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아마도 끝이 없다

황재민


자기소개가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1. 도시와 장애 억압

지리학자 브렌던 글리슨(Brendan Gleeson, 1964-)은 현대 도시에서 장애 억압이 형성되는 주요한 동학을 지리적 조건으로부터 찾는다. 일반적인 도시 디자인이 가정하는 용이함과 편리함은 ‘이상적인’ 인간, 장애인뿐 아니라 그 누구도 달성할 수 없는 어떤 모범적인 인간형을 위해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장애인에게 특히 차별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도시는 장애인의 이동을 제약하고, 경제 활동을 어렵게 만들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도시 생활에 요구되는 능력을 약화한다. 억압적으로 설계된 도시 디자인은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호명하는 바탕이다. “도시는 장애인에게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된다.1


그러나 국가는 도시를 비롯한 현대적 생활 공간이 장애인에게 하나의 억압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유로 오히려 장애인을 보호하고 고립시킨다. 시설화를 통한 사회 보호는 장애인을 공간적으로 배제하며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탈시설 운동을 통한 장애인의 사회 복귀는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하지만 탈시설화 이후의 삶은 다시 한번 도시의 억압적 디자인에 의해 어려움을 겪는다. 따라서 장애인 운동은 그간 정부 청사나 대중교통 시스템과 같이, 공공 공간을 극적으로 점유하는 방식을 통해 저항 정치를 활성화했다.2 1988년 ‘대중교통권을 원하는 미국 장애인 모임(American Disabled For Accessible Public Transit, ADAPT)’이 고속버스 정류장을 막아선 채 탑승권을 주장한 것, 1990년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ADA)의 통과를 촉구하며 미국 국회의사당 앞 계단을 점거하고 기어오른 것3, 그리고 1997년 호주의 장애 활동가들이 시드니에 위치한 총리 관저를 에워싸고 장애인 관련 예산 삭감에 항의했던 것, 나아가 2021년 12월 3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전국장애인철폐연대의 지하철 점거 시위까지. 장애인의 저항 정치는,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의 말을 빌리면, 공공 영역의 차별적 헤게모니 구성에 반대하며 하위 주체의 대항공론장(subaltern counterpublics)을 만들어 낸다.4 이는 현대 도시의 디자인과 토지 이용이 근본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 억압적 도시의 작은 공간들

이와 같은 이야기로부터 하나의 전제를 생각할 수 있다. 도시 공간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는 것은 장애 억압의 관성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경우 도시 공간의 일부로 자리 잡은 동시대 예술 공간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곳은 장애 억압의 재생산 장치로서 현대적 도시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거기 있을까?


물음에 답하기 전에, 또 다른 물음이 먼저 필요할 것 같다. 동시대 예술을 위한 공간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나는 여기서 그것을 ‘작은 공간’이라고 적당히 말해보고자 한다. 동시대 예술을 위한 공간이란 곧 작은 공간이다. 나는 작은 공간을 방문해 본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계단이다. 작은 공간으로 향하는 좁고 작은 통로들, 그리고 계단들.


모든 미술관/미술 장소들이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하고 접근성 높은 공간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끝없는 계단을 올라야 도달할 수 있는 도시의 어느 작은 공간처럼.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왜 그 공간에는 계단이 있을까? ‘배리어 프리(barrier-free)’, 혹은 유니버설 디자인, 보행 장애를 지닌 누군가가 접근할 수 있는 긴요한 설계가 동반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공간이 작다는 것은 그냥 공간이 작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간이 작다는 것은 험난한 계단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간이 작다는 것은 멋들어진 공간을 독립적으로 건축하여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공간 운영자가 건물주가 아니라 임차인 신분일 확률이 높다는 것, 그러므로 매달 월세와 관리비 등을 지불해야만 겨우 운영 가능하다는 사실을 뜻한다. 한국의 대표적 도시 중 하나인 서울에서 공간을 얻는 일의 지난함과 고통스러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배리어 프리’란, 물론 있어야 할 것이고,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일 테지만, 그렇지만…


어쩌면 책임을 계단에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2층 이상의 모든 건물에 계단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면, 보행권은 자연스럽게 보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행 제정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등편의법) 상, 이동 편의를 보장하는 시행령 일부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장애인 등이 건축물의 1개 층에서 다른 층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그 이용에 편리한 구조로 계단을 설치하거나 장애인용 승강기, 장애인용 에스컬레이터, 휠체어 리프트 또는 경사로를 1대 또는 1곳 이상을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장애인 등이 이용하는 시설이 1층에만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5


해당 법령에 따르면, 공공건물을 기준 삼았을 때에도, 승강기나 휠체어 리프트, 경사로는 필수가 아니며 계단을 설치하는 것으로 책임을 피할 수 있다. 물론 계단을 설치할 때는 “이용에 편리한 구조로” 설치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긴 하다. 그렇지만 아래의 진술을 보면 해당 규정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층 이상 공공건물은 계단과 승강기 중 하나만 설치해도 된다.” 이 규정이 어떻게 장애인 편의시설일까? 지체장애인에게 있어서 계단은 공포의 대상이다. 2층 이상의 건물에 계단을 설치하는 것은 장애인등편의법이 아니더라도 필수적으로 설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여기에 명시할 필요도 없다. 승강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명시해야 한다. (…) 장애인 이용 시설이 1층에만 있는 경우에는 그것마저 제외해도 된다는 규정은 또 무슨 말인가? 장애인이 공공건물에서 근무할 수도 있고, 의무 고용 제도도 있다. 그때도 장애인은 2층 이상을 올라가지 말라는 것인가?”6


공공건물과 관련된 기본적인 법령부터 이 모양인데, 여타 건축물의 경우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도시의 관성적 디자인이 하나의 억압으로 작동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작은 공간이 곧 평등한 공간이 될 수 없는 이유에는 억압적이고 배제적인 도시 디자인의 문제가 선행하며, 동시에 부동산에 의해 결정적으로 굴절되는 동시대 예술의 한계 지점이 선행한다.7 동시대 예술은 건물 앞에서, 계단 앞에서 힘이 없다. 싸울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낼 순 없을 것 같다. 나는 장애 억압적인 도시 내에서 작은 공간이 배치되는 방식과 관련해 좀 더 집요한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은 공간은 동시대 예술이 (일단 동시대 예술이라는 용어를 유지해 본다) 가장 결정적으로 기능하는 장소이며, 예술의 의미와 잠재성이 가장 깊고 분명하게 생산되는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은 큰 공간이 다루지 않는 의제를 보여주며, 보다 새로운 시각이 드러날 가능성을 잠재한 장소다. 그곳은 도시 일반의 억압에 얽매인 종속적 장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적 도시의 차별 구조와 역동적 동학을 만들어 내는 장소다.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일이 될 듯하다. 작은 공간은 이처럼 과중한 책임을 지기 위한 곳이 아니라 그냥 전시를 열고 작업을 보여주기 위한 곳이다. 내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당사자성도 없다. 다만 ‘작은 공간에서 배리어 프리가 어째서 불가능한가?’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이나 편파적이라는 점에서 ‘해방적(emancipatory)’ 의견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해방적’이라는 용어를 장애 활동가이자 이론가인 김도현이 쓴 『장애학의 도전』(2019)에서 배웠다. 그는 이 책에서 장애학의 ‘해방적’ 성격을 강조한다. ‘해방적’ 연구란 주류 과학에 전제된 객관성이나 중립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편파성과 당파성에 근거한 비중립적이고 실천 지향적인 연구를 뜻한다. ‘해방적’ 연구는 객관성과 중립성을 일부러 포기함으로써, 그간 주류 질서에 은폐되어 있던 것을 강하게 열어 보이는 힘이 된다.8 그렇다면 ‘작은 공간에서 배리어 프리가 어째서 불가능한가?’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상상하는 것은, 동시대 예술의 지형에 장애학을 외삽할 경우 어떠한 모순과 난점이 파열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작은 공간은 자본이라는 측면에서는 부동산에 의해, 지리적인 측면에서는 억압적 도시에 의해 예속된다. 도시의 틈새 공간에 위치한 작은 공간은 예속적 구조 내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린다. 최선이라는 기준은 개별 사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느 정도의 험난한 환경을 감수하되 도시 중심부와 가까운 공간을 선택함으로 관객 유인을 높일 수도 있고, 비교적 외곽에 자리 잡되 널찍하고 쾌적한 공간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혹은 그냥 왜인지 마음에 드는 곳을 택할 수도 있다. 다만 작은 공간이 지향하는 최선의 선택에 있어 공통으로 해당할 요소가 있다면, 전시를 선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컨디션’을 가져야 한다는 점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컨디션’이야말로 작은 공간을 결정적으로 코드화한다. 작은 공간은 그냥 공간이 아니라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그것은 또 다른 판단을 이끌어낸다. 여기에는 어떤 ‘시각적 적절함의 추구’, 그리고 ‘시각적 부적절함의 거부’라는 이항 구조가 있다. 이와 같은 이항 구조는 동시대 예술이라는 범주 전체를 분할한다. 동시대 예술의 지형은 중층적이고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려워서, 심지어 ‘동시대 예술’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조차 가끔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해당 범주는 사실 단순한 이항 구조로 간단히 나뉠지 모른다. 특정 공간이 억압적 도시 내에서 계단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계단 끝에 시각적 부적절함과의 투쟁을 통해 시각적 적절함을 구현할 수 있는, 그런 ‘컨디션’을 가진 공간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3. 작은 공간의 이항 구조

위의 이항 구조를 나는 다음의 문장으로부터 빌려 온다.


“하나의 이항 구조가 사회를 가로지릅니다. (…) 완전히 처음은 아니나 정확한 역사적 분절화를 수반했다는 점에서는 처음인 사회에 관한 이항적 개념 규정은 중세 또는 철학적-정치적 이론이 사회체를 거대한 피라미드로 서술한 것과 대립되고, 토머스 홉스가 사회체를 유기체나 인간 신체라는 이 거대한 이미지로 서술한 것과 대립됩니다.”9


이것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강의록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2015)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권력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전쟁이라고 지각하거나 상상하기 시작했는가? 여기서 전개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일종의 계보학,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10이라는 생각에 대한 계보학이다.


“평화는 그 가장 사소한 단위에서조차 암암리에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서로서로 전쟁 상태에 있고, 전선이 사회 전체를 연속적이고 영구적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바로 이 전선이 우리들 각자를 한 진영이나 다른 진영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중립적인 주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적인 것입니다.”11


해당 구절을 진지하게 곱씹기 위해서는 규율, 생명정치, 안전, 통치성의 관점으로 확장되며 주체화를 탐구했던 미셸 푸코의 지적 여정을 맥락 속에서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인 것’이 적과 동지의 결속과 항쟁으로부터 정식화된다고 주장했던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의 고전적 논의와 대조하는 작업 또한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회체를 거대한 피라미드로 서술”하고 “사회체를 유기체나 인간 신체라는 이 거대한 이미지로 서술”했던 기존의 복잡한 기술을 이항구조로 단숨에 분절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든다. 다층적 구조로 표상된 것을 극적으로 단순화시켰을 때, 기존의 시점으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예외적 견해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해당 구절을 내키는 대로 이용해 본다. 사회체를 이항 구조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가 실은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있기 때문, 혹은 사회가 실은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여전히 준비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12


그리고 결정적인 전투, 이 영구적인 전쟁은 물리적 폭력이 아닌 다른 무기를 사용한다.


“홉스의 원초적인 자연상태 속에서 마주치고 대결하며 교착하는 것은 무기도, 주먹도, 야생적이고 광포하게 날뛰는 힘들도 아닙니다. 홉스의 원초적 전쟁에는 전투도, 피도, 사체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표상, 의지표명, 기호, 과장되고 간계로 가득 찬 기만적 표현입니다. 속임수, 정반대로 변장된 의지, 확신으로 위장된 불안감이 있는 것이죠. 이것은 표상들이 교환되는 극장이며, 사람들은 시간적으로 무한정한 관계인 두려움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13


전쟁은 물리적 폭력이 오가는 야만이 아니라 표상의 무대이며, 속임수와 간계, 미세하지만 확실한 힘들이 오가는 무한한 외교와 같은 것이다. 지속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상태’다. 이것이 예의 이항 구조 속에서 힘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설명을 다시 동시대 예술의 구조 속으로 꿰맞춰 본다. 동시대 예술은 이른바 (다른 모든 전환들, 예컨대 전 지구적 전환 혹은 탈식민적 전환과 더불어) ‘텍스트적 전환’ 이후 비판이론을 전용한 끝에 보다 날카로운 진리 탐구의 체계로 거듭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사실 시각적으로 적절한 것과 시각적으로 부적절한 것 사이의 이항 구조, 예쁜 것과 못생긴 것 사이의 무한한 전쟁이 여전한 관성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예쁨과 못생김이라는 것은 정교한 비평적 용어로 간주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전쟁은 “과장되고 간계로 가득 찬 기만적 표현”, ”속임수, 정반대로 변장된 의지, 확신으로 위장된 불안감”을 경유해 애매하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지속된다. 소문, 사적 발화, 비밀 댓글, DM, 비공개 SNS 계정 속의 담화 등, 아주 미세한 방식으로 유통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못생겼다는 판단은 결코 공개적으로 공유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단히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작은 공간은 모종의 압력에 시달린다. 되도록 제대로 된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력, 못생긴 것을 피하고 예쁜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력이다. 못생긴 공간의 못생긴 작업은 그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끔찍한 결과를 반드시 피해야 한다. 이러한 회피기동으로부터 이항구조가 굳건해진다.


작은 공간은 작은 공간이 아니라 다른 어떠한 공간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는데, 작음이라는 조건으로도 충분하며 오히려 작음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음을 작음으로 남아있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존재하며, 이 힘과의 “외교” 속에서, 작은 공간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불필요한 모종의 적절한 ‘컨디션’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이 ‘컨디션’을 갖추고자 할 때, 작은 공간은 작은 공간이 아닌 공간의 속성을 모사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그 과정에서 계단 등으로 대표되는 억압적 공간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곧 장애 억압을 재생산하는 동인이 된다. 동시대 예술 공간은 진리적인 것을 탐구하기 위한 싸움의 장소다. 그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실천의 장소 위로 휠체어 진입로를 가져다 놓으려고 하는 순간, 그곳은 일순간에 파열되어 힘이 빠지고 만다. 이것은 곱씹을 만한 장면이다.


4. 싸움은 아마도 끝이 없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은 저서 『내전』(2017)을 통해 내전(스타시스)의 정치학을 탐구한다. 여기서도 책의 부분 부분을 손 가는 대로 이용해 본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서술이다.


“내전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 (…) 혁명 개념이 점점 더 인기를 끈 데서 찾을 수 있을 텐데 (…) 비록 혁명과 내전이라는 차이가 실제로는 순전히 명목상의 것일 수도 있지만 혁명 개념에 관심이 집중된 것(…)이 내전 개념을 주변화하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14


내전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며 사회체의 작동 방식 자체다. 이처럼 핵심적 원리임에도 그것은 꾸준히 주변화된다. 혁명 때문이다. 혁명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막대한 관심을 필요로 한다. 내전은 혁명에 미치지 못하는 사태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다. 잠재성 사이에서도 구별이 작동한다.


이 구절을 조금 더 일반적인 차원의 것으로 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하든, 뭐라고 해야 할까, 일단 혁명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 혁명적으로 아름다워지거나 혹은 혁명적으로 추악해지거나. 혁명적으로 화이트 큐브에 도달하거나 혹은 혁명적으로 쓰레기장이 되거나. 혁명은 중요한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수행하고, 그를 위한 배경을 짓는 것만큼이나, 완벽할 수 없는 공간에서 완벽할 수 없는 작업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할 수 있다. 혁명적 사유와 혁명적 실천을 위하여 골몰하는 동안 놓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사회를 항구적인 전쟁 상태로 재사유하는 내전 모델은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 투쟁이 없었던 평화로운 옛날이 실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시한다.15 그렇다면 작은 공간이 반드시 획득하고 회복해야만 하는 어떠한 이상적 공간, 중립적이고 투명한 진공 상태의 공간 역시 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말해보고자 한다. 동시대 예술을 위한 작은 공간은 필요할 경우 시각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컨디션을 구성할 수 있다. 휠체어 진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경사로가 어떻게든 설치된 공간은, 모든 것이 잘 정돈된 하얗고 큰 공간과 비교했을 때, 단지 시각적으로 부적절한 엉성한 공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장애 억압을 생산하는 도시 환경과 생산적인 긴장을 이루는 실천적인 공간이다. 작은 공간이 보행권을 보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고, 나아가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째서 불가능한 것인지,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인지, 이유를 고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예쁨/못생김이라는 이항 구조에 또 다른 판단을 부여하는 힘을 만든다. 비판은 작업에 적당한 안전지대를 설치하기 위한 관례적 서술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자리 잡는 방식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싸움은 끝이 없고 수단은 수도 없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갖은 수를 전부 쓸 줄 알아야 한다.




1 브렌던 글리슨, 『장애의 지리학』, 최병두, 임석회, 이영아 옮김(그린비, 2020), 262-265.

2 같은 책, 270-271.

3 인현우, 「덴버에서 ADA까지..美 장애인 이동권 투쟁도 '점거·교통방해' 였다」, 『한국일보』, 2023년 4월 25일 접속, 출처.

4 글리슨, 앞의 글, 271에서 재인용.

5 조봉현, 「휠체어 타고 계단을 올라가라?」, 『소셜포커스』, 2020년 3월 9일에서 재인용, 2023년 4월 25일 접속, 출처.

6 조봉현, 같은 글.

7 고령화 장애의 흔한 양상 중 하나가 보행 장애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장기적으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 한국에서 결과적으로 ‘우리’ 대부분은 작은 공간(들)에 접근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험한 계단에 준거하는 특정 공간, 그리고 공간에 우선하는 불평등의 구조는 접근성 자체의 문제를 넘어, 미술과 그 미래에 대해 돌이켜보게 만든다.

8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오월의봄, 2019), 40-41.

9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난장, 2015), 71.

10 같은 책, 66.

11 같은 책, 71.

12 같은 책, 71.

13 같은 책, 117.

14 조르조 아감벤, 『내전』, 조형준 옮김(새물결, 2017), 30.

15 ‘영구 평화’ 개념의 이상주의적 입장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판은 김항, 「혐오, 음모, 그리고 내전 - 집단 학살의 패러다임과 정치적인 것의 상황」, 『문학과사회』, 136 (2021), 145-14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