는 도중에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작가의 사후에 발생한다. 그의 사후에 작품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 우리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일기나 편지와 같은 기록물에 기대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란 결국 한 개인의 내면이기 때문에 그것의 진실 여부에 대해 파악할 수 없다. 작가의 내면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결국 ‘올바른' 회화 작품 관람이란 허상에 불가하다.
막다른 길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옳은’ 길이 없다는 것은 어디든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두 개의 갈래목에 놓인 것이 아니라 사방이 뚫린 평지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든 길이 될 수 있는 곳에서 모네의 이야기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위 해설이 잠시 설명해 준 것처럼, 모네는 수련 연작을 제작하고 몇 년 뒤 백내장 수술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백내장을 앓았다. 백내장을 가진 사람들은 빛을 받아들여 대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수정체가 혼탁해져 색을 뿌옇게 보고, 여러 개로 겹쳐 본다. 어쩌면 사람들이 흔히 극찬하는 인상주의와 모네의 작품들은 모네가 백내장이 있기에 정말 그렇게 세상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네가 달리 보아 인상주의가 발달하였다면, 우리는 더욱더 달리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미술관으로 초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더 달리 보고, 더 새롭게 볼 수 있게 하면서 말이다. 보지 않더라도 볼 수 있으니, 관람하지 않더라도 관람할 수 있게.
1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Modern Art and Modernism: A Critical Anthology, ed. Francis Frascina and Charles Harrison (1982).
2 정수경, 「C.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 J. Derrida의 “파에르곤”(parergon)개념을 토대로 하여」, 석사 학위 논문, 서울대학교, 2000, 22-24.
3 Rosalind Krauss, 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 (Thames and Hudsons, 2000), 27-29. 국내 번역본은 다음을 참조. 로잘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현실문화A, 2017).
4 MoMA, 필자 번역, 2023년 4월 23일 접속, 출처.
5 전시실의 바닥에 있는 QR코드를 스캔하면 다음의 사이트로 이동한다. 2023년 4월 23일 접속, 출처.
6 국립현대미술관,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2023년 4월 23일 접속,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