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n차원 세계로

김여명

그만 좀 죽여

이 글은 회화와 조각을 차원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재고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통해 수차례 무자비하게 살해되며 무감각의 대상이 되어 버린 가련한 회화와 조각의 평행 우주에서의 삶을 상상한다. 이 상상은 기하학을 창시한 유클리드(Euclid, 기원전 330?~275?)로부터 시작한다. 유클리드는 『원론』 1권에서 23개의 정의를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였다.


1.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2. 선은 폭 없이 길이만 있는 것이다. 3. 선의 양 끝은 점들이다. 4. 직선이란 그 위의 점에 대해 한결같이 늘어선 선이다. 5. 면은 길이와 폭만 있는 것이다. 6. 면의 끝은 선들이다.


『원론』 11권에서는 입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역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였다.


1. 입체란 길이, 폭, 두께(깊이)를 가진 도형이다. 2. 입체의 끝은 면이다.


정리하자면 점은 단순히 위치이며, 선은 폭 없는 길이이고, 면이란 길이와 폭을 가진 것이며, 입체는 길이와 폭과 높이를 가진 것이다. 점, 선, 면, 입체는 각각 0차원, 1차원, 2차원, 3차원 도형이다. 이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미지1) n차원 도형의 모습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정리 또한 차원에 간단히 접근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는 n차원에서 n을 ‘한 점의 위치를 정하는 데 필요한 수치의 개수’라고 정의했다. 예컨대 1차원에서 폭이 없는 길이인 선 위의 한 점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는 기준점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즉 길이를 나타내는 좌표 하나만이 필요하고, 이는 (x)로 표기할 수 있다. 2차원에서 한 점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좌표가 필요하고, 이는 체스판처럼 (x, y)로 표기할 수 있다. 3차원에서 한 점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좌표가 필요하고, (x, y, z)로 표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4차원의 초입방체는 네 개의 좌표가 필요하다. 원칙적으로 4차원 객체들은 3차원 객체들의 표면 안쪽, 3차원 입체의 내부를 외부와 동시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래 이미지는 4차원 초입방체 도형 중 하나인 정팔포체의 전개도가 정팔포체로 조립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완성된 정팔포체의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4차원 객체가 3차원 객체를 볼 때 그 속이 보인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단, 이는 4차원을 2차원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의 왜곡을 담고 있어서 정확히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이미지2) 초입방체의 전개도로 초입방체를 만드는 과정.


(이미지3) 초입방체의 전개도로 초입방체를 만드는 과정 2.

중요한 것은 이 차원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n차원의 한 객체는 같은 차원의 다른 객체를 n-1차원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1차원 객체는 다른 1차원 객체를 n-1=0차원 생명체인 점으로만 인식할 수 있고, 1차원의 선이 선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다음 차원인 2차원 객체에게 보일 때뿐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상대 객체의 단면, 예를 들어 내가 한 사람을 바라본다고 했을 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정해진 위치에서 바라본 2차원 단면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치를 이동한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단면뿐이다. 앞과 뒤를 동시에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물질적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 무언가를 보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시도해 왔고, 미술 또한 그러한 방법의 하나다. 차원과 보기에 관한 사실들은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 개념 등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놀랍도록 간과되었다. 이 논의는 1920년대 서양 회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 중 하나인 〈우는 여인(The Weeping Woman)〉(1937)은 앞에서 보는 정면 시야 한 단면과 옆에서 보는 측면 시야 한 단면을 합성하여 하나의 형상으로 만들고 이를 평면 위에 옮기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가 차원의 문제를 의식하고 이 작품을 제작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작업을 3차원 존재인 우리가 3차원 대상을 바라볼 때 2차원의 한 단면만 보이는 것을 극복하고 여러 단면을 동시에 보려 했던 시도로 고려해 보자는 것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피카소의 인물이 신체의 여러 부위를 서로 다른 피부로 기워 놓은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인다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같은 시도를 회화가 아닌 거울과 사진 매체로 해내며 도플갱어를 만든다. 정식 작업으로 발표된 적은 없지만, 뒤샹 본인과 친구들이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인물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한 사진이 있다(아마 뒤샹이 아닌 다른 사람이 촬영해 주었을 것이기도 하다). 이 사진에서 관객은 거울을 통해 뒤샹의 다섯 단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여기서 거울은 우리 차원에서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차원 왜곡 장치다. 차원을 왜곡한다기보다 3차원 공간에 주어진 2차원의 한 단면이라는 시각 모델을 왜곡하는 장치로 보는 것이 더 정교한 설명일 수도 있겠다. 두 작품 사이에 약 20년의 시차가 존재하고 시각적인 결과물은 서로 상이할지라도 피카소의 회화와 뒤샹의 사진에서 우리는 한 자리에 앉아 한 객체의 여러 단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시각 모델, 하나의 고정된 위치에서 하나의 눈으로 하나의 단면을 보는, 원근법에 기반한 르네상스적 시각 모델로부터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미지4) 피카소, 〈우는 여인〉, 1937.


(이미지5) 뒤샹, 〈뒤샹의 5가지 초상화(The Five-Way Portrait of Duchamp〉(1917).

평면이란 무엇인가? 입체란 무엇인가? 동시대 미술의 언어에 약간이라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회화나 사진 같은 매체들을 평면이라 일컫고 물질적 두께를 가지는 것들, 예를 들면 조각이나 설치 같은 매체들을 입체라 일컬을 것이다. 이 글이 문제 삼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회화는 정말로 평면인가? 누가 봐도 그것은 잡을 수 있는 두께가 있으며, 아무리 얇고 얇아서 0mm에 가까운 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0mm가 될 수는 없으며 두께를 가지는 3차원 객체이다.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 조각에 관한 관심이 증대됨과 함께 단순히 두께를 가지는 모든 것을 조각 혹은 입체로 보는 이상한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내가 불만을 가지는 지점은 그런 경향에서 ‘회화’, ‘평면’, ‘조각’, ‘입체’ 개념의 지나치게 평평한 사용이며, 이 글을 통해 그런 개념들의 복잡함을 되살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결론을 선취하여 말하자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특정한 매체는 특정한 방식의 시각 모델을 유도한다. 그러므로 회화를 회화라 부르는 것, 조각을 조각이라 부르는 것은 해당 오브제의 물질적 특성’만’을 따져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관한 고려가 누락되어 있다.


평면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텍스트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의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이다. 이 에세이는 사람들에게 회화의 회화다움, 회화의 순수성을 위한 회화의 제1매체성으로 2차원 평면(성)을 역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2차원 평면(성) 중에서 ‘평면(성)’만이 살아남게 되고 ‘2차원’은 슬슬 떨어져 나가게 되었으나 이 글은 차원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한 것처럼 2차원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린버그는 회화가 다른 매체의 특성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회화 내부에서 그것의 존재 근거를 정의해 나가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회화를 규정하는 요소를 1) 평평한 표면(flat surface), 2) 캔버스의 모양(shape of canvas), 3) 색(properties of pigment)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그중에서도 평면성은 회화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다. 그는 ‘환영(illusion)’, 즉 원근법에 기초하여 구성된 회화 내부의 3차원 공간과 그에 알맞게 변형된 그림 속 대상이 구성하는 풍경을 “조각적인(sculptural)” 것으로 보고 회화에서 배제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조각적인 것은 그림 내부 속 구성 요소들의 크기뿐만 아니라 명암, 색상에도 관여한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 그린버그적인 의미에서 회화를 물질적으로 두껍다는 의미의 조각적 입체성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물질성이 얇은 것을 회화, ‘평면인(flat)’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는 이미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조각적인 것은 회화의 물질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물감을 두껍게 바르든 얇게 바르든, 라우셴버그의 회화처럼 생활 사물을 회화 캔버스 위에 부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평면적일 수 있다. 문제는 회화의 표면이 어느 정도나 환영을 구사하는지에 있다.


또한 그린버그는 회화의 평면성을 회화의 근본 요소로 짚는 다른 한편, 회화가 평면성을 성취할 수 없다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모더니스트 회화가 그 자신을 이끌고 있는 평면성(flatness)은 절대로 완전한 평면성이 될 수 없다. 그림 평면(picture plane)에 관한 감각(sensitivity)이 곤두서서 조각적인 환영이나 눈속임(trompe-l’œil)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광학적 환영(optical illusion)을 허용하고, 허용해야만 한다. (…) 오직 지금에만 그것은 엄격하게 그림적인(pictorial), 엄격하게 광학적인 3차원이다. 거장들이 걸어들어가는 상상을 가능하게 했던 공간의 환영을 창출했던 곳에서, 모더니스트에 의해 창출된 환영은 오직 보기만 가능한, 오직 눈으로만 여행 가능하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주장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회화의 특질은 평면성이지만 회화가 평면이 될 수는 없다.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1968-)이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1939-)를 경유하여 적절하게 밝혀냈듯이, “평면과 평면성의 경계는 ‘회화 미술의 환원 불가능한 본질’로 생각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무언가가 회화로 여겨지기 위한 최소 조건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즉, 표면 위의 물질성을 얇게 만드는 방식으로 평면성을 드러낸다고 해서 모두 회화가 되는 것은 아니며 물질성을 두껍게 만들고 우리 쪽으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방식으로 입체감을 드러낸다고 해서 모두 조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회화에서 환영을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린버그가 말하는 2차원 평면이란 “광학적 환영” 그 자체로 우리가 물질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 시각적인 공간으로, 관객의 몸은 들어갈 수 없고 오직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상상된 추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둘째, 평면은 회화의 물질적 표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때 그린버그가 광학적 환영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구상 회화든 추상 회화든 상관없이 발생한다. 회화는 작가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화면을 물질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 3차원 객체는 관객에게 감상될 때 하나의 2차원 평면, 즉 단면으로 지각된다. 나는 이 단면을 그린버그가 지칭한 평면의 의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회화가 이 많은 일을 해내는 동안 관객은 무엇을 하는가? 먼저 어느 전시장에 방문한 관객이 회화나 조각을 감상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품이 회화라면 그것은 우선 벽에 걸리는 것이 디폴트로 작동한다. 모든 회화란 벽에 걸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회화는 그동안의 미술 전시 관습에서 벽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고, 그것이 벽에 걸리지 않는 어떤 형태로 전시된다고 한다면 비평가는 해당 작품이 벽에 걸리지 않는 형태로 전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찾고자 할 것이다. 혹은 회화 캔버스의 옆면까지 꼼꼼하게 칠해진 어떤 작품이라 회화의 옆면으로 이동하여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라면 비평가는 그 옆면이 꼼꼼하게 칠해져야만 했던 어떤 이유나 옆면이 두꺼워진 이유를 찾으려 시도해 볼 수 있다. 관객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회화의 뒷면을 굳이 보려고 하지 않으며, 여기서 관객이 보아야 하는 앞면과 볼 필요 없는 뒷면의 구분은 거의 절대적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회화와 조각을 개념적으로 가르는 데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다. 한편, 관객은 조각의 뒷면을 보기 위해 기꺼이 작품 주변을 회전한다. 이때 관객의 눈과 뇌는 조각과 마주한 최초의 단면에서 옆면과 뒷면, 혹은 다른 각도의 단면들을 이어 붙인다. 관객의 뇌 속에서 완성되는 조각의 이미지는 파노라마 사진 같거나, 전개도 같을 것이며, 조금 더 최신이라면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같을 것이다. 작품 사진 촬영도 회화와 조각의 개념적 차이를 생각해 보기에 적절한 상상이다. 필요한 최소한의 장수를 생각해 보자. 회화는 정면에서 촬영한 한 장만 있어도 작품 사진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하다. 조각은? 이 문제는 다른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조각의 왼쪽 사진과 오른쪽 사진 중 어떤 것이 더 핵심적인가? 조각의 정면 사진은 해당 조각 작품의 핵심적인 사진인가? 후면 사진은 굳이 볼 필요 없는 사진인가? 정면과 후면의 구분이 없는 조각이라면? 그 경우에도 관객에게 보여야 하는 정면과 보이지 않아도 되는 후면의 구분은 회화처럼 절대적인가? 그런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단면이 여러 개가 될수록 관객의 머릿속에 더 정확한 형태가 상상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은 무엇이고 입체란 무엇인가? 관객은 조각의 주변을 회전하며 자신과 작품이 위치한 좌표를 변경하고 그 과정에서 1+n개의 단면 이미지를 조립한다. 약간은 부족해 보이지만 그린버그의 규정처럼 이 조건을 충족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회화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조각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평면과 입체의 개념을 단순히 물질적인 지지체의 두께로 판단하는 기존의 기준보다 정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회화는 무엇보다 (사태/사건/사물을 총칭하는 의미의) 객체의 단면을 보는 일이고, 조각은 객체의 여러 단면, 즉 다면을 보는 일이다. 멀리 보는 일과 가까이 보는 일 중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단면을 보는 것과 다면을 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좋다거나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회화의 평면성은 어쩌면 ‘단면성’이라는 용어로, 조각의 입체성은 ‘다면성’이라는 용어로 교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부조(relief)에 관하여. 이 글은 여전히 별다른 고민 없이 통용되는 회화, 조각, 평면, 입체 개념에 시비를 거는 글이었고, 이를 회화는 단면 보기, 조각은 다면 보기를 요구한다는 시각 모델에 관한 논의로 대체해 보려 했다. 그런데 회화와 마찬가지로 단면 보기를 요구하면서 조각으로 여겨지는 특이한 위상을 차지하는 부조의 존재는 이 논의 전개에서 계속해 장애물이 되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 1885-1953)의 작업 중 그가 피카소를 무작정 찾아갔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제작하기 시작한 ‘회화적 부조(painterly relief)’나 ‘역-부조(counter-relief)’ 등은 분명히 이 논의 안에서 적절한 자리가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벌써 7,648글자를 써 버렸기에 이는 다음의 과제로 남겨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