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거의 대부분의 회화는 밑에서부터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식으로 만들어진다. 먼저 그려진 것을 나중에 덧칠한 것이 뒤덮든, 아니면 먼저 그려진 것이 전반적인 그림의 배경이 되든, 붓과 물감을 통해 그려진 것들이 이루는 각각의 레이어가 시간 속에서 공간에 겹치거나 뒤섞이면서 하나의 작품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인스타그램에 작업 과정을 게시하기도 했듯) 문유소의 회화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다. 한데 정작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 정반대의 느낌을 받게 된다. 레이어를 쌓아 올린 게 아니라, 완만한 산에 비가 내리듯 레이어와 물감을 밑으로 흘러가게 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먼저 이번 개인전 《새해》(2024)에서 가장 넓은 크기의 작품인 〈그 무엇도 아닌 것〉(2024)을 보자. 여기서 전면에 나선 매섭고 두꺼운 붓질의 부분은 캔버스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보이는 완만한 붓질의 부분과 대조를 이루며, 이는 색채에 있어 (초록~노랑 계열인) 전자와 (오렌지 계열인) 후자의 그라데이션으로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대조는 매서운 붓질의 (마른 물감의 두께에서도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진출로 인해 미묘한 낙차의 감각을 갖는데, ‘형상과 배경’이란 오랜 철학적·미학적 구도를 이쯤에서 끌어오자면 전자를 형상으로, 후자를 배경으로 쉬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유의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 무엇도 아닌 것〉에선 배경 속에서 형상이 솟아나거나, 배경이 형상의 지지체 역할을 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새해》에 속한 여러 작품들이 공유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가령 〈그 어디도 아닌 곳 3〉(2024)의 경우 거칠고 두터운 마띠에르가 화폭을 거의 점령하고 있으나, 아래를 잘 보면 은근한 삼각형 속에 상대적으로 완만한 부분이 드러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수직으로 흐르던 물감이 그 위를 가로지르기에 이 삼각형의 존속은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말이다. 다시 ‘형상과 배경’을 끌어오자면, 이 삼각형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배경일 것이다. 배경답지 못한 배경, 즉 형상의 작용에 의해 물들고 뒤덮이는 배경. 여기서도 레이어들은 쌓인 게 아니라 흘러내리며 중첩된 듯하다. 이쯤에서 처음으로 돌아가건대, 형상의 아래를 향한 작용이 배경을 변형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문유소의 캔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굳혀주는 것은 《새해》에서 예외적인 경우처럼 보이는 〈매일이 우울한 월요일이다 3〉(2024)으로, 캔버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오른쪽의 거칠고 두툼한 마띠에르는 수직의 획으로 이루어진 반면 왼쪽의 상대적으로 평탄한 부분은 수평의 획으로 이루어져 서로 직접적이고 과시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도 아닌 곳 3〉과 비슷하게 왼쪽 부분 위로 흘러내리다 말라붙은 하얀 물감들은 우리의 판단을 대조에서 좀 더 나아가도록 자극한다. 이 과시는 오른쪽 부분이 형상으로서 배경을 향해 작용하다 멈춘 결과가 아닌가 하는, 다시 말해 문유소가 《새해》에서 견지한 방법론이 일부러 오작동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요컨대 〈매일이 우울한 월요일이다 3〉은 그 예외적인 모양새로서 오히려 《새해》의 중핵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새해》에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텍스쳐의 극명한 대조로서 '형상과 배경'의 구도를 활용하고 또 뒤집는다. 그렇다면 문유소는 어째서 이런 그림을 그린 걸까. 형상과 배경의 구분 불가능성이 (적어도 인문학적 담론장 안에선) 갈수록 강화되는 요즈음에, 그 구도의 이분법을 굳이 반복하는 듯이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그려진 것이 형상과 배경의 구도를 갖는다고 해서 그게 꼭 실제의 형상과 배경에 고스란히 대응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새해》의 작품들이 공유하는 또 다른 특징을 건드릴 필요가 있을 성싶다.
처음 전시를 다 보고 나온 직후 문유소가 간단한 소감을 물어봤을 때, 나는 다수의 그림에서 글리치 아트에 가까운 감각을 느꼈다고 말했다. 물감의 물성을 아주 도드라지게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붓 터치가 퍽 거칠면서도 일정하고 세밀한 모양새를 띄어 마치 자글거리고 윤곽이 늘어진 디지털 노이즈 화면처럼 보인다는 얘기였다. (사실 이는 《Ring》(2024)과 《fe, yi》(2024)에 전시됐던 문유소의 작품들에도 해당되는 진술이다) 한데 놀랍게도 문유소는 작업에 있어 글리치 아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글리치 아트가 무엇인지 잠깐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전시장을 한 번 더 찾았을 때 문유소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얼마 전에 외국인 관객들이 왔었는데, 아랑님과 비슷하게 글리치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짧은 기간 동안 전에는 듣지 못한 반응을 반복해서 들으니까 되게 신기했어요.”)
그래, 확실히 그는 동시대 한국의 정희민이나 조효리처럼 디지털 이미지의 컨벤션을 직접적으로 회화에 끌어들여 대결하는 화가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을 밀고 나갔을 때 문유소의 작업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짐작하자면, 이러한 형식적 유사성은 형상성에 대한 문유소의 방법론과 글리치 이미지의 특이성 사이에 서로 공명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이후(를 의식하는) 회화적 이미지에 있어 물성을 드러내는 여타의 방식들을 떠올려 보자. 이는 작품을 이루는 표면(성)까지 작품으로 포괄하려 드는 과시화의 전략으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1939-) 이후의) 우리는 이를 흔히 ‘매체특정성’이란 용어로 설명하고 또 이해해 왔다. 반면 글리치는 엄격하게 따질 때 '매체특정성'을 드러내고 활용하는 몸짓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글리치 이미지는 오늘날 영화관, 컴퓨터, TV, 스마트폰 등 디지털 신호를 기반으로 이미지를 송출 및 전송하는 온갖 매체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이른바 잠재된 ‘디폴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리치 이미지는 어떤 특이성을 갖는가? 이쯤에서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1943-2011)의 구분을 빌리자면) ‘자연적인’ 글리치의 출몰이 신호의 전송(transmission)뿐만 아니라 저장(storage)과 처리(process)의 문제에 ‘동시에’ 달려있다는 것을 고려해 보자. 무엇보다 글리치는 디지털 신호로 현상하는 어떤 이미지가 (앞서 거론한) 상이한 문제를 거치는 흐름(stream)의 차원에서 조건부로, 혹은 유동적으로 성립된다는 사실이 노출되고 육화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 눈에는 정지된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도 실은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미시적으로 점멸하는 중이다) 이는 형상성의 문제를 건드리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1892-1957)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따로 또 같이 논했듯) 우리에게 지각되는 특정한 형상 역시 격렬히 움직일 때이든 가만히 있을 때이든 상관없이 바로 그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범박한 예로, 어떤 물질을 현미경으로 본다면 무수한 미생물들이 그 물질의 위와 안을 모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던가? 형상성이란 곧 유동성과 비독자성이기도 하다.
「작품의 기생충: 글리치 아트의 미학에 관한 에세이(Parasites at Work. An Essay in the Aesthetics of Glitch Art)」(2023)에서 앨리스 이아코보네(Alice Iacobone)는 “궁극적으로 글리치 아트는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사실, 즉 표현의 선형성을 방해하는 교란(불쾌감)이 항상 그 내부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라고 쓴다. 하지만 거꾸로 뒤집어 보면 이는 글리치가 그 자체로는 미적으로 새로울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첨언하건대, 글리치 이미지는 흐름으로서 형상성이 디지털 신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며, 또한 세계를 이루는 강력하고 보편적인 힘이 된 디지털 신호의 위상을 ‘인간적’ 감각에 있어 승인하게끔 만드는 제스처다. 그리고 이는 형상성을 “만남”으로 인식하는 문유소의 방법론과 공명할 터이다. 작가노트에 쓰인 바를 빌리자면, “새해는 환상적 개념”이며 “하얀 캔버스야말로 내겐 가장 거대한 새해”이기에, “개별체들이 점유하고, 서로의 공간을 횡단하는 구역과 만남의 장소”로서 캔버스의 잠재성을 증폭시키려는 동시에, “그 시간들은 결국 되돌아가는 순환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하며 이를 다시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것, 곧 인격적인 의지와 비인격적인 의지 사이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분투로서 “만남”을 그리는 것.
다시 ‘형상과 배경’으로 돌아가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의 말처럼 배경이란 가장자리에 있음에도 형상의 생성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역동적인 영역이라면,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비니시우스 포르텔라 카스트로(Vinícius Portella Castro)의 말처럼 노이즈/글리치가 오류가 아닌 배경의 위상을 갖는다면, 문유소는 이러한 배경을 회화에 있어 ‘전통적인’ 형상의 자리에서 다시 사유하고 감각해 보려 한다. 다시 말해 배경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다. 다만 배경을 어떤 사물이나 요소로 환원하거나 은유하지 않으면서, 글리치를 비롯한 배경의 역할과 위상을 철저히 힘의 관점에서 (묘사나 표현보다는) 소환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걸까? 가죽과 내장을 뒤집는 것처럼, 배경을 그 자체로서 마주하는 일이? 문유소는 한 치의 의심 없이 거기에 자신의 믿음을 거는 것 같다. 여기에는 지독하게 허무맹랑하고도 적확한 유머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새해》에서 직면하는 것은 바로 그런 유머의 시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