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을 위해 종합하기

황재민

2020년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나는 올해 읽은 텍스트를 모아 보기로 했다. 다만 모범적인 형태의 텍스트, 이를테면 책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고, SNS에 발행된 짧은 글이나 전시 공간에 있던 서문, 웹을 통해 읽은 기사 같은 것들, 자연스럽게 마주친 텍스트를 조각 모은다는 생각을 하며 썼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디스크 조각 모음’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체제에 내장된 프로그램으로,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파일을 재정렬해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것이 기능이다. ‘디스크 조각 모음’은 이제 ‘마이크로소프트 드라이브 최적화’라는 새 이름을 얻었는데 이 이름은 프로그램의 기능을 보다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드라이브 최적화가 아직 조각 모음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때, 나는 이게 무언가를 종합하기 위한 작동이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재정렬을 통한 최적화가 낭비를 줄이고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단순한 종합은 지연을 만들 따름으로, 상상은 오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도대체 어째서 최적화를 위한 기능에 조각 모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납득이 잘 되지 않고, 그러므로 어쩌면 둘 사이엔 알 수 없는 연결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최적화를 위해선 종합, 혹은 지연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최적화와 접근 속도를 지연시키는 종합이 원래 서로 잘 구분되지 않는 종류의 기능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결산은 최적화를 위한 것일까, 혹은 종합을 위한 것일까? 결산을 통해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것이 좋을까, 혹은 속도를 지연시키는 게 좋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결산으로 한 해를 여는 기획을 위해 쓰며 나는 최적화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은 지연을 위해 종합하기가 되었다.


1. 《장식전》, 《이미지 인류학, 므네모시네 아틀라스》, 《방법으로서의 출판》의 텍스트


미술 전시에 놓였던 글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장식전》에 있었던 기획자 이상엽의 석사 논문 『동시대 미술과 장식의 새로운 관계성 연구: 미술로서 장식, 장식으로서 미술』이었다. 《장식전》은 ‘미술’을 불러내어 빈 칸으로 만든 다음 그 남는 자리에 ‘장식’을 넣어 발생하는 위상 변화를 조장하고 관찰하는 전시였다. 전시가 진행된 공간 ‘오래된 집’에는 그러므로 여러 종류의 (미술) 작업이 장식으로 제시된 채 있었는데, 그 광경은 ‘오래된 집’이라는, 낡은 가옥 두 채를 미술을 위해 고쳐 만든 공간이 뿜는 비릿한 선량함과도 맞아 떨어지는 바가 있었다. 전시에서 다종의 미술-장식물은 화장실부터 마당까지 공간 곳곳을 은근하게 차지했고, 쪽마루에는 참여 작가의 과거 도록 등 읽을 거리가 놓여 있었으며, 기획자 이상엽은 여기에 장식에 대해 다룬 자신의 글과 논문을 함께 두었는데, 이것은 놀라웠다… 석사논문이라는 것은 모두가 숨기고 싶어하는 금기의 텍스트로 이미 밈(Meme)화 되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 여기서 논문의 기획과 전개에 대하여 따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테지만, 이것은 전시의 기획이 꽤 오랜 시간 이론적 기획과 함께 발전한 결과라는 언질처럼 보여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는 전시 《이미지 인류학,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에서 김상길이 전시한 〈RE – M – OD – E – L SPACER+ REPEAT + SEQUENCE + CURSOR +〉가, 그리고 《방법으로서의 출판》에 전시된 류한길의 〈충격 관리자〉(포스터 디자인: 심규선)가 인상 깊었다. 김상길의 〈RE – M – OD – E – L SPACER+ REPEAT + SEQUENCE + CURSOR +〉은 일반 프린터로 출력된 듯 보이는 260여 장의 A4 사이즈 사무용지로, 미술 공간에서 텍스트를 전시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과 형식을 택한 듯해 오히려 인상적인 작업이었다. 나아가 이것은 주기적으로 갱신되는 텍스트로, 작업엔 전문을 웹 환경에서 다운로드하고 볼 수 있도록 링크가 함께 게시되어 있었다. 김상길의  〈RE – M – OD – E – L〉(하략)은 텍스트를 전시하기 위한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독해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시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더불어 류한길의 〈충격 관리자〉 역시, 목적은 독해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그런 듯 보였다). 작업은 포스터 형태로 제작된 짧은 텍스트였고 자리에 선 채 다 읽을 수 있는 길이였지만, 이 텍스트를 다 보고 나면 이것이 과연 완독이라는 실천을 허용하는 작업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다. 〈충격 관리자〉는 (현실이 아닌) 현실성을 “합법화”하는 “비자연적 회전체”(“비자연적 회전체?”)를 구성하고, 그것에 충격관리자라는 이름을 준다. 이 미상의 관리자는 현실성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구현 가능한 현실의 영역을 좁히는 괴이로 설명되는데, 이(들)에 의해 현실성은 계속해서 좁아질 것이기에 반드시 관리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필요하다. 탈출을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위장된 합법성을 통해 달성 가능한 허구의 기만술”인데, 완전한 비합법이 아니라 위장된 합법성을 상상해내야 하는 것은 완전한 비합법 역시 합법의 영역을 허용했을 때에만 활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충격 관리자〉는 이 기만술의 현실적인 구현 방법을 성공적으로 상상해냈을 때에야 비로소 경험이 가능하다.


김상길과 류한길이 전시한 텍스트는 비슷한 시기, 서로 그렇게 멀지 않은 미술 공간에서 체험할수 있었다. 전시장에서의 텍스트는 언제나 물성과의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들은 몇 가지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회피하거나 무시하면서 예술 텍스트를 독립적 영역에서의 대안 연구 행위 쯤으로 활용하고, 그것은 흥미로웠다.


2. 콘노 유키의 「조선통신사 월간 소식」, 권정현의 「총총레터」


2020년에도 뉴스레터는 계속되었다…. 정기적인 메일링 서비스는 어쩌면 등장했을 때부터 유행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메일 계정과 온라인 신청서 양식만 있다면 누구든 스스로의 편집자이자 발행인이 되어 작은 플랫폼을 가장할 수 있는 뉴스레터는 이미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으나, 차선책의 탐색이 절실했던 2020년엔 특히 눈에 띄는 형식 중 하나가 되었다.


나 또한 올해 몇 개의 뉴스레터를 새로 구독했고, 그 중 미술에 대해 다루는 서비스로 콘노 유키의 「조선통신사 월간 소식」과 권정현의 「총총레터」가 있었다. 콘노 유키는 1년 동안 한국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를 300개 이상 찾아보던 평론가이자 기획자였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세계적 대유행 상황 이후 한국에서 전시 보는 일이 어려워지자 대신 뉴스레터를 시작한다. 그는 2017년부터 2020년에 열린 전시 중 글로 갈음하지 못한 사례를 골라 평론하고 그것으로 시간을 만회한다. 모든 평론과 리뷰는 돌아보는 행위에 속할 테지만, 회고에도 규칙은 존재한다 - 이를테면 3년 전 열린 전시를 한 달 뒤 발행될 지면에서 리뷰하는 것은 어색하다. 하지만 2020년은 특수하게 가능한 종류의 회고를 허용하고, 「조선통신사 월간 소식」은 이에 맞춰 최선의 차선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뉴스레터의 기능은 그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권정현의 「총총레터」는 1주일 중 목요일, 매주 한 편 발행되었고 이 편지의 주된 기능은 (아마도) 전시를 골라 소개하는 일에 있었다. 「총총레터」는 발 빠르게 전시를 보고 인상을 정리해 짧은 리뷰로 소개한다. 리뷰를 이용해 다루지 못한 전시는 메일 하단에 목록으로 제공된다. (다만 오로지 미술 전시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전시는 많다. 그 중 무엇을 볼 것인가? 미술잡지는 늦고 네오룩은 아무도 보지 않고 아트바바엔 정보가 너무 많다. 「총총레터」는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의 문법을 따라 미술을 다루고, 그 결과물은 상수로 존재했던 정보 전달의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고등학생 때 학교 가는 전철에서 누가 무가지를 나눠주면 읽을 것이 생기니까 좋았다. 「총총레터」는 팜플렛처럼 접힌 작은 무가지를 읽는 기분으로, 매주 챙겨 읽게 되는 편지였다.


편지는 사적이고 내밀한 형식이다. 동시에 문자 메시지와 카카오톡 메시지, 그리고 DM의 시대에, 이메일은 그 무엇보다 공적인 형식처럼 보인다. 발행인에게 있어 뉴스레터는 공적인 무엇처럼 다뤄질 테다. 발행인은 신청서 양식을 공개하고 메일 주소를 수집한 뒤 다수에게 전달될 것을 염두에 둔 채 정보를 작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뉴스레터는 수신자의 메일함에 사적인 형태로 도착한다. 인터넷 세상 혹은 인터넷 이후의 세상에서 공적 공간이 온전히 열려 있으며 사적 공간이 온전히 닫혀 있다는 단언은 어렵다. 뉴스레터는 휘발되기 직전의 형태로 흘러가는 SNS의 타임라인과 비교적 단단하게 굳은 무엇으로 보이는 기존 텍스트 매체 사이에서, 그리고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사이에서, 자율적인 글쓰기를 허용하는 내밀한 지면으로 존재한다.


3. 제리 살츠(Jerry Saltz)의 글, 「4개의 미술관이 이 작품이 전시되어선 안 된다고 결정하다. 그들은 옳고 또 틀렸다.(4 Museums Decided This Work Shouldn’t Be Shown. They’re Both Right and Wrong.)」


2020년에는 《지금,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 Now)》이라는 제목으로 화가 필립 거스턴의 회고전이 계획되고 있었다. 《지금, 필립 거스턴》은 워싱턴 국립미술관과 휴스턴 미술관, 보스톤 미술관, 그리고 런던의 테이트 모던까지 포함하는 대형 전시로, 2021년부터 2022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9월, 4개 미술관은 공동 성명을 통해 전시를 2024년으로 연기할 것임을 밝힌다. 성명을 통해 공개된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한 전지구적 건강 위기였고, 하나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 이후 촉발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여파였다. 《지금, 필립 거스턴》을 위한 기획에서 특히 문제가 된 건 KKK를 다룬 25점의 작업으로, 이것은 백인 화가가 그린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연기를 선언한 미술관의 결정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술지 브루클린 레일(The Brooklyn Rail)엔 전시 연기에 대해 항의하는 공개 서한이 발표되었다. 약 2600명에 달하는 예술가들이 서명한 서한은 미술관의 결정이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우며”, 그들은 지난 5년간 활발히 논의된 인종 정의(Racial Justice) 문제에 대해 스스로 교육하고, 준비하지 못한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전시를 연기하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규탄했다. 서한은 필립 거스턴의 딸인 무사 메이어(Musa Mayer)의 입장을 인용, 거스턴이 주류 백인이 아니라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 구성원에 속했다는 점, 그의 작업은 백인주의의 과실(culpability)를 폭로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했고, 진정한 위험은 작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회피하려는 미술관의 결정에 있다고 주장했다.


위키피디아는 ‘캔슬 문화(Cancel Culture)’를 현대적인 형태의 도편 추방제도(Ostracism)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Z 세대의 시대 정신을 보여주는 새롭고 유독한 인터넷 문화로, 종종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인터넷 공론의 해악이자 최선의 경우 양날의 검이 되는 시민 운동으로 이해된다. 아마 공개 서한에 참여한 2600명의 예술가는 필립 거스턴의 전시를 연기한 미술관의 결정을 ‘캔슬 문화’에 굴복한 예로 여겼을지 모른다. 취소는 검열이며, 표현을 향한 억압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논쟁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미술은 자신이 주장한 혐오의 역사를 회피하는 대신 직시해야 한다. 이것 역시 공개 서한을 통해 전개된 주장 중 하나였다.


이슈에 빠르게 반응하는 평론가 제리 살츠 역시 정기 기고하는 문화지 벌처(Vulture)의 지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연기된 미술관의 결정이 옳다는 쪽에 힘을 싣는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그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주요 미술관의 주요 직위는 백인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그렇기에 미술관이 비백인 대중을 바라보며 무엇이 교육적이고 윤리적인 것인지 선보이는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제 미술관은 비백인 대중이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좀 더 귀 기울여야 옳으며, 거스턴의 그림이 전시되는 것은 백인, 더하여 남성으로 채워진 미술관의 주요 직위가 소수자에게 분배된 후여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선택이 ‘캔슬 문화’의 유독한 사례로 규정된 뒤, 그에 대한 대응은 종종 ‘캔슬 문화’ 그 자체의 방식을 모방한다. 한 쪽에서 무언가를 취소하라고 말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취소하는 것을 취소하라고 이야기한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현 관장 케이윈 펠드만(Kaywin Feldman)은 미술지 아트넷(artnet)과의 인터뷰에서 몇 가지 숫자를 짚는다. 그에 따르면, 워싱턴 국립미술관 기획 부서(Curatorial Department)는 구성원의 98%가 백인이다. 그에 반해 보안, 경비 업무를 수행하는 시설관리 노동자 중 83%가 비백인에 해당한다. 미술관은 얼굴 없는 진공의 공간이 아니고 그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검열과는 거리가 좀 있다.


필립 거스턴의 그림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의 그림은 매번 아이러니컬하고 쓰고 맵다.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거슬린다. 그는 1930년대에 보다 고풍스러운 화풍으로, 그리고 1960년대에는 익히 알려진 특유의 화풍으로 KKK단을 다룬 적 있다. 하지만 거스턴은 1930년대에 동료 화가인 루벤 카디쉬(Reuben Kadish) 등과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가 60년대에 남긴 그림은 명백히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혐오와 폭력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종교적 신비에 구멍을 뚫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제리 살츠는 글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상징물인 ‘MAGA 모자’를 쓴 젊은 대안 우파 트럼프주의자들이 KKK단을 다룬 필립 거스턴의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 찍는 장면을 상상하게끔 이끈다. 그렇게 촬영된 사진은 몇 가지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 등 SNS에 업로드될 테고, 그렇게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공유될 것인데, 그때도 그림은 여전히 그 대상에게 공격적일 수 있을까? ‘MAGA 모자’를 쓴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곁에서, 거스턴의 그림은 마치 트럼프주의자들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또 다른 용도를 얻는 것은 아닐까? 제리 살츠의 글은 원본의 맥락을 변형하는 전유의 방법론이 시효를 다했음을, 또는 미술관이 이 역사적 방법론을 보존하고 시연하는 최선의 장소가 아니게 되었음을 알린다.


4. 마테리알(ma-te-ri-al), 『질식자의 편지』, 그리고 정성일의 답장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2020년엔 비평지 마테리알 역시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현재 영화문화는 교수대에 목매달려 생명을 잃어가고 있”으며, “영화문화 옆에서 우리는 목매달린 채로 버둥거리고 있”다고 토로하는 이 편지에서, 6명의 공동 편집인은 13개에 달하는 질문을 내던진다. 질문의 숫자만큼이나 다루는 범위 역시 넓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무척 특정하기도 했다. 이 질문의 목록은 기성의 문화에서 지식과 권력을 생산하는 방법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영화문화라는 공동체를 향해 무엇이든 대답을 요구하는 편지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착한 회신 중 정성일의 글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성일에게 답장을 요구하고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이들이 어렴풋이 알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영화를 보고 골라내는 방법을 찾아 퍼뜨린 사람이자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체온을 조금 높여야 마땅하다는 규칙을 만들어낸 자로, 그에게 답장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규칙을 직접 입안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공동 편집인 함연선이 마테리알 웹페이지에 공개한 글 「수신인: 씨네21」에 따르면 기성의 영화문화 중 일부인 잡지 씨네21은 마테리알의 편지에 회신하는 대신 그들을 격려했고, 그렇게 선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피했는데, 이에 비하면 정성일의 답장은 의미 있는 결과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성일은 그의 글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에서,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마테리알이 송신한 편지 속 문항들에 대해 먼저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테면 “질식자”란 대체 무슨 뜻인가? 영화문화를 교수대에 걸어버린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 형벌 집행에 판결문은 있었는가? 그리고 ‘우리’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데? 그는 답하는 대신 재차 질문한다.


서한을 함께 쓴 편집인 gkd는 회신에 대한 또 다른 답장을 쓰며 정성일에 대해 “하나의 기능으로 작동”하는 “고유명사”라고 말한다. 그가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 문장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정성일에게 정성일은 어디까지나 개인일 테고… 고유명사로 작동하는 자신의 기능에 대해 스스로 해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gkd가 쓴 것처럼) 정성일의 답신은 우회기동이다. 정성일이 마테리알을 향해, ‘선생님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따져 묻는 대목은 특히 그렇다. 편지를 쓴 이들에게 정성일은 다름 아닌 선생님이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정성일은 이 편지가 바로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마테리알은 불균등한 지형 조건을 가늠한다. 정성일은 모든 사람들이 평평한 땅 위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은 절실한 인사로 끝난다.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건강은 내일을 성공적으로 예비하기 위한 다양한 조건 중 하나다. 하지만 죽음 없는 건강은 모든 체제와 질서를 이대로 건강하게 방치하는 요인이 될 지도 모른다. 이 모든 편지의 독자로 남은 나는 그의 안부인사를 오독한다. 그것은 가상의 평지 위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건강을 독려하는 인사말이다.


5. 루이즈 더 우먼(Louise the Women)의 창립문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젊은 여성 예술가들의 모임”인 루이즈 더 우먼은 창립과 함께 2개의 텍스트를 발행한다. '#안전한미술계를요구합니다' 해시태그와 함께 시작된 글「루이즈 더 우먼 Louise the Women의 시작을 알리며」라는 제목이 붙은 글은 1주일의 텀을 두고 발표되었고, 공통적으로 두 가지를 주장했다. 여성을 향한 모든 폭력을 방조하지 않을 것임을, 또 여성 예술가의 안전한 창작이 가능한 미술계 내부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립할 것임을. “우리는 당신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전문을 읽으시길.


6. 긴급재난문자


지난 2020년에 대해 알리는 텍스트적 상황과 사건 중 긴급재난문자를 빼놓을 수 없다. 진동과 소음을 이용, 전지구적 감염병 상황을 국지적으로 중계하는 해당 텍스트는 2020년이 어떻게 지연되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분명한 사례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도 스마트폰은 이 근방에 발생한 확진자의 수와 경로에 대한 링크를 전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