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oul과 납혼당에 관한 상상

김여명

초등학교 3학년 처음으로 개설된 컴퓨터 수업의 첫걸음은 다음과 네이버에서 나의 메일 계정을 생성하는 일이었다. 200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아이러브스쿨이나 다모임, 세이클럽, 버디버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내 싸이월드가 등장하고 그즈음에는 네이트온을 함께 사용하다가, 2010년대 언제부턴가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투브가 주축으로 올라오며 2018년부터 틱톡(TikTok)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분야에 있어서는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카카오톡이나 틱톡(TicToc), 마이피플, 라인 같은 메신저들이 등장했고, 사찰당할까 무서워 텔레그램이 반짝 유행했지만, 현재는 역시 카카오톡을 주로 사용하는 인상이다. 트위터는 이 모든 풍경 속 우리의 물 밑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목록에 올리지는 않겠다.


온갖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메신저의 등장과 변천에 굴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스마트폰이라는 기기 자체를 소유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기술을 혹은 기술의 안정성을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전자(기)파 과민증(electromagnetic hypersensitivity)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와이파이의 은총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버지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 주 경계에 국립전자파청정구역(National Radio Quiet Zone)을 마련했다.) 어느 쪽이든 이 사람들은 데이터로 집계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내게는 이 일이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 학적을 잃게 되거나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일(죽은 사람으로 취급되는 일과는 다르다)과 같은 이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콘과 서류와 매체와 기계의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햄릿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없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아니면 죽은 건 아닌데 살아 있다는 흔적도 딱히 없어서 그냥 실종된 상태이느냐, 그것이 문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방향에 있다.


인터넷상에서의 흔적이 내 존재를 확정 짓는다는 사실은 삶과 죽음의 선후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뒤집어 놓는다는 말이 너무 급진적이라면, 뒤집어 놓을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나의 존재가 나의 흔적으로 보증된다는 것보다 더 이상한 현상을 가능하게 한다. 즉, 이제는 없는 사람도 SNS와 메신저 계정, 인터넷 상에서의 흔적을 통해 존재를 획득할 수 있고, 여러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인터넷은 네크로맨서와 영매의 천국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 듯하다. 첫 번째 유형이든 두 번째 유형이든 둘 다 매체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고,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흐르저드가 죽음을 유예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이어갔던 것처럼, 사람은 잊힐 때 비로소 죽는다고 생각했던 쵸파의 동료처럼, 언어와 죽음과 망각 삼자가 연루되는 현상의 유서 깊음은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 이후의 시기로 한정되지 않는다.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다’라는 상투적인 어구에서도 이 연루를 엿볼 수 있다. 이미 죽어 버린 저자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 그가 죽음 이후에도 망각되지 않도록 그를 불러오는 문자와 책이라는 접신 도구로 가능하다. 어쨌든 완전히 픽션인 것과 반쯤 픽션인 것을 제작하는 일은 예술과 사기의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왔다. 어떨 때는, 완전히 픽션인 것보다 반 정도만 픽션인 쪽이 더욱 실재 같기도 하다. 프랭크 윌리엄 애비그네일 주니어도 변호사 시험만큼은 실제로 공부하여 자격증을 취득했다. 프렌즈와 모던 패밀리처럼 10년 넘게 지속된 시트콤을 생각할 때 그 배우와 해당 배역을 떨어트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주지한 두 유형 중 첫 번째 유형은 완전히 허구인 존재를 형성한다. 본인 인증이 필요하지 않은 허위 SNS 계정을 개설해 여론 형성 활동에 참가하거나 자기의 현실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고 텍스트로만 소통하는 곳에서 자아 분열하는 경우, 혹은 이미지를 사용할 경우 메타 휴먼 크리에이터로 만들어진 외양의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이 유형에 속한다. 사실 완전히 코딩된 것이지만 새로운 존재의 자리를 생성하는 것, 즉 그것이 실제 있는 사람인 것처럼 꾸며내는 일에는 크게 헷갈릴 만한 부분이 없다. 그런 존재는 현실 세계의 누군가에 기반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가 남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는다면 누구도 그를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다음 카페 등지에서는 분열된 자아들이 종종 해를 입히는 일이 있어 왔기에 최근 댓글 창에 글 작성자임을 알리는 기능을 추가했다.) ㅡ 혹은, 그는 진짜 사람 같은 걸로 인정받지 못한다. 위협이라기보다는 가상은 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걸그룹 에스파의 아바타들이 ‘진짜’ 에스파 멤버로 인정을 받는 것도 안 받는 것도 아닌, 거대한 농담의 광야에 거주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우리와 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던 누군가를 기반으로 구성된 반쯤 허구적인 인물은 어떨까. 두 번째 유형은 반은 가상으로 구성되고 반은 현실에 기반하는 반인반시(半人半尸)이다. 특히 전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 유형이 갖는 확연한 차이는 그의 존재 자체가 현실 세계를 향하는 명백한 위협, 즉 시체(屍體, nekrós)의 현현 혹은 귀환으로 감지된다는 점이다. 블랙 미러 시즌 2의 〈돌아올게 Be Right Back〉와 넷플릭스 영화 〈캠 걸스 Cam Girls〉, 페이스북 에밀리 괴담은 우리가 이 반인반시들과 겪어내야 하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어떤 학문적 진술보다 잘 담고 있다. 세 개의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 세계의 인물이 했던 말이나 할 법한 말, 했던 행동이나 할 법한 행동을 빅데이터화한 것을 통해 원본의 자리를 완전히 꿰차려고 하지만 결국은 원본을 뛰어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이거나 원본과 매우 유사하면서 원본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공포 유발 장치로 작동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조건을 본다. 사람들은, 외양은 복제할 수 있어도 영혼은 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1901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헤이브릴의 의사 던컨 맥두걸이 6명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했던 실험 이후 인간 영혼의 무게는 21그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실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태도다. 우리 중에 영혼이 없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남고, 그 몸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혹은 영혼이 있거나 말거나 사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시체를 ‘우리’라고 부르지 않으며, 우리 자신에 대한 가치 평가는 물론 몸과 마음 양자를 종합한 결과에 기인하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친 평가가 다수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예술 작품의 디지털적 복제에도 유사한 양상으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이 데이터가 될 때, 정확히 무엇이 데이터화되는 것일까? 그것은 살(flesh)의 문제인가, 피(blood)의 문제인가? 구글 아트 앤 컬처로 〈모나 리자〉를 관람하는 것과 실제 〈모나 리자〉를 감상하는 일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실제 〈모나 리자〉와 〈모나 리자〉의 디지털 복제본은 물론 같지 않다. 앞서 세운 영혼에 관한 명제에 따르자면, 그리고 영혼이 곧 예술 작품의 영혼인 미적 가치라고 한다면, 〈모나 리자〉를 복제할 때 복제되는 것은 〈모나 리자〉의 육신일 뿐 영혼이 아니다. 미적 가치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번역될 수 없는데, 이는 그것의 영혼을 훔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복제되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지는 순간부터, 재현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원본이 아닌 어떤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본과 복제라는 양자의 관계는 도플갱어라기보다 쌍둥이 형제자매에 가깝다.


우리의 사후에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집적하여 클라우드에 업로드한다고 가정할 때 누락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어떤 것들이 이 목록에 들어갈까. 죽은 나를 아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의 납혼당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결국 핵심은 나의 데이터가 나의 영혼까지 복제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내가 미래에 할 법한 행동을 비슷하게 수행할지 하는 문제로 집중된다. 그러나 주지했듯 이 문제의 초점은 그것이 나와 얼마나 닮았는지와는 전혀 무관하다. 한 번 복제되면 그것은 나랑 몇 가지 겹치는 취향을 가질 뿐 전혀 나라고 부를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나보다 훨씬 유능한 것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질문인 것만 같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하는 것은 영혼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하는 일이 처한 곤경에 관한 것이다. 메타 데이터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영혼이 존재하는 방식의 대척점에 선다. 영혼은 개개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다른 영혼과의 차이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메타 데이터는 영혼 개개를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고 다른 영혼과의 차이점을 내용이나 의미와는 무관한 코드에 둔다. 또한 모든 정보는 데이터의 포맷을 갖추는 즉시 유지, 관리, 검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영혼이 데이터가 된다면 우리에게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영혼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참조하는지, 언제 업로드되었는지, 업로드된 시기는 신뢰할 만한지, 내용에 잘못된 것은 없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존재를 보증하고 보증받는.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울 그곳에서 문득 서글퍼지는 것은 왜일까. 이것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 호흡처럼 되어 버리고서야 나아질 고독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