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

최보련

(lock with ink pen)은 이모지 🔏를 풀어 쓴 코너의 제목처럼, 이미지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텍스트를 게재하는 코너다. 작업이거나, 작업에 관련되었거나, 지금은 작업과 뚜렷한 관계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도 모르는 텍스트를 요청한다.

최보련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노뉴워크의 동료들과 『재관람차』를 함께 썼고, 개인전 《while True: do /Virga》를 진행했다.

‘나’를 거쳐온,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재 정렬하여 연대기적으로 서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략 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어제와 오늘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이웃들이 나를 구성해왔으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만 우연에 불과했습니다. 직선로나 우회로에 대해 논하는 열띤 토론에 슬쩍 올라타려다가, 텅 빈 테이블의 중앙과 부드러운 가장자리를 응시하게 되었고, 불현듯 테이블에게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서진 도로, 끊긴 도로, 잠긴 도로를 생각합니다. 부서진 나의 경로에서는 개연성이 작동하지 않고 앞에 먼저 간 것이 뒤따라오는 것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적의와 환대는 타당한 이유를 지니기보다는 동형존재자를 판별하는 곤충의 움직임과 비슷한 것으로 전개됩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도로가 전해준 소식>에서, 도로에 접한 오두막에 사는 부부는 어느날 평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줄행랑치는 자동차의 행렬을 목격합니다. 그 행렬의 끝에서 한 청년이 달아오른 라디에이터를 식히기 위해 물을 청하고, 차에 동승하고 있던 여자는 핵전쟁으로 온 세상이 끝장났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있는 경로는 소설 속에서 제공되지 않는데, 끝장났다는 그 ‘온 세상’이 무엇인지 오두막의 부부가 채 물어보기 전에 차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위상에 놓인 시간과 공간을 통과했는지, 그 시공간 속에서 어떤 우연이 양의 피드백 루프 속에서 증폭되었는지, 어떤 음엔트로피 기계가 가스라이팅이든 스포트라이팅이든 동원해 그 증폭을 감쇠시켰는지, 그 와중에 어떤 반딧불 같은 게 잔존했는지, 그 느리고 미약한 잔존은 어떤 형태의 느림으로 하나의 동기 내지는 가속을 만들어냈는지. 내가 작동하는 기계라는 점, 그리고 기계같이 작동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를 선택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자기소개서의 호환되지 않는 여러 판본에 맞춰 나를 다시 씁니다. 끊임없이 창출되는 포스트-나의 주관성 속에서, 부서진 도로라는 조건조차 ‘부서진 도로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극복 서사로 압출됩니다. 쓰레기는 더 외딴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밀려납니다.


인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는 곳을 바꾸거나, 만나는 사람을 바꾸거나, 시간을 달리 써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장소와 사람, 시간은 개별 조정이 가능한 파라메터처럼 제시되지만 기실 분리 불가능한 방식으로 뒤얽혀있습니다. 선택지처럼 제시되는 것들은 사실은 기껏해야 강매품에 불과합니다. 오지선다형 답안의 선택지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학생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까? 혁명의 시간에 개인은 자신의 것이 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삶에 개입하여 세계를 바꿀 것인지에 대답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당신은 싸움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얻을 것인지, 물러남으로써 비천한 평화에 머무를 것인지를 묻는 취조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이때 주어진 것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 의지를 뜻합니까? 혹시 한 마리의 쥐새끼가 되어 어두운 쥐구멍으로 빠져나갈 ‘선택지’는 없습니까?


나는 내가 선택한 것들의 총합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 진부한 우연들의 시시한 총합이자 이 필연적 우연들의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입니다. 이 돌림노래를 벗어나는 유일한 것은 의식으로 제어할 수 없는 틱(tic)으로 그것은 성급한 기대를 못 이기고 언제나 돌림노래보다 약간 더 앞서나갑니다. 틱은 돌림노래의 무한 루프를 중지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약간 어긋나게 만듭니다. 때로 이 어긋남은 육안으로는 분석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빨리 시작되고 끝나서 초당 프레임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분석 결과는 놀랍게도 수십 개의 마이크로 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끊임없이 진동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간접적 실재론자의 말마따나,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침묵처럼 들리는 것은 오버슈팅을 피하고자 지각이 데이터 갱신을 일시 중지하거나, 임의의 데이터를 물려놓은 결과입니다.


그렇게 어긋난, 미처 돌려막지 못한 구멍에서 불길하게 진동하는 저음을 따라가다가 불현듯 입력부에 근접하면 하울링에 연루됩니다. 매 사가 이런 식입니다. 계속해서 신변은 부서져 내립니다. 간신히 연명해온 인식론들, 실천들, 예술들은 건너방의 건반음처럼 뭉개집니다. 반복 녹음으로 평평하게 녹아내린 드론 사운드만이 오직 가능한 청취 경험이 됩니다. 이 부드러운 음향적 불확정성 속에 난폭한 광학적 전자총이 난입하면서, 매체 연합이 결성됩니다. 고해상도의 소음을 난사하는 이 매체 연합은 시한폭탄처럼 째깍대며, 다시금 쓰레기를 파묻을 사회적 뒤뜰을 게걸스럽게 탐색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집 뒤뜰에 혐오 시설을 두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가설적인 주권만을 지니고 있는 예비 입주민까지 합세한 쓰레기장 건립 반대 시위 속에서 사회적 뒤뜰은 더 바깥, 더 외곽의 지역으로 확장됩니다. 모든 것이 한없이 선명해지는 매체 연합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백색 소음은 전자적인 것에서 정서적인 것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시금 선명한 오디오 비주얼 절편들로 산산조각납니다. 모든 노이즈는 사전에 계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