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의 작동방식은 마술과 같다. 그것은 하드웨어의 향상된 능력에 힘입어 환영을 창출하며 실재와 물질의 지위를 넘본다. 나아가 소프트웨어는, 몇몇 기술적 인프라가 디지털화됨에 따라, 사회에 예속된 개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사물과 도시와 인간은 하나의 축으로 통일되어 ‘스마트’한 손실 압축의 대상이 되고, 이 모든 상황은 직관적인 상호 작용 아래에서 신속하게 이뤄진다. 겨우살이 지팡이를 치켜들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는 마술사의 모습은 이제 모니터를 바라보며 정체 모를 줄글을 타이핑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자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다행히도, 혁신적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며 우주와 가상세계를 선점하려는 백인 남성 억만장자를 향한 혐오감을 발판 삼아,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에 대한 비판 의식은 더욱 첨예해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다. 소프트웨어는 마술이기 때문에, 예의 문제에 대해 총체적인 대항이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은 핸드폰을 망가뜨릴 수 있고 컴퓨터를 부술 수 있다. 그러나 이 즉각적인 반동은 소프트웨어에겐 거의 무의미하다. 아무리 기계를 부숴도 그것은 파괴되지 않는다. 성공적인 파괴가 이뤄지려면 기술의 작동 방식을 알아내야 하고 약한 회로를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을 밖으로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는 명령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파놉티콘 장치가 연상시키는 장엄한 방식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를 편리하게 도와주는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통제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유저에게 자신을 소비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자유는 언제나 문제적이다.
유저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며 자유로울수록 그는 해당 기술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으로부터 배제된다. 인간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글쓰기하고, 시간을 편집하고, 공간을 구성한다. 모든 활동은 프로그래밍 언어에 근거하지만 몇몇 인간은 그것을 독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적 사명을 선사하던 신의 뇌우가 이제는 인텔 프로세서의 반도체 사이를 오가는 전압의 변화로 대체되었다는, 혹은 축소되었다는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지적은 옳다. 소프트웨어는 인간의 글쓰기를, 역사와 담론을 독해 불가능한 이진수의 집합과 전압의 번쩍임으로 대체한다.1 마술적 소프트웨어의 기원 설화는 이렇게 탄생한다.
악의를 담아 읽자면, 이 이야기는 새로운 기술의 충격을 유럽 문명에 대한 종언(終焉)으로 번역하려는 지식인의 관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는 없다(There is No Software)」(1992, 1997)라는 키틀러의 유명한 글이 제시하는 의문은 날카롭다. 그는 어쩌면 복수심과 비슷한 것을 활용해 묻는다. 소프트웨어는, 그것의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마술에는 마술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실체가 있다. 소프트웨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선 소스 코드로부터, 프로그래밍 언어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더 내려갈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소프트웨어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처리 장치와 반도체와 전압 등에 의지하며, 그리고 또 한 가지, 인간의 일상 언어에 의지한다. 형체 없는 소프트웨어 마술은 기계 장치와 일상 언어가 없다면 작동하지 않는다.2 그러므로 “소프트웨어는 없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자신의 없는 존재를 숨겨야만 한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를테면 거대한 투자금을 예치해 만들어진 상품으로서 저작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기에 소프트웨어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개입을 은폐하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유연하고 원활하게 작동하는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Graphic User Interface)를 만들어 스스로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영역, 프로그래밍 언어의 영역을 유저가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고, 에러와 바이러스를 방지한다는 핑계로 핵심적인 디렉토리와 기계 장치로의 접근을 원천 차단한다.3 선험적 기술 미디어를 이해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소요한 키틀러에게 이 존재의 모호성은 무척 끔찍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는 소프트웨어의 마술 속 자유를 즐기는 일이 실리콘밸리의 집단적인 조작을 수용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이 주장은 플랫폼이 현실을 선점하고 분할하는 오늘날 더 정확한 것처럼 느껴진다.4 그러므로 인간이 소프트웨어의 마술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숨겨진 기계와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 기계와 일대일 대응이 가능한 어셈블리어 차원에서의 대안적 코딩이나 하드웨어 해킹, 혹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나 최소한 응용 소프트웨어를 직접 제작해 사용하는 것, 이런 방법들이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에 속아 폭력적으로 누락되고 싶지 않다면 인간은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이 주장은 이상적이지만, 혹은 이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충분히 고약하지만, 코딩 좀 한다고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세상이 원상복구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여기선 아직 일상 언어의 세계에 머무른 채로 키틀러의 주장을 다시 한번 살피기로 한다. 그는 몇 가지 소프트웨어를 직접 코딩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그 코드를 뜯어보는 것이 도움될지 모른다. 이 통찰의 장본인이 펼친 실천 속에 어떤 유익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자 마크 C. 마리노(Mark C. Marino)는 이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키틀러의 코드를 하나하나 뜯어보는데, 이 과정에서 철학자의 주장에 결여된 실천적 측면을 밝힌다. 마리노에 따르면, 키틀러는 간단한 레이트레이서(raytracer)를 코딩하는 과정에서 어셈블리어가 아니라 C언어를 일부 사용했다고 한다. C언어 역시 고급 언어의 대표적인 사례로 해당 언어를 기계에게 번역해주는 컴파일러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소프트웨어를 벗어나 기계와 직접 대응하는 실천이 요구된다는 주장은 저자조차 실현하기 어려운 것으로, 수행적 형태의 트롤링이자 이상적 주장에 불과했던 셈이다다.5 그러므로 키틀러와 협업했던 파울 파이겔펠트(Paul Felgelfeld)는 그를 거짓말쟁이이자 오디세우스라고 부른다. 소프트웨어는 존재한다. 다만 프로그래밍 언어를, 하드웨어를 잊어선 안 될 뿐이다.6
나아가 소프트웨어를 비판적으로 다루기 위해, 소스 코드의 차원으로 일단 ‘내려가야’ 한다는 주장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어쩌면 그것은 계몽이라는 실패한 프로젝트를 반복하는 일이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미디어 연구자 웬디 희경 전(Wendy Hui Kyong Chun)은 소스 코드를 향한 페티시즘이 있다고 지적하며, 소프트웨어 마술을 구성하는 소스 코드(source code)의 흑마술(sorcery)을 ‘소서리(Sourcery)’라고 이름 붙인다.7 소스 코드를 소프트웨어의 유일한 근원(source)이라고 간주하는 것, 그 대안적 지식은 하드웨어와 일상 언어라는 소프트웨어의 (비)가시적 ‘지지체(support)’를 다시 한번 유령으로 만드는 마술이 된다. 하드웨어는 소스 코드 없이도 실행(execution)될 수 있으며 소스 코드는 일상 언어, 그중에서도 영어 기반의 커뮤니티에 의존해 작동하기 때문에 비대칭성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그래밍 언어를 계몽의 언어로 물신화할 때, ‘소서리’는 이와 같은 비대칭성을 알아채기 어렵게 가려 버린다. 점점 더 신속해지는 실시간 상호작용의 마술은 소프트웨어와 현실 사이의 지연을 삭제함과 마찬가지로 소스 코드와 소프트웨어 사이의 지연 역시 삭제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맥락을 상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컴퓨팅 기술은 누구에게나 유용한 기술이었으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기술이기도 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이를테면 총 중량이 30톤에 이르던 초기 컴퓨터 에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이 사용되던 시기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화된 컴퓨터와 그것을 위한 GUI는 ‘일반인’에게도 기계의 소유와 작동을 허용했고, 필멸자로부터 진리를 숨기는 사제들의 교리와 같았던 소스 코드로부터 소프트웨어를 해방했다.8 그러나 소스 코드를 그 자체로 강조하는 이론은, 심지어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Free and open-source software)조차, 소스 코드를 이성(logos)의 언어로 페티시화 하면서 이 해방을 평가절하한다.9
결과적으로 키틀러의 저주는 유의미하다. 소프트웨어의 마술은 하드웨어가 발달할수록, 더 작아지고 더 매끈해질수록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실시간 상호작용에 의해 유령화된 마술이 될 때, 그 뒤에 소스 코드가 있다는 것, 기계 장치를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필요하다. 이를 모른다면 유저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어떻게 경험한 것인지 파악할 수 없기에 자신의 경험에 매몰되고 지식으로부터 유리될 가능성이 있다. ‘포스트-인터넷(post-internet)’이라는 개념 아래 주목받았던, 실은 누구도 별로 궁금치 않았던 자아의 자기 서술은 유저 경험을 반복적으로 미학화한 결과물이기에 미약해진다. 이제는 유저 경험뿐만 아니라 해커 경험이 모방되어야 한다. 모든 기술에는 악한과 불량배와 아마추어 생산자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생태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맡기 때문인데, 마술의 친근한 통제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면 소프트웨어의 거짓말쟁이 상호작용을 제때 포착해 알아볼 수 있는 방어술이 요구된다. 이것은 유저의 눈높이를 고수한다면 달성될 수 없다.
다만 모든 이들이 ‘소서리’의 페티시즘을 이성으로 오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모두가 코딩의 영역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소프트웨어가 편재하는 현재는 마술이 내쫓긴 세상이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한 마술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대안적 실천은 이미 꽤 자리를 잡았다. 컴퓨터 회로에 버섯을 엮어 기르거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웹을 복각하는 고고학을 전개하거나 ‘이성적인’ 프로그래밍 언어에게 시학을 부여하거나, 혹은 좀 더 전통적인 사례로 자유-오픈 소스 운영체제를 개발하고 사용하거나. 여기 섞인 의심스러움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고 어떤 것들은 그저 예술의 영역에서만 정상 작동하기에 효용을 의심받지만, 그래도 이들 모두 여전한 가능성을 갖는 실천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는 완전 자동화라는 파도가 엔트로피를 가속화하며 모든 가치를 전도한다고 직시하면서, 그에 대한 대응법을 요약한다. 노동의 종말과 인간의 소외를 초래할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의 자동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동화로 생산된 이익과 해방된 시간을 탈자동화와 부엔트로피를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에 투자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사용할 필요가 있다.10 어쩌면 이 모든 마술적 상황에 대해 같은 주장을 변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유사 해킹으로 생산된 탈마술적 체험은 분배되어야만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나은 계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분배를 위한 이야기다.
1 Friedrich Kittler, “There is No Software,” in Literature, Media, Information Systems: Essays, ed. John Johnston(Routledge, 1997), 147, 출처.
2 Ibid., 147-155.
3 Ibid., 152.
4 Mark C. Marino, “Kittler's Code,” Critical Code Studies(The MIT Press, 2020), 171.
5 Ibid., 166-172.
6 Arndt Niebisch, "Kittler is a Liar! - Interviewing Paul Feigelfeld", Metaphora, 2021년 11월 10일 접속, 출처.
7 Wendy Hui Kyong Chun, “On "Sourcery", or Code as Fetish”, Configurations, vol. 16, no. 3 (2008), 302-310.
8 Ibid., 311-312.
9Ibid., 302-303.
10 베르나르 스티글러, 『자동화 사회 1』, 김지현, 박성우, 조형준 옮김(새물결, 2019),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