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세계를 테라포밍(terraforming)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테라포밍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및 위성, 기타 천체의 환경을 지구의 대기 및 온도, 생태계와 비슷하게 바꾸어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일차적으로 테라포밍은 자연을 이용 가능하게,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특정 형태를 부여(form)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글은 테라포밍의 범주를 확장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안전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언어도 일종의 테라포밍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로 3차원을 가로지르고 4차원으로 도약한다. 언어는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어쨌든 직접 만질 수 없다는 인류 최대의 약점(이자 강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착각을 생산하기 위한 기계다. 혹은 보잘것없는, 미미한, 너무 작고 가벼워서 잊히고 말 것을 위한 기계. 언어는 세계를 구획하는 동시에 우리를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울타리다. 그런데, 언어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리 애스터(Ari Aster)의 〈미드소마(Midsommar)〉(2019)와 나홍진의 〈곡성〉(2016)은 어느 날 갑자기, 또 우연히 닥친 사건에 사람들이 휘말리는 광경을 그린다. 귀신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공포 영화로 장르화되는 두 영화는 고어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 주지만 휘말리는 광경을 그린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전자의 사람들은 어떤 마련된 환경 안으로 침입하거나 초대를 받아 들여보내지고, 후자의 사람들은 그들이 마련한 환경을 침투당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또 우연히 닥친 사건’이라 함은 미스터리하고 오컬트적인 제의/굿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영화들에서 주요한 사건이자 유일무이한 사건은 바로 그들이 세계라고 알고 있는 것의 장막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이 글은 근 몇 년간 많은 공포 영화 중에서도 유달리 찬사와 비난의 대상이었던 〈미드소마〉와 〈곡성〉을 차례로 짚는다. 또한 내가 그동안 써 온 글들보다는 영화 감상문에 가까울 것임을 미리 밝힌다.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는 감독의 전작인 〈유전(Hereditary)〉(2018)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미드소마〉의 대니와 〈유전〉의 애니의 가족들은 매우 불행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이 불행은 인과율에 기반하지 않는다. 즉, 이 불행은 그들이 어떤 금기를 어겼거나 인간의 분수에 넘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찾아온 복수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나 보통의 영화 주인공들이 할 법한 절망(왜 하필 나일까! 왜 이런 고통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에게 찾아온 걸까!)을 하지 않는다. 이런 류의 절망, 즉 아무런 이유 없이 닥치는 불행과 잘못한 것도 없이 맞이해야 하는 재앙, 그리고 ‘왜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누릴 자격 없는 사람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전혀 새롭지 않다. 사람들은 기원 전부터 이에 관하여 질문했다.
성경 속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 욥은 신실한 믿음으로 신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고 있었으나, 어느 날 사탄이 욥의 믿음이 신실한 것은 신이 욥에게 내린 축복들 때문이고, 축복을 앗아간다면 욥은 신을 저주할 것이라고 내기를 건다. 신은 이 내기를 수락해 욥의 모든 재산과 부, 가족들까지 빼앗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자 사탄은 그의 몸에 피부병을 일으켜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 그가 믿음을 저버릴 것이라고 다시 내기를 건다. 신은 또 이 내기를 받아들여 욥이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허용한다. 욥의 아내는 신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고 폭언을 하고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잘못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신에게로 돌아가 조아리라고 조언하지만, 욥은 이 재앙이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에는 이유 없이 닥치는 불행과 재앙, 무결함의 관계, 그리고 세계의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이 잘 담겨 있다. (어찌 되었든 욥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신의 축복을 되찾는다.)
대니와 애니의 세계에서는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아니, 아예 인과관계가 없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사건들의 연쇄는 언어로 세계를 논리정연하게 구조화하려는 언어의 안쪽에서는 비상식적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약간 바꾸어서, 우리에게 불행인 많은 것들은 멀리서 바라본다면 단지 서로 관련 없는 사건들의 연쇄거나 우연한 겹침일 뿐, 여기에는 어떤 가치 판단도 개입되지 않는다. 대니와 애니는 미시적으로는 불행이고 거시적으로는 그냥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 이 사건들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대니와 애니의 주변 사람은 이 혼란을 언어화하여 세계를 테라포밍하고자 한다.
〈유전〉과 〈미드소마〉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인과관계가 먼저 있고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거친 뒤에야 인과관계가 비로소 구축된다는 것이다. 애니의 직업은 미니어처 아티스트로 그녀는 극 내내 미니어처를 제작한다. 그녀의 작품은 애니가 자신의 삶에서 발췌한 장면들을 재현하는데, 주로 모종의 불쾌함을 안고 있는 장면들(침대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애니를 바라보고 있는 친정 엄마 같은)이다. 여기서 미니어처 작품들은 그 상황에 놓여 있던 애니가 1인칭으로, 그러므로 수평적 시선으로, 사건 안에서만 바라볼 수 있던 세계를 외재화하여 3인칭으로 바꾸면서 전체를 수직적 시선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애니의 남편이 몸서리를 쳤던 작품 중 하나는 애니의 딸인 찰리의 목이 떨어져 죽은 장면을 재연 혹은 재현한 것인데, 남편이 설마 이 작품을 찰리가 죽을 때 함께 있었던 피터에게 보여 줄 것이냐고 묻자 애니는 “걔 보여 줄 거 아니야, 그 사고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이지!”라고 대답한다. 이를 보충하듯, 제작된 미니어처를 보여 주는 카메라의 위치는 종종 애니의 가정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여 주는 카메라의 위치와 겹쳐진다. 마치 이 세계 또한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도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수용해야만 하는 인간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일 뿐, 누가 이 세계를 창조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른 한편 〈미드소마〉에서는 대니 대신 그녀의 동행들이 이 역할을 맡는다. 대니의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은 학위 논문 리서치를 위하여 호르가(Hårga) 마을의 하지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이 축제에 동원되는 모든 것을 학문적 언어와 지식으로 포획, 객관적인 사실로 정리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으며 실제로 그런 야망을 실행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지제의 신성함은 작동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들 중 한 명은 호르가 마을의 상징적인 나무에 소변을 보는데, 이에 분노하는 마을 주민을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냥 나무를 가지고 왜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황당해한다. 이 장면은 세계의 신비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하는데, 호르가 마을의 주민들은 세계를 바꾸거나 변혁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거스르지 않는다기보다 인간이 세계를 거스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유지 보수, 세계라는 흐름에 동참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이나 섹슈얼리티,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분노, 즐거움 모두는 예비된 절차를 따르는 것일 뿐 그 무엇도 특별하지 않다. 호르가 마을의 사건을 논리적 언어로 구조화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죽는다. 그러나 이 역시 건방지게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에게 향하는 세계의 리벤지는 아니다.
또한 그들에게 진정한 종류의 소통이란 언어를 경유하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장면을 목격한 대니가 신체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올리는 절규에 주민들은 ‘그런 놈은 그만 잊어버리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세요’ 같은 대사가 아니라 함께, 짐승처럼 절규하는 것으로 합일을 시도한다. 대니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얻지 못했던,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바로 이런 언어 외의 일로 가능하고, 대니가 오월의 여왕이 된 것은 외로워서일지도 모른다. 호르가 마을은 인간의 소위 지성이라는 것과 그 지성으로는 절대 무너트릴 수 없는, 오히려 세계가 언어를 무너지게 만드는 결투의 장소다.
그런데 언어와 세계가 맞붙는 지점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전에, 또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니와 남자 친구의 관계는 불안정하다. 잘은 모르지만 과학적으로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실제로는? 사랑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의 삶을 짓누르기도 하며, 우리에게 그런 힘이 숨겨져 있었다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의 효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사랑은 우연을 운명으로 건설하고 운명도 우연으로 전락하게 한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만들고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내가 지금껏 써 온 몇 가지 글에서 ‘신비’라고 칭하는 것, 즉 ‘언어로 모조리 설명해 버린다 하더라도 소거되지 않는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에는 사랑의 존재 방식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세계를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세계에는 언어로 소거되지 않는 것이 계속 남는다. 우리는 사랑을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사랑에는 언어로 소거되지 않는 것이 계속 남는다. 사랑은 내가 앞서 설명한 세계처럼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기 때문에, “머리론 아는데 가슴으론 그게 안 돼……. 내 심장은 그에게만 끌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어…….”라는 문장이 작동하는 장소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혹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바로 그 이유로 영원히 좇게 되는 것, 그것이 저편에 있다. 나는 이것이 신비의 작동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예술은 이 신비에 도전한다. 상상력은 이를 위한 도구다.
〈미드소마〉에서 호르가 마을의 하지제는 90년에 한 번 9일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시기의 축제다. 이 9일이라는 기간 동안 언어의 안쪽,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만큼의 인과응보적 세계와 언어의 바깥, 비상식적이고 불가해한 초자연적 세계, 인과관계 없이 계속 발생하기만 하는 세계가 서로에게 트인다. 그러나 여기에 언어의 은총과 수호를 받고 있는 자는 들어갈 수 없다. 호르가에 도착한 대니 일행은 우선 마약 성분이 있는 차를 마신다. 이는 〈곡성〉에서도 마찬가지다. 〈곡성〉에는 두어 번 정도 환각 버섯을 먹은 사람들이 일으킨 사고에 관한 뉴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의 상태에서, 즉 언어의 가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뉴스거리가 될 수 있다.
이외에도 여기서 정리한 특징들은 나홍진이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각본을 쓴 최근작 〈랑종(The Medium)〉(2021)에서도 마찬가지로 견주어 볼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랑종〉은 태국어로 ‘무당’을 뜻하지만, 영어 제목은 ‘중간’이다. 무당, 영매 등 처음부터 언어의 안팎 그 중간(medium)에 있는 사람들만이 언어의 안팎이 트이고 세계와 ‘진정한 의미에서 합일’하는 엑스터시에 입장할 수 있다. 즉, 신비는, 사랑은, 세계는 믿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미드소마〉의 대니가 오월의 여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참가한 춤 대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발등에서 돋아난 자연을 환각으로 보며 빙글빙글 도는 춤을 반복해서 춘다. 결국 그녀는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처럼 꽃과 한 몸이 되어 세계 안으로 스며들고 마침내 웃는다.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외롭고 괴롭고 아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기쁨뿐.
이쯤에서 우리는 ‘인간의 좁은 시야로 볼 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로 가득 찬 이 세계에 인간이 좋든 싫든 살고 있다(우리는 모두 욥). 인간은 이 세계를 언어로 구조화해서 인과관계를 만들고 선형적이든 아니든 어떤 종류의 내러티브를 축조, 즉 테라포밍한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운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그 사고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이지) 그게 엄청 잘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어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언어의 바깥에 닿기 위해서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버섯과 언어의 바깥).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언어의 안팎이 트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는 놀랍도록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는 다른 종에 비해 더 특별한 종도, (환경 문제는 매우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이지만) 이 우주에 엄청난 반향을 끼칠 수 있는 종도 아니다. 이 생각도 엄청나게 새로운 생각은 물론 아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삼상 12:16)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욥 37:14)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은 다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일뿐이다.
이제 겨우 〈곡성〉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곡성〉과 〈미드소마〉 양자는 모두 언어의 바깥에 주목하고 세계를 언어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무용함과 그 앞에 선 우리 존재의 미미함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미드소마〉의 대니는 세계와 합일하며 웃지만, 〈곡성〉의 종구는 언어의 안팎이 트이는 곳에 입장한 자신의 딸 효진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남겨진다. 여기서는 〈미드소마〉를 볼 때 서사에 집중했던 것보다는, 무당 일광이 살을 날리기 위해 굿을 하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생각해 본다. 〈곡성〉이 재미있는 영화라면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추리를 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광이 외지인과 같은 훈도시를 입었다느니, 무명이 박춘배의 겉옷을 입고 있었다느니 같은 것을 근거로 들어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이 장면이 유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이 “이 사고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려 노력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일광이 살을 날리는 굿을 시작할 때, 귀신에 씌었다고 생각되는 효진은 효진의 방에 있고, 외지인은 자신의 집에 차려 놓은 제단 앞에서 자기만의 굿을(혹은 역살을 날리는 굿일 수도) 시작한다. 이때 외지인의 집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땅을 구획하기 위해 제작한 사회적 시스템인 주소가 없는 곳이다. 통계 바깥의, 정식이 아닌, 동사무소 시스템과 지도 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장소. 그는 곡성에만 외지인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에도 외지인이다.
어쨌든 이 세 개의 장소는 서로가 서로에게 겹치며 등장하는데, 이 일련의 장면들은 앞서 〈곡성〉이 편집된 암묵적인 문법을 뒤엉키게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경찰과 범인이 몸싸움을 벌이는 어떤 장면을 생각해 보자. 경찰이 주먹을 뻗는 씬이 먼저 보인다. 그러면 거의 99%의 확률로 다음 씬은 얼굴을 맞는 범인의 모습이 나온다. 주먹을 맞은 범인이 쓰러졌다가 다시 경찰에게 덤빈다. 그러면 또 거의 99%의 확률로 다음 씬은 경찰에게 덤비는 범인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 줄 것이다. 이는 영화 편집이 인과관계와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다. 영화 편집은 어떤 순서도, 선후 관계도 없이 존재하는 동시다발적인 사건들을 하나의 시간으로 엮어 여러 개의 무관한 장면을 서로 관련 있는 사건으로 만들며, 이는 우리가 언어 밖의 세계와 맞붙는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일과 꼭 닮았다. (심지어 이렇게 치밀하고 교묘하게 이어붙여 완성된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언어를 거쳐 인과관계가 구성되어야 하는 날것의 상태로 있다. 애니의 미니어처가 그러는 것처럼, 대니의 동행들이 수양하는 학문적 지식들이 그러는 것처럼, 〈곡성〉에 등장하는 수많은 직업들이 상징하는 것(경찰-법, 치안이라거나, 신부-종교 등)처럼, 우리는 날것의 세계를 세공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항상 재현을 통해서 완성되며, 그러므로 사후적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편집 문법이 〈곡성〉의 제의 장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살을 날리는 무당 일광이 나무로 된 인형에 못을 박으면 방 안에 있는 효진이가 인형의 못 박힌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는 자기 신체 부위를 감싸 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면 관객은 ‘어? 혹시 일광이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게 아니라 효진이를 죽이려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에서는 외지인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럼 관객은 다시 ‘어? 효진이를 죽이는 게 아니라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말미에는 갑자기 무명이 나와서 ‘즈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 들어가믄 니 딸 죽어.’라고 말한다. 그럼 ‘어? 혹시 무명이가 효진이를 저렇게 만든건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외에도 일광이 누구에게 공격을 당하는지, 외지인이 누구 때문에 산에서 굴러떨어져 죽는지, 일광은 왜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챙기는지 등, 서사를 더 명료히 하고 인과관계를 더 명확히 할 수 있는 장면들은 생략되어 있다. 종구는 고통 받는 효진을 보다 못해 결국 일광의 굿에 깽판을 놓는다. 그제서야 효진의 고통도 멈춘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굿이 끝나 버렸기 때문에 효진의 고통도 멈춘 걸까? 외지인의 굿도 비슷한 시기에 끝나지 않았나? 종구의 상상은 현실이 되나?
어쩐지 편집이 덜 된 것 같은, 그러므로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장면들을 시간상 연달아 보기는 하지만, 관객은 앞에 나오는 장면과 뒤에 나오는 장면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신부가 초자연적 현상을 이야기하는 종구에게 “직접 봤어요?”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사실 종구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 악마일 것이라거나 외지인과 일광이 한패라고 추리하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은 무명이 효진이를 저주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나? 외지인의 집에서 효진이의 실내화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효진이가 귀신 들릴 만한 일을 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나? 〈곡성〉은 무엇이 사실이거나 사실로 인준을 받을 수 있냐고 묻는 영화가 아니다. 〈곡성〉은 사실의 개념 자체를 무너지게 하고 우리가 딛고 있는 언어가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에둘러 말한다.
이런 지점에서, 〈곡성〉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자신이 만들어진 바 사이에 교묘한 공명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영화다. 인과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로,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탐구하면서, 관객이 스스로 인과관계를 만들어 가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그 노력을 무화하는 다른 장면을 함께 보여 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는 일, 다만 세계를 바라보기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를 삶이라고 설명하거나 삶을 영화라고 말하는 일은 느끼하지만 유효하다.
할 수 있는 일이 목격밖에 없다는 것은 절망일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 글의 주요 주장은 세카이계, 포스트-진실, 짜라투스트라 등으로 확장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아래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약간 어리버리하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양이삼 신부가 외지인을 찾아가 그에게 묻는다.
“あなたは誰?”
세계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우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