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친구가 겪은 일인데...” 이 문장은 도시괴담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경적이자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얼마간의 사실성을 담보해주는 마법 주문과도 같은 말이다. ‘이건 내가 겪은 일이야.’라고 단언하는 괴담을 들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 할머니가 예전에 그랬대.’ 혹은 ‘내 친구의 친구가 거길 다녀왔대.’라는 식의 괴담의 간접적인 기생 방식은 사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만적인 자유와 그럼에도 일말의 실재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섞여 만들어낸 기묘한 결과물이다. 도시괴담의 포인트는 언제나 내가 직접 겪지 않았기에 미스테리하고 신비하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가 겪은 일이기에 그럴듯해 보인다는 현실감이 공존하는 데에 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같아 보이는 것, 혹은 사실이길 내심 바라는 것이 도시괴담의 정체인 것이다.
이는 종교의 존재 방식과는 사뭇 다른 것인데, 종교는 의심과 회유의 전략을 모두 적극적으로 구사하지만 결국에는 이를 통해 절대자와 신자 사이의 절대적인 믿음을 확립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 그러나 도시괴담은 확실하고 절대적인 것을 요구하는 일에서 일부러 자리를 멀리하며 얄팍한 의심의 장막을 이야기와 청자 사이에 넓게 펼쳐 놓는 방식을 취한다. 이때, 말과 글, 그림 그리고 영상 매체는 신앙에 의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 상상의 영역을 현실화함으로써 점차 더 강력한 믿음의 증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반면 도시괴담의 경우, 도시의 형성과 함께 (혹은 그 이전부터) 탄생한 이래 그 모든 매체를 경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가시성을 확보하는 것을 유보해왔다.
그렇다면 도시괴담이 시각화되는 일은 어떤 효과를 만들어낼까. 의심이라는 장막을 모조리 걷어내고 믿음의 가능성을 조금 더 증폭시켜 주는 일일까, 아니면 거짓말일 줄 알았다며 스스로를 그저 그런 낭설로 전락시켜버리는 일일까. 아니, 그보다 이에 앞서 대체 왜 도시괴담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시괴담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아닌가. 그러나 빨간 마스크 괴담, 노래를 끝까지 들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팥죽송 괴담, 시중에 납품되는 닭꼬치의 재료가 실은 비둘기였다는 괴담 등 비슷한 시간대를 공유한 이들에게 도시괴담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인지하는 꽤 강력한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뻥 뚫린 도로를 볼 때, 어떤 길을 걸을 때, 그리고 특정 역 앞을 지날 때 머릿속을 스치는 공통의 기억과 감각은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는 간접적, 사변적 방식이 된다. 여기에 도시괴담의 희미하게 반짝이는 가능성이 있다. (그 의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면의 위아래를 유연하게 오가며 애매한 진실을 재구성하고 현실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수행할 때 도시괴담은 존재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다시 도시괴담의 시각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구전을 거쳐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을 경유하며 모양을 달리해온 도시괴담은 이미지가 범람하고 이야기의 재생산 속도가 전례 없이 가속화된 동시대의 매체 환경에서 좀처럼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조각난 파편처럼, 격랑을 맞은 정보의 잔해처럼 도시의 저변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동시대의 도시괴담은 진실과 허구의 사이에서 의심을 자처하는 양가적인 태도가 스스로를 어쩌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으로 격상시켜주는 본질이라는 점을 주지하며 그 생존전략을 다시 한번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도시괴담은 이미지와 말의 상호 보충적 결과물로서 어떻게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을까? 도시괴담이 시각화된 사례들을 비교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에 앞서 간략히 도시괴담의 시각화 역사를 살핀다.1 이번 글에서는 국내 대중매체 내에서의 사례들을 살피는 것으로 한정한다. 제일 먼저 괴담이 매체를 타기 시작한 건 신문과 라디오이지만, 이들은 철저하게 도시괴담의 생존 법칙을 준수하며 오로지 언어를 통한 묘사로만 그 몸집을 부풀렸다. 텔레비전이 등장함에 따라 도시괴담의 생존 법칙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는데, 움직이고 숨 쉬는 이미지를 쏟아내는 텔레비전에서 더 이상 말과 글자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만으로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납량특집’ 하면 으레껏 제일 먼저 떠오르는 프로그램들이 몇 가지 있다. ⟨전설의 고향⟩과 ⟨토요미스테리극장⟩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둘 말고도 몇 개의 역사가 더 있는데, MBC의 ⟨다큐드라마 이야기 속으로⟩, 경인 TV에서 방영했던 ⟨미스터리 극장 위험한 초대⟩가 그것이다. ⟨미스터리 극장 위험한 초대⟩를 제외하고 이 세 개의 프로그램은 모두 1996년부터 2000년 이전까지 밀레니엄의 도래를 앞두고 이른바 ‘엽기’라는 기이한 코드가 사회를 장악했던 1990년대 말, 이상한 것들에 대한 열광과 함께 성행했다.2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사실과 거짓 사이에서 거짓이 되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를테면 ⟨토요미스테리극장⟩의 경우 최초의 프로그램명은 ‘토요미스테리’였으나 너무 사실 같아 공포스럽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을 이유로 4회 방송부터는 뒤에 ‘극장’을 추가해 허구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분명히 밝힌다. ⟨다큐드라마 이야기 속으로⟩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초기 제목은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였으나, 비과학적인 내용을 다큐멘터리라는 명칭으로 사실처럼 에둘러 포장한다는 방송통신위원회의 경고에 따라 ‘다큐드라마’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거짓이 되기를 선택함에 따라 이들은 더욱 자극적이고 허구적인 재연을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일괄 1999년을 전후로 비슷한 시기에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IMF 상황의 악화로 인해 사회 분위기 전반이 침체되었고 이에 국민에게 건강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방송계 전반의 기조에 따른 사실상 강제 폐지에 가까운 결과였다.
이후 공포 프로그램의 역사는 20여 년간 맥이 끊겼다가 ⟨심야괴담회⟩(MBC)의 탄생과 함께 부활한다. 그러나 도시괴담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종류가 단순 공포만이 아니라 으스스하거나 기이한 것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도시괴담을 다룬 프로그램들은 꾸준히 지속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2002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19년간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건‧사고와 음모론 등을 재연의 형식으로 다룬다. 오랜 방영 기간으로 인해 내용이 점차 흥미 본위의 자극적이거나 엉성한 사건들로 점철되고는 있으나, 그럼에도 이 장수 프로그램이 미스테리, 괴담의 분과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분명하다. 서프라이즈에서의 재연은 조악한 분장과 어색한 연기를 전매특허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재연은 그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며, 그저 하나의 콩트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제공할 뿐이다(심지어 서프라이즈는 높은 확률로 실제 있던 사건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MBC에서 방송되었던 ⟨타임머신⟩ 역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과거의 신문 사회면에 실린 사건, 사고를 다뤘다. 각 사회의 분위기나 변화하는 구조와 밀접하게 연동하며 이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시괴담의 배경과는 가장 근접하지만 명백한 사실들만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는 다른 것들과 분리되는 지점에 놓인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소재의 고갈에 따라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편, 앞서 잠시 언급했던 공포 프로그램 ⟨심야괴담회⟩ 역시 패널들의 사연 읽기와 재연이 결합된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심야괴담회⟩는 시청자 제보를 기반으로 하는데, 제보자가 직접 겪었거나 친척 내지는 지인이 겪은 일들이 주를 이룬다. 이따금, 당시 현장의 모습이라며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 함께 제시되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누구도 보장하지 않으며, 여전히 누군가(패널)를 한 번 더 매개되어 전해진다는 점에서 그것이 제보자가 직접 겪은 일이든 아니든,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는 지점은 강도 높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재연에 있다. ⟨심야괴담회⟩를 통해 전해지는 도시괴담은 말하기와 보여주기 사이를 진동하며 보는 이의 몰입을 고조시키지만, 대체로 시각적인 재연의 강도에 의해 보여주기가 말하기를 압도해버린다. 과도한 몰입을 막으려는 듯, 중간중간 겁에 질린 표정을 한, 혹은 한껏 진지한 모습으로 사연을 읽어 내려가는 패널들의 모습을 비춰주지만, 그 장면들조차도 보여주기의 적극적인 장치로 활용되어 버리며, 말과 보기 사이의 균형을 붕괴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처럼 텔레비전에서의 도시괴담의 시각화 역사는 대개 유사한 결말을 맞이하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줄다리기하는 것에 실패한 채 허구성만을 강화해온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들은 도시괴담이 스스로의 생존방식에 대해 재고해보아야만 하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주지했듯 도시괴담은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차원의 문제이기보다는, 절대 진실이어서도 절대 거짓이어서도 안 된다는 경계자의 숙명을 갖고 있음에 방점이 있다. 이는 사실과 허구, 혹은 픽션이라는 이분법적 경계가 무화되었다는 자명한 사실에 관한 것으로 두 항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각 구성 성분에 일정 정도의 지분을 주고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밀폐된 공간에서의 선풍기 사용과 관련된 사망설이 퍼지자 대법원에서 이를 사망원인으로 적시하고 재해로 인정한 사례와 같이 가짜뉴스가 먼저 유포된 후 현실이 그에 맞춰 수정되는 것처럼 말이다.3 그렇기에 (다소 낡은 감은 있지만) 도시괴담은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시대의 작동 메커니즘을 참고하며 조금 더 교묘하게 유포되는 방식으로 그 생존전략을 수정해야만 한다. 진실의 조건이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혹은 진실이 조건부로 존재하는 세계 내에서 불확실하게 존재하기에 비로소 당위를 얻는 것, 그것이 도시괴담이 가진 커다란 힘인 것이다.4 눈치챘겠지만 이 논의들은 히토 슈타이얼(Hito Styerl)의 디지털 이미지론에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이 글 안에서 슈타이얼의 논의를 면밀하게 짚고 넘어갈 능력은 없으니 도시괴담이 이들과 연결되는 지점을 자연스럽게 살피는 것을 간략하게나마 시도한다.
2009년 『스크린의 추방자들』부터 지속되어온 디지털 시대 이미지의 존재론적 변화와 위상의 변화에 대한 슈타이얼의 진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유효하다. 슈타이얼이 옹호하는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는 해상도와 선명도가 떨어져 이미지 계급의 하위권에 위치하며 전송, 압축, 복제, 리핑, 리믹스5 등 유통의 구조와 과정을 자신의 너절한 빈곤함으로 체화한 이미지이다. 자본주의와의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가시성의 정치학’의 작동 원리를 따라 선별된다.6 생산과 유포, 순환을 포함한 빈곤한 이미지의 실천은 모두 물신주의의 체제를 적극 수용한, 혹은 그 내부에서 배태된 부산물이지만 가시성의 선별 기준에는 미달한 존재들이기에 그 나름의 변장과 위장의 전술을 이용하여 체계의 틈새를 파고들며 스스로를 가시화한다.
도시괴담의 재현은 이러한 동시대 디지털 이미지의 포스트-재현적 실천을 따를 때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더 이상 건강하고 긍정적인 것만을 국가 강령처럼 제시할 필요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도시괴담의 이미지들은 필연적으로 ‘빈곤한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보자면 도시괴담의 이미지는 그 원형부터 이미 빈곤했다. 이는 도시괴담 자체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들은 단 한 번도 고해상도이거나 명료하게 증명 가능한 형태를 갖춘 적이 없었고 갖출 필요조차 없었다. 특정 괴담의 원형들이라며 전해져오는 것들이 있지만 그 자체도 실은 원본이 아니라 오직 사본의 형태로만 존재해온 것이다. 수많은 더미 중 하나쯤은 분명 누군가의 진실된 경험담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이 도시괴담의 형태로 소비되는 순간 이야기는 그 즉시 n번째 사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도시괴담은 지시체와 일대일로 조응하지 않으며 매개체와 유통의 확산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를 분화하는 포스트-재현의 양식을 충실히 수행한다.7 수많은 말과 매개를 덧붙여서 생산되고 확산되는 도시괴담은 그 과정에서 도시에 관한, 혹은 동시대에 관한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한 장면들을 발생시키며 현실을 우회적으로 이어낸다. 도시괴담은 도시의 저변에서 생존을 거듭하며 우연찮게 갖게 된 이 같은 힘을 스스로 더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빈곤한 이미지의 불완전함이 야기하는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도시괴담의 재현 시 제1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현은 현실을 모사하는 일이기보다는 진실을 상상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때 상상의 영역은 도저히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나 재현 불가능한 것에 도달하려는 것이기보다는 현실의 규칙과 질서로부터 유예된 무언가를 찾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진실의 조건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슈타이얼의 글과 이미지가 서로를 완성하는 상호보충적인 관계인 것처럼 도시괴담 역시 다양한 방식의 말하기와 보여주기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8
그렇다면 도시괴담이 미디어를 통해 우후죽순으로 시각화되는 일을 달리 막을 방도가 없을 때, 그 이미지는 어떤 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지를 위의 논의들을 전제로 삼으며 더 고민해보자. 이때 초점은 보여주기와 말하기 사이의 균형에 있다.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가, 혹은 빈곤한 이미지가 더 이상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며 재현할 수 없듯이 괴담의 이미지들 역시 그 불가능성에 집중하며, 재현 불가능한 실재를 도시괴담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 방식이란 은밀하되 어떤 징후를 감지할 수 있으며, 무언가를 예고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때 도시괴담이 예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실재가 되어버리는 도시의 불규칙한 프랙탈이 된다. 말하기의 불완전함은 보여주기의 직접성으로, 보여주기의 과도함은 말하기의 은밀함으로 보완하며 나아가야 한다.
미디어 환경과 연동하여 생존하는 도시괴담을 살필 때, 살펴보아야 하는 곳은 당연 유튜브이다. 앞서 보았듯 텔레비전 시대를 거친 도시괴담은 그 기세를 잃은 뒤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다(이야기들이 모여드는 게시판 형식의 웹사이트는 언제나 예외다. 웹사이트는 언어를 중심으로 전유 되는 신문과 라디오의 계보에 더 가까이 위치하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도시괴담의 썰을 푸는 곳이거나 괴담 자체가 만들어지는 생산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해내고 있다. 썰을 푸는 채널의 경우 텔레비전 방송과 비슷한 내레이션과 재연이라는 구조를 골조로 삼으나 삽입되는 이미지나 영상들이 인터넷을 떠도는 헌 짤이거나 파운드 푸티지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한편, 유튜브를 통해 생성되는 괴담은 대체로 어느 날 문득 올라온 이상한 영상 자체에 대한 것이거나 라이브 스트리밍 도중 발생하는 기이한 현상들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괴담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으니 재현/재연과 유통에 중심을 두고 도시괴담을 전파하는 몇몇 채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국내에서 이 분야 부동의 1위를 달리는 채널은 ‘디바제시카’ 채널인데 이 채널은 말하기의 적절한 완급조절과 보여주기의 허접함 사이의 균형에서 그 동력을 얻는다.9 원래 직업이 영어 강사였다던 디바제시카의 말하기는 한국인의 말하기 포인트를 관통한다. 이따금 혼자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따라 해 본 적이 있거나 사교육 시장에 오랜 세월 자의로든 타의로든 몸담아 온 사람이라면 디바제시카의 말투가 어딘지 익숙할 것이다. 신뢰감을 주는 저음의 목소리로 강조점에서는 별표를 치듯 더 힘을 주고 그 외의 부분에서는 쿨한 번역 투를 사용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디바제시카는 한국 대중들의 보편적인 기억 한 지점을 건드리는 힘을 갖고 있다. 이야기와 함께 제시되는 이미지는 여기저기서 갖고 온 사진과 짤로 이야기 중에 있는 디바제시카 옆에 엉성하게 몽타주 되어 나온다. 개중 일부만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이미지이다. 여기에서 이미지의 역할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해 보이지만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을 때는 어딘지 부족한 기분이 든다. 같은 내용이어도 칠판에 필기를 보면서 듣거나, 줌 화면 속 누군가를 보며 듣는 것이 소리만 듣는 것과는 집중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비슷하게 괴담을 다루는 채널들로는 ⟨괴담라디오⟩, ⟨숫노루 TV⟩, ⟨미미미미⟩ 등이 있는데 이들 역시 전체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화자 보다는 이미지를 더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들이 촉발해야 하는 것은 공포감 그 자체보다는 이상하거나 찝찝한 무엇이어야 한다. 그럴 경우, 디바제시카의 유려한 말솜씨는 기승전결이 잘 구성된 이야기보따리에 더 가깝기는 하겠다. 그럼에도 디바제시카를 포함하여 유사 채널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도시괴담의 이미지들은 직접 제작하거나 촬영한 결과물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여기저기서 떠돌던 낡은 디지털 잔해들을 그러모아 약간의 사실들과 교묘히 교차시킬 때 믿음과 의심 간의 적절한 비율이 조제된다. 누더기처럼 기워진 조악한 이미지들은 디지털 이미지의 작동 방식 안에서 추동력을 얻으며 말하기와 따로 또 같이 읽힐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동영상의 대문 사진이자 콘텐츠의 인상 자체를 좌우하는 썸네일 역시 중요한 이미지 장치이다.
여기에 더하여 댓글이 괴담의 구조를 완성해주는 듯해 보이는데, 댓글 창에서 시청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아는 이야기, 혹은 겪었다던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 익명의 군중들은 친구의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던 전통적인 도시괴담의 전승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의 웅성거림은 불특정한 개인들이 호소하는 불확실한 진실들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괴담은 연기처럼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며 유포된다.
이를 현재진행형인 ⟨심야괴담회⟩와 비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심야괴담회⟩는 공포프로그램을 종말의 말로로 이끌었던 텔레비전 매체의 오래된 작동방식을 그대로 수행 중에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직접 제작한 영상은 너무 정성스럽게 연출되어 있기에 매끄러운 공산품으로 보인다. 이 반질반질한 영상은 의심의 물꼬를 틀어막는다. 모든 재연 프로그램이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한 회에서는 무당이었다가 한 회에서는 사연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식의 연기자의 반복 출연 역시 회차가 쌓일수록 처음의 낯선 감각을 잃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댓글 창의 역할과 비교할 만한 대상도 있는데, 바로 패널들이 소개한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44명의 어둑시니들이다(숫자며 명칭이며 모든 것이 다 노골적이다). 시청자들 중 추첨을 통해 매회 어둑시니를 선정하여 스튜디오에 얼굴을 띄워놓고 라이브로 녹화 과정에 참여시킨다. 이들이 말을 하거나 특별한 일을 수행하지는 않지만, 얼굴을 드러내놓는 행위 자체, 무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위치 자체만으로 많은 제약을 만든다. 또한, ⟨심야괴담회⟩ 역시 각 사연들을 잘라 유튜브에 업로드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유튜브의 생태계를 살피는 일과는 그다지 관련 있어 보이진 않다. 종합하자면 ⟨심야괴담회⟩는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제작진, 패널, 제보자, 시청자들이 괴담의 재가공 즉, 포스트 프로덕션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전통의 반열에 오른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서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유튜브 채널의 모든 요소들(이미지, 이야기, 댓글)은 서로를 도와가며 그 빈곤함을, 불완전함을 확대시킨다. 물론 이 채널들의 최대 약점인 빈곤하다 못해 어떠한 미감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는 유의할 필요는 있다. 말 그대로 데이터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90%는 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예시들이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긴 글을 구구절절 쓰는 내내 궁극의 예시를 찾고자 분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도시의 사변적 존재에 대한 다분히 개인적인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글이지만 사실 도시괴담으로부터 파생 가능한 논의들은 무수히 많다. 인프라로서 미디어 환경에 대한 이해, 도시의 비가시적 영역에 관한 관심,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모호하지만 새로운 장면에 대한 기대 등 이 모든 것이 얽히고 응축되어 도시괴담을 의미 있는 것, 혹은 의미 있을지도 모르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본 글에서 논의해보고자 했던 지점은 미디어를 경유하며 이어지는 도시괴담의 전승 방식에서 시각화의 양상을 살피고 더 적절한 방법을 찾아보는 데에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유튜브와 디지털 네트워크로 미디어 플랫폼의 이양은 이미지 생산 방식의 근원적 변화뿐 아니라 언어와 이미지의 작동 방식과 그 관계에도 변화를 창발시켰다. 유튜브의 시대에 다다라 도시괴담 속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는 말하지 않고 보여줄 수 없으며, 보여주지 않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호불가분의 관계로 거듭나고 있다. 도시괴담은 이 전략을 충분히 인지할 때, 사회 전반을 은은하게 장악했던 2000년대 초반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설령 스스로 원하던 바가 아니었을지라도 생산과 유포의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시지각적 유대나 공통의 정서는 일획적인 도시의 구성 체계를 인지하는 대안적 방식으로서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과장된 망상에 가까운 이 기대가 더 괴담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어떤 대상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언제나 더 기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화답하곤 한다.
1 관련 정보들은 도시괴담과 각종 미스테리 관련 정보의 보고인 나무위키, 위키피디아를 참고했다. 유저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완성되는 위키 사이트들은 이야기들이 쌓여 변형된 버전들이 창작 및 유통되는 괴담의 구조와 가장 유사하게 작동하며, 정보의 괴담화, 괴담의 정보화에 훌륭하게 이바지 하고 있다. 언급되는 프로그램들이 단지 도시괴담만을 다루고 있다고 소급할 수는 없으나 정사로부터 벗어난 소문, 음모론, 괴담을 폭 넓게 다룬다는 점에서 재연의 역사로 정리해본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2 〈미스터리 극장 위험한 초대〉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방영된 프로그램으로 다른 두 프로그램보다는 비교적 늦게 시작했으나 경인방송 내부의 문제로 종영되었다. 〈전설의 고향〉의 경우 1977년 처음 시작한 이래로 1989년까지 1기가 방영되었고 1996년부터 1999년까지 2기가 방영되었다. 2008년에 잠시 부활했으나 이듬해 종영되었다. 그러나 〈전설의 고향>은 전통 설화, 괴담 등을 다룬 드라마로 나머지 프로그램과는 결이 다른 것으로 분류한다.
3 선풍기 사망설은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괴담으로 197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인터넷과 뉴스를 오가며 무분별하게 확대 재생산된 케이스다. 70-80년대 여름 변사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근거 없이 활용되다가 1991년에 이르러 대법원에서는 한 사건 케이스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으로 인정하며 재해 판결을 내리기 까지 한다. 선풍기는 공기 성분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기 때문에 공기 농도 변화에 의한 질식사는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답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풍기 괴담은 꽤 오랜 시간 정설로 믿어지며 에어컨이 보급화되기 전 우리의 유년 시절을 지배해왔다. 출처
4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안규철 옮김(워크룸프레스, 2021)의 논지를 짚고 있다.
5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워크룸프레스, 2018), 41.
6 김지훈,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포스트 인터넷: 히토 슈타이얼의 이론과 미술 프로젝트」, 『현대미술학 논문집』 vol. 21 no. 2 (2017) 64.
7 김지훈, 앞의 글, 55.
8 Sven Lutticken, “Hito Steyerl: Post cinematic Essays after the Future,” Too Much World: The Films of Hito Steyerl, ed. Nick Aikens(Sternberg Press, 2014), 48. - 김지훈, 앞의 글, 재인용.
9 이 채널에 대한 기본 아이디어는 abs의 공동 편집인이자 여타 채널들에 조예가 깊으신 황재민님이 제공해주셨다. 압도적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