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물질은 무엇이었을까?
산스크리트어로 허공을 의미하는 아카샤(Akasha)1는 최초의 원소이자 우주 만물의 정수다. 힌두교에서는 이를 타트바, 즉 빛과 영혼,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파동으로 이루어지는 현상계에서 우주 속 모든 물질과 사건들은 이 근본 질료 위에 기록된다. 마치 소리가 음반 위에 기록되듯, 전자기파가 공간으로 퍼져 나가 아카샤라는 매질을 통과해 그 궤적을 남기는 것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 이야기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추방당한 에테르(Aether)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2
“어떻게 생각해?”
2주는 너무 적당한 시간이었다.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지체되지도 않은.
다음을 기약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한 채, 그냥 어물쩍 넘어가기로 했다.
“뭐 좋다고 생각해.”
영 시원찮은 대답이었는지 00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우리는 앞으로 여섯 바퀴를 더 돌기로 약속했다. 두 바퀴까지는 괜찮았다. 네 바퀴째가 고비다. 지금 세 바퀴를 도는지, 다섯 바퀴를 도는지, 내가 도는 건지, 아닌지, 어디를, 얼마나 오래 돌고 있는 건지 모른다. 모르겠다. 아마 모를 것이다.
20세기 신비주의의 토대를 다진 블라바츠키(Helena Vlabatsky)는 러시아 출신의 영매로, 신지학 협회의 창립자이자 처음으로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 개념을 제시한 사상가다. 아카식 레코드란 인간의 뇌에서 기억 일부가 저장되는 곳인 시냅스3와 같은 만물의 기억 창고, 즉 우주 도서관이다. 세상 모든 일이 기록된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영매는 과거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여 대비한다. 이는 숙명론 또는 결정론을 이야기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것이 꼭 전지성을 띄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영적 진화를 목적으로 살아가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고, 거듭된 발전은 곧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블라바츠키의 주장이다. 그는 “어떤 종교도 진리보다 높지는 않다.”라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간, 동물, 식물, 광물에서부터 영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괴연한 존재계의 우주적 통일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블라바츠키 이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신지학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가진 한계에 대해 생각하며 그의 저서 『아카샤 크로닉으로부터(Aus Der Akasha-Chronik)』를 통해 인지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유체이탈, 영적 의례, 마술은 모든 인간의 인지적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 꾸준한 명상과 집중을 통해 모든 사람이 스스로 ‘초월적 인식능력’을 발현시킬 수 있어야 인류 전체의 영적 진화라는 거대 목표에 다가갈 수 있고, 비로소 신비학은 인지학으로, 보다 합리적인 체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는 학문으로 나타난다. 『아카샤 크로닉으로부터』는 우주와 인류의 역사,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성과 발달에 관한 초감각적 기억의 흔적, 이를테면 아틀란티스 대륙과 무 대륙의 존재 등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언뜻 목차를 훑으면 무엇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단순한 나열 같다. 그러나 내용 전반을 아우르는 축은 물질화의 배후에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힘과 주체에 대한 서술이다. 하지만 증거의 부재가 반드시 부재의 증거는 아니듯, 증명할 수 없는 존재와 현상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슈타이너 또한 (스스로 밝히기를) 아카식 레코드와 접촉해 정보를 얻었으며 이후 아카식 레코드라는 용어는 소위 ‘정신세계’와 관련한 여러 학문과 사상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게 되었다.
촉각은 당신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감각인가? 다소 진부하고 새삼스러운 질문이 되겠으나 우리의 오감 중 무엇을 첫 번째로 포기할 수 있나?
이리가레의 촉각성은 단편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촉각성과 구분해서 봐야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이 우리가 실제로 느낄 수 있는(그것을 체득해야 할 당위성을 누구도 강요한 적은 없지만)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관념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이 감각의 초월성을 그저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봐도 될까?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는, 상상이라는 단어의 편리함에서 나아가 좀 더 유기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어젯밤 꿈에 내가 나왔다. 나는 서 있는 채로,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 나는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서 나는 누워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나를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서 나는 선 채로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누워있었다. 나는 누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 서 있는 나뿐이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나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 서 있는 나는 무언가에 쫓기는 마음으로 누워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의 나였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되어야 한다. 선 채로 아래를 바라본 나는 누워있는 나를 보며 절박함을 느끼고, 조급하다. 조급했다. 누워서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 있는 내가 바라보는 아래는 고요했다. 고요한 만큼 불안했고, 당장에 그 고요를 깨트려야 할 것만 같았다. 서 있는 나는 누워있는 나만큼이나 내가 고요하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또 다른 낯선 내가 되어 그 자리에 나는 서 있었다. 누워있는 나는 서 있는 내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서 있는 내가 될 수 없는 나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을 느끼지는 않는다. 않을 것이다. 누워있는 나는 고요한 것 같다. 서 있는 나의 아래에 누워 자리한 나는 내 앞을 등지고 서 있는 나에 의해 허리께에 뉘어있는 오른손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나는 죽었나? 아니, 나는 죽나?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서 있는 나는 어서 내가 ‘나’가 되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죽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누워있는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서 있는 나와는 달리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사실 외에 아는 것이 없기에 더 이상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아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길은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 위에, 서 있는 내가, 누워있는 내가,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며,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끊임없이 내가 되었다가, 내가 아니었다가, 내가 비로소 내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아직 내가 아님을 끊임없이 역설한다. 하고 있다. 서 있는 나는 나를 등지고서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내가 나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가 나임을 알고 있다.
‘감각의 초월(sensible transcendental)’이라는 말이 가진 모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감각은 초월할 수 있는 것인가? 문자 그대로 이 용어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만난 것으로, 전통적 시각중심주의가 가진 이분법 논리의 해체를 요구하는 데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본다는 것’은 다분히 사회적 성격을 지닌 감각 활동이다. 이성과 감성, 주체와 객체, 마음과 신체와 같이 사고와 지식에서의 시각적 메타포는 단일화된 주체를 형성한다. 후기구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영역(특히 철학 분야)에서 시각중심주의가 가진 이러한 한계를 지적해 왔다. 그러나 이리가레(Luce Irigaray)에게 있어 시각중심주의는 단일한 남성 주체에 관한 비판의 대상이다.4 서구담론이 자신을 생산하는 데 있어 여성은 억압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없어서는 안 될 작동 조건, 근거, 토대로, 여성은 여성이 아니며 형태가 아닌 질료로서 자신의 성질을 갖지 않는 장소로 여겨진다. 이리가레는 이러한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근거로 한 남근이성중심주의에 의해 은폐된 여성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따라서 배제를 통해서만 자신을 재현할 수 있는 남성적 담론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 주체를 창조하는 차원에서 차이(성차)의 기획은 중요한 작동 원리이며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새로운 관계 모델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여는 것5이 그가 목표하는 바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촉각은, 이리가레가 제시하는 또 다른 감각이다(그러나 이것은 여성 고유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찬양하자는 것도 아니다). 촉각 개념은 시각을 기반으로 하는 남근이성중심주의에서 보이지 않는 여분으로 나타난다. 이는 사이와 질료가 바탕이 되어 ‘다른 방식의 봄’을 유도하는데, 각각 ‘빛의 질료성’과 ‘잊혀진 질료성’ 그리고 ‘공기로 가득 찬 공간’으로 촉각은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시각의 토대로서 제시된다. 특히 공기에 대한 이리가레의 관점이 흥미로운데, 차이는 질료성과 연관 지어 생각해야 된다 하여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범주가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텅 빈 공간에 던져져 오직 무와 직면해야만 하는, 대상과 나 사이의 텅 빈 거리가 가져다주는 소외와 분리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는 공기를, 호흡을 잊은 것일까? 공간은 텅 빈 상태가 아닌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이리가레는 공기를 각각의 개인을 분리하는 동시에 연결 짓는 매개체로 보았다. 그리고 질료로서의 빛은 공기를 통해 눈과 접촉한다. 즉, 촉각은 현실과의 실재적 만남을 성사시키는 감각이며 내가 가하는 힘을 매개로 하여 나 자신의 사실성과 외부를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시각의 전제조건이 촉각 안에서 찾아진다면 ‘정신과 몸의 분리’ 같은 논리는 무너지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메를로퐁티의 ‘살’은 이리가레의 맥락에서 문제적이다. 메를로퐁티는 촉각과 시각을 동등한 위치에 놓아 시각의 특권을 뒤엎으려 했으나 이리가레가 보기에 그것은 시각에 우선하는 촉각을 간과함으로써 여전히 시각경제를 특권화하는 것이다.6 ”시각은 촉각을 대신할 수 없”기에.7 따라서 촉각적인 봄은 타자에 의해 만지고 만져지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정의내림을 불필요한 것으로 전제하는 이리가레의 촉각성 개념은 우리의 인지체계가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오는 감각 정보를 통합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거기에는 실재와 보다 맞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보인다.
일정한 요소들이 체계적으로 통일되어 구성 요소 간의 상호 관계가 분명한, 시간이 흐르는 이곳은 물리계다. 정념은, 정견(正見)으로 파악되는 모든 법의 본성과 모습을 바로 기억하여 잊지 않는 일로, 존재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고 억압하는 윤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지에 이르고자 거쳐야 할 과정 중 하나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정념의 개념을 빌려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혼 집합체의 위치를 설명하려 시도했다. 그들은 그곳을 정념계라고 부른다. 정념계에는 아카식(Akashic)이라는 공간 단위가 존재한다. 이 단위는 어떠한 명칭적 혹은 지리적인 것과 관계되는 것이 아닌 ‘공간 그 자체’로, 정념계의 부산물로서, 수많은 영혼이 뭉쳐진 각각의 집합체를 설명할 때 쓰인다. 각각의 아카식에는 하나의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 아카식 레코드는 파동이 지나간 흔적에 대한 기록인데, 하나의 아카식이 가진 무한한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탐구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 힌두교와 불교, 러시아의 전통적 샤머니즘과 신지학 및 인지학 그리고 과학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일 시도해 본다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공간상 기록된 전자기파를 재생하는 문제는 객체의 하드웨어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아카식 레코드에 접근하는 방법은 우리 뇌의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서술기억(장기기억)을 처리하는 곳으로 알려진 해마는 신경세포들의 발화 정도에 따라 활동 양상이 결정된다. 만일 누군가 자극이 없는 환경에서 가만히 쉬고 있다면, 해마 신경세포들의 뇌파는 200㎐ 정도의 고주파가 0.1초가량 지속되어 ‘날카로운 파형의 잔물결(sharp wave ripple)’8을 띈다. 이 뇌파를 억제하면 새롭게 들어온 정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렇듯 커다란 뇌파는 기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건강한 신체는 뇌의 항상성 유지 기능으로 인해 지속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부 환경에 맞는 움직임과 그에 필요한 혈당 소비를 조절하는 뇌는 다량의 포도당을 써야 하는데, 그렇다면 신체가 하루에 사용하는 포도당의 절반 가까이 되는 양이 오로지 뇌 활동에 쓰인다는 것은, 혈당이 인지와 기억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연구자들은 실험을 통해 혈당과 ‘날카로운 파형의 잔물결’의 상관관계가 일상 요인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음을 확인했다. 즉, ‘날카로운 파형의 잔물결’은 지속된다. 언제 어디서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생각하기, 기억하기, 계산하기 따위와 같은 인지 활동이라고 여겼으나, 우리의 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에너지의 조율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율이 인간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매번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어떤 실험에서, 연구진이 피실험자들에게 집게를 주어 작은 블록을 집도록 한 후, 몇 분 뒤 손을 사용해 다시 블록을 집게 했다. 흥미롭게도 피실험자들은 도구의 사용 전과 달리 손의 운동 속도 조절을 더 느리게 해 블록을 집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고 한다. 이처럼 뇌는 때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도구를 몸의 일부로 인식하고는 한다.<9 그것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도착한 감각 정보들을 통합해 도구에 대한 내적 표상을 너무나도 손쉽게 활용하여 ‘나’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계획하고, 또 수정한다. 따라서 ‘나’라는 자아는 실상도 허상도 아닌 현상인 것이 일부 과학자들의 견해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정도(八正道)와 자아에 대한 과학자들의 거리두기는 어느 정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팔정도란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道)’로,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여덟 가지 수행을 제시한다. 그중 일곱 번째인 정념(正念)은 바른 의식을 갖고 이상과 목적을 언제나 잊지 않을 것을 지시하며 특히 무아(無我)를 염두에 둘 것을 강조한다. 슈타이너가 이야기한 ‘명상’과 ‘집중’은 바로 팔정도의 정신에서 이어진 것이다. 신지학자들은 어떨까? 블라바츠키는 힌두교와 불교가 서구 신지학의 원형임을 깨닫고 그의 저서 『비경(秘經, 1888)』을 통해 진화이론과 업보(karma), 윤회(reincarnation) 사상을 결합했다. 인간의 정신은 여러 주기의 삶의 과정에서 지속되며, 내세에 환생해 물질성을 통한 인식에 이른다. 뜬구름 잡는 듯한 이 이야기를 좀 더 현실계와 가까운 곳으로 가져와 보자. 홈트레이닝 채널에서 내 귀를 때리는 말이 있었다. 중둔근을 사용하여 한쪽 다리만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쪽 다리를 펼치는 동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꽤나 힘들다). 따라가기 바쁜 와중, 트레이너가 자신이 하는 설명을 그냥 듣고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순환과 호흡을 반복하는 동시에 최대한 ‘상상’할 것을 요구했다. 순환과 호흡은 나에게 있어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어릴 적 수련을 위해 잠시 요가원을 다닌 적이 있다. 제자리 뛰기 50번, 윗몸일으키기 30번, 발끝치기 100번10을 한 후, 배꼽을 중심으로 한 깊은 호흡에 집중해 우주의 기운을 손과 손 사이의 감촉으로 느껴보았다(혹은 상상했다). 정말로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 모인 열은 그가 말했던 ‘기(氣)’였을까? 아니면 순진한 어린이가 열심히 모은 집중력에 의해 밀집된 혈관에서 나오는 단순 열기였을까. 의외의 순간에 떠올릴 수 있었던 이 경험은 신체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보다 확장된 인식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어느 날 원장이 잠적한 뒤로 요가원이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곳이 단월드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시각이 주가 되는 분야인 미술에서 촉각적 바라봄은 어떻게 나타날까. 애초에 촉지적 시각에 관한 연구는 드물뿐더러, 촉각을 바탕으로 재개념화된 시각성이 미술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일은 거의 전무하다. 이리가레의 이론과 미술을 연관시킨 논의는 모방 개념이나, 현대미술이(특히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시각이 아닌 촉각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기본적인 단계에서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여기엔 지극히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미술 분야에서 촉각의 개입을 설명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련된 몇몇 시도는 있었다. 이리가레의 촉각성 개념을 상세히 분석한 김지혜11는 감각적 초월로서의 도예를 제시한다. 도자의 특성은 촉각성, 물질성, 특수성, 실용성, 테크닉 등에 있다. 이는 이리가레가 언급한 촉각성과 여러 방면에서 연결되는데 물질적인 촉각성뿐만 아니라 질료를 강조한다는 점, 완성된 것이 아닌 과정중심적 주체라는 점, 그리고 몸과의 물질적 인접성을 맺는다는 점에서 감각적 초월의 맥락과 유사하다. 또한, 이리가레의 이론과 직접적인 연결을 보장할 수는 없으나 지나라자다사의 ‘원형’ 예술개념과 신지학을 계승한 몬드리안12의 해체주의적 특성(외형상 색과 형태로 귀결되기에 비교적 닫힌 구조로, 이리가레의 맥락과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은 촉각적 바라봄이 가진 메커니즘과 매우 근접한 양상을 띤다. 다시 말해 ‘접촉’은 촉각을 통한 시각의 재개념화 과정을 이해하거나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는 일에 있어 바탕이 되는 공통 키워드다. 이러한 시도들 가운데 특이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각과 관련된 유의미한 논의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1. 아카식 레코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정보만을 내어주는 구조를 갖고 있다. 접근을 위해서는 스피릿 가이드 혹은 고차원적 존재, 천사, 조상신, 옛 성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빠르다.
2. 순환과 호흡에 집중해, 긴장을 이완시킨다. 음악이 도움이 된다면 활용해도 좋다.
3. 이마 정중앙에 빛의 구슬을 떠올린다. 청자와 같은 은은한 색감에, 흰 구름 띠를 두른 형태다. 준비가 되었다면 구슬을 회전시킨다.
4. 발밑으로 들어오는 지구의 빛을 느끼며 호흡한다.
5. 머리 위 30센치에서부터 내려오는 우주의 빛을 느끼며 호흡한다.
6. 지구의 빛과 우주의 빛을 위아래로 느끼며 이마 정중앙에 위치시켰던 빛의 구슬을 심장 언저리까지 수직으로 이동시킨다.
7. 서른세 개의 계단을 오른다. 1부터 33까지의 숫자를 천천히 센다.
8. ‘Hall of Records’13, 도서관의 입구를 두드린다.
9. 안으로 들어가 수정구를 만나 질문한다. 이때, 소리 내 질문을 하거나 혹은 마음으로 물어도 좋다.
10. 검색이 끝났다면 스피릿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내려온다. 33부터 1까지의 숫자를 센다.
11. 대지에 발을 딛고 발바닥에서부터 대지의 숨결을 느낀다. 우주에서 얻은 정보를 지구 중심부에 가라앉힌다. 당신이 우주에서 가지고 돌아온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빛이 된다. 그 빛을 통해 지구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당신 자신의 소원을 빌자.
1 아카샤와 관련하여 앞으로 나올 여러 개념들은 루돌프 슈타이너의 『초감각적 세계 인식에 이르는 길』(양억관, 타카하시 이와오, 물병자리, 2016)과 『인간과 지구의 발달 - 아카샤 기록의 해석』(루돌프 슈타이너 전집발간위원회, 한국인지학출판사, 2018), 그리고 각종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여 편집·정리한 것이다.
2 또는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가상의 금속, 비브라늄(Vibranium)을 떠올릴 수도. 이 금속의 주된 특성은 진동이라고 한다. 2021년 10월 31일 접속, 출처.
3 뇌세포 사이의 접합 부위.
4 김지혜, 「루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의 촉각성에 근거한 시각의 재개념화」(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8), 57.
5 그러나 여성 고유의 정체성이나 본질적인 여성성을 상정하고 있는 듯한 흐름을 보이기도 하여 본질주의의 의혹을 떨칠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리가레의 유명한 딜레마다.
6 메를로퐁티가 제시한 상호주체성과 같은 이원론적 사고는 타자를 고려하지 않으며 그것은 결국 성차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이리가레 외에도 아이리스 영, 주디스 버틀러 등은 메를로퐁티의 주장이 담고 있는 감각의 위계를 지적한다.
7 Luce Irigaray, An Ethics of Sexual Difference, trans. Carolyn Burke and FGillian C. Gill (Continumm, 1993), 135-137.
8 「몸과 생각의 조율」,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 2021년 09월 30일 접속, 출처.
9 기억은 ‘나’에 대한 내적표상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중요 요소이다. 이는 역시 맥락의존적 기억체계를 관리하는 해마와 연관된다.. 「신경과학으로 다시 보는 나」, 『사이언스 온』, 2016년 7월 15일 접속, 출처.
10 과도한 신체활동이 동반된 이유는 그것이 ‘나’를 잊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었을까.
11 김지혜, 위의 글, 135-136.
12 물론 이리가레의 이론과 신지학을 막무가내로 연결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이리가레의‘차이’개념을 통한 성찰 과정은 자연에 근거하여 보편적 조화와 질서를 탐구하는 신지학의 일원론적 사상 체계와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의 발견을 이야기하고자 언급한 내용이며, 젠더적 관점에서의 논의를 중점으로 둔 것이 아님을 밝힌다.
13 성공적으로 아카식 레코드를 접한 이들 중 유명한 예시는 바로 미국의 최면술사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의 사례다.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조각 밑에 존재하는 ‘Hall of Records’는 모든 기록이 저장되어 있는 전설의 도서관인데,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며, 사실 이 공간은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는 일종의 장소라는 설이 있다. 이 도서관의 존재에 대해 에드가 케이시가 예언한 바 있다. 믿거나 말거나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