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엉덩이의 무거움*

김호원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1984년 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차용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 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서울: 민음사, 1999, 2011), 13.

1.

오늘 하루 엉덩이가 맞닿아 있던 표면을 떠올려 보자. 혹은 엉덩이가 느꼈던 감촉을. 이 일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한 번쯤 자신의 엉덩이가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란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 뒷근육을 잘 사용하지 않아 힘이 약해지고 쇠퇴하는 증상”1을 일컫는다. 엉덩이 주위의 근육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엉덩이 기억상실증은 근육의 기능과 관련된 증후군이지만, 이는 피부와 감각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엉덩이 근육의 기억상실은 엉덩이가 감내해야 하는 동시대의 생활 방식 자체, 즉 한 표면에 오래 앉아 있는/있어야만 하는 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TV와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HMD와 같은 VR 기기로 앉은 자리에서 일과 여가 모두를 해결한다.2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대부분의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그 편리함 밑에는 엉덩이의 문제가 깔려 있다. 아니, 깔려 있는 엉덩이가 있다.


2.

납량(納涼)의 의미가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 것"3이라 할 때, 납량물(納涼物)은 여름날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콘텐츠를 의미할 것이다. 대표적인 납량물로는 납량특집으로 제작되는 공포물이나 여름 휴가철을 겨냥하여 개봉하는 공포 영화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붙은 ‘납량특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공포물이나 공포 영화가 실제로 전달해 주는 시원함은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4 납량물이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에 따른 호르몬 작용으로 시원함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의학적인 근거에도 불구하고5, 그것이 가지는 실제적인 납량의 효과가 미미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깔린 엉덩이 때문인 것은 아닐까? 납량물을 관람하는 동안 우리의 혈관이 수축하고 식은땀이 난다고 하더라도, 엉덩이는 여전히 거실에 놓인 소파나 영화관 의자에 깔려 있기에. 그렇게 납작해진 엉덩이에는 납량의 틈이, 시원함이 들 수 있는 틈이 없기에.


그리하여 이 글은 앉은 생활로 그 기억을 잃은 엉덩이가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는 가능성, 이른바 엉덩이의 납량 가능성을 탐구한다. 특히 이 글은 전통적인 납량물로 여겨지는―또한 지나친 공포감 조성이나 가학성 등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공포 영화와 공포물 대신, 최근 유튜브에서 많은 사람에게 각광받는 ‘공간 (상상) ASMR’(이하 ‘공간 ASMR’로 통일)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이 글은 하나의 납량물로서 공간 ASMR이 엉덩이와 그 표면 사이에 틈을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실제적인 납량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이미지1)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배경인 호그와트의 그레이트 홀 ASMR / YouTube: asmr soupe

‘앰비언스(ambience) 비디오’라고 불리기도 하는 공간 ASMR은 일반 ASMR의 사촌뻘 되는 오디오-비주얼 콘텐츠로6, 괄호친 단어 ‘(상상)’이 보여주듯 가상의 시공간을 재현한 사운드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7 기존의 ASMR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을 트리거(trigger)로 팅글(tingle)을 느끼게 하는, 즉 그런 소리를 기제로 기분 좋게 소름 돋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면8, 이 공간 ASMR은 가상의 시공간에서의 현전의 경험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간 ASMR은 어떻게 납량물이 될 수 있을까?



(이미지2) 공간 ASMR 이미지 제작 과정 / YouTube: New Bliss


(이미지3) 위의 제작 과정을 통해 완성된 공간 ASMR 이미지 / YouTube: New Bliss

공간 ASMR은 관람자의 신체를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위치시킴으로써 납량물로 기능한다. 비록 관람자의 엉덩이가 실제 현실의 물질적인 표면에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가상 현실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체를 재인식하게 하고 엉덩이와 표면 사이에 틈을 만들어 시원함이 깃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과 기대라는 심리적 상태에 따라 신체의 병세가 실제로 호전되는 플라시보 효과와 비슷한 현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공간 ASMR은 시청각적 요소를 접하는 것만으로 관람자가 빠르게 가상의 시공간적 상황을 믿고 기대할 수 있게끔, 즉 몰입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단순한 정신적 반응 이상의 신체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시각적 요소로서 이미지는 공간 ASMR이 재현하고자 하는 가상의 시공간을 한눈에 보여주며 관람자들에게 몰입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 이미지는 주로 실재하는 장소를 촬영한 사진이나 3D 프로그램으로 렌더링한 파일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며, 공통적으로 관람자가 더욱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편집의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많은 제작자들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1인칭 시점으로 공간 ASMR의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이는 관람자가 해당 시공간을 직접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공간 ASMR 이미지에는 다른 인물이, 더 정확하게는 관람자를 바라보는 다른 인물의 시선이 부재하는데, 이는 관람자가 주관적으로 가상의 시공간을 그려낼 수 있게 한다. 한편 공간 ASMR 이미지에 가미된 간단한 애니메이션들, 이를테면 흘러내리는 빗방울이나 다리를 핥는 고양이는 관람자에게 그것이 그려내는 공간이 실제 환경처럼 시간이 흐르고 변화가 일어나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주어 관람자가 더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끔 돕는다.



(이미지4) 공간 ASMR 사운드 제작 과정 / YouTube: Ambient Storyteller

이렇게 공간 ASMR의 이미지가 가상의 시공간에 더욱 빠르게 몰입할 수 있는 출발선이 된다면, 사운드는 관람자가 지속적으로 그 몰입을 이어나가 현실과 가상을 서로의 영역으로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에서 밝히고 있듯이 몰입형 콘텐츠에서 청각 정보는 해당 콘텐츠가 얼마만큼 몰입을 유도하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 기준 중 하나이다. 특히 공간 ASMR의 이미지가—입체적인 시공간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HMD 기반의 가상현실과 달리—고정된 시점과 평면적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사운드는 공간 ASMR이 그려내는 시공간에 대한 몰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작자들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사운드 편집 과정에서 시간차와 레벨차를 고려하여 관람자가 귀로 직접 듣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다양한 샘플들을 배치한다. 이는 관람자가 공간 ASMR의 시공간을 실제 환경처럼 3차원적으로 인식하고 1인칭 시점의 이미지를 수평면상으로 확장시킬 수 있도록 하는 효과를 낸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ASMR이 플라스틱을 두드리는 소리 등 특정한 한 가지 소리만 집중했던 것과 달리, 공간 ASMR의 사운드는 특정 시공간에서 들릴 수 있는 또는 들릴 법한 소리를 전부―일상생활에서는 노이즈로 여겨지는 소리까지―담아냄으로써 관람자가 해당 시공간을 더욱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인식하게 돕는다. 이렇게 공간 ASMR의 사운드는 관람자가 고정된 시점의 평면 이미지 너머로 3차원적인 가상의 시공간에 자신의 신체를 장시간 동기화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틈을 만들고 그 속에서 실제와 가상 환경에서의 경험이 서로 교차할 수 있게 한다.



(이미지5)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배경인 별장 ASMR에 달린 댓글 / YouTube: yuza asmr

공간 ASMR의 관람자들은 유튜브 댓글로 자신의 관람 경험을 공유하는데—몇몇은 자신이 단순한 몰입 너머 과몰입의 경지에 다다른 ‘과몰입러’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공간 ASMR이 지니는 실제적인 납량 효과를 확인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관람자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배경인 1980년대 이탈리아 근교의 어느 별장 ASMR을 자신의 정신이 맑아졌다고 밝힌다. 그 관람자를 따르면, 새벽녘에 관람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ASMR은 관람자의 방 안에 해가 뜨게 하고 방 안을 나른한 오후처럼 따뜻하게 만들었다. 물론, 관람자의 방에 정말로 해가 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ASMR은 관람자가 실제 햇볕을 받을 때와 동일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신체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믿으면 병리적 현상이 소거되는 플라시보 효과와 같이, 해당 ASMR은 그 관람자가 단순히 이탈리아 근교 어느 별장의 소리와 모습이 담긴 사운드-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체가 실제로 해당 시공간에 있다고 느끼게 하여 감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공간 ASMR이 가상 환경에서의 경험을 실제 환경에서의 경험으로 교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HMD 등을 통한 가상 현실 경험은 관람자가 착용한 기기가 피할 수 없는 재매개의 느낌을 발생시킨 반면, 공간 ASMR을 통한 가상 현실 경험은 기기의 매개 없이—있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스크린이나 오디오 장비 정도—이루어지기 때문에 둘 사이의 경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한다. 이로써 공간 ASMR을 통해서 관람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실제 환경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주변에 놓인 사물들을 다른 맥락 속에 배치하여 사물 간의 관계를, 그 사물들과 신체의 관계를 그리고 더 나아가 물질들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배치 그리고 새로운 구성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기존의 것들과 겹쳐지고 또 충돌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틈이 만들어진다. 엉덩이와 그것이 맞닿은 표면 사이의 틈, 납량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틈.


4.

공포물이나 공포 영화를 관람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 ASMR를 듣고-바라보는 우리의 엉덩이는 여전히 표면에 붙어 있다. 그러나 공간 ASMR은 관람자를 둘러싼 환경-사물-물질들의 배치를 바꾸고 틈을 만들어냄으로써 심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신체적 차원에서도 변화를 이끈다. 그리하여 공간 ASMR은 엉덩이가 맞닿은 그 표면을 거실 소파나 영화관 의자 대신 알프스 산자락의 나무 의자나 바닷가의 해먹으로 느낄 수 있게 하여 실제적인 납량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미지6)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영화 ⟨터미네이터⟩(1999), ⟨써로게이트⟩(2009), ⟨월-E⟩(2008), 드라마 ⟨이어즈&이어즈⟩(2019)

그러나 여전히 엉덩이 기억상실증의 문제가 남아 있다. 공간 ASMR을 통해 엉덩이가 맞닿은 표면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짓눌려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짓눌린 엉덩이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이 되어버린 걸까? 인간의 존재 방식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져 소프트웨어화된 가상 현실을 떠돌고 아바타로 몸을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엉덩이의 무게는 그대로이다. 인간을 우주로 이주 보내거나 인간의 몸에 이식된 칩으로 전자기기를 다루는 미래를 그려내는 서사에서 앉거나 누워 있는 인간의 모습을 빼놓을 수 없듯이.


5.

어쩌면 이러한 모순이, 그러니까 앉은 생활로 기억을 잃어가는 엉덩이와 앉은 자리에서 피서지로 떠나려는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모순이, 실은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아닐까? 시간적-공간적-금전적인 이유로 피서를 갈 수 없는 엉덩이는 공간 ASMR을 필요로 하고, 공간 ASMR은 그 여정을 위해 그리고 시원함을 느끼기 위한 실제의 엉덩이가 있어야 하니. 1929년에 태어난 밀란 쿤데라는 20세기 후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존재로 전락한 인간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는 삶의 굴레에서 원대한—혹은 무거운—가치를 창출하려고 하는 모순에 관해 썼다. ⟨생각하는 사람⟩(1904)이 보여주듯 삶의 무게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가벼우나, 그 가벼움이 무겁고 단단한 청동 조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2029년은? 21세기 전반의 인간 존재는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쓴 시대보다 더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네트워크에 올라타는 것만으로, 즉 오디오-비주얼을 경유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제 다른 시공간에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그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하는 케이블 선을, 수없이 얽혀 그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조차 모를 케이블 선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쉽게 그리고 빠르게 가상 현실에 가닿기 위해 더 선명한 화질의 스크린과 더욱 깨끗한 음질의 오디오 장비를 만들어낼 것이다. 가벼워지려는 욕망은 모순적으로 수많은/무거운 장비에 대한 욕망을 낳는다.


우리는 엉덩이와 함께 태어난 존재이기에 엉덩이 없는 자유를 꿈꾸고, 그 어느 때보다 쉽고 빠르게 취할 수 있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정교하고 견고한 장비와 그 표면에 맞닿은 엉덩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여름에도 짓눌린 엉덩이를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엉덩이와 표면 사이의 틈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1 네이버 지식백과 - 시사상식사전. 검색어: 엉덩이 기억상실증.

2 실제로 한국인의 하루평균 앉아서 보내는 시간의 추이가 매년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양해원, 「[카드뉴스] 엉덩이도 기억상실증에 걸려요」, 『매경헬스』, 2019년 7월 16일 접속, 출처.

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어: 납량.

4 손봉석, 「공포영화 보면 시원하다 14.8% 그쳐」, 『경향신문』, 2007년 7월 21일 접속, 출처.

p>5 유상연, 「제철 맞은 공포영화, 보면 정말 시원해질까」, 『한겨레신문』, 2009년 7월 17일 접속, 출처.

6 공간 ASMR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개별 콘텐츠 사례는 다음의 기사를 참고. Eliza Brooke, “The Soothing, Digital Rooms of YouTube,” New York Times, February 16, 2021, 출처.

7 그러나 공간 ASMR이 꼭 가상의 시공간만을 그려내는 것은 아니다. 공간 ASMR은 판타지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공간을 모티브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를 테면 파리와 같은 도시 길거리나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 ASMR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8 네이버 지식백과 - 시사상식사전. 검색어: ASM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