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내려 제법 걷다 보면 초록빛이 가득한 도산공원을 지나치게 된다. 공원과 맞붙어 있는 멋진 외관의 브랜드스토어를 몇 개 지나자 오렌지빛의 건물이 보인다. 이어서 정장 차림의 친절한 직원이 열어주는 정문으로 들어서 장인이 한 땀, 한 땀 손바느질 했다는 나선형의 가죽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면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음악, 그리고 대화 소리가 들린다. 약간의 멋쩍음을 이겨내고 카페 공간을 가로지르면 마침내 깨끗하고 정갈한 화이트 큐브에 도착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직접 방문하기까지의 물리적 여정이다. 숱한 전시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뜰리에 에르메스를 떠올릴 때 내게 가장 먼저 찾아드는 기억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이처럼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때로 전시장이라는 장소이기보다 공간 그 자체로 기억되곤 한다.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는 세계에서 실제 공간을 잇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김희천에 의해 몇 차례나 재구성되었다. 김희천의 작품 속 공간은 언제나 실재하는 특정 장소에서 출발하지만, 그가 반복해서 재구축하는 공간은 자신의 불안감을 추동하는 기원으로서의 서울을 제외하고는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실제 전시 공간과 작품의 구조를 다차원적으로 연결하고 시공간을 새롭게 직조하는 시도를 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공간은 김희천이 세운 파리한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몇 겹의 의미를 얻거나 혹은 모든 의미를 상실해 버리기도 한다.
“너 어디임? 네 목소리가 엄청 울려, 평소에 접속하던 곳 보다 더 큰 공간에 있는 것 같아서.”
이제부터 저 사람이 있는 곳을 추측해보자.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김희천에 의해 처음으로 재구성된 것은 2017년 전시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2017.5.20-7.23)의 커미션 작업으로 제작된 〈멈블〉에서 였는데, 이 작업에서 공간은 세 가지 버전으로 재현되었다. 첫 번째는 영상의 주인공인 시각장애인이 더듬더듬 손을 짚어가며 감각하는 실제 전시장 공간이다. 당시 재개관을 앞두고 한창 공사 중이었던 화이트 큐브를 촬영한 장면으로 비계와 공구, 페인트 등 각종 장애물로 가득 차 있다. 두 번째는 주인공이 헤드기어를 착용해 접속한 가상 세계인데 이곳에는 공사 현장의 도구들 뿐 아니라 어질리티 쇼(Agility Show)의 장애물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재되어 있다. 마지막은 안내견을 은퇴한 노년의 폴라가 참여한 가상 어질리티 쇼의 경기장으로 각종 난코스 장애물이 번쩍이는 라이트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스크린이라는 평평한 세계 위에서 각자 다른 공간감을 드러내는데, 이때의 공간감은 시각장애인과 개의 속도감의 유비를 통해 증폭된다. “가상의 환경을 그보다 작은 물리 환경에 구겨 넣는 방식입니다”라는 내레이터의 말을 따라 관객은 세 곳의 크기를 계속해서 비교하도록 안내받는다. 길잡이 안내견 폴라를 잃어버리고 조심스레 길을 헤쳐나가는 시각장애인 주인공의 공간은 몹시 비좁아 보인다. 두 번째 공간인 가상 세계에서 그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전으로 인해 공간의 규모를 한 번에 가늠할 수 없다. 이곳에서 역시 그의 속도는 느리다. 다른 한편, 난코스를 헤쳐가며 질주하는 폴라의 공간은 한없이 넓게 느껴진다. 얼핏 보기에는 이 세 곳이 같은 공간임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 공간을 세 개의 각기 다른 공간으로 한 번 더 굴절시킴으로써 관객의 공간감을 더욱 혼란하게 만든다.
김희천은 최근, 한국-러시아 상호교류 3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온라인 전시 《네 번째 차원을 본 사람》(2020.12.18.-2021.3.31.)에서 다시 한번 아뜰리에 에르메스를 재구현하는데, <멈블>을 온라인 버전인 〈나 홀로 ‘멈블’ 보기〉(2020)로 재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한 겹의 레이어가 더 추가된다. 영상을 관람하는 장소, 즉 전시 공간으로서의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작품의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다. 영상이 끝나도 뒤로 가기를 클릭하지 않는 이상 관객은 여전히 그가 만들어 준 가상의 전시장 안에 머물러 공간을 둘러볼 수 있는데 이는 실제 공간에 남아 영상을 한 번 더 보기로 결정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문제이다. 영상 속의 주인공이 접속했던 가상 공간과 유사한 조도를 갖고 있는 그곳은 사실 내가 그 주인공이었으며, 이곳이 바로 그가 접속했던 가상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는 혼란을 야기한다. 다만, 장애물이 가득 차 있던 그곳은 이제 텅 빈 폐허에 가까워졌다. 어둠을 헤치고,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찾는 관람자의 느린 움직임은 시각장애인 주인공의 그것보다 더 축소되었다. 이곳에서 관람자는 한 발자국도 직접 움직일 필요 없이 손으로 스크롤을 몇 번 내리거나 방향키를 조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현실보다 비대한 가상의 공간을 헤매는 일은 이들을 금세 지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자 저 멀리 스크린에서 새어나오는 어슴푸레한 빛이 눈에 들어온다. 질주하는 개와 움직이는 사람, 몇 겹의 이야기 구조에 의해 뒤틀린 입체감으로 가득했던 아뜰리에 에르메스라는 공간은 딱 스크린의 두께만큼 평평해졌다.
한편,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다른 작업에서 한 차례 더 재구현되었다. 바로 <나 홀로 ‘멈블’ 보기>보다 한 계절 앞서 2020년 여름에 만들어진 〈다섯 명의 ‘저택관리인’ 쓰기〉에서 이다. 이 작품은 전시 ⟪다른 곳⟫(2020.8.28.-10.25)을 위해 에르메스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이번에도 역시 그는 영상의 안팎에서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공간을 세 번 재구현했다. 작품에는 자신의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유튜버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출근하는 길을 영상으로 담는데, 그의 출근지인 에르메스는 앞서 밝힌 나의 경험과도,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험과도 사뭇 달라 보인다. 이곳은 내가 가 본, 혹은 알고 있는 그곳과 동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추리 소설가이기도 한 주인공은 자신이 오가는 출근지인 아뜰리에 에르메스를 배경 삼아 추리 소설을 집필 중이다. 이때 공간은 다시 한번 소설가의 언어로, 그리고 구조가 끝없이 반복되는 3D 가상공간으로 변주된다. 시체도, 범인도 밝혀지지 않은 모호한 밀실이 된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물리학 법칙에 등장하는 한 덩어리의 식빵과 같아 보인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체계를 벗어나 덩어리로 존재하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시공간은 유튜버, 소설가, 그리고 김희천에 의해 각기 다르게 절단되며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고 읽힌다.
왜 아뜰리에 에르메스일까? 많은 작품 중 〈멈블〉을 웹으로 옮기기로 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저 그와 공간 사이의 인연이 깊었던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앞서 주지했듯 아뜰리에 에르메스 만큼 방문자에게 공간 자체에 대한 기억을 뚜렷하게 남기는 곳이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거나, 확정적이지 않다는 전제를 딛고 공간을 파악할 때 물리적 실체로서의 공간은 수많은 경험, 관계들과 겹쳐 매듭을 만들고 생동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라는 공간을 두고 여러 대상들이 생성한 매듭들은 각기 또렷한 모습을 띠고 있기에 그 상대성을 감각하는 데 적절하다. 그렇다면 몇 번의 간격을 두고 재구축된 김희천의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김희천 특유의 파국의 정서와는 도무지 겹치지 않는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공간은 공사장으로, 폐허로, 밀실로 분파하며 의미를 거듭하여 갱신한다. 김희천이 만들어낸 세계는 도저히 빠져나올 요량이 없는 밀실인가? 혹은 어디로 이어지든 전혀 상관이 없는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일까? 그렇게 김희천의 세계는 갈수록 좁아지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이 어두워져 간다. 그 어둠 속을 더듬더듬 헤쳐나가는 우리의 더딘 속도는 쉼 없이 시공간을 질주하던 어떤 궤적을 파기한다. 이 느린 여정에서 관람자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이접된 면을 발견하게 된다. 기이하게 맞붙은 시공간 안에서 관람자는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공간의 끄트머리에 닿을 수 없으며, 그곳을 완전히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렇게 스크린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좁지만 깊은, 깊어서 모두가 연결되어버리는 세계는 가능한 한 교묘한 방식으로 여기 어디쯤의 현실 세계를 가리킨다.
정신이 신체보다 늙어버린 10살의 폴라를 떠올린다. 인간의 시간과 개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 한 개체 내의 시간 역시 뒤죽박죽 엉켜 다르게 흐른다. 공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멈블〉과 〈나 홀로 ‘멈블’ 보기〉에서 시간의 함수인 속도에 의해 끝없이 그 크기를 달리하며 감지되었다가, 〈다섯 명의 ‘저택관리인’ 쓰기〉에서 피드백 루프 안에 공간 자체를 가둬버림으로써 분기한다. 각 공간은 ‘흐른다’라는 시간의 존재 양태에서 벗어나 서로 분리되기를 포기한 채 나란하게, 병렬로, 동시에 존재한다. 평소보다 넓지만, 보폭을 좁혀 종종걸음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렇게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물리적 실체로, 영상으로, 3D와 웹상의 데이터로 그 거처를 옮기며 불안정한 속도로 편재한다. 현실 세계와 여기 어딘가가 아닌 다른 곳, 모두가 서로의 간극을 감각할 수 없게 뒤틀리고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