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하는 신체, 축소하는 마음

유진영

어제보다 나은 오늘, 혹은 어제만큼 건강한 오늘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 다방면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중에서도 신체는 언제나 제1의 극복의 대상이었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기술적 매개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이처럼 기술 철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인간의 확장, 혹은 대체로서 포스트 휴먼에 관한 상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왔다. 이를테면 안경이나 지팡이부터 조금 더 나아가서는 오를랑(Saint Orlan, 1947-)의 테크노 바디, 매튜 바니(Matthew Barney, 1967-)의 뿔이 솟아난 기묘한 인물,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44-)가 그리는 사이보그들까지. 이때의 포스트 휴먼은 신체의 보조 기구에서 출발해 점차 과장되게 기술의 면모를 강조한 사이보그, 즉 탈-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져 오곤 했다. 극복의 대상으로서 '탈신체'의 가능성을 꿈꿔온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의 논의에서는 기술이 정교해진 만큼 다음 단계로 그리는 인간의 모습 역시 보다 섬세하고 교묘해진 양상을 보인다. 인간의 일부를 완전히 대체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기술적 연쇄가 이끄는 다른 세계로의 인식적, 물리적 이행처럼 말이다. 이처럼 탈신체라는 말은 욕망의 연장으로서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인간 존재로의 확장, 혹은 도구적 의미로서의 신체에 관한 관념으로부터 탈피를 통한 사물화의 경향으로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이때의 신체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재 방식의 전환을 가리키고 있다.


근 몇 년 사이 이루어진 최근의 논의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것을 끌어안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는 그들이 ‘되기’를 시도한다. 이는 해러웨이적 의미에서 다름을 공통점으로 삼아 나아가려는 시도이자, 나와 다른 존재들과 공진화(co-evolution)하며 서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1 그러나 사실 여전히 건강한 몸, 이른바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건강하지 못한 신체를 갖고 있는 존재들은 가려져 있거나, 쉽게 잊혀지곤 한다.


‘배리어 프리(barrier-free)’란 장애인뿐 아니라 노약자나 임산부 등 사회적 약자층이 일상 생활에서 겪게 되는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허물기 위한 제도적, 사회적 실천을 의미한다.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배리어 프리의 실천은 젠더, 노동권, 장애 등 소수자에 대한 불평등한 인식이 재고되는 과정에서 장애인의 문화 향유권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연극계를 중심으로 2010년대 중반부터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많은 권리들을 조금은 유난스럽고, 특별한 방식들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도전들과 부족한 배려들이 있다. 미술에서는 어떤 실천이 있었을까? 각 국공립 미술관에서 최근 전시 마다 실천 중인 쉬운 해설, 음성 안내나 점자 등을 활용한 촉각적 안내판 등 시각이라는 감각의 제약을 극복하고, 현대미술이 갖는 심리적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 등이 떠오른다. 이러한 시도들은 여전히 정량적인 측면에서 매우 부족한 실정이지만, 가끔은 그마저도 다소 관습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아무런 당사자성이 없는 내가 배리어 프리에 대해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일 보 후퇴해 그보다는 조금 얕게 어떤 능력을 중심에 두고 정상과 비정상으로 인간의 가치를 매겨 온 관습적 규범과 미술/전시를 겹쳐본 뒤 시각예술과 배리어 프리의 적절한 동행 방법을 고민해보려 한다.


신체와 예술의 오랜 관계를 들여다보자. 여전히 신체는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예술 작품을 의미하는 마지막 증언과도 같은 대접을 받는다. 노장의 작가가 수십여 년의 세월을 바쳐 일궈온 수행성의 집약적 결정체, 주체로서 인간의 현존을 드러내는 가시적 결과물, 극한의 상황에 내 몸을 내놓음으로써 나를 이루는 여러 정체성을 담은 물리적 그릇을 확인하는 예술 작품 등 신체와 예술의 관계는 유구하다. 몸의 움직임에 맞춰 역동적으로 흩날리는 선, 켜켜이 쌓인 물감의 층, 손길이 느껴지는 붓의 흔적까지, 물론 한 명의 관객으로서 그것들이 주는 감동을 부인하는 바는 아니다. 현실이 가상의 영역으로 이주 중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오늘날의 환경에서도 신체의 현전을 지각하게 하는 작품들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신체의 비교 대상으로 흔히 여겨지는 인간 정신이 갖는 지위가 약해졌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먹히고 다시 대체되는 바나나를 보며 ‘이것이 현대미술’이라 외치게 되는 일종의 밈(meme)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개념미술 이래 예술가의 선택이 곧 작품이 된다는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어쩌면 현전하는 신체보다 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대한 산업시대의 부산물이든, 매끄러운 디지털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특정 주체의 선택에 의해 예술 작품으로서 지위를 얻게 되는 예술의 구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 나은 신체를 얻으려는 일련의 노력 역시 어쩌면 우리의 정신은 이미 충분히 훌륭하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정신의 영역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하려니 어색함이 느껴지지만, 어쨌든 신체와 정신의 지위를 막론하고 언제나 공통되게 논의가 소급되는 곳은 예술가라는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특권적인 지위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전통적 의미의 주체적 인간으로서, 각자의 인간됨의 능력에 경중을 매겨 누군가는 예술가가 되었고, 예술 작품은 예술작품이 되었으며, 전시는 전시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적인 인간은 전시에서의 배리어 프리에 대한 논의에서도 언제나 걸림돌이 되어 왔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가치를 (그 기준이 분명치 않은) 능력에 둠으로써 이것을 수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 능력의 수행 여부로 누군가를 판단해왔다. 다소 과도한 논리적 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간의 배리어 프리에 관한 논의를 돌이켜본다면, 이러한 능력주의에 대한 단선적 고안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각, 인지 능력으로서 정신의 영역을 포함한) 신체적 결함을 해결해 이른바 정상의 범주로 모든 대상을 포섭하려는 방책 같은 것이다.


전시장을 가기 위한 몇 가지 수행 단계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보고 싶은 전시에 대한 정보와 전시장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때 필요한 감각은 해당 전시를 볼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얼마간의 이해 능력과 인지 능력이다. 두 번째, 몸을 움직여 전시장을 향한다. 갈 때까지의 물리적 여정이 녹록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모든 일은 전시장에 가야지 시작될 수 있다. 세 번째, 전시장에 들어서서 적절한 안내를 따라 전시를 감상한다. 최적의 동선을 따르기 위해 전시장에 배치된 기구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권장한다. 네 번째, 작품을 보고 전시를 소화한다. 무엇을 거쳤든 간에 일단 작품이 내 감각 기관 내로 들어온 순간 작품의 감상은 내 몫이 된다. 작품을 위한 온전한, 혹은 정해진 감상법은 없겠지만 어쨌든 작품을 소화해내는 건 나의 모든 감각과 인지 능력을 총동원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위의 전시 관람 과정은 사실 매 단계마다 많은 존재들을 탈락시킨다. 그리고 이때 가능한 모든 보조수단을 동원하더라도 결여된 신체의 능력을 대신하겠다는 방법론으로 접근할 시 한 명의 탈락도 없이 모두를 완주시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장애에 관련한 현재의 분류를 비트는 보다 탈중심적 시선이 필요하다.


뒤따라오는 고민은 전시 구조의 선후 관계이다. 작품과 전시라는 이중의 결과물에서 배리어 프리의 논의는 대체로 전시장과 전시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요소들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여 왔다. 작품 자체에 관한 것이기 보다는 이를 감상하기 위한 시설적 접근에 초점이 맞춰 있던 것이다. 물론 배리어 프리에 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연극의 경우도 시설 차원의 접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하나의 극장 안에 하나의 작품을 선보이는 일대일의 구조를 갖고 있는 연극은 작품을 극장에 올리는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을 만드는 일과 비교적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므로 작품의 완성과 장치의 고안이 동반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반면, 그 주제와 종류에 따라 여러 명의 작가와 여러 개의 작품을 하나의 전시장 안에 불러들이는 미술 전시의 경우에는 사뭇 다른 상황 일 수밖에 없다.


전시라는 형식 자체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의 제작 단계에서부터 배리어 프리적 측면을 고려하는 일과 전시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시설적인 측면으로 고려되는 배리어 프리는 어떻게 동행할 수 있을까. 혹은 전시의 주제로 장애나 접근성의 문제를 가져오는 일과 이와 상관없이 모든 전시에 접근성을 당연한 요소로 고려하는 것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처럼 문제는 무수히 많지만 작업이라는 게 으레 그런 것이듯 하나의 방법론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쾌한 해결 방법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배리어 프리 예술을 전시하는것과 접근성을 낮추는 전시를 만드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동반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점을 조금 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때 배리어 프리 예술이라는 명칭보다는 장애인의 리터러시(literacy)를 드러내는 장애인 예술 운동이라고 칭하는 것이 조금 더 섬세하게 들어맞을 것 같다.2


작품과 전시의 신체적, 인지적 수용의 단계를 한 층 더 다차원적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장애를 단순히 극복의 대상으로 환원하기보다는 작품과 관객을 중심으로 장애 그 자체를 드러내는 일에 더 주목해야 한다. 무언가를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어떤 위계와 균열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배리어 프리의 고안은 신체의 연장, 혹은 보완으로서 접근성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체와 지각 체계, 그 자체로 전시장과 작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해나 상상을 돕기 위해 단순하지만 분명한, 그리고 아주 귀여운 사례 한 가지를 들어본다. 장애-기술 연구자 강미량이 HCI 학회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 보호자가 반려견과 산책할 때 필요한 도구를 개발하기 위한 워크숍에 참여한 경험을 소개한 글이다.3 워크숍에서는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보호자가 산책 중 반려견의 배변을 치워야 할 때 사용할 도구와 산책 전후 반려견을 들었다 놨다 할 때에 필요한 도구를 개발하려 한다. 이때 참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고려한 사항은 보호자와 반려견의 물리적 부족함을 대체하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간의 관계 안에서 각자 수행할 수 있는 강점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보호자가 아닌 반려견이 직접 움직여 휠체어를 탄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고안한 접이식 경사로나 배변 상태에 따라 모듈 변경이 가능한 집게 등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은 상당히 단순하지만 사용자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고안된 것들이었다. 이는 강미량이 언급했듯이 신체를 극복하거나 해결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 가능했던 것으로, 있는 그대로 존재와 존재를 잇고 그 나름의 관계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단순한 사례에 비해 나 역시도 앞서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장애와 비장애, 신체와 정신 같은 이분법적 구분을 통해서는 배리어 프리가 도달하게 될 한계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곱씹어 본다. 예술이 여러 현실적인 차원을 고민하는 장소인 동시에 보다 근원적으로는 상상의 차원을 여는 장소인 것처럼 배리어 프리는 경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존재들이 단순히 전시장에 물리적으로 입성하는 것을 넘어서서 전시와 관계 맺는 방법을 질문하고 고민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염두에 두어야 할 유일한 것은 능력이나 가치에 경중을 두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전히 피상적이고 어찌 보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조금 더 명료하고 실질적인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싶지만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도무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늘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요즘에서야 내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볼 수 있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조금 더 크게 말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아무튼 서로가 보인다는 것, 여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




1 홍성욱, 「포스트휴먼 테크놀로지」, 『인문학연구』, vol. 35 (2021), 6.

2 허혜정, 「장애인 예술운동과 ‘몸’의 리터러시」, 『한국문예창작』, vol. 21 (2022), 151-178.

3 강미량, 「그와 휠체어와 강아지」, 『웹진 X』, 2023년 4월 30일 접속,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