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로부터: 길 잃은 정령의 둔갑술

객원 필진: 박정서


박정서 예술학을 공부하고 전시 기획, 글쓰기 등 시각 예술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를 감지해 글로 나열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미지1) <빌렌도르프의 베누스> Ⓒ NHM 비엔나 / Alice Schumacher

여덟 살이 되었을 무렵, 주술카페가 인터넷상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나는 그곳에서 [소원을 이루어주는 정령 만드는 법]이라는 글을 읽고 정체불명의 수호신을 빚어서 모신 적이 있다. 엄지손톱만 한 작은 흰색 덩어리였는데 위로 뾰족이 솟은 작은 두 귀와 짧은 팔다리가 달린 동물 형상의 조각이었다. 매일 밤 달이 뜨면 창가에 서서 그 정령에게 달빛을 쐬어주고, 주문을 외운 후 며칠간 물에 담가 두었다. 그리고 그 정령에게 강아지를 선물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당시 내 친구였던 J에게 이 조각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어 간절히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준다는 순수한 믿음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는 “그냥 지점토잖아.”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이후 ‘절대 열어보지 마시오!’라고 서툴게 적어 놓은 작은 클립 상자에 보관해두었는데 이사하면서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 정령은 오직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조각’이라는 타이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이 많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무엇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그저 추정할 뿐이지만 인류가 그동안 일구어 온 ‘문화’를 연구하기에 값어치 있는 주제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것 중에는 〈탄탄의 베누스(Venus of Tan-Tan)〉, 〈베레카트 람의 베누스(Venus of Berekhat Ram)〉 등이 있는데 사람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거의 식별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저 자연 풍화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돌’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글은, 최초는 아니지만 인류가 만든 아주 초기의 조각으로 잘 알려진 것 중(적어도 논쟁이 적고, 형상이 분명한) 〈빌렌도르프의 베누스(Venus of Willendorf)〉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빌렌도르프의 베누스〉는 1909년 오스트리아 다뉴브강 강가에서 발견된 여러 점의 유물 중 하나로, 기원 전 25000년부터 20000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조각상이 어떠한 계기로 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여성의 몸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풍만한 가슴과 복부, 그리고 둔부는 비현실적으로 과장되어 있고, 얼굴을 비롯한 나머지 신체는 단순화되거나 생략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미루어보아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조각상을 만든 사람이 일반적인 여성을 묘사하려 했다기보다, “풍요를 기원하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주술적 도구”를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빌렌도르프의 베누스〉는 그 당시 사람들이 숭배했던 정령을 빚어낸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조각의 기원은 이렇듯 ‘주술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조각은 여전히 그 기원을 잃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선 조각을 ‘형식’과 ‘관념’, 두 가지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조각은 ‘재료를 깎거나 새겨 입체적인 형상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오랜 기간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모더니즘 시기를 지나 동시대에 가까워지면서 예술은 전통을 벗어난 새로움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각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제작 기술의 다양화, 미디어 장치와 인쇄 기술의 발전, 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확장 등이 있다. 게다가 사진,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등 타 예술 장르와 융합되는 사례도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재료나 형식, 형태에 있어 반드시 전통을 따라야만 조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한 연유에서 오늘날의 조각은 다양한 매체가 혼합된 복합적인 구성으로, 서로 다른 재료, 사물, 물성이 자유롭게 조합된 혼성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미지2) 《더 프리퀄(The Prequel)》에서 선보인 권오상의 조각 퍼포먼스 〈Reclining Figure〉(2022). Ⓒ 민티스트클럽 / 사진: 김경태

앞서 설명한 동시대 조각의 특성이 가장 잘 투영된 사례로 조각가 권오상의 작품이 있다. 우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데오도란트 타입(Deodorant Type)〉 연작은 조각의 속 재료인 아이소핑크를 깎아 형태를 만드는 전통 조각의 기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위에 사진을 인화해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조각의 차원을 중첩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을 3D 그래픽으로 제작해 디지털화 하기도 하고, 퍼포먼스로 구성하기도 한다. 최근 민티스트클럽(MINTIST CLUB)이 주최한 《더 프리퀄(The Prequel)》에서는 현대무용수가 콜라주 조각의 형태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조각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권오상은 ‘전통 조각’, 그리고 ‘콜라주 조각’에서 나아가 무용수의 몸이 조각을 닮아가는 ‘신체 조각’을 실시간으로 공연하고, 이를 촬영해 ‘NFT(대체불가토큰)’로 발행하기도 하며 기존의 조각이 가진 형식적 기원의 틀을 장르 융합을 통해 확장해 나가고 있다.


위와 같이 동시대 조각가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3차원의 현실 공간에 물리적으로 부피를 차지하게 하는 방식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조각을 존재하게 하는 법을 모색하며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① 3D 그래픽 툴을 사용해 만든 디지털 조각. ② 실물 조각을 3D 그래픽으로 재현한 조각. ③ 디지털 조각을 실물로 인쇄한 프린팅 조각. ④ 소리로 비가시적인 입체감을 표현한 사운드 조각. ⑤ 인간의 몸이 일종의 조각 역할을 수행하는 신체 조각. ⑥ 각종 대중매체와 결합한 미디어 조각. ⑦ 조각을 상상해 적은 텍스트 조각 등. 무엇이든 조각의 범주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들로 미루어 보아 동시대 조각은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초기 조각의 기원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기원을 잃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식이 아닌 관념에 있다. 관념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조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술적이다.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어떠한 종교적 의도도 없으며, 그저 메타포일 뿐이라는 것을 미리 알린다.) 조각은 현실에서 마주한 어떤 상황을 단순히 재현한 것이라기보다, 그 너머의 초월적인 것을 상상해 입체적으로 구현한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조각이 단순히 대상을 재현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돌’이라고 부르지는 않듯이, 조각에는 조각가의 정신이 깃들어 있거나, 혹은 조각가가 담아내고자 하는 특정한 정신이 소환되어 있다. 여기에서 나아가 이를 접한 관람자에게도 동일한 정신과 신념을 공유하는 것까지가 조각가의 의도일 것이다. 때문에 조각이 오늘날에도 ‘정령을 부르는 주술적 행위’에 가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설명한 동시대 조각의 행보 속에서 주술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질과 비물질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정령은 어떠한 상태를 유지할까? 이에 대한 답을 맨눈으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상상해볼 수는 있다. 우선 그들은 조각가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점으로 피어올라 훗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역할, 방향, 형상 등에 대한 조각가의 복합적인 구상을 통해 그 존재를 구체화 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부터 조각에는 정령이 이식되고,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영속적으로 깃들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조각가의 정신 뿐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신념과 염원이 동시에 담긴다. 이후 조각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따라 그 안에 깃든 정령은 모습을 달리하며 둔갑술을 펼치기 시작한다.


동시대 조각 속 정령은 앞서 설명한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각가를 수호하는, 혹은 대변하는 조각의 정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변신을 거듭하며 그 안에 깃든 신념과 염원을 전파하고 다닐 것이다. 여러 제작 과정에서 그들은 데이터화되거나, 감각이 되거나, 영혼이 되거나, 관념이 되기를 반복하면서도 우리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끄는 신묘한 술법을 부릴 테니 말이다. 혹여 그것이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내몰리는 순간이 올지라도 그 안에 깃든 정령은 또 다른 둔갑술을 펼치며 멀지 않은 곳에 머물다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리라 믿는다. 내가 여덟 살 때 잃어버렸던 조각이 이후 귀여운 말티즈를 선물해주었던 것처럼.


글을 마치며 미래의 조각과 정령의 운명에 대해 상상해보려 한다. 오늘날에도 그렇듯 미래의 조각은 더욱 예측 불가능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어제 본 〈미래의 이것(The Future Of)〉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학자들이 말하길, 미래에는 현재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도로 정밀한 비현실적인 현실을, 허구적인 진실을 빚어내는 기술 융합형 문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한다. 만일 조각에도 이러한 것들이 시도된다면, 미래의 조각 정령들은 다차원 둔갑술이나 미러링 분신술, 영혼 번역술, 더듬이(antenna) 독심술, 버블 환술과 같은 것을 익혀야 할 것이다(…) 끝으로 조각은, 새기면 솟아나고, 부수면 남아있고, 볼록하고 평평한, 더하고 덜어지는, 음(陰)과 양(陰), 그늘과 볕의 공존이다. 만물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가 한 곳에 담겨 있으니, 조각은 가장 근원적인 우주의 진리가 새겨진 영혼의 클라우드로서 도래할 미래에도 주술적 기원을 이어 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