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죽었는가? 이 질문은 2021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제안되었다. 아마 누군가는 인터넷이 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하기 위해, 혹은 죽었다기보다 그냥 그 이름 하에 관찰되는 현상들이 약간씩 변했고 이 변화한 인터넷 개념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고안된 질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마음대로 변화해 버려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을 좀처럼 견디기 힘들어하는 듯하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고. 그러나 세계는 우리의 사소한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마음대로 변화무쌍하다. 2020년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나? 오바마 당선을 예언했던 불가리아의 유명한 예언자 바바 반가는 2021년 인류가 암을 정복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9년을 겨냥한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도, 2012년을 겨냥한 마야인들의 달력도, 빗나갔다.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를 생각해 본다. 어떤 태도나 의도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과관계의 기초다. 이때, 행동은 의도한 결과를 낳아야만 한다. 그러나 의도와 행동, 즉 원인과 결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 나라에서는 ‘신 포도(Sour Grapes)’ 우화를 예시로 인지부조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한 마리의 여우가 있다. 여우는 담장 너머에 있는 포도를 먹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포도를 먹을 수가 없어 의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아주 불쾌한 상황, 여기까지가 인지부조화이고, 그러므로 저 포도는 어차피 아주 아주 셔서 먹을 수 없는 포도일 것이라는 생각을 덧붙이면 자기합리화를 통해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만약 신 포도를 포기한 여우가 어딘가에서 샤인 머스캣을 사먹는다면, 그것은 신 포도를 잊기 위한 보상 행위인가? 신 포도와 샤인 머스캣 사이의 인과관계는 유효한가? 굳이 신 포도가 아니었더라도 샤인 머스캣은 늘 맛있다.
2021년을 기준으로 하는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에 관한 질문들도 이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많은 일 중 하나는 전시를 하거나 보는 일이다. 그러나 2020년, 우리는 전시를 하거나 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시를 하거나 보는 일이 점점 ‘정상화’되기는 했지만서도, 어쨌든 코로나 이후 전시를 위시한 많은 예술 실천들이 온라인을 ‘차선’으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서두의 질문을 약간 비틀어서, 인터넷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인터넷은 불가능해진 원래의 삶이라는 신 포도를 해소하기 위한 샤인 머스캣인가? 인터넷은 실재의 대안인가, 대체인가? 인터넷은 대안적 실재인가? abs 1호는 이러한 질문들에 그렇다/아니다라는 단선적인 대답보다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라는 이름 하에 발견할 수 있는 현상들이 약간씩 변했으며 우리는 이 변화한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 개념에 적응해야 한다고 대답하려 했다. 최소한 관심 있는 독자 분들을 위한 새로운 질문들을 기획하고자 했다.
먼저 황재민과 유진영은 범유행 감염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임한다. 황재민은 우리가 소위 넷 아트, 포스트 인터넷 아트라고 부르는 것들을 고민한다. 코로나 이후 전시-웹 브라우저-인터넷을 가로지르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재)배치되면서 이런 예술들을 생각하기 용이한 배경이 형성된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내용은 코로나와 관계없는 유효타로 구성되었다. 유진영은 김희천의 몇몇 작업에서 몇 번이고 재구축되는 공간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벽을 더듬으며 하나의 공간이 복수의 시간을 담지하고 그럼으로써 시간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버리는 일에 대하여 썼다. 한편 김호원과 이지우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이를 왕복하는, 혹은 병행하는 경험에 기초하여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에 기반한 활동들에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를 고민했다. 김호원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몸의 관계를 짚으며 메타(meta)와 유니(uni), 그리고 세계(verse)가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지우는 몇몇 온라인 전시에서 구체적인 작품이 보여지는 방식을 딛고 온라인 전시가 놓인 독자적 환경을 포착했으나 그것이 오프라인 전시의 그것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시선은 다음 방향에 둔다. 김얼터는 시 읽는 구멍인 《시홀(seehole)》을 보고 생각한 인터넷과 SNS, 웹 브라우저 이후 시의 시각적인 부분, 형식, 유통에 관하여 썼다.
(lock with ink pen)과 🥠는 abs의 고정 코너로, 1호에 초대된 사람은 각각 구자명과 최영, 권태현이다.
구자명은 개인전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0)을 열었으며, 이번 호에는 「분자생물학을 통해 분석한 웹의 생태 원리와 코드의 생장 과정」이라는 제목의 글로 참여한다. 웹과 웹을 구성하는 코드가 대안 접합(alternative splicing)의 원리에 의거해 외부에서 유입된 이질적 코드가 원본의 질서를 재조정하고 의미를 변형하는 과정에 주목하며 향후 이 현상이 갖추게 될 형태를 탐색하기 위한 필요를 모색했다.
이번 호 🥠에는 특별히 두 명을 섭외하였다. 한 명은 《Quarantine Études》, 《CENTERS(중심들)》을 기획하고 ‘컴퓨터 뮤직 클럽(Computer Music Club)’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뮤지션이자 DJ인 최영이고, 다른 한 명은 《광장/조각/내기》, 《Nothing Theater》의 공동 기획, 《IGMO: Ignorant Mobility》를 기획한 권태현이다. 2020년과 2021년 발표한 온라인 기반 예술 실천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 고민하는 인터뷰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실천들이 있었지만, 여러 번의 온라인 실천을 진행하며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인터넷/웹 매체에 관해 공유할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여 구성한 목록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우리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처럼?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변했을 것이며 ‘예전처럼’이라는 말은 아무데나 적용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말이다. 마스크를 벗고 대로에서 연인의 귀여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얼굴은 이제 이전과는 무척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샤인 머스캣 이후의 포도계에 격변이 있었던 것처럼. 즐거운 읽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