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선물해 준 책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2020년에는 몇 번이고 이 문장을 되새겼다. 이런 질문을 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림을 좋아하면 마음은 어떻게 될까. 설렘을 위해 이 사연을 쓴다.
몇 개의 전시를 짚으면서 몇 개의 회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텐데, 이 회화들은 내가 전시장에 직접 가서 본 것이며 좋다기보다 나쁘다기보다 이상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회화들이다. 이상하다는 감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미적인 것에 가장 가깝다.
첫 번째는 정경빈의 《위로가 되는 환상들》(갤러리175, 2020.09.15-09.27)과 《섀도우》(인스턴트루프, 2020.10.14-10.30)에 걸렸던 그림들이다. 《위로가 되는 환상들》에서는 전시장 입구 근처에 놓인 작업보다는 안쪽에 놓인 작업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색이 드물게 들어갔거나 흰색만을 사용한 이미지들이 마음에 들었다. 이때의 나는 2019-2020년에 유독 흰색을 중요하게 사용한 작업들이 많지 않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어 열린 《섀도우》에도 비슷한 그림들이 걸리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방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초록색을 사용하며 벽을 꽉 채우도록 걸린 네 개의 캔버스를 볼 수 있었다. 앞의 전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사용된 흰색의 작동 방식은 정경빈의 그림이 이상한 원인이다. 그것은 관객에게 복수의 시점을 요구하거나 시점 자체를 하찮게 만든다.
회화 오브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소위 ‘구상’이라고 부르는 회화들에서 특정 부분을 클로즈업하여 따로 보고자 한다면, 해당 회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이미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보기 때문이다. 회화는 가까워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 매체고, 많은 천재 미술가들, 소위 ‘추상’ 미술가들의 걸작은 그러한 특성을 잔인하도록 철저히 이용한 결과다.
정경빈의 그림이 요구하는 그림과 관객 사이의 거리, 혹은 관객의 시점은 최소한 두 개다. 첫 번째는 멀리서, 그림 전체가 보이는 위치이고, 이때 관객은 어떤 풍경을 볼 수 있다. 타오르거나, 흘러내리고 있거나, 쏟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이 풍경을 구성한다. 두 번째는 가까이서, 그림의 부분만 볼 수 있는 위치이고, 이때 관객은 물감과 캔버스를 본다. 마찬가지로 물감은 캔버스의 표면을 흘러내리고 있거나 캔버스 위에 쏟아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두 개의 시점은 하나의 회화가 작동할 수 있는 두 개의 방식을 제공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기존의 회화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것이다. 반드시 시점을 분할하여 두 개의 작동 방식을 마련한 의도로 제작된 회화가 아니어도 멀리서 보면 이미지가, 가까이서 보면 캔버스의 표면이 드러난다. (나는 여기서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의 유명한 영상 작품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정경빈의 그림은 왜 이상할까. 거기에는 ‘헛손질’이 눈처럼 흩어져 있다. 내가 ‘헛손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가 보라고 그려 놓은 게 맞나 싶게 그려졌으면서 동시에 어떤 의도를 띠고 그려진 부분들을 가리킨다. 정경빈의 그림에서 헛손질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보여지는데, 주로 사용되는 방법에 몇 가지가 있는 듯하다. 첫째로는 배경과 같은 색(주로 흰색)이어서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것의 양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다. 이 경우 헛손질은 홀로 있는 상태이며 은근한 색이 들어간 큰 캔버스 몇 개와 작은 캔버스 네 개가 모인 작업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경우에서는 헛손질을 따라 짙은 선이 따라 그려진다. 이 방법을 사용한 그림들은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다. 액체라든지, 물감이라든지, 아무튼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멀리서)이면서 동시에 흘러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면 투명하게 남아 있어야 할 캔버스 화면 위를 흘러내린다(가까이서). 또한 헛손질을 따라 그려진 짙은 선들은 어느 헛손질이 먼저 그려졌는지, 혹은 어느 헛손질의 양감이 더 두터운지 같은 순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순서는 완전히 조작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이 먼저 그려졌는지, 어떻게 그려졌는지 같은 제작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이 감춰지며 신비가 발생한다.
앞의 두 개가 《위로가 되는 환상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면 《섀도우》에서는 마지막 사용법을 볼 수 있다. 가우시안 블러가 적용된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화면에 그려 넣어진 흰색과 짙은 선들은 첫 번째나 두 번째 헛손질을 반전한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에서 흰색은 색조가 있는 화면 때문에 양감이 불어넣어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양감을 불어넣는 대상이며, 동시에 화면에 심도를 부여한다. 나는 줌 기능을 거꾸로 수행하며 그림을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두 번째는 한선우의 개인전 《Wishing Well》(FAS, 2020.06.20-06.26)에 전시된 회화들이다. 한선우 회화의 이상함은 그것의 ‘회화답지 않은’ 질감으로부터 온다. 그 질감은 회화의 능력을 한물간 것으로 만드는, 소위 새로운 매체들과 회화의 경계, 그리고 회화의 앞으로의 임무를 건드리는 한편 인스타그램으로 회화를 보는 행위의 의미를 의문에 부친다. 이 회화들은 타투의 한 장르 ‘스쿨(school)’과 블러, 오패시티, 페더(feather), 선버스트(sunburst) 등 포토샵의 주된 시각성을 조합한 듯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양쪽이 다 특유의 질감을 가진 장르인 점이 특징인데, 한 쪽은 인간의 신체를 캔버스로 삼고, 다른 한 쪽은 디지털 평면을 캔버스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서로 다른 것을 캔버스로 삼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질감에는 묘하게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쪽은 디지털의 질감인데, 특히 한선우의 그림에서는 높은 명암 대비, 흰색을 사용하는 그라데이션 표현에서 그러한 질감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한선우의 전시를 기록한 사진에서는 캔버스가 걸려 있는 벽이 사진 안에 존재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해진다. 촬영 시 화면의 네 모서리가 전부 이미지 안에 들어와 있고 ‘Acrylic on Canvas’라는 캡션이 없다면, 디지털 페인팅이라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질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Wishing Well》의 경우 벽에 붙은 이미지들과 캔버스 속 이미지들 간의 질감 차이가 거의 없어서, 한선우의 회화가 캔버스임을 보증할 수 있는 부분은 캔버스로부터 비스듬히 서서 촬영할 때 드러나는 캔버스 옆면의 두께나 캔버스 아래 붙은 그림자들뿐이다. 즉, 한선우의 그림에서 이상한 부분은 그것의 내용, 예를 들자면 한국 대중문화를 풍미했던 이미지나 특정 타투 장르와 포토샵의 시각성의 재구성 같은 것을 넘어 다른 매체의 질감을 놀랍도록 잘 구사하는 점다. 그런 질감 표현을 더 쉽게, 더 빠르게 할 수 있는 매체는 물을 것도 없이 포토샵이다. 그러나 한선우는 그것을 회화 캔버스에 구현하고 그럼으로써 여러 매체 사이의 경계를 가시화한다. 노련함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문주혜 개인전 《스킨케어 루틴》(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20.09.11-09.27) 또한 장지를 사용해 독특한 질감을 보여 주었다. 전시의 구성을 보면 우선 제목에 ‘집단’이 들어가는 작업이 몇 점, ‘풍경’이 들어가는 작업이 몇 점, 게임 스킨을 모티프로 삼은 그림들, 〈섀도우 게이볼그 +10〉, 〈우로보로스로 자동 이동 555km〉, 〈세라핌의 날개〉 등이 있었다. 앞의 작업들보다는 뒤의 작업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데, 그 그림들에서 ‘스킨’의 의미가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스킨은 무엇보다 효과(effect)다. 깃털, 불, 금사슬, 날개, 왕관, 연기, 반짝임, (주로 만화에서 사용하는) 오라 같은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효과로 가득한 문주혜의 화면에, 이 영광과 신비를 발산하는 근원은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은 효과뿐이다. 스킨은 다른 기능 없이 오직 효과만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매체다. 내용이 없고 메시지도 없는, 비어 있는 매체. 그렇기 때문에 스킨에는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누군가 왜 날개보다 왕관을 선호하냐고 묻는다면 왕관이 더 싸서, 날개는 캐릭터를 가리기 때문에 기능이 별로라서 같은 답변도 가능하지만 종내에는 ‘왕관이 더 멋있어’라거나 ‘그냥’이라는 답변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회화 또한 다른 많은 매체와 장치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효과를 창출한다. 회화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 선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때로는 특정 결과, 특정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화면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체를 장악하는 형태가 되도록 제작되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특성을 없애고 전체와 부분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얇게 함으로써 그 특성이 더욱 현저해지는 작업들도 있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것일수록 화면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규칙은 사진이나 영화, 디자인 등 다른 많은 장르와 매체들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문주혜의 화면 안에 삽입된 프레임, 액자 혹은 액자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스킨들에는 강조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강조하는 도구만 있고 강조되어야 하는 대상은 부재한다. 그럼으로써 강조되는 것은 어떤 매체가 어떤 효과를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장지는 어떤 역할을 수행할까. 앞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다.
마지막은 이동혁 개인전 《공회전》(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2020.05.07-05.28)과 《침묵이 바위를 깰 때》(에이라운지, 2020.10.06-10.24)다. 두 전시 서문은 모두 그림에 등장하는 종교적 분위기와 모티프, 도상을 언급하는데, 그림 앞에 선 나는 표면 아래에 있는 색의 역할을 고민했다. 우둘투둘한 표면의 색 아래로 언뜻 보이는 다른 색에게는, ‘배경과 형상이 뒤얽혀 있다’보다는 ‘둘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형상과 배경이라는 이분법은 회화가 걸리는 벽을 만나면 쉽게 하나가 된다. 이동혁이 만드는 신비로운 이미지들에서 간혹 천장이나 바닥 부분이 하늘이나 우주, 검정 같은 무한한 뚫림으로 처리된 것은 우리 세계의 많은 이분법들과 편의를 위한 경들이 우주 단위에서 바라보면 단숨에 동질한 것이 되어 버린다는 말을 건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주로 나가지 않고 지구 안에서, 더 좁게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그런 동일화를 손쉽게 해내는 것이 있다. 신앙이다.
신앙이란 세계에 신의 말씀을 덧씌우는 일이다. 여기서는 우연인 게 그다지 없어서 세계는 점점 더 완벽해지고 세계의 정합성은 계속 증가한다. 이는 물론 세계가 선하게 바뀌어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세계를 단일한 실재로 취급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악이 있는 만큼 선이 있고, 죄가 있는 만큼 회개가 있다. 이런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신의 뜻이라는 단어로 거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회화의 일과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어떤 그림들 안에서 세계는 완전한 형태로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처럼 완전한 세계를 상정하는 그림들도 분명히 그려지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시대가 세계를 설명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를 예술로 표현하려는 데서 기인하는 기품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동혁의 그림 안에서 세계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일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사실 정말로 이상한 건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림이라는 사물을 좋아하는 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