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 즈음, 전시 《HOMEWORK》와 《Girls in Quarantine》 그리고 난지의 오픈 스튜디오 《OPEN SOURCE STUDIO》를 봤다. 왕왕 나열한 이 제목들은 알다시피 모두 웹사이트를 기반으로 하여 열린 전시들이다. 이전보다 더욱 심화된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공간 사이의 간극, 그에 따라 변화된 어떠한 특정 양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던 시기였다. 세계는 넓어진 반면 감각경험이 줄어드는 온라인 전시의 특성상, 현재로선 흐릿한 기억만을 붙잡고 세 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3개월 전의 내가 남긴 메모를 살펴보면 당시의 나는 몇 가지 사항을 염두 하여 해당 전시들을 선택하고 감상했음이 분명하다:
첫째, 오프라인 공간을 3D, AR 등등의 형태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닌, 온라인 전시 그 자체로서 기능할 것
둘째, 온/오프라인 각각의 공간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진 전시일 것
셋째, 이전에 오프라인에서 내가 여러번 마주쳤던 작품 혹은 작가가 참여한 전시일 것(그러므로 국내 전시로 한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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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겹다. 이 글을 장장 몇 개월간 마무리 짓지 못 하고 끌고 온 이유는 내가 부지런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지겨워서다. 온라인도 팬데믹도 엔에프티도 테이크아웃 커피잔도 무거워진 몸뚱아리도 그리고 한탄하며 키보드를 두들기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어서 더 그런 걸까나. 벌써 선풍기 없이는 타이핑을 칠 수 없는 계절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전시를 연다. 말은 참 쉽지만 사실 무언가를 열기, 혹은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다. 겨우 두 눈과 손가락 몇 개와 약간의 손실(내 머리카락...)만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 전시(물론 눈과 손과 머리카락만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지만)는 오프라인 못지않게 손 가야 할 곳이 많다. 넷-아트, 인터넷 아트에 관한 담론은 그간 간헐적으로 출현했던 주제이지만 이를 전시 전반에 관한 것으로 가져오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작품, 전시 공간이기 이전에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람 형태를 요구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이것을 인지하고 있는 여러 온라인 전시의 비판적 실천에 긍정을 표하며, 세 전시를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국내 온라인 전시 상황을 정리하고 되짚어 보고자 글을 엮는다. 웹 브라우저에 기반한 앞으로의 전시에서 어떤 것을 보게 되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트선재센터의 《HOMEWORK》와 (N)YTN의 《Girls in Quarantine》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의 공통점은, 기존의 미술 전시에서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완결된 형태의 작업이나 혹은 작품을 위한 작품이 아닌, 미술가 개인의 감상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 열린 형태의 작업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상이었다. 여기서 나는 ‘온라인’이라는 신체를 경유한 전시 공간이 미술 일상 전반에 미치는 어떠한 영향을 감지했는데, 본래 인터넷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볍고도 속도감 있는 일상과 너무나도 깊이 맞닿아 있다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플랫폼에서 비일상의 영역에 가까운 예술 작품을 전시해야 한다는 약간의 난해함, 당혹감, 혹은 오히려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등을 생각했다. 또한 소위 말하는 작품의 ‘퀄리티’ 혹은 그 존재감 하나하나를 온전히 담기에 웹 전시가 선사하는 감상의 깊이는 극단적으로 얕거나 깊었으며(우리는 ‘전시장’에 ‘게재’된 5분짜리 영상 작품을 5초 만에 넘길 수도, 혹은 원 없이 50분 동안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미술가 홍길동 씨의 작품과 아무개 씨의 작품 등등이 참여한 전시 《블라블라》’가 아닌, ‘작품 N가지가 모여 있음으로써 완성된 전시 그 자체’로 보이게끔 만들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작품보다는 전시 서문이 궁금해지는데, 기획과 작품의 보다 더 촘촘한 관계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것은 어쩌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는 말인 것 같아 부연을 하자면, 전시에서 기획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것에 대해 긍정하는 이유는 ANT가 미끄러지는 부분에 대하여 설명한 하먼의 명사적 객체 읽기와 동시대를 ‘작동하는 허구’로 명명한 오스본의 말을 등에 업어, 전시의 서사를 맵핑 하는 주체의 존재 혹은 아티스트-큐레이션의 실천은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당해년도에 입주한 작가들의 활동을 소개해 온 난지의 오픈 스튜디오가 팬데믹 상황에 맞추어 온라인 기반의 행사로 진행되었다. 스튜디오의 건물과 주변 환경의 위치, 시각정보를 LiDAR 카메라로 촬영해 그것을 데이터화 하여 홈페이지 메인을 꾸미는 등 물리적 공간 개념을 비물질적인 웹 공간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했고, 이에 ‘확장된 신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오프라인 전시 공간을 3D, AR 등등의 형태로 옮기는 것에 그쳤던 기존의 온라인 전시공간에 관한 문제의식을 내비쳤다. 참여한 작가는 총 23명으로, 평면, 사진, 조각, 설치 등 각각의 영역에서 진행한 작업물들을 선보였는데 흥미롭게도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연구한 흔적이 보였다. 누군가는 자신의 SNS 계정 링크를 걸거나 Vimeo 링크를 걸어 다이렉트로 작품을 보여주었고, 같은 평면, 조각, 설치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보여주는 방식과 플랫폼이 서로 달랐으며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보다 다양했다. 또, 《Girls in Quarantine》에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참여했던 장서영의 또 다른 작품을 이번 난지의 오픈 스튜디오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같은 작가를 두 웹 전시에서 마주하니 오프라인 전시 공간에서 하는 고민과 유사한, 상황별로 달라지는 보여주기의 방식이 비교적 플랫한 온라인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Girls in Quarantine》의 ‘스크리닝’과 ‘프로젝트’ 두 갈래 중, 관계를 매개하는 장치를 탐구한 챕터 ‘스크리닝’에서 선보였던 그의 작품 〈LDR-ASG〉(2020)은 텍스트 중심의 영상 작업으로, 스크린과 카메라 렌즈 사이를 경유해 나타나는 물리적/관계적 모순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 《OPEN SOURCE STUDIO》의 〈Infinity Pool〉(2020)도 동일한 주제의 연장선으로, 현실과 가상을 잇는 대리적 감각을 극대화하여 보여준 영상작품이다. 8분 남짓한 길이의 이 작품은 실제로 촬영한(것 같은) 수영장 풀 속 상황에서 시작된다. 이때 다소 메디테이트한 톤의 내레이션이 물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내가 너에게 한없이 다가가도, 결코 닿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며 실재와 가상을 넘나드는 기묘한 가상적 현실을 친절히, 대신, 부정해준다. 그러다 영상 말미에 가서는 어느 순간 갑자기 수영장을 마치 처음부터 3D로 구현된 세상에 던져놓았던 것처럼 전환시켜 감각되는 공간의 경험을 확장시킨다. 즉,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던 가상과 실재가 중첩된 감각 안에서 가상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밝혀내 그러한 합의된 감각을 배반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가상-실재의 중첩으로 인해 나타나는 오류를 직관하게끔 만든다. 작가는 《Girls in Quarantine》에서의 〈LDR-ASG〉(2020)와 《OPEN SOURCE STUDIO》의 〈Infinity Pool〉(2020) 모두 동일하게 Vimeo 링크를 걸었으나, 각각의 전시에서 보여준 인터페이스를 서로 달리했으며 이는 작품의 성질에 맞게 바꾼 것으로 보였다.
앞서 예로든 장서영의 작업과 비슷하게, 다른 작가들의 작업에서 또한 마찬가지의 고민이 언뜻 보였다. 나에게 초면이었던 장서영의 두 작품은 각각의 웹 전시들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구면인 다른 작가들의 작품인 경우 이전에 오프라인에서 작품을 마주했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웹 전시에서 그들의 작품을 색다르게(?) 감상할 수 있었다. 온라인이라는 신체는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는 약간 미션 같이 보였다(늘어나는 확진자 수와 동시에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 상황이었던 지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해보자는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웹 브라우저를 전시 공간으로 가지는 전시는 아무래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집중력은,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요구되는 어떤 성의를 의미한다(그만큼 웹 전시는 감상에 있어 방해되는 요소가 많다. 예를 들어 각 전시 별로 상이한 인터페이스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서부터 진입 장벽이란 것이 존재하니, 컴맹에게는 그닥 매력적이지 못하다). 따라서《OPEN SOURCE STUDIO》의 서문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온라인이라는 신체는 오프라인 전시의 대체물이 아닌 ‘확장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그것이 유효한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것이며 확장의 의미 또한 재검토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세 전시를 경험한 후 3개월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 온라인 전시 공간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주제가 되지 못하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로 고려되는 듯하다. 자유자재로 PC(Player Character)의 옷과 스타일링을 바꿔치기하듯이 공간도 그렇게 미술가 개인의 상황과 기호에 맞춰 바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서영의 작업이 유독 인상 깊었던 이유도 플랫한 성질의 웹 전시와 작품의 결이(서사가) 일치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아무튼 좋았다는 뜻이다).
디지털 기술(을 경유한 예술)은 물질적인 무언가(thing), 즉 물감이나 아이소핑크, 프로젝터와 같은 구체적인 재료가 보이지 않는 형식이기에 기존의 그 어떤 매체보다도 이미지의 지표적 특성을 드러내는 중재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데이터화된 시각 정보들은 분배를 통해 만연해지고, 동시에 지식과 진실은 모두 감소하지 않는다. 즉, 이미지의 실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데이터값이 끊임없는 복제를 통해 아무리 내려간다고 한들, 그것의 의미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이미지 대 정보가 아닌, 정보 대 서사라는 대결구도로 이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물질에서 벗어난 것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왠지 허전함을 느끼고, 내가 방금 무엇을 본 것인지 모르겠고, 마치 어제 먹은 저녁 메뉴가 생각나지 않듯 나의 뇌가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로 처리해버리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게, 디지털에 의해 전유되는 미술은 오로지 서사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외출 횟수가 현저히 줄어듦과 동시에 옷차림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이 덜한 요즘, 일종의 보상심리인지 인터넷 쇼핑이 더욱 즐겁다(이참에 닥치는 대로 옷입기를 자제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옷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그 와중에 신체 없는 신체는 유유자적하며 언젠가 자신에게 관심 가져 줄지 모르는 주체들 사이를 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