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키놉시아

이지우

거대한 둥근 돔이 세워진 곳을 배경으로 거북이 두 마리가 나오고, 환히 웃는 남녀가 시청자를 향해 팔을 뻗어 손짓한다. 동시에 얼굴 없는 합창단이 단조로운 패턴의 음조로 구성된 노래를 부른다. 단 몇 초 사이에 서울랜드의 전경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는가 싶더니, 한덕개발주식회사를 내걸고 개장일을 한 번 더 강조하며 마무리한다. 여기까지가 1988년에 방영된 서울랜드 개장 CF의 내용이다. 33년이라는 세월을 고려한다 치더라도, 영상 속 내래이터가 구사하는 어조는 과장 좀 보태 조선중앙텔레비죤의 그것과 당황스러우리만치 흡사하다.1



(이미지1) 1988년의 서울랜드 CF - 개장편


(이미지2) 2016년의 조선중앙텔레비죤

서울대공원 안에 있는 서울랜드는 BTO 방식의 민간투자사업으로 건설되었다.2 주식회사 서울랜드가 놀이기구를 기부채납해, 개장 초기 20년간 무상 이용 후 10년 이상 유상 이용한 뒤, 시설 운영권이 2014년 만료되었고, 사업자 재선정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2017년까지 약 3년의 대여 기간을 제시하면서 결국 주식회사 서울랜드와 광주패밀리랜드 두 곳만이 입찰을 했고 대기업들은 불참하게 된다. 이에 서울랜드는 우선협상대상자가 되어, 공개입찰 방식을 거쳐 2022년 5월까지 갱신허가를 받아 사용하고 있다(2020년 카카오가 ‘한국판 디즈니’를 꿈꾸며 귀여운 라이언과 어피치를 내세워 서울랜드를 인수하려 했으나 서울시와 경기도, 과천시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림돌이 돼 무산되었다고 한다3). 지금도 여전히 서울랜드의 개폐장 루머가 도는 상황. 방치되다시피 노후화된 어트랙션과 미흡한 시설물 관리의 문제, 테마곡 부재 및 다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 하는 가요곡의 선정, 유행이 지난(그러나 자랑스럽게도, 한국 토종 캐릭터들로 구성된) 캐릭터 조형물 설치 등등이 서울랜드 수요의 가파른 하락 곡선을 그리는 원인 중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서울랜드는 낡고, 오래되고, 멈춰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곳을 몇 주 전 방문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가 마주한 서울랜드의 첫인상은 ‘모든 것이 멈춰있다’였다. 놀이공원 입구를 지나 바로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핑거푸드 코트는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굳게 닫혀 있었고, 대신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모양새의 인테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그때 그 시절 롯데리아가 입장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레드벨벳의 ’빨간맛’(2017년 발매)이 매장 내에 흘러나오는 와중, 어릴 적 마지막으로 보았던 롯데리아 특유의 스칼렛 컬러 카운터가 반복되는 메들리와 기묘할 정도로 어울렸다. 사람들은 태연히 햄버거를 고르고 있었고, 그렇게 꿈과 희망의 나라는 차분하고 조용했다.4



(이미지3) 롯데리아 소공점(1호점)(1979)


(이미지4) 롯데리아 서울랜드점(2016)

한편 지난 4월, 북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서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밈이 물 위로 떠 올랐다.5 2019년 포챈(4chan)의 한 보드에서 시작된 이 밈은 익숙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낯선, 텅 빈 공간의 이미지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학술 용어로 리미널이란 문지방(threshold) 또는 주변(Margin)을 어원으로 하는 라틴어 리멘(Limen)에서 시작된 단어로, ‘문지방에 있음(being in threshold)’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지방은 통과, 교차, 떠남, 진입, 변화 등을 연상시키는데, 통상적으로 그곳을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6 리미널의 명사형인 리미널리티(Liminality)는 아놀드 판 헤네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인간 생애에 나타나는 여러 통과의례 과정 중 겪게 되는 모든 변화 양상을 설명하고자 리미널리티 개념을 제시했다. 변화의 당사자는 이 일종의 애매성을 통과하며 ‘미결정상태’에 놓이는 순수한 잠재성의 순간을 겪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순수한 잠재성의 순간이란 ‘가정법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채워진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바라본 긍정적 의미로서의 리미널리티는 제의, 카니발, 축제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며 이와 같은 사회 제도는 유희를 통해 사회 자체를 반성하고 비판하게 하는 틀이 된다. 200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더불어 파생된 여러 포스트 이론들은 이러한 리미널리티의 특성 즉, 일시적인 경계의 모호성, 불확정성, 유동성 등과 맥을 같이 했으며 당시 ‘리미널 스페이스’(또는 역공간)는 리미널리티와 연관된 키워드로 도시 사회학 및 건축 담론 속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예로 샤론 주킨은 역공간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문화와 경제, 시장과 장소 등을 가로지르고 결합하는 공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렇듯 리미널 스페이스는 누가 공간을 이용하고 점유하는지, 즉 공간 이용 주체가 그곳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지에 따라 새로운 공간이 되거나 보다 능동적인 공간점유의 장으로 바뀌는지에 관한 논의를 목적으로 소환되어 왔다.7


반면 집단적 아카이빙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 레딧의 리미널 스페이스 밈은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8 익명의 게시물에서 출발해 산발적으로 생산되는 크리피파스타를 경유하여 2019년 백룸(Backrooms)밈이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소셜미디어에서 리미널 스페이스와 관련된 이미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으로 레딧의 움직임이 가장 큰 것으로 소개되는데, 2019년 8월 레디터(Redditor) CaLaHa717의 게시물을 시작으로 2021년 5월 기준 약 20만 명의 유저들이 이 거대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9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리미널 스페이스는 여러 학술 담론에서 ‘가정법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지어져 명확한 바운더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밈 컬쳐’에서는 리미널 스페이스에 대해 그리 엄격한 잣대를 두지는 않으며 어떠한 주관적 이유에서든지 간에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이루는 공간이라면 그들은 그것을 그들만의 리미널한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모으는 이미지는 대체로 ‘황량한 분위기의 이미지’ 혹은 ‘낯설게 느껴지는 친숙한 공간’, ‘꿈속에서 가 보았던 곳’이 되거나 때로는 저주받은 이미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공간주의의 김음은 이러한 현상을 낯선 공간으로부터 느껴지는 ‘인간 활동의 부재’로 인한,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10 포스트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을 떠올려 본다면 훨씬 수월하게 역공간이 제시하는 감각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사람이 만들었고, 그래서 사람이 존재해야 할 공간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어쩐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여담이지만 관련된 사례로, 지난 7월에 한 스페인 남성이 자신이 2027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며 틱톡에 조작된 영상을 올려 여러 커뮤니티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11).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해방과 자유, 무법지대, 새로운 가능성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또한 레디터들에게 리미널 스페이스란 어떤 회고적 감각 안에서 작동하는, 말하자면 로우폴리곤의 RPG게임의 공간 혹은 드림코어(Dreamcore), 위어드코어(Weirdcore)12의 감각 아래 생산된 이미지 같은, 가시화된 과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파생된 트라우마와 향수라는 이 두 가지 감각은 서로 충돌하여 ‘불안’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공통의 기억이 된다.







(이미지5, 6, 7) 레딧의 '리미널 스페이스' 이미지들

리미널 스페이스에 의해 겪는 감정을 키놉시아(kenopsia)라고 한다.13 번역하면 ‘황량한 분위기’ 정도로 나오는데 키놉시아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데이빗(영화 A.I(2001)의 주인공)이라면 우리에게 이러한 감정을 대신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이미지8)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2001) 중

인류의 마지막 흔적인 데이빗은 외계인의 배려 덕에 마침내 과거에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2000년이 흐른 뒤의 세상에는 데이빗의 기억 속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집안을 돌아다니며 그는 ‘테디, 우리가 집에 왔어’라며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엄마가 그리운 아이는 무언가를 감지한 듯 파란 천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묻는다. ‘여긴 어디인가요?’. 이처럼 키놉시아는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새삼스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기이하고도 기묘한 감정이라고 본다. 그것은 공포도, 불안도, 불쾌도 아니며 단지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이상함’에 있다. 이후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상함은 공포가 되기도, 슬픔, 불안 혹은 불쾌가 되어 찾아오기도 한다.


다시 서울랜드로 돌아와, 조용한 환상의 나라를 떠올려보자. 그날따라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여든 비구름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랜드를 찾은 사람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으며, 대기줄이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인기 있는 어트랙션은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물론 롯데월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개장 당시 국내 최대 규모, 최장 운행 시간을 자랑했던 ‘킹바이킹’을 선두로 하여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차례대로 정복했다. 84인석을 보유한 킹바이킹의 탑승객은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는 어린 아들과 침착한 아버지, 고작 둘 뿐이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티아라의 ‘TTL(Time to Love)’(2009년 발매)을 들으며 즐겁게 대기했으나 탑승 직후부터 나는 3분 20초간 웃을 수 없었고 앞서 탄 부자의 여유로움에 속았음을 알았다(참고로 롯데월드의 ‘스페인 해적선’ 탑승 시간은 총 1분 30초다). 킹바이킹의 위엄을 몸소 깨닫고 다시는 서울랜드를 얕보지 말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겉보기에 소박한 ‘급류타기’의 급하강 구간에서 또다시 쓰디쓴 후회를 맛보았다. 또, 대기줄에서 터닝메카드(2015년 첫 방송)의 인기를 다시금 실감하며 추억의 범퍼카를 끌어보기도 했다(말이 터닝메카드지 범퍼카의 외형은 오래전 기억 속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어 당황스럽다). 조금 더 걷다 보면 ‘라바 트위스터’가 나온다. 지나칠 수 없는 라바의 귀여운 표정에 넘어가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의 빛바랜 등 위에 올라탄다면 당신은 전에 겪어본 적 없었던 크기의 원심력의 법칙에 의해 격렬히 응징당하고 말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알바생의 놀라운 센스인지 모르겠으나 라바의 등에서 내려와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내게 작은 위로가 되었던 것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년 발매)였다. 비열한 라바를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어느새 2PM의 ‘Heartbea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계산의 검푸른 능선을 배경으로 고개를 까딱이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만날 수 있다. 거대한 포식자의 머리 위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노란색 철도가 공중에 떠 있다. 무지개 끝을 따라가 보듯 기다란 철도를 따라가면 그 끄트머리에는 ‘블랙홀 2000’의 입구가 탑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이름만큼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놀이공원에서 가장 안쪽, 숲이 우거진 구석에 위치한 탓인지 가족 단위의 입장객들에게 사랑받지 못 하는 것으로 보였다. 시속 85km의 열차가 여전히 운행되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그곳은 매우 조용하고 음울했다. 여기까지가 나의 간략한 서울랜드 답사기다. 만일 당신이 평소 놀이공원에 자주 가는 타입이라면 나의 생각과 어떻게 다를지 모르겠으나 놀이공원에 다녀온 후의 기억은 대체로 그날 함께 간 사람, 먹은 것, 어트랙션이 제공하는 속도감, 긴장감, 혹은 장난감 매대에서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이미지 등으로 남는다. 그러나 내가 주로 기억하는 서울랜드는 희한하게도 거기서 들은 소리다. 보통 우리는 놀이공원에 가면 무슨 노래가 나오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테마곡으로 특정된 음악이 나와 그것은 군중 소리와 섞여 반복되는 소음 정도로만 들린다. 생각보다 꽤 많은 다양한 볼거리와 탈 것, 입장객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서울랜드가 황량함을 감출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내가 겪은 바와 같이 주체의 감각을 완전히 사로잡거나 채울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속할 수 없는(혹은 일시적인) 일상성을 보았고, 북적이는 사람들과 멈춰있는 어트랙션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 나는 되려 ‘대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왔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로 인해 나는 앞서 이야기한 키놉시아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불안이 아닌 오히려 기묘에 가까운. 이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H. G. 웰스의 「벽에 난 문」을 기이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분류하는 이유로 피셔는 세계 간의 ‘문턱’을 제시한다. 그는 기이한 소설이 갖는 힘은 일상적인 요소들로 묘사된 공간과 이(異)세계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하며, 「벽에 난 문」은 바로 그 문턱 가운데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야기가 완전히 문턱 너머에 자리한다면 그것은 기이한 현실에 관한 것이 아닌 판타지가 된다. 따라서 문, 문턱, 포털은 ‘사이’라는 개념으로, 기이함을 자아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갖고 있다. 한편, 「벽에 난 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월레스의 불행한 결말은 정신 이상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집중하고자 하는 바는 월레스의 트라우마 혹은 미쳐버림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보다 더 사실적인 무엇과의 조우에 관한 것이다.14


재밌는 것은 내가 물리적인 환경 속에서 겪은 것과 같은 시청각 버전의 키놉시아를 사이버 공간 안에서 구현하려는 시도가 레딧 외에도 적잖이 보인다는 점이다. 리미널 스페이스와 관련된 이미지,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조합하는 유튜버 float의 ‘Strangely familiar places with unnerving music’ 시리즈15가 그러하다. B급 감성을 자아내는 이 비디오는 한 가지 무드를 오랜 시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짧은 클립을 무작위로 한데 묶어놓았는데, 10초 간격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과 각각에 어울릴 법한 사운드 여러 개를 삽입하여 우리가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키워드 아래에 상상할 수 있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리미널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쏘아대는 폭격기처럼 시시각각 모습을 바꿔 눈과 귀 모두를 사로잡는 이것은 마치 게걸스레 스크롤을 내려 꼬리에 꼬리를 문 레딧의 보드를 빠르게 탐험하는 것과 비슷하다. 높은 시청률이 증명하듯 과연 이 밈의 추종자들을 만족시킬만하다.



(이미지9) 221만 뷰를 기록한 float의 strangely familiar places with unnerving music 시리즈 중 첫 번째 작업

서울랜드의 체험중심 어트랙션들 중 하나인 ‘착각의 집’을 소개하고 싶다. ‘착각’이라는 단어에 먹힌 듯한 이 공간은 외관뿐만 아니라 그것이 내세우고자 하는 테마조차 너무나 낡았고 그 자체로 이상하다. 관람객들은 공간 자체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passage)에 사로잡힐 것만 같은 기이한 불쾌함과 동시에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서울랜드는 2020년까지 ‘귀신동굴’을 운영했고, 현재는 문을 닫아놓았다. ‘착각의 집’은 공포보다는 불쾌를 겨냥해 만들어진 듯 하다). 커다란 큐브 형태의 이 공간은 거울로 둘러싸인 기다란 복도에서부터 출발한다. ‘흔들리는 방’이라는 이름을 지닌, 어두운 조명,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의 초상이 그려진 액자가 걸린 조악한 공간을 지나, ‘원근의 착각’, ‘중력착각의 공간’, ‘착각의 계단’, ‘거울미로’, ‘문 미로’ 등등의 공간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름에서 밝힌 것과 같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구현해내기 위해 각각의 공간들은 천고의 높낮이, 바닥의 기울임,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여러 장치들(에셔의 〈상대성 이론〉(1953)과 같은 착시 이미지 또는 거울 등)을 활용한 것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이처럼 이들이 정한, ‘착각’이라는 개념 아래 만들어진 공간, 그러한 공간 안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험(스스로가 ‘중력착각의 공간’ 안에서 정말로 ‘중력착각’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저 바닥을 뒹구는 어린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미지의 감각이 아닐까)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만들어진 착각’에 이르도록 지시한다. 나는 과연 이것을 순전히 내가 느낀 착각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거짓으로 만들어진 경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으스스함을 느끼는 걸까? 그저 단순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진실로 만들어내기 위한 어떤 염원 때문에 느껴지는 섬뜩함일까.







(이미지10, 11, 12) 서울랜드 착각의 집 전경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베닝의 〈L. Cohen〉(2018)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베닝의 작업을 통해 무려 45분간 서서히 다가오는 키놉시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당신은 비행기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지나다니는 농촌 풍경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이름 모를 풀을 뜯으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가? 얼핏 보면 광활한 대지와 그 위에 버려진 드럼통 따위가 전부인 미동도 없는 풍경이다. 다이내믹한 서사도, 장면의 변화도, 개미 한 마리조차 등장하지 않는. 자연의 변화에 어쩔 수 없이 그저 몸을 내맡기는 것처럼 관객은 그대로 프레임 안에 갇히고 만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보면,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소리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러닝타임이 45분이라는 점을 재차 확인할 무렵, 세상에 어둠이 내린다. 절묘한 타이밍에 찾아온 이 어둠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일 뿐 어둠은 그것이 찾아온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간다. 제트기인지 뭔지 모를 비행체의 소리와 어디선가 간간이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 아이의 비명과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 레너드 코헨의 ‘Love Itself’ 등이 텅 빈 공간을 번갈아가며 채운다. 베닝은 줄곧 “내 작업의 가장 큰 화두는 지속(duration)이다”라며 변화하며 지속되는 시간을 이야기해왔다. 그런 그의 작품인 만큼 단일한 시퀀스로 이루어진 이 비디오는 놀랍게도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몇 번이고 바꾼다. 사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덧 없는 삶에 관한 메타포가 담긴 이 작품에 관한 적절한 감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독의 통제 하에 만들어진 다소 지루한 리얼리티에서 ‘황량한 공포’를 느꼈다. 장시간 낯설면서도 친숙한 풍경과 소리에 매혹되어, 감각과 감정의 변화를 한 자리에 멈춰서서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여기엔 작품 언저리에 존재하는 키놉시아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부동은 역설적으로 운동의 감각을 증폭시키며, 그것의 동력은 미지에 대한 공포다.



(이미지13) Still from L. Cohen(2018) by James Benning

버려진 시공간을 향한 높아진 관심은 과연 팬데믹으로 인해 마주하게 된 특수한 상황일까. 물리적이거나 혹은 가시화된 형태로 멈춰있는 과거를 우연히 발견하는 일은 살면서 종종 겪게 되는 흔한 일이다. 대청소를 명분으로 서랍장을 뒤질 때, 서랍장 안에서 무언가 발견했을 때, 길 가다 마주친 오래된 동네 안경점이 실은 부모님의 연애 시절 데이트 장소라는 사실을 서랍장에서 발견한 사진을 보고 알았을 때. 좀 더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싸이월드가 복구될 때(소름이다). 아무튼 나 역시 가성비를 찾아 서울랜드로 떠났지만(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망설임 없이 롯데월드에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겪은 기묘함은 오로지 팬데믹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경험이라고 본다. 다만 20세기 말 인터넷과 사이버공간의 등장으로 일부 도시학자들이 물리적 형태의 퍼블릭 스페이스의 쇠퇴 혹은 소멸 가능성까지 예견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사람들을 방구석 여행자 혹은 방랑자로 만들어버린 팬데믹이 이 유행의 가열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시공간을 넘어 텍스트로, 이미지로, 또는 이미지와 소리로 공유되는 이 감각은 어떻게, 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가? 애초에 이러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힘은 무엇인가? 진부하지만 한낱 인간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원초적 본능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봐도 될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우리는 도약한다. 그러나 도약을 위한 이런 미결정상태의 지속은 언제까지고 이어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문지방’ 위에 올라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여름의 무더위는 그렇게 우리를 멈춰서게 만든다.




1 88년도의 한국과 16년도의 북한. 시간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 내래이터의 어조를 들어보시라. 출처1, 출처2.

2 서울랜드의 역사가 매우 친절히 설명되어있다. 출처.

3 「[단독] 카카오 인수 무산 … 서울랜드 마스코트 ‘라이언’ 될 뻔한 사연」 , 『일요신문』, 2020년 8월 24일, 출처.

4 서울랜드 관련 이미지3, 이미지4, 이미지10, 11, 12 는 블로거들의 게시물들이다. 출처1, 출처2, 출처3.

5 이미지5, 6, 7은 해당 보드에서 가져왔다. 출처.

6 조대원, 임종엽,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성과 건축적 적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계획계)』 대한건축학회, 23(1) (2003).

7 조경진, 한소영, 「역공간(Liminal Space) 개념으로 해석한 현대도시 공공공간의 혼성적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한국조경학회지』 vol. 39, no. 4 (2011).

8 Madelyn Xiao, “The Pleasant Head Trip of Liminal Spaces,” The NEW YORKER, April 16, 2021, 출처.

9 2021년 8월 31일 기준 약 28만 4천 돌파. 출처.

10 리미널 스페이스가 제시하는 감각에 관한 이야기는 공간주의의 김음, 「리미널스페이스론」을 참고하였다.

11 「2027년에서 왔다는 ‘시간여행자’를 시험하던 스페인 방송사가 발견한 소름돋는 장면 (영상)」, 『엔터테인먼트』, 2021년 7월 22일 접속, 출처.

12 Fandom의 한 보드, Aesthetics Wiki를 참조하였다. “온/오프라인 미학에 관한 백과사전”이라는 슬로건이 흥미롭다. 출처1, 출처2.

13 공간주의의 김음이 묘사한 리미널 스페이스가 자아내는 감각과 유사한 설명이다. 출처.

14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안현주 옮김(구픽, 2019), 51.

15 마지막으로 업로드 된 날짜는 2021년 6월로, 여덟 번째 시리즈를 올렸다. 이외에도 fridgophobia(추위 공포증), claustrophobia(밀실 공포증), autophobia(격리 공포증), speluncaphobia(동굴 공포증) 등 여러 혐오와 관련된 영상들을 꾸준히 올린 것으로 보인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