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요나스 메카스의 특별전이 열렸다. 그곳에서 보게 된 <서신교환 4>는 두 감독이 촬영한 9통의 영상 편지로 구성된 영화이다. 영화는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캠코더로 촬영되었다.
지금까지도 머리에 남은 장면은 개미가 지네를 옮기는 씬이다. 개미는 벽돌위에서 자기 몸의 4배가 넘는 지네를 ‘수직으로’ 끌어올리길 시도한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이 행위를 홀로, 그리고 또 다른 한 개미와 함께하는 과정은 아름답다. 개미는 수차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다시 오른다. 관객은 곤충의 긴 시간을 경험한다. 다음 장면에는 고층빌딩과 그 안에서 일하는 회사원이 보인다. 건물은 원거리에서 줌인으로 당겨 촬영된다. 화면은 빠르게 건물 표면을 움직인다. 감독은 건물 벽돌과 창문, 그리고 그 너머 일하는 회사원을 차례대로 미끄러지듯 포착한다.
곤충의 몸과 일하는 사람의 몸을 함께 두며, 감독은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을까? 그는 특정한 촬영 기법과 함께 보는 사람이 장면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동시에 거리를 두고 포착하고 있는 촬영자의 위치를 감각하게 만든다. 감독(그리고 관객)은 지네를 옮기고 있지 않다. 우리가 화면을 통해 보고 있는 건물의 벽돌을 옮기지 않았다. 우리는 지네와 돌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감독은 이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사유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게린과 메카스는 자신의 삶 가운데에 카메라를 두었고, 카메라의 눈은 그들의 몸에 붙었다. 그럼에도 그 눈은 포착한 대상에 붙을 수 없다. 눈이 벽돌에 붙어버린다면 망막은 찌그러지고, 멀어버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거리는 화면에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영화에서 일하는 개미와 인간을 시각적으로 연결해준 것은 카메라가 촬영한 ‘벽돌의 표면’이다. 바로 이 ‘벽돌’을 적극적인 조각의 재료로 다룬 작업이 있다. 칼 안드레의 <등가Ⅷ>는 120개의 회색 벽돌을 두 단으로 쌓은 작업이다. 벽돌은 건물과 도로를 구성하는 산업적인 재료이고, 안드레의 작업을 통해 평범한 노동의 결과물과 예술 작품 사이에 불안정하게 놓인다. (실제로 안드레의 할아버지는 벽돌공이었으며, 아버지와 자신도 각각 조선소와 철도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의 정체성은 노동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흔들린다)
이러한 안드레의 작업을 움직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흥미롭다. 작업에서 사용된 움직임은 벽돌을 들어 올리고,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움직임이며, 산업화된 노동자의 가장 기초적인 움직임이기도 하다. 스터즈 터클(Studs Terkel, 1912-2008)의 저서 <일>(1974)에서 제철 공장 노동자인 마이크 르페브르는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움직임을 묘사한다. “나 같은 사람은 퇴화하는 종자예요. 노동자 말이죠. 근육으로만 먹고사는…들어 올리고, 내려놓고, 다시 들어 올리고 또 내려놓고…”1 이것은 사라진 움직임이다. 산업화된 제품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움직임과 그 흔적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이름이 그것을 만든 수많은 노동자의 이름을 지우듯, 노동자의 구체성을 지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노동의 비가시화를 영상 이미지로 빌딩을 바라볼 때 사라지는 촉각성의 비가시화 과정과 겹쳐볼 수 있다. 산업화된 재료로 만들어진 빌딩은 ‘노동자’의 신체적 흔적을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이름을 지운다. 그리고 이를 카메라와 영상으로 매개하여 바라보는 시점은 이중화된 의미에서 무게와 중력, 체력과 같은 ‘노동’에 수반되는 촉각성을 보이지 않게 한다. (동시에 특수한 영상적 시점을 얻는다)2
안드레의 120개의 벽돌이 조각이 될 때, 관객은 사라진 움직임과 촉각성을 가상적으로 복귀시킬 가능성을 만난다. 이는 조각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조각을 앞에 둔 관객에게 달린 것이기도 하다. 벽돌을 옮기고 쌓는 움직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관객은 그 단순한 형상을 지지대 삼아 그것을 ‘재생’할 가능성을 만난다. 어떤 움직임이 과거에 분명히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이는 불완전한 흔적으로만 조각에 담겨 있다. 만약 관객이 이 흔적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그는 정확하지 않고 충분하지도 않은 미약한 이미지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물질을 만지는 ‘촉각적’인 실천이 아니며, 심지어 실체가 없는 가상적인 행위이다. 사라진 움직임과 그 촉각성을 재생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특정한 거리를 가진 2차원적 ‘영상 재생’의 마술적 감각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과해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조각은 불완전하고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과거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불완전함은 관객에게 짧은 과거를 추적하는 행위를 유발할 수 있는 수행적인(performative)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기록을 안전하게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클라우드를 평소에는 이유 없이 열어보지 않는다. 우리는 망가진, 혹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순간에 그것을 찾는다. 턱없이 불완전한 클라우드로서 조각을 마주하기. 하나의 시각적 훈련으로 조각의 흔적을 재생(Play)하기. 주물의 음각을 통해 양각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 혹은 형상을 통해 시간의 음각을 재생하는 것. 이러한 과정들은 더 이상 눈앞에서 볼 수 없는 대상을 떠올리는 기억의 행위와 닮아 있다. 사실상 안드레의 120개의 벽돌이 조각이 되는 순간은, 이러한 관객의 사후적 행위를 통해, 그리고 그 대상이 관객(들)의 중앙에 놓일 때에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조각은 고정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 한시적으로 생성되는 무엇이다.
안드레에겐 노동자와 조각가의 차이를 오가며 질문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다.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나에겐 노동자와 조각가의 한가지 공통점, 즉 물질을 직접 만져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사방에 펼쳐진 ‘눈으로 보는 행위’로부터 소외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미니멀한 조각과 그 행위들은, 역설적으로 그 단순성 때문에 사라진 움직임을 (불완전하게) 떠올리게 할 가능성을 가진다. 나에게 최고은 작가는 초기 «Torso» (김종영 미술관, 2016)에서부터 «Vivid Cuts» (P21, 2022)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단순한 조각의 움직임을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냉장고를 잘라 입방체를 만들거나, 동 파이프관을 잘라 속을 드러낸다. 이상한 점은 유기체적인 촉각성이 제거된 산업제품을 조각적으로 다루면서 의외의 차원에서 ‘인간적 형상’이 도드라진다는 것이다.3 거울, 냉장고와 같이 우리 주변에 있는 가구와 가전제품은 인간의 신체에 맞게 제작되어 있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인간의 몸과 닮아 있다. 작가는 건조하며 동시에 잔혹한 움직임으로 그들을 잘라내어 사물의 가려진 촉성과 내부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조각가들의 행위. 손톱으로 뜯어내고, 칼로 긁어내고, 구멍을 뚫고, 모양을 갈아내고, 톱으로 자르는. 이 같은 행위는 조각의 표면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이는 감추며-드러나는데, 최고은 작가의 경우가 그렇다. 대상을 산업적인 방식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도록 자르며 그것이 손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매끈한 마감을 가질 때, 그 매끈한 사물에서 관객이 어떤 불안함과 불길함을 느낄 때, 또 그것이 사라진 촉각성을 보충하고자 하는 관객의 어떤 욕망과 만날 때, 과거의 행위는 불완전하게 재생되며 어쩌면 그것이 사물이 조각이 되는 하나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미니멀리즘 조각을 설명하는 가장 알려진 말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의 “당신 눈에 보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What you see is what you see.)”일 것이다. 당시 이러한 태도는 인간이 바라보는 관점, 해석, 의미로부터 벗어나 눈앞에 있는 그대로로써서 물질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하지만 앞서 가장 단순해 보이는 두 단의 벽돌에서 보았듯, 눈앞에 물질은 그 자체로는 나타나지 않는(심지어 가려진) 무언가를 포함한다. 물질은 물질이 놓이기까지 과거의 사건에 기대어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보여지는 현재의 조건, 미래의 과정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존한다.
이미지 연구자인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1953-)은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이 같은 비가시적인 차원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포르트-다(for-da) 놀이’와 함께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어린 손자를 놀아주면서 이 놀이를 발견했다. 여기서 아이는 ‘포!’라고 외치며 실공을 멀리 던지고, 그것을 다시 끌어당기면서 ‘다!’라고 외친다. ([for]는 “없다.”라는 뜻이고, [da]는 “여기 있다.”라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이 놀이를 아이가 어떤 대상이 사라진 고통스러운 경험을 반복하고, 또 극복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디디 위베르만은 추상적 구를 가지고 노는 이러한 놀이를, 미니멀리즘 조각을 바라보는 관객의 경험과 접붙인다. 있는 그대로의 오브제로서 미니멀리즘 조각이 이제는, 관객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불길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가지고 노는 과정에 중심에 놓인 대상으로 변모한다.
사라진 대상들, 혹은 우리 눈앞에 드러날 수 없는 대상들은 이처럼 즉물적인 것을 벗어난 가상적인 차원에서 출몰한다. 이는 조각을 바라보는 공간과 일회적인 매체인 퍼포먼스를 기억하는 공간에 양쪽 모두에 겹쳐 있다. 또한 이는 우리가 수없이 보고 있는 영상물들이 자국을 남기며 저장된 공간이기도 하다. 나에게 이 같은 기억의 대상을 둘러싼 조건과 기억의 놀이는 중요하다. 덫 없이 사라지는 매체인 퍼포먼스는 기억하기의 행위를 불가능에 가깝게 만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전혀 다른 종류의 기념비(Memorial 기억공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기억하기의 욕구는 기억 능력 자체가 크게 상실되었다는 감각과, 선후(맥락)와 긴 시간성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점차 상실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한다.
1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 『미술노동자』, 신현진 옮김(열화당, 2009), 115.
2사라지는 ‘노동자’와 ‘노동’의 촉각성을 앤디 워홀(Andy Warhol)이 탐구한 소재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마릴린 몬로(노마 진)’와 함께 놓고 보면 흥미롭다. 그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 이 둘은 모두 ‘스타’ 이미지이다. 이경우 건물과 인간의 몸 모두에서 어떤 종류의 이름과 신체성, 그리고 정체성들이 가시영역에서 사라진다.
3 통상적으로 미니멀리즘 조각은 이러한 인간형태를 제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설명된다. 여기서 가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인간적 형태를 담고 있다. 하나는 가구가 인간의 신체와 비슷한 크기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가구가 인간의 신체와 접촉하며, 연동하는 사물이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는 가구와 인간의 신체가 이미지적으로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산업제품으로서 유기체적 형상(손자국)이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가구는 인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관이 인간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이러한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나타나는 인간형태의 유사성과 비유사성을 가시적인 영역을 벗어난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다룬 바 있다. 그는 가시성(눈에 보여지는 것)과 시각성(비가시적 작동을 포괄한 차원)을 구분하며 이 같은 논지를 전개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우리가 보는 것, 우리를 응시하는 것』, 이나라 옮김(출간 예정).
4 고양이는 멈춰 있는 물체를 잘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멀리 있는 대상은 보이지 않고, 가까이 있는 대상의 경우에도 흐릿한 초점으로만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계속해서 멈춰 있는 대상은 고양이에게 큰 흥미를 끌지 못할지도 모른다. 반면 고양이는 뛰어난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고양이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선 물체를 숨겼다 드러내거나, 가까이 그리고 멀리 이동시키고, 속도를 천천히 또는 빠르게 전환하며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