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영역 곳곳에 그 어느 때보다 깊게 파고든 디지털은 이제 ‘사회’나 ‘문화’ 그리고 ‘환경’과 같은 단어들처럼—디지털은 이 단어들과 자주 결합하기도 한다—매일 쓰이지만, 그 뜻은 점점 알 수 없는,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 말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디지털은 마치 블랙박스같이 그리고 또 블랙홀같이 우리의 언어망을 빠져나간다.
블랙박스(black box)는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개념으로 그는 『판도라의 희망』에서 과학적 사실이 이미 만들어진 상품처럼 받아들여지며 그것의 구성 과정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황에 대한 비유로 블랙박스를 든다. 한편 중력으로 완전히 붕괴하여 무한히 수축하는 천체인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는 아무것도 관측할 수 없게 한다. 이제 너무나 고도로 발달해버린 디지털은 그 복잡성 때문에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지각없이 사용되며, 또 철학의 힘을 입어 감히 우리가 그 의미를 붙잡을 수 없는 담론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디지털의 정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블랙박스를 열고 또 블랙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블랙박스와 블랙홀은 모두 검다. 즉, 디지털은 암흑처럼 우리의 곁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우리가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더듬는 것이다. 이때 많이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그러니까 접촉의 표면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것의 모습을 가늠하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연결고리를 늘려야 한다. 블랙박스같이 그리고 또 블랙홀같이 우리의 곁에서 자꾸 숨어버리는 디지털의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
‘SUJANGGO수장고‘와 협업으로—또는 수장고와의 ‘링크’로—진행되는 abs 3호는 디지털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디지털과의 접점을 늘리고 암흑 너머에 감춰진 그것의 정체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먼저 황재민과 김얼터는 블랙박스를 여는 일에 가담한다. 황재민은 물질적인 토대가 없는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마술처럼 작동하며 우리를 현혹하는지 그 방식을 짚으며 이에 대한 방어술의 필요성을 촉구한다. 반면 김얼터는 소셜미디어와 현실을 넘나들며 우리의 존재와 영혼의 관계를 고찰하고 그것을 디지털 작품의 존재와 영혼의 관계에 대입해본다. 한편 이지우와 김호원은 블랙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이지우가 픽션과 팩트, 시각과 촉각의 사이를 오가며 감각은 초월 가능한 것인지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김호원은 현실과 가상에서의 조각 감상 경험을 촉각적 시지각의 관점에서 살펴보며 만짐에 대한 욕구와 그것의 불가능성이라는 모순을 유희하는 방식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유진영은 ‘SUJANGGO수장고‘에 전시된 디지털 작업에서 ‘SUJANGGO수장고‘의 수집 방침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디지털 데이터로서 작품이 소장되고 공유되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lock with ink pen)과 🥠는 abs의 고정 코너로, 2호에는 각각 오제성과 최하늘을 초대했다. 공간과 기억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전시 ⟪The Motion Lines⟫(2019), ⟪가소성전: Plastic Ruins⟫(2020) 그리고 ⟪System Container⟫(2021) 등에 참여해온 오제성은 물리적-비물리적 복제를 모두 동원하는 3D 스캔을 통해 미지정 문화재들이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본다. 한편 조각과 퀴어를 탐구하며 전시 ⟪벌키 BULKY⟫(2021), ⟪보니BONY⟫(2021) 그리고 타이포 잔치 2021: 《거북이와 두루미⟫ 등에 참여한 최하늘은 abs와 물질적/비물질적 조각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블랙박스로서 혹은 블랙홀로서 존재하는 디지털과 맞닿는 표면이 많아진다고 해서 그것의 완전한 모습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러나 디지털에 대한 논의에서 연결고리의 확장은 계속해서 작은 상자 속으로 들어가며 또 거대한 구멍 너머로 사라지며 언어의 망을 빠져나가는 디지털을 다시 붙잡는 일에 분명 이바지한다. 손에 손잡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그리고 손에 손잡고 사건의 지평선을 건너기. 이로써 abs 역시 디지털과의 숨바꼭질에 참여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