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리 함께 모래성을 쌓아보자. 그리고 그 감각을 느껴보자. 넓고 두터운 모래사장에 손을 푹 찔러 넣어 건조하면서도 바스락거리는 모래를 힘껏 그러모으고, 그 위에 바닷물을 길어와 붓자. 촉촉하게 모래 반죽을 만들고, 네모나거나 둥그런 통에 반죽을 촘촘히 채워 넣은 다음 통을 확 뒤집자. 살살 흔들며 통을 들어내고 마지막으로 통 모양새로 우뚝 선 모래성을 손으로 꾹꾹 눌러 다듬자. 그리고나서 손을 씻자. 얕은 바닷물에 들어가 허리를 푹 숙이고 미지근한 파도가 밀려올 때 잽싸게 손을 넣어 손에 묻은 모래를 흘려보내자. 손을 들어 바닷물이 미처 씻어내지 못한 금색과 검은색의 작은 알갱이를 털어내자. 다시 뒤돌아 모래사장으로 올라가며 우리가 만든 모래성을 바라보자. 무너질 것 같지만 동시에 단단해 보이고, 까끌까끌하지만 부드러운 모래성을 눈으로 더듬어보자. 그러면 모래가 느껴진다. 바닷물의 소금기로 약간은 끈적거리지만 그래도 깨끗한 우리 손에, 다시금 모래의 촉감이 느껴진다. 모래를 만지지 않고 모래성을 쌓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바닷가에 가지 않고서도 매일 그런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 스크린에 무수히 떠오르는 이미지들의 촉감을 느끼며. 이미지 속 어떤 사물의 풍선처럼 팽팽하고 스테인리스처럼 매끈한 표면을 어루만지며. 혹은 아스팔트처럼 거칠고 스티로폼처럼 연약한 표면을 더듬으며. 우리는 스마트폰 스크린에 범람하는 이미지들과 그 속의 것들을 단순히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들의 촉감을 느끼며 스크린을 쓸어내리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우리의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과 유리 스크린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 못한 채.
II.
촉각은 다른 감각과 함께 우리의 경험의 큰 축을 차지하는 중요한 감각이다. 촉감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우리 몸이 가장 일차적으로 접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촉각은 현실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비물질적인 디지털 환경에서도 중요하다. 디지털 미디어는 계속해서 다양한 감각의 동원을 동시다발적으로 요구하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낳고 있으며 또한 혼합 현실(Mixed Reality)의 사례가 보여주듯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말 그대로 새로운 또 하나의 환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촉각의 문제가 현실의 뮤지엄 공간과 가상의 디지털 전시 공간 모두에서 작품의 감상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조각의 촉각성은 회화나 판화, 비디오나 사운드 등의 다른 매체들보다 더 자주 논의되었기에, 이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촉각은 시각 예술 작품의 감상 경험에서, 특히 조각의 감상 경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먼저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촉각의 중요성은 촉각이 지니는 초감각성을 통해서 설명해볼 수 있다.1 촉각은 각각의 특정적인 신체 부위를 통해 지각되는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온몸을 통해서 지각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촉각은 시각에 관여하는 눈, 청각에 관여하는 귀, 후각에 관여하는 코, 그리고 미각에 관여하는 입—물론 후각이 미각에 영향을 미치듯 이들 역시 다소간 상호의존적이긴 하지만—을 포함하여 피부 전체를 통해서 지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촉각은 마치 피부가 이 독립적인 신체 기관들을 아우르듯이, 다른 감각들과 상호작용하며 이들을 종합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미술 감상에서 촉각은 시각을 비롯한 감각들을 통합하여 감상 경험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조각은 다른 매체에 비해 더 강한 입체성과 물질성을 가지기에 촉각과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형태, 즉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제작 과정에서 재료를 부단히 만지거나 깎고 다듬고 덧붙이거나 덧대는 등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 과정은 재료 자체가 갖고 있는 물성—이를테면 단단함과 부드러움—에 따라 다양한 흔적으로 남기에 강한 물질성을 띤다. 정리해 보면 “표현재료의 물성에 따른 촉각이 [조각] 작품 표현에 결정적인 영향”2을 끼치기에 촉각의 문제는 조각의 감상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문제이다.
III.
그러나 우리는 조각을 만질 수 없다. 이 ‘만질 수 없음’은 현실의 뮤지엄 공간에서도 또 디지털 전시 공간에서도 동일한 조각의 감상 조건이다. 먼저 뮤지엄에서 관람객은 조각이 참여적인 작업이거나 그러한 작업의 일부가 아닌 이상 함부로 그것을 만질 수 없다. 작품과 관람객의 직접적인 접촉의 제한은 작품의 보존과 관리를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는 사실 조각뿐만 아니라 뮤지엄에 전시된 다른 모든 매체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해당하는 사안이다.3 한편 디지털 공간에서도 조각을 만질 수 없는데, 이는 현실의 뮤지엄의 경우와 달리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조각, 즉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물질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물로 존재하는 조각을 스캔하여 디지털로 구현한 것이든 또 실물 없이 디지털로만 만들어진 조각이든 간에, 디지털 조각(fragment)으로서 디지털 조각(sculpture)은 비물질적이라는 점에서 만져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만질 수 없음’은 ‘촉각을 느낄 수 없음’ 또는 ‘비촉각적 감상 경험’을 의미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까 우리가 쌓은 모래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모래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듯이, 우리는 시선을 통해 촉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현실의 뮤지엄에서건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서건 또 그것이 물질적 기반이 있든 혹은 비물질적이든 간에 우리는 조각을 바라보며 그것과 접촉한다.
조각을 만지지 않고 조각의 촉감을 느끼는 경험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촉각적 시지각의 과정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인간의 지각 과정을 외부 자극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도 아니며 인간 주체의 단독적인 의식의 투영도 아닌 그 중간적인 것, 즉 자극으로서 세계와 지각 주체의 몸 사이의 중간적인 운동 작용으로 보았다.4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몸 밖에 놓인 세계는 우리의 몸과 분리된 지각 대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몸과 겹쳐진 혹은 우리의 지각 작용과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대상이다. 그러한 대상의 지각 과정, 즉 대상과 몸 사이의 운동 작용은 지각 주체가 대상과 대면하는 최초의 표면인 살갗을 중심으로 모든 감각이 함께 어우러지며 동원되는 통합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시각과 촉각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시각적 접촉은 물리적 감촉 없이 시선에 의해 표면에 닿아있는 촉각성”5이며 우리의 시선이 곧 촉각적인 어루만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만질 수 없음’이 현실의 뮤지엄과 디지털 공간에서 동일한 조각의 감상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둘에 놓인 조각에 대한 촉각적 시지각 경험이 온전히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두 조각은 물질적 구성물과 비물질 데이터의 집합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더 나아가 두 조각이 놓인 곳 역시 실제 시공간과 가상의 환경이라는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세계와 총체적인 지각 작용을 하는 몸이 구성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연적으로 더욱 촉각적인 시지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물질적인 디지털 조각(fragment)이 실제 조각(sculpture) 못지않게 강렬한 촉각적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데이터로 존재하는 디지털 이미지는 물질적인 하드웨어 어딘가에 가상적인 데이터로 존재하다가 사용자가 요청하는 순간에 이미지로 바뀌며, 그 자체는 무형에 가깝지만 인터페이스를 통해 형태를 나타낸다. 즉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서 디지털 조각을 볼 때, 우리의 스크린 너머에는 항상 그 조각의 미처 현실화되지 않은 데이터들이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시점을 360도로 조정하거나 크기를 확대 또는 축소하는 등의 경우에—현실화되며 우리의 스크린에 무형의 데이터 대신 형태를 갖춘 이미지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은 필연적으로 그 지각 과정에 사용자의 개입을 전제로 하고 있다.6 이는 감상자의 요청과 별개로 존재하는 실제 시공간의 물질적 조각과 달리, 가상 환경의 디지털 조각의 이미지는 현실화되기 위해 매 순간 감상자의 요청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이미지 자체에 이미 포개어져 있는 사용자/감상자는 몸과 세계의 더욱 밀접한 그리고 더욱 활발한 운동 작용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국의 뉴미디어 이론가 한젠(Mark B. N. Hansen)은 메를로-퐁티의 논의를 이어받아, 가상의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의 몸은 디지털 기술을 육화한 ‘코드화된 몸’(body in code)이 되어 디지털 이미지와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한다.7 이때 코드화된 몸이 상호작용하는 세계는 디지털 이미지처럼 역설적이고 무규정적인 세계이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잠재적인 현실화의 가능성을 지닌 세계, 그리하여 현실의 시공간보다 더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세계이다. 따라서 디지털 세계와 코드화된 몸은 현실 세계와 몸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상호작용을 통해 한 단계 더 총체적인 운동 작용 그리고 종합적인 감각의 활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가상의 디지털 전시 공간에 놓인 비물질적 조각(fragment)이 실제 시공간에 놓인 조각(sculpture)보다 더 촉각적인 시지각 경험을 낳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IV.
그런데 모래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모래의 촉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모래를 만지고 모래성을 만들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촉각적 시지각의 가능성이 실제 피부를 통한 촉각의 중요성을 낮추는 것은 아니며 가상의 전시 공간에 놓인 조각이 더욱 촉각적인 시지각 경험을 낳을 수 있다고 해서 실제 뮤지엄 공간에 갈 필요성을 소거해버리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세계를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이 연결되어 있고,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우리의 몸이 더욱 강렬한 초감각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조각을 실제로 만지는 것과 그것을 촉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실제 시공간과 가상의 환경에서 그것을 촉각적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만질 수 없음’이라는 제약을 극복해낼 수 있는 경험으로서 촉각적 시지각은 도리어 ‘만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는 디지털 환경에서 실제로는 구현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형태와 질감을 가진 조각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우리의 몸에는 중력을 거스를 수 있는 거대한 쇠구슬, 혹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 극도로 얇은 유리막에 대한 촉각적 정보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최근에 개발된 가상현실 특수장갑 기술은 그 욕구를 해소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 같다.8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디지털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촉각적 정보를 또 다른 감각의 정보를 총체적으로 구성하면 우리의 몸은 그것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촉각적 시지각은 단순히 시각이 촉각을, 그리고 비물질(적 접촉)이 물질(적 접촉)을 대체해버린다고 말하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조각을 만지고 싶은 욕구가 실제로 조각을 만져서 해소될 수 있다면, 촉각적 시지각으로 생겨나는 비물질 조각에 대한 물질적 접촉의 욕구도 시각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남을 뿐이다. 모래를 만지지 않고 모래성의 촉감을 느낄 수 있다면, 모래성을 만지는 손을 보며 모래성을 만지는 촉감을 느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V.
이번에는 우리 함께 모래성을 썰어보자. 그리고 그 감각을 느껴보자. 아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 함께 모래성이 썰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감각을 느껴보자. 원통이나 원뿔 또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모양을 한 형형색색의 모래성들이 있다. 이들은 견고하지만 흐물거릴 것 같은 또 까끌까끌하지만 부드러울 것 같은 형태와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칼과 손이 등장한다. 손은 모래성을 가볍게 어루만지다 칼을 쥔다. 칼을 쥔 손은 모래성을 사그작사그작 아그작아그작 가차 없이 썰어버린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아주 단호한 움직임으로.
스크린을 떠도는 무수히 많은 모래성 썰기 영상들에는 mesmerizing, satisfying 또는 relaxing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그렇다면 모래성 썰기는 어떻게 우리를 매료시키고 어떻게 우리를 만족하게 하며 또 어떻게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가? 이 모래성 썰기 동영상들이 충족시켜주는 욕구 또 해소시켜주는 불편함은 무엇인가? 어쩌면 모래성 썰기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8백2십6만 개의 검색결과는 디지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강렬한 촉각적 시지각 경험의 반증일 수도 있다. 모래를 만지지 않고 모래성의 감촉을 느끼고, 또 모래성을 썰지 않고 모래의 촉감을 느끼는 것은 ‘만질 수 없음’이라는 제약을 완전히 극복해내거나 또 완전히 회피하는 것도 아닌, 만질 수 없는 상황과 만지고 싶은 욕구라는 역설적인 상황 자체를 유희하는 놀이인 것은 아닐까?
1 김선혜, 「조각에서 촉각의 의미와 교육적 함의」, 『미술교육논총』 vol. 24, no.3 (2010), 43. 미술 감상과 교육에 있어서 촉각의 중요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고.
2 앞의 글, 42.
3 사실 모든 뮤지엄에서 미술 작품을 만져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미술 작품을 실제로 만져볼 수 있는 전시나 교육 프로그램 또 뮤지엄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원본이 아닌 복제품 또는 모델을 활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시각 중심의 감상 경험에서 더 나아가 관람객이 직접 다양한 미술 작품을 촉각적으로 또 공감각적으로 느껴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촉각 중심의 뮤지엄 경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 최병진, 「박물관 문화의 변화와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 호메로스 국립 촉각 박물관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사연구』 43 (2018), 225-247.
4 이은아, 「가상현실 수용자 몸의 관계에 기반한 지각적, 정념적 시공간성 연구」, 『미학』 vol. 81, no. 2 (2015), 98-99.
5 이소영, 「신체적 사유, 지각하는 이미지 – 신체를 통해 육화된 디지털 시공간 분석」, 『CONTENT PLUS』 vol. 14, no. 3 (2016), 46.
6 이은아, 위의 글, 91-94.
7 같은 글, 101-102.
8 최수상, 「가상현실인데 손으로 뜨거운 물 만져져.. 특수장갑 기술 개발」, 『파이낸셜뉴스』, 2021년 9월 27일 자,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