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피파스타 레시피

황재민

1.

무서운 이야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만들어 낼까? 무서운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입에서 와서 듣는 이의 마음으로 간다. 그리곤 입과 마음 사이의 텅 빈 곳, 메시지가 영원히 닿지 않는 손실의 공간을 점유한다. 말하자면 무서운 이야기는 수신 장치와 송신 장치 사이, 항구적인 손실, 그 잡음의 공간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손실은 어마한 현실에 의해 발생하고(텔레비전은 우주배경복사를 포착해 노이즈로 출력한다), 또한 모든 미디어의 공통 조건이다. 그러므로 무서운 이야기는 현실을 포집하고자 애쓰며, 동시에 기술을 타고 편재한다. 몇 가지 예가 있다.


1938년, 오손 웰즈(Orson Welles)는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의 장편 『우주 전쟁(The War of the Worlds)』(1897)을 라디오 드라마로 개작했다. 화성인의 침공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실제 뉴스 방송처럼 연출했는데, 청취자들은 이것을 그만 실제로 오인했다고 한다. 1993년, 영국 BBC는 할로윈 특집 드라마로 《고스트왓치(Ghostwatch)》를 기획했다. 귀신 들린 집을 직접 찾아가 중계한다는 내용의 방송이었다. 이것은 생방송처럼 꾸민 드라마였지만, 몇 가지 오해로 인해 시청자들은 그것을 진짜 생방송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TV 속에서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현상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크게 충격받았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으며 정신적 피해가 보고되었다. 그리고 1999년, 《블레어 위치(The Blair Witch Project)》가 개봉했다.


구전 설화에서, 라디오 드라마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리고 극장에서. 각각의 미디어 기술은 스스로를 대표하는 무서운 이야기를 갖는다. 그렇다면 인터넷의 시대,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의 시대에 무서운 이야기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블레어 위치》 이후, 《블레어 위치》보다 성공한 무서운 이야기가 드물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더 많고 다양한 정보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발전한 리터러시를 갖는다. 그리고 이 변화는 공포에 비견될 만한 손실을 허용하지 않는다. 혹은 정반대의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다. 더 많고 다양한 정보는 진실을 가리고,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모든 뉴스가 곧 무서운 이야기로 변한다. 괴담이라는 잡음을 허용치 않는 미디어 환경, 또는 현실이 괴담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미디어 환경. 둘 중 무엇을 바라보든 무서운 이야기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괴담은 꾸준히 기능하고자 했다. 이 중 하나의 사례로 크리피파스타(creepypasta)에 대해 말해볼 수 있다.


2.

크리피파스타는 카피파스타(copypasta)의 변형이다. 카피파스타는 ‘복사, 붙여넣기(copy & paste)’하여 파스타처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인터넷 기반의 내러티브를 가리키는 속어다. 크리피파스타는 무수히 많은, 또 끊임없이 확장하는 카피파스타 중, 특히 무섭고 등골 섬찟한 것, 기괴한 것 등을 특정하는 파생어다. 여러 맥락을 제거하고 옮긴다면 ‘공포썰’, 아니면 ‘귀신썰’ 정도의 뉘앙스가 될까? 혹은 그냥 ‘도시괴담’? 아무튼 이것은 현대의 디지털 구전 설화로 공간도 시간도 없는 장소, 인터넷을 통해 확장되고 덧입혀지고 변형되며 공유되는 바이럴 내러티브의 일종이다.1


인터넷에 전적으로 의지한 미디어로써 크리피파스타가 갖는 명료한 특징이 있다. 이것은 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취하는 헌신, 그리고 참여에 의해, 무엇보다도 진실성(sincerity)에 힘입어 지탱된다.2 물론 헌신이 담긴 진실성 같은 것은 진실 이후의 시대에서 작동하기 어려운 가치다. 하지만 대신, 여기엔 규칙이 있다. 온갖 무서운 이야기를 공유하는 레딧(Reddit)의 게시판(서브레딧 subreddit), ‘잠들 수 없는(nosleep)’의 게시판 규칙 8번 항목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있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 심지어 진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Everything is true here, even if it's not.)”3 먼 과거, 무서운 이야기는 자연 발생하는 믿음에 기생해야 했다. 순진한(naïve) 믿음에 올라타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시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괴담은 순진한(naïve) 믿음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한(ironic) 믿음, ‘알면서 믿는’ 믿음에 의지하며, 규칙을 통해 공간을 확보한다.4 이 공간에서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확장되며, 곧 선동적 믿음을 만들어낸다.


크리피파스타가 인터넷의 문법에 익숙한 참여자들에 의해 전달된다는 점, 이를 통해 모종의 공간의 감염시킨다는 점은 중요하게 보인다. 이들의 헌신에 의하여, 크리피파스타는 여러 인터넷 플랫폼(internet platform)을 자발적으로 횡단한다.5 트위터에서는 트위터의 문법으로, 레딧에서는 레딧의 문법으로, 또 블로그를 통해서는 조금 더 고전적인 포스트로 행세하며, 이 내러티브는 어색함 없이 자리 잡는다. 참여자의 크리피파스타 ‘복사, 붙여넣기’, ‘복붙’은 각 플랫폼에 기설정된 구조를 차용한 다음 그것을 단순 변용하면서 ‘비창조적 글쓰기(uncreative writing)’를 실천한다.6 자연 발생적인 순진한 믿음에 기초하는 괴담은, 현실성을 포집하고 점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보편화된 인터넷과 ‘탈-진실’의 시기, 이제 더는 점유할 현실이 남아 있지 않기에, 크리피파스타는 본능적으로 플랫폼을 점유한다. 현실과 플랫폼이 분리 불가능한 시대에 적극적으로 플랫폼을 오염시키는 내러티브. 그것은 새로운 괴담을 만들어낸다.


또,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 구조에 대해, 한 가지 첨언이 더 필요하다.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네트워크화(networked)한다.7 인터넷에서, 내러티브는 단순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플랫폼의 관성에 맞추어 변형되거나 혹은 반복적으로 열화되면서 변화한다. 또한 내러티브는 다양한 인터넷 인간의 진실된 참여와 함께, 텍스트를 뛰어넘는다. 포토샵을 이용해 편집된 이미지로, 또 유튜브의 DIY 비디오 모놀로그로, 가능한 모든 형식을 차지하며 확장되는 것이다. 크리피파스타는 단 한 줄로도 만들어질 수 있고, 그렇기에 정제될 때는 너무 빈약한 내용일 때가 많다. 이 사실은 영화나 소설처럼, 이미 확립된 형식으로 내러티브가 정제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되려 크리피파스타의 구조를 견고하게 한다; 저자가 튀어나오기 어려운 환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크리피파스타는 여러 플랫폼을 넘나들며 꼬이고 고장난 끝에 새로운 이야기로 파열된다고 해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인식되지 않고, 또 ‘2차 창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저자성이 격하되지도 않는다. 만일 당신이 레딧의 ‘잠들 수 없는’ 게시판에 들러 “나 어제, 백룸에 다녀온 것 같아”8라고 쓴다면, 그 누구도 당신에게 “이 세상에 백룸 같은 건 없어. 미안한데 너 인터넷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으니 나가서 산책을 좀 해보렴.”이라고 차갑게 대꾸하거나 “와 찐이네… 이곳은 곧 성지가 됩니다 엔시티 제노를 영업합니다 미모 실화냐?”라고 매정하게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게시판의 8번 규칙에 입각해, 사람들은 “그래? 어땠어?”라고 되묻거나 “마침 나도 어제 다녀왔던 것 같은데… 혹시 우리 같은 레벨에 있었나? 그때 쾅 소리를 냈던 게 혹시 너야?”라고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질문과 답변이 이어질 것이고, 그것은 또 하나의 내러티브 감염체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크리피파스타가 ‘네트워크 내러티브(networked narrative)’를 만들어내게 돕는다. 이렇게 네트워크화된 내러티브 객체는 원본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복사본도 아닌 상태, (말하자면) ‘귀신 들림(haunted)’을 겪으며 주체와 객체와의 이분법을 분쇄하는 내러티브 공간을 창출한다. 요컨대 새로운 괴담을 위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이제 현실은 괴담을 위한 바탕이 된다.9


3.

그리고, 슬렌더맨(Slenderman)이라는 괴물이 있다. 2009년 한 인터넷 게시판에 게시된 이래 예외적인 명성을 얻은 이 괴물은, 크리피파스타라는 내러티브 양식, 혹은 내러티브 공간을 대표한다. 이목구비가 없는 새하얀 얼굴에, 언제나 검은 양복을 입고 있으며, 사지가 믿을 수 없이 길고 또 원하는 대로 늘릴 수 있다고 알려진 무언가. 슬렌더맨은 갑작스레 나타나 아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며, 자신의 얼굴을 맞댄 사람을 죽거나 미치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그 어떤 인간도 슬렌더맨을 직접 목격할 수 없다.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눈 깜빡하는 사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진, 슬렌더맨이라는 현상을 신체로 느꼈거나, 혹은 광학기기에 우연히, 정말 우연히 포착된 그것의 잔상을 ‘힐끗 보(glimpse)’았을 따름이다.10



(이미지1) 카메라에 우연히 포착된 슬렌더맨의 모습

포토샵 된 이미지 한 장과 그리고 짧은 상황 묘사로 출발한 슬렌더맨은 곧 수많은 내러티브로 확장되었다. 설정이 덧입혀졌고 캐릭터가 늘어났다. 슬렌더맨의 팔이 왜 늘어나는 줄 알아? 그건 사실 그게 기다랗고 매혹적인 촉수라서 그래. 슬렌더맨은 사실 기원전부터 살아남은 존재야. 인류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지… 슬렌더맨은 숲속에 있는 거대한 집에 살고 그 집엔 그의 하수인들이 있어. (그리고 슬렌더맨은 가끔 그 하수인들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을 때가 있는데…) 슬렌더맨이 나타난 곳에는 항상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는데, 그 종이를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되냐면… 내러티브는 곧 세계가 되었고 세계관은 곧 ‘슬렌더버스(Slenderverse)’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11 슬렌더맨은 위키피디아와 팬덤 위키에 기록되었고, 또 ‘마블 호넷(Marble Hornets) 시리즈’와 같은 성공적인 2차 창작 미디어로 연결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그저 평범한 2.5D 놀이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슬렌더맨의 내러티브가 네트워크화하는 동안 발생한 의외의 현상이 있었다. 괴물이 실체를 갖게 된 것이다.


연구자 안드레아 키타(Andrea Kitta)는 늦은 밤이나 새벽, 어딘가 어두운 곳에서 슬렌더맨을 보거나 느꼈다는 증언을 여럿 소개한다. 그들은 집 화장실이나 부엌 한 켠에서, 혹은 귀갓길의 어둠 속에서, 실제로 슬렌더맨의 존재를 느꼈으며 공포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 놀며 “조심해! 슬렌더맨이 쫓아온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았다고도 쓰는데12, 슬렌더맨이 진짜로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이것은 착각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슬렌더맨이 착각을 만들어냈다는 사실 자체다. 이야기꾼의 입과 듣는 이의 마음 사이, 송신 장치와 수신 장치 사이의 갭에서, 사라지지 않을 그 손실의 한 가운데에서, 슬렌더맨은 그간 유령이라 불린 괴물을 대체하며 실체화한다. 아이러니컬한 믿음이 조형한 선동적 믿음의 유희가 순진한 믿음을 경유하여 자연 발생적 믿음으로 발달한다. 자연 발생적 믿음은 신체적 믿음을 동반하는데, 그 신체 속에서,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현실이 된다.


조형된 괴담의 양식에 진정성 있게 거짓을 이입한 수많은 인터넷 플랫폼 지박령들의 (말하자면) ‘진짜 가짜’ 숭배가 바로 이 신화를 지탱하며 현실을 감염시킨 주범이다. 누구나 승인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비창조적 글쓰기’의 귀신 들린 내러티브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괴물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 이 괴물이 유령으로 대표되는 원시적이고 신체적인 믿음의 영역을 점거하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한없이 고무적이다. 무서운 이야기는 드디어 힘을 갖는다 – 이제 더 많은 괴담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물컵을 움직이는 괴담부터 세상을 무너뜨리는 괴담에 이르기까지. 이제 모든 텍스트 생산자는 괴담의 생산자로 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멈추는 곳은 어디일까?


4.

이것은 수사적 질문이 아니다.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2014년 5월 31일, 미국 위스콘신 워케샤 카운티의 한 어두운 숲속에서 마침내 멈춰서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자.


2014년 5월 31일 워케샤 카운티의 한 숲 근처 도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행인이 있었다. 그는 곧 까만 플리스 재킷을 입은 청소년이 바닥에 누워 쓰러진 것을 발견한다. 놀란 행인은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곧 청소년이 심각한 상처를 여럿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진찰 결과, 온몸에 19개나 되는 자상을 입은 사실이 밝혀진다. 어느 새벽, 어두운 숲 속에서 일어난 잔인한 범행. 다행히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둘이었고, 모두 피해자와 평소 절친했던 또래였다. 경찰은 두 사람의 가방 속에서 피 묻은 흉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사건 당일 새벽, 발견 장소 인근 숲 속에서 숨바꼭질하며 함께 어울렸다는 정황을 바탕으로 둘을 검거했다. 하지만 한 가지 퍼즐 조각이 비어 있었다.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피해자와 친했던 두 사람이 날카로운 칼로, 19번이나, 피해자를 공격했을까? 범인은 증언했다. 슬렌더맨의 대저택에서 하수인으로 살고 싶었다고. 하수인이 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고. 이 답을 들은 청자의 머릿속에선 무슨 소리가 울렸을까? 그것은 내러티브가 실재를 파열시키는 소리였을까, 혹은 내러티브가 실재 앞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바람이 빠지는 소리였을까?13


사건에 대해 정리하며, 워케샤 카운티의 경찰서장 러셀 P. 잭(Russell P. Jack)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둡고 이상한 것(Dark and wicked things)에 아이들을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인터넷은 위험한 공간입니다.14두렵고 무섭고 고통스러우며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이상한 것. 이 표현은 ‘유치한 것’이라는 뜻으로 당장 바꿀 수 있을 듯해 흥미롭다.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 실천은 결과적으로 유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슬렌더맨 내러티브의 참여자들 또한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믿음으로 선동적 믿음을 길어 올리며, 누구도 슬렌더맨의 실존을 믿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러나 그들이 남긴 내러티브의 감염체를 워케샤 카운티의 두 청소년은 믿어버리고 말았다.


민속학자(Folklorist) 제프리 A. 톨버트(Jeffrey A. Tolbert)는 이 ‘슬렌더맨 사건(Slender Man stabbing)’ 이후 발생한 여러 논의를 추적하며, 관련 커뮤니티, 크리피파스타의 발원지에서 형성된 패닉을 기록한다. 패닉은 슬렌더맨이라는 공포스러운 대상의 현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패닉은 선동적 믿음이 사회의 가장 약한 구성원, 이를테면 청소년을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에 발생했다.15 믿음은, 괴담은, 위험은,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충격하기 전에 먼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향한다. 무서운 이야기 속에서, 슬렌더맨은 강력하고 온전할 뿐만 아니라 끝없이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르가 갑작스럽게 범죄 드라마로 바뀐 다음, 슬렌더맨의 존재감은 쪼그라든다. 그것과 함께 크리피파스타가 형성한 감염의 엔트로피는 예기치 못한 곳으로 향한다. 괴담이 성공적으로 변할수록, 마침내 실체를 얻은 이후, 즉각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향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직시할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말해, 이제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믿음을 현실화시키며 테러리스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순종할 것인가?


5.

됐고… 무서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데이지 브라운(Daisy Brown)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운영된 이 채널엔 핸드폰 하나를 대충 들고 찍은 듯한 브이로그나 메이크업 튜토리얼이나, 손으로 그린 어설픈 드로잉 같은 게 올라오곤 했는데,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유튜브 채널이나 다름없었는데, 한 가지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채널의 거의 모든 영상에, 앨런(Alan)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 그랬다. 더 나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만, 희뿌연 눈알과 짓무른 푸른 얼굴, 듬성듬성 난 가는 이빨이 눈에 띄는 앨런은 어디를 보아도 괴물이었다.


데이지 브라운 채널은 첫 영상이 바이럴된 후 관심을 끌었다. 〈내가 앨런 밥 주는 법(How I feed Alan)〉(2017)이라는 제목의 영상엔 괴물 앨런이 전면을 차지한 썸네일이 놓였는데, 확실히 거기엔 누구나 한 번쯤 눌러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수상함이 있었다. 영상은 3분 남짓으로 짧았으며 내용도 별 게 없었다. 데이지가 포대기에 싸여 움직이지 못하는 작은 앨런에게 설탕 캡슐을 먹이는 장면이 다였다. 호기심에 끌려 영상을 보게 된 사람 중 몇몇은 “또다시 인터넷의 이상한 영역에 들어왔다”라며 관심을 껐을 테지만, 그 외 누군가는 분명히 이 채널을 구독하거나, 최소한 꾸준히 지켜보았을 것이고, 얼마 뒤 이 채널이 크리피파스타의 확장된 내러티브를 차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내가 앨런 밥 주는 법(How I feed Alan)〉

그 뒤 채널엔 드문드문 영상이 업로드되었고, 이야기는 아주 천천히, 1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작은 앨런을 돌보는 데이지, 사라진 아빠에 대해 말하는 데이지,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못하며 혼자서 끊임없이 외로워하는 데이지. 그리고 앨런이 데이지 브라운의 사라진 아빠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또 다른 괴물이 있으며 데이지의 아빠가 사라진 건 그 괴물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아빠는 데이지의 유일한 친족이었으며 그러나 폭력적인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앨런은 마침내 데이지의 돌봄이 필요 없는 큰 괴물로 자라나고 마는데, 마치 사라져버린 아빠와 똑같이 위협적으로 굴기 시작했다는 것 등등.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데이지 브라운이 보여주는 내러티브에는 빈칸이 많을 뿐더러, 숨겨진 부분도 많다. 데이지의 신체 일부는 언제나 스크린 바깥으로 튀어나가 있고, 음질은 버석하며, 카메라는 흔들리고 자막은 가공되어 있지 않다. 이 (의도된) 아마추어리즘은, 무언가를 말하고 전달하는 대신 누락하고 숨기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온전히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비어 있는 부분들은 데이지 브라운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16, (영상 내 자막이 아닌) 유튜브 자막을 통해, 또 이 내러티브를 굳이 분석하려 드는 익명의 참여자들과, 참여자들이 기록한 팬덤 위키 내 문서들과, 또 ‘리뷰 유튜버’들의 비디오 에세이를 통해, 그러니까 네트워크된 상황을 경유해 퍼즐 맞춰진다. 말하자면 이 내러티브는 네트워크를 유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비어 있다. 마치 슬렌더맨을 둘러싼 여러 파생물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슬렌더맨이, 이를테면 ‘페이크 다큐멘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듯, 데이지 브라운의 유튜브 채널 역시 슬렌더맨을 둘러싼 크리피파스타 내러티브와는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가장 큰 차이는 아마 괴물의 존재일 것 같다. 앞에서 말했듯, 슬렌더맨은 ‘힐끗 보기(glimpse)’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은 등 뒤에서 나타나거나 시선 바깥에서 튀어나오고,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지 않고 노이즈와 함께 분산된다. 그것은 손실을 경유해 현실에 기생하는 이미지이며, 흐리고 저화질일수록 효과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데이지 브라운의 채널에서, 괴물은 갑작스러운 곳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기법으로써 ‘점프 스케어’ 정도는 존재한다.) 괴물은 내러티브가 시작되는 첫 순간 모습을 드러내고, 가장 약한 모습을 전부 보여준다. 손실을 노리고 조형된 디지털 이미지가 아니라 손으로 만든 공예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괴물 앨런은 그 무엇도 속이려 들지 않는다.


무엇도 속일 생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무서운 이야기-네트워크의 중요 노드가 되는 현상. 아마 이것이 데이지 브라운의 작동 방식이 슬렌더맨의 그것과 가장 다른 지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데이지 브라운은 괴담을 생산하지만, 그 경로는 안정되어있고, 그렇기에 위험으로 뻗어 나가지 않으며 비교적 안전하다. 슬렌더맨이 자연이라면 데이지 브라운은 정원이다. (이 비유에는 큰 비약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을 마냥 더 나은 괴담이라고 포장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데, 슬렌더맨의 존재론, ‘힐끗 보기’를 포기한 크리피파스타의 DIY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첫 영상이 업로드된 후 약 1년 정도 지난 뒤, 간헐적으로 업로드된 이 누더기 같은 내러티브도 드디어 결말로 접어 든다. 그에 따라 어느 정도 드라마가 격렬해지는데, 문제는… 몸싸움이 벌어지고, 비밀이 밝혀지고, 앵스트가 폭발하는데도, 그 어쩔 수 없는 어설픔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참고 봐주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심지어 대사조차… 움찔거리며 설탕 캡슐을 받아먹던 작은 괴물에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난 괴물 앨런은 울부짖는 데이지를 가로 막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제일 아끼는 작은 다이크가 이렇게 빠져나가게 그냥 놔둘 것 같아?” 장난하냐고… 하지만 크리피파스타가 빠르게 관습화된 후, 그 배경 위에서 형성된 내러티브로써, 데이지 브라운은 진짜 믿음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포기한 대신 가짜 믿음 위에서 확고하게 정상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를 위해 실재는 물론 필요하지 않으며, 더는 허구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내러티브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진 이 엉망진창의 무언가가 과연 내러티브이기나 할까? 하지만 이 엉망진창 내러티브에 누군가는 마음을 이입한다. 이야기는 거칠지만 효과적이다. 유일한 친구이자 내가 애쓰며 돌보던 무언가가 나 몰래 매일 자라나 나를 해치기 시작한다는 것. 천천히 자라나 말을 배우고 팔 다리가 생긴 괴물 앨런은 데이지 브라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니네 아빠는 어디 있어, 데이지?”) 스트로베리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죽인다. 게다가 데이지 브라운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이 채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데이지를, 그리고 데이지의 영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괴물 앨런을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데이지는 울면서 말한다. 사람들은 다 앨런만 보고 싶어해. 아빠는 내가 있는 데도 왜 앨런을 만들어낸 거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싶은 이카리 신지적 감정과 함께, 채널에 올라온 마지막 영상에서, 데이지 브라운은 그 동안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방법, 마침내 집을 나가버리는 방법을 실천에 옮긴다. 그러나 괴물 앨런은 시시덕거리며 그를 막아서고, 하지만 데이지는 어떻게든 집을 나가야 하기에, 또 한 가지 그 동안 해본 적 없던 일을 저지르는데, 그것은 바로 유일한 친구였던 그 괴물을 죽여 없애는 일이다. 많은 것을 간추려 말하자면, 데이지 브라운의 이야기는 유독한 관계에 고통받던 누군가가 결국 집을 뛰쳐 나오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 해방감 같은 것은 없고, 그저 집을 나온 뒤에도 상실과 고통은 계속되리라는 익숙한 감정이 자리한다.



(이미지2) 데이지 브라운 채널에 올라온 마지막 영상의 마지막 장면.

〈내가 어떻게(그리고 왜) 데이지 브라운을 만들었는가(How (and why) I made Daisy Brown)〉

데이지 브라운의 창작자 줄리아 대퍼(Julia Dapper)는 올해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다. 비디오 에세이 비슷한 콘텐츠를 게시하는 이 채널을 통해, 대퍼는 “내가 어떻게(그리고 왜) 데이지 브라운을 만들었는가(How (and why) I made Daisy Brown)”라는 제목으로 늦은 후일담을 공개한다. 대퍼는 비슷한 형식의 유튜브 영상들, 그러니까 (슬렌더맨의 파생 내러티브인) ‘마블 호넷’과 같은 시리즈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되뇌었지만 이 아이디어는 끝까지 사라지질 않았으며… 어느 날 데이트 상대에게 이 머릿속 계획에 대해 털어놓게 된다. 그러자 상대방은 대퍼에게, 그런 걸 대체 왜 하냐고… 사람들이 전부 비웃을 거라고 말했고, 대퍼는 그 다음 날 바로 괴물 앨런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컨대 데이지 브라운의 내러티브 안에는 크리피파스타와 같은, 어둡고 이상한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10대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 세상에게 품은 앙심(spite) 비슷한 게 있다. 누군가 영상에 이입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만약 이것이 내러티브로 허용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앙심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는 어쩌면 기존의 내러티브와 데이지 브라운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차이점을 갖는지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가 되느니 세상을 저주하는 10대가 되는 게 더 낫다는 점에서, 나는 이 이야기가 슬렌더맨의 충격 위에서 들여다볼 만한, 교훈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보기로 한다.




1 Joe Ondrak, “Spectres des Monstres: Post-postmodernisms, hauntology and creepypasta narratives as digital fiction,” Horror Studies, 9(2) (2018), 3.

2 Ibid., 12.

3 "r/nosleep Rules", 2021년 8월 25일 접속, 출처.

4 Jeffrey A. Tolbert, “Dark and Wicked Things: Slender Man, the Folkloresque, and the Implications of Belief,” Contemporary Legend series, 3 (2015), 13.

5 Ondrak, op. cit., 18.

6 Ondrak, op. cit., 8.

7 Kevin Cooley, Caleb Andrew Milligan, “Haunted objects, networked subjects: The nightmarish nostalgia of creepypasta,” Horror Studies, vol. 9, no. 2 (2018), 194.

8'백룸(The Backrooms)'이라는 크리피파스타와 그 성질에 대해서는 abs 2호에 실린 이지우, 「매혹의 키놉시아」를 참조.

9 Paul Manning, “Monstrous Media and Media Monsters: From Cottingley to Waukesha,” Slender Man is Coming (2018), 168.

10 Adam Daniel, “‘Always Watching’: The Interface of Horror and Digital Cinema in Marble Hornets”, Global Media Journal: Australian Edition, vol. 10, no. 1 (2016), 5.

11 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팬덤 위키 내 슬렌더버스 위키를 훑어보라. 출처.

12 Andrea Kitta, “What Happens When the Pictures Are No Longer Photoshops? - Slender Man, Belief, and the Unacknowledged Common Experience”, Contemporary Legend series, 3 (2015), 70-71.

13 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위키피디아 문서를 참조. 가해자인 애니사 와이어(Anissa Weier)와 모건 게이저(Morgan Geyser)는 각각 2급, 1급 살인미수로 기소되었다. 출처.

14 Jeffrey A. Tolbert, op. cit., 42.

15 Ibid., 44.

16 계정은 아직도 살아 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