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것만이 무너져내리고 깎여나가는 것에는 자국이 남듯이, 낮은 곳에서부터 쌓이는 것들은 그 흔적을 남긴다. 지층 생성 작용에 관한 설명으로 읽을 수 있는 이 문장은 조형 작업에 관한 내용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땅과 조각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땅과 만나는 조각은 모래나 점토를 손으로 빚어낸, 재료와 노동 모두의 차원에서 더 자연적인 작업물뿐만 아니라 기계가 플라스틱이나 철 등으로 만들어내는 보다 인공적인 것까지도 아우른다. 특히 최근에 3D 프린터로 만들어진 유기적-비유기적 소재의 조형물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많은 글에서 표면과 내부, 지형과 등고선 따위의 단어가 빈번히 쓰이고 있는데, 이는 3D 프린터가 조형을 해나가는 적층 제조(Additive Manufacturing) 방식1이 지층의 생성 및 변형 과정과 여러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층과 관련된 운반, 퇴적, 침식 그리고 풍화 작용이 자연히—또는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일어나는 과정인 것에 반해, 3D 프린팅 공정에서 출력과 그로 인해 생긴 자국을 연마하고 제거하는 피니싱(finishing)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철저히 인위적인 의사결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3D 프린팅 공정에는 우리가 디자인했던 것과는 다른 표면이 출력되는 등 우리의 의도에 어긋나는 결과가 뒤따르기도 한다. 마치 자연재해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듯이. 그래서 이 글은 철저히 인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3D 프린팅 공정에서 자연히 또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의 흔적을 쫓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땅과 조각 사이에 있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의지의 영역을, 우리와 우리를 넘어서는 것이 수렴하고 발산하는 곳의 지도를 그려내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각을 만들어내는 여러 종류의 3D 프린터 중 지층의 생성과 특히 더 많은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FDM(Fused Deposition Modeling) 프린터이다. FDM 프린터는 용융방식으로 조형물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대지를 흐르는 마그마가 차례로 굳고 쌓이면서 새로운 화산 지형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FDM 프린터는 얇고 긴 필라멘트 형태의 열가소성 재료2를 뜨거운 노즐로 녹이고 압출하여 한 층씩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3D 모델을 출력한다.3 이러한 FDM 프린터는 다른 방식의 3D 프린터, 이를테면 광 조사를 통해 액체형 소재를 경화시키며 3D 모델을 출력하는 광경화형방식의 SLA(Stereo Lithography Apparatus) 프린터 등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덕에 오늘날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제작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FDM 프린터는 다른 3D 프린팅 방식보다 더욱 두드러지는 적층 제조의 흔적, 이를테면 필라멘트 층의 결착에 의한 물결 또는 주름 무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FDM 프린터로 만들어진 조형물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이 단층 자국은 3D 프린팅 산업 일반에서 단점이나 오류로 여겨진다. 3D 프린터로 만들어지는 조형물 대부분은, 그것이 아주 작은 기계의 부품이든 혹은 건축적 규모의 자재이든 간에 여느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흠집 없고 매끄러운 표면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FDM 프린터 조형물의 필라멘트 결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서 피니싱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3D 프린터 출력물은 출력 이후에 사포 등을 통한 연마나 표면 등의 공정을 거쳐 울퉁불퉁한 필라멘트의 자국을 없애고 나서야 비로소 상품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3D 프린팅 공정에서 생겨나는 출력 무늬는 마무리 과정을 통해 없어져야만 하고 또한 손쉽게 없앨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피니싱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근본적인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출력 이전의 3D 모델에도 또 최종 상품으로 만들어져 나갈 조형물에도 눈에 띄지 않는 혹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할 단층 자국은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 모델링과 프린팅 모두는 우리의 의도에 의해 인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인데,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그 물결 혹은 주름은 어떻게 자연적인 것처럼—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원래 그러하였듯이—생성된 것일까?
무척이나 당연하게도 이는 모델링 이후의 출력 과정에서 FDM 프린터의 재료로 사용되는 필라멘트가 지층에 쌓이는 퇴적물처럼 우리의 의도나 결정 같은 인위성을 넘어서는 자연의 물리적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FDM 프린터에 쓰이는 필라멘트는 SLA 프린터에 쓰이는 액체형 수지나 그 수지에 쏘이는 광선보다 상대적으로 두께를 더 가질 수밖에 없고, 이는 더욱 가시적인 층의 간격을 만들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노즐에서 용융되어 나온 필라멘트는 다시 굳는 과정에서 적층면의 가장자리가 살짝 휘어 올라오게 되는데4, 이때 먼저 쌓인 필라멘트와 새로이 쌓일 필라멘트 사이의 시차로 인해 각 층의 끄트머리에는 미묘한 오차 간격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 오차 간격이 노즐이나 베드의 이동에 따라 동일하게 반복되면 우리가 FDM 프린터 조형물에서 보는 등고선과 같은 단층 자국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필라멘트의 재료적 특성이 FDM 프린터로 출력된 결과물의 단층 자국을 모두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3D 프린팅 공정에서 출력 과정은 사실 두 가지의 세부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하나가 앞서 설명한 물질적 프린팅 단계라면 다른 하나는 그 이전의 비물질적 프린팅 단계이다. 먼저 3D 프린터는 CAD(Computer-Aided Design)를 통해 만들어진 “.STL”이나 “.OBJ”와 같은 확장자명의 3D 모델을 바로 출력할 수 없다. 이는 3D 모델 소스가 무수히 많고 작은 삼각형으로 짜인 폴리곤 메쉬와 같은 형상의 외부 정보만 담고 있지, 형상의 내외부를 모두 포괄하는 레이어 단위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5 따라서 .STL이나 .OBJ 같은 모델 소스를 3D 프린터가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정보이자 프로그래밍 언어인 “g-code”6로 바꾸어주어야 하는데, 슬라이서(slicer)가 바로 그 역할을 한다. 슬라이싱(slicing) 프로그램이라고도 불리는 슬라이서는 말 그대로 3D 모델 소스를 레이어 단위로 잘게 잘라서 g-code로 처리하는데, 이는 마치 디지털 또는 컴퓨팅 환경에서 3D 모델을 무수히 많은 2D 레이어로 먼저 프린팅해보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7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g-code가 펌웨어를 통해서 전달되면, 3D 프린터는 비로소 물질적 프린팅을 시작한다. 따라서 FDM 프린터의 출력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단층 무늬는 필라멘트의 재료적 성질뿐만 아니라 슬라이서라는 소프트웨어가 이루어낸 매개의 흔적 또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형 작업의 역사에서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는 객체들의 개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과거부터 다양한 조각 재료는 우리가 특정한 형태를 결정짓고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해왔으며, 여러 조각을 위한 도구들은 우리의 의지를 대리하거나 초과하여 재료의 물질성을 변화시켜 왔다. 그러나 3D 프린팅 공정에서 슬라이서의 역할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3D 프린터 사이를 매개할 뿐만 아니라, 3D 프린터와 CAD, 즉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두 객체 사이 또한 매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라이서가 처리하는 .STL이나 .OBJ 등의 모델 소스와 g-code 모두를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도 또 이해할 수도 없다. 물론 우리는 작업 과정에서 CAD나 슬라이서의 뷰어를 통해서 우리가 모델링하고 출력하는 3D 모델 형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뷰어가 코드를 이미지로 변환시킨 결과물을 보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코드의 내용을 시각화한 결과물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슬라이서는 우리가 근본적인 프로그래밍 언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3D 프린터가 이해할 수 있게끔 CAD로 만들어진 모델 소스를 또 다른 명령어로 변환해준다. 따라서 3D 프린팅 공정에서 슬라이서의 역할은 컴퓨팅 기반의 작업 환경이 자연환경처럼 우리의 의지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되었음을, 즉 우리의 의도를 넘어서는 객체들의 존재와 그들의 개입 그리고 그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컴퓨팅 환경에서의 조형 작업에서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FDM 방식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에서 눈에 띄는 필라멘트결은 무조건적 지워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작업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관계의 지도로서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조형 과정에서 CAD를 통해 디자인한 모델 소스와 필라멘트 재료 그리고 슬라이서의 정보 처리 과정이 함께 만들어낸 흔적이기 때문에. 3D 프린팅 결과물에 남은 단층 무늬는 우리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는 자연의 법칙 그리고 컴퓨팅 환경 그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자국은 단순히 3D 프린팅 공정에서 생겨나는 오류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를 넘어서는 물리적 재료의 성질과 우리의 인식과 이해를 초과하는 소프트웨어의 매개가 어느 한 지점에서 맞닿고 어긋난 것의 결과물이다. 어쩌면 그 자국은 3D 프린팅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형 작업에서 컴퓨터의 매개를 피해 갈 수 없는 오늘날, 땅과 조각, 자연스러운 것과 인공적인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얽히고설키는 조형 작업 환경 그 자체의 지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넘어서고 초과하는 언어로.
1 적층 제조 방식은 3D 프린팅 공정을 가리키는 다른 말로, 이는 소재를 층 단위로 한 층씩 쌓아가며 3차원 모형을 조형해 나가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와 대비되는 공정으로는 절삭 가공(Subtractive Manufacturing) 방식, 즉 재료를 깎아내고 덜어내며 조형하는 방식이 있다.
2 필라멘트의 원재료는 플라스틱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녹는점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점토나 철, 사탕이나 초콜릿 등 다양한 소재 또한 여러 산업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3 FDM 프린터에서 층을 쌓아나가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필라멘트를 뽑아내는 노즐이 X, Y축으로 움직이고 출력물이 만들어지는 베드가 Z축으로 움직이는 멘델 방식, 노즐과 베드의 움직임이 그 반대인 카르테시안 방식, 혹은 베드는 고정된 채 노즐만 X, Y, Z 축으로 움직이는 델타 방식이 그것이다.
4 이용수, 「FDM 방식 3D 프린팅을 위한 CAD 프로그램(마야, 스컬프트리스, 메쉬믹서)의 효과적인 활용 연구」, 『일러스트레이션 포럼』 47 (2016), 42.
5 정성민, 장중식, 「슬라이서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 사용성 연구; 개인용 FDM 프린터를 중심으로」, 『산업디자인학연구』 vol. 12, no. 2 (2018), 77.
6 G-code는 필라멘트의 양이나 베드의 온도 등 출력 설정과 관련하여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7 슬라이서는 3D 모델 소스를 g-code로 변환해주는 필수적인 기능 이외에도, 원하는 밀도만 입력하면 3D 모델 내부의 형상을 자동으로 채워주거나 3차원 모델 출력 과정에서 급경사를 가진 부분 등을 안정적으로 출력하기 위한 서포터를 만들어주는 부가적인 기능 또한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