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통역사와의 대화

유진영

장소통역사 장소통역사는 미디어아티스트 익수케와 소설가 최추영으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자신들의 작업을 모션-픽션'이라고 이름 붙이며, 소설을 단순히 영상화 하는 것이 아닌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찾는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공포', '유물'이라는 테마가 주된 관심사다. 서로의 예술 언어를 번역하며 우리만의 '장소' 만들어 관람자를 초대하고 있다. 장소통역사는 «유물, 창작자의 시선»(온라인전시, 2021) 온라인 전시를 포함해 «공포워크숍»(공간 풀무질, 서울, 2021), «유물박피»(술술갤러리, 서울, 2021), «인공난자 얼리기»(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22), «FM 88.8 예술건강원 라디오 방송국 런칭쇼 - 장소통역사의 괴담극장»(오시선, 서울, 2023), «서울로 미디어 캔버스 2023 문학X미디어전»(서울로7017, 서울, 2023~2024)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진영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 인터뷰 시작해 보겠다. 사전에 질문지를 공유드렸던 것처럼 이 인터뷰의 맥락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보자면 개인적으로 저는 태어나서 거의 한 번도 한 동네를 벗어나 본 적 없이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독립을 하면서 새로운 삶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고, 어떤 장소와 이동에 대해서도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되었다. 물론 많은 분들은 이걸 들으면 뭘 그거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웃지만 어쨌든 나 자신에게는 내가 내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커다란 경험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전까지는 한 번도 스스로의 일이 된 적이 없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이동과 장소라는 키워드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맥락으로 이번 인터뷰에 두 분/팀을 섭외하게 되었는데, 오늘 모신 장소통역사 분들이랑 노혜리 작가 이렇게이다. 노혜리 작가의 경우에는 학창 시절에 미국 이민을 가신 뒤로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며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고 있는 분이다. 그래서 그 분에게는 정말로 어떤 물리적인 이동, 다른 시공간과 문화를 오가는 감각들에 대해 묻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물리적인 3차원의 공간으로만 한정될 수 없고 웹이나 비물리적 영역으로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지 않나. 그런 장소성에 대해 생각할 때 웹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고 교차하면서 활동하는 사람에게도 장소와 이동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통역사 분들을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분들이다.


익수케, 추영 감사하다.


진영 우선은 장소통역사에 대한 소개와 두 분의 소개를 간단하게 부탁드린다.


추영 장소통역사 소개는 매번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장소통역사의 뒤섞임이라는 특성 때문인데 소설,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시는 분이냐, 미디어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분이냐에 따라 다르게 소개를 한다. 어떤 면에 관심을 가졌냐에 따라서 확장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다양한 면면 중에서 어떤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번 인터뷰 역시도 우리를 알게 되었을까, 우리의 어떤 면을 기대하며 찾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어쨌든 다시 답변으로 돌아와 장소통역사 소개를 해 보자면 장소통역사는 2020년부터 시작된, 소설가 한 명과 미디어 아티스트 한 명으로 구성된 그룹이다. 뭘 하냐고 묻는다면 이것저것 다 한다고 답한다. ‘우리 매장 정상 영업합니다’처럼. 뒤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하게 될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단순히 소설을 영상으로 만든다던가, 소설을 전시장에서 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과 미디어 아트를 결합시켜 서로가 발견하지 못하는 장소를 발견하고, 경계를 만드는 것을 시도하는 작업을 한다. 작업을 할 때 실제 만드는 시간보다 어떤 형태로 아웃풋을 내놓을 것인가라는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 전시도 하게 되고, 오프라인 전시도 하고 웹진으로 연재도 하고, 오프라인 낭독 공연이나 쇼케이스, 워크숍도 진행하고 이리저리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해볼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몰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


진영 제가 장소통역사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됐는지를 이야기 해 보자면, 저는 두 분을 오시선(Osisun)의 인스타그램에서 ⟨공포워크숍⟩ 홍보 게시물을 보고 알게 되었다. 괴담도 그렇고, 유머도 그렇고 저는 이야기가 확산, 유통되는 구조에 관심이 많아서 그 게시물을 딱 보자마자 ‘어머, 이게 뭐지’ 이러면서 열심히 들여다봤었다. 그렇게 홈페이지랑 인스타그램을 쭉 구경을 하면서 유머 코드가 필시 내 스타일이다 하는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쩐지 범상치 않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장소통역사의 결성 과정이 궁금하다.


익수케 우선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별로 친하진 않았다. 나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 친구는 문창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전공이 다르다 보니 성인이 되고도 각자 삶을 잘 살면서 종종 안부만 묻고 지냈다. 그러다 실제 팀을 결성하게 된 건 2020년도에 서울문화재단에서 코로나 시기에 맞춰 긴급 편성한 공모가 뜬 게 계기였다.


진영 아트 머스트 고 온?


익수케 맞다. 그걸 보고 추영이 나에게‘이거 한 번 써 봐라’하고 알려 줬다. 처음에는 서로 각자 팀을 꾸려 진행을 하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둘 다 그게 무산이 되었다. 나는 그래도 이걸 내보고 싶은 마음에 추영 작가에게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했고, 그때 탄생하게 된 것이 장소통역사라는 팀이다.


추영 국가가 맺어준 인연이다.


진영 아, 나 역시도 사실 숱하게 어떤 지원 사업에 맞춰 팀을 꾸리고, 지원하고, 결국에는 무산되고 이런 과정들을 반복해 왔는데, 어떤 식으로든 팀 활동이 이어진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추영 처음 1~2년 차는 서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기대를 안 했던 것 같다. ‘그냥 멀어질 수도 있지’ 그런데 같이 작업하는 게 너무 재미있으니까 ‘그래, 이것 까지는 제대로 해 보자. 저것도 좀 더 해 보자’ 하면서 정신없이 또 시간이 간 것 같다.


진영 지난 작업들을 시간 순으로 쭉 보게 되면 큰 범주 안에서 주제가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공포, 이야기, 질병, 유물(혹은 역사), AI라는 기술 혹은 통로 등등. 개인적으로는 ⟨인공 난자 얼리기⟩(2022)에서 ⟨통증의 매뉴얼화⟩(2023)로 이어지는 작업 방식이 흥미로웠는데 아무래도 아카이빙된 기록으로만 접하다 보니 제대로 이해를 하진 못한 것 같다. 조금 더 설명 부탁드린다.


(이미지1, 2) 장소통역사, ⟨인공 난자 얼리기⟩(2022).

추영 나는 사실 AI 회사를 다니고 있다. 처음은 아르바이트였는데, AI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도록 대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익수케도 내가 일을 제안해서 함께 일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AI에게 대화를 학습시키는 것처럼 다른 예술 언어를 지닌 우리 두 사람의 대화 방식에 적용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서 시작되었던 게 언급한 두 작업이다. 그리고 소설과와 미디어 아티스트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연결고리로 AI를 중간자로 선정하는 실험을 해보겠다며 서교예술실험센터의 ‘링크’ 사업에 공모를 지원했고 운이 좋게 선정되어 <인공난자 얼리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인공난자 얼리기>는 AI를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말의 순서들이 예술 작품을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작업이다. 나와 익수케는 아무래도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보니까 이 언어를 서로 맞추는 시간들이 꽤 많이 들 수밖에 없다. 서로 간의 언어의 낙차를 느낄 때 챗 GPT나 달리(DALL-E) 같은 AI 기술을 많이 쓰기도 했는데, 이것이 마치 우리 둘이 어떤 아이를 만들고, 키우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그때 난자 얼리는 것에 되게 매몰되어 있던 시절이었기도 해서, 우리는 엄마가 둘이고 이게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단순히 ‘난자’라고 부르고, AI작업의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서 ‘인공난자’라고 호명하게 되었다. 언젠가 작업이 될 수 있는 무언가의 덩어리를 계속해서 얼리는 그런…... 이후에는 리서치 플랫폼 포킹룸으로 연결되면서 ⟨통증의 매뉴얼화⟩까지 확장되었다.


(이미지3) 장소통역사, ⟨통증의 매뉴얼화⟩(2023).

(이미지4) 장소통역사, ⟨엉터리 예술론⟩(2023).

추영 아무튼 그때 당시에 AI를 쓰면서 AI 작업은 결과값으로서 AI 작업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결과물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증의 매뉴얼화>는 웹진 비유에서 연재했던 것을 AI 작업으로 연계해와서‘과정’을 쇼케이스가 아니라 작업물의 형태로 표출해 보는 시도였다. AI 작업은 제가 그냥 막연히 재미있을 것 같고 뭔가 될 것 같아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둘 다 기술적으로 능숙하지가 않으니 실제 작업 과정이 꽤 힘들었다. 그래도 익수케 작가가 믿고 따라와 준 덕분에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진영 사실 AI랑 대화할 때 약간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나. 마치 심즈 할 때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처럼. 나도 가끔 GPT랑 대화를 하는데 그럴 때 정말 내가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이상한 대화들을 막 하게 된다.


추영 익수케 작가가 적절한 순간에 재미있는 질문을 밀어 넣는다.


진영 ⟨공포워크숍⟩(2022)이야기도 좀 더 해보고 싶다.


(이미지5, 6) ⟪공포워크숍⟫(2022, 공간 풀무질), 전시 전경.

추영 ⟨공포워크숍⟩은 공포를 테마로 처음에는 지인들끼리 진행했던 워크숍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포라는 건 엄청 범위가 큰 것이라서 한 번은 환경, 신체, 그리고 주술 이런 차원 안에서 이야기를 했었고, 지난 여름에는 조금 더 추상적으로 진행했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땅’, ‘내가 이상하게 여기는 신체 부위’ 등으로 질문형으로 만들어서 진행했었다. 익수케가 왔던 워크숍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었더라?


익수케 신체 절단 이야기였다. 몸의 감각으로 다가오는 공포를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추영이 이야기로서의 공포를 말한다면 나는 보통 물리적인 기능을 잃게 되는 몸의 감각과 상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편이다.


추영 맞아.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워크숍을 빙자해서 그냥 편하게 무서운 얘기를 많이 하고, 듣게 되는데 사실 공포를 좋아하는 일이 그냥 무서운 얘기를 주고받는 것에서 그친다기보다는 약간 우회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내가 그런 것들을 왜 무서워할까’ 라는 생각들을 하다 보면 이건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건데, 그게 좀 건조한 방식의 내밀한 말하기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뭔가 “나 이런 이런 일 때문에 너무 무섭고 우울해.” 이런 식의 말하기는 약간 축축한 느낌이 나지 않나. 근데 공포를 전제로 말을 하다 보면 내가 그게 왜 무서웠지를 하나하나 더듬어 보면서, 이걸 어떻게 전달해야 듣는 사람이 무섭게 될까 그런 생각까지 닫게 된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될까, 공간을 먼저 설명할까? 아니면 내가 본 걸 먼저 설명해야 될까? 이런 식의 생각들. 역으로 질문을 낳기도 하고. 그리고 사람들마다 무서운 걸 기억하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보니 말과 이야기의 순서에 매몰된다고 한다면, 익수케의 경우는 색으로 보게 된다고 하더라. 색의 느낌과 이미지들.


(이미지7) 장소통역사, ⟨공포워크숍 2022⟩(2022), 스틸샷.

진영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공포를 들여다보는 것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일 같아서 흥미를 갖고 있다는 말이 흥미롭다. 그러면 이쯤에서 두 분의 불안과 공포는 어떤 것이 깔려 있는지 궁금해진다. 사실 어떤 불안감이나 두려움 같은 건 요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동반되는 감정이지 않나. 그런 지점에서 같이 출발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도 들었다.


익수케 추영과 비교해서 나는 뭔가 그런 불안이나 공포에 대한 강도가 좀 무딘 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었다. 근데 장소통역사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불안에 떠는 추영의 글을 읽고 깨달았던 것은 나도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인데 계속 외면하고 내면 한구석으로 묻어왔던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걸 끄집어내서 직면했을 때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되, 그것에 매몰된다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흘러가게 두자라는 말을 스스로 계속 되새기면서 작업을 한다. 일부러라도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계속 끄집어내고 나를 완전히 그런 상태로 몰아넣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허물을 벗는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 다음이 보이는 것 같더라. 다음에는 뭘 해야지, 이건 이렇게 다시 해보면 되겠다 등의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니까 더 이상은 피해서는 안 될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진영 익수케 님은 오히려 불안을 직면하고 그걸 작업의 주제로 갖고 오면서 스스로의 태도나 내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더 들여다 보는 것 같다. 추영님은 어떤가?


추영 이 질문을 받고 처음 장소통역사 시작했을 때와는 달라졌다는 걸 깨닫았다. 그때의 나는 소설가라고 하면 좀 확실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황희 정승처럼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쓰면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게 뭐야’라고 생각할까 봐. 아까 익수케가 말했던 불안에 떠는 추영이를 본다는 게 아마 이런 부분 같다. 나는 자기 불신형이라서 그런 불안정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불안해하며 작업을 해왔었는데, 요즘은 익수케와 비슷하게 불안정함 자체가 나의 태도인 것을 그냥 받아들여야 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옛날에는 나의 이 불안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고 한다면, 요즘은 그냥 이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이제 내가 감당해야 되는 불안의 세계는 디폴트 값으로 두되, 그 다채로운 불안을 어떻게 각기 다르게 다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물 위에 서 있을 때의 위태위태한 것과 푹푹 빠지는 늪에서의 불안정한 상태는 매우 다르지 않나. 물에서는 균형을 잘 잡아야 되고, 늪에서는 힘을 빼고 나와야 되는 것처럼 그 다름을 잘 인지하고 매번 작업에서 다른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과 더불어서 최근에 제일 많이 생각하는 건데 나는 스스로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는 편이다. 전시는 끝나고 나면 다 사라지지 않나. 뭔가 기운만이 남은 상태로 구전설화처럼 ‘장소통역사라는 게 있었다’ 이렇게 되는데 책은 반대로 절대 사라지지 않는 물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을 쓸 때 다른 층위의 고민이 많았다. 뭔가 소설은 내가 한 번 말하면 10년 동안 사람들이 최추영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움이 컸다. 그런데 전시는 그 기간 동안 지금 이제 시작이야, 지금 중요한 거 말해야 돼 이러면서 불태웠다가 딱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장단점이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그래서 사라지고 싶지만 동시에 또 사라진다는 게 두려워서 글을 쓰고, 소설가가 되었는데, 전시에서는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열심히,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투쟁하는 느낌을 받으니까 도리어 더 자유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헛헛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장소통역사의 활동에서 웹을 간간이 어떻게든 활용해야지 하고 계속 생각하는 게 우리가 했던 것들이 다 사라지지 않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모아 놔야 하겠다 싶더라. 그러면서 시각 작가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새삼 들었던 것 같다. 저렇게 사라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기 확신형들의 세계라니. 뭔가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소설을 썼을 때 있었다면, 장소통역사로서는 사라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라지는 감각들을 어쨌든 잠깐이나마 일시적으로 붙잡아 놓으려고 하는데, 이때 활자적 힘과 이미지, 사운드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장소통역사 이후 다른 방식의 양극단의 불안정성을 모두 경험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영 공감이 많이 간다. 나는 어쨌든 기획자로 일하고 있지만 전시를 만드는 것은 뭔가를 정말 열심히 만들었는데 한 달 뒤면 이게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리지 않나. 특히 물리적 기록이나 결과물을 남기지 않았을 때는 정말 내가 이걸 했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리고 사실 ‘전시 어땠어?’라고 물어봐도 사람들이 막 솔직하게 얘기해 주지는 않는다. 그냥 ‘좋았어’ 이렇게 말하고 말지. 그래서 항상 전시라는 것이 실체 없는 무언가로 느껴질 때가 많은데, 막상 또 전시에 드는 품과 비용 같은 것들은 너무 어마어마한 걸 볼 때마다 뭘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근데 또 글을 쓴다는 건 그게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 부담스러워서 막 울면서 쓰게 되기도 한다. 아무튼 두 분 각자의, 혹은 공통의 그 상태에 대해서 나 역시도 너무 공감이 되는 것 같다. 그럼 작업을 하는 방식과 작업 자체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 ‘모션-픽션’이라는 용어로 장소통역사의 작업을 장르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직은 ‘모션-픽션’이 대체 어떤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는데 이 용어에 대해서도 더 설명을 들어보고 싶다.


추영 사실 ‘모션-픽션’은 내 기억이 맞다면 기획서를 위한 용어였다. 뭔가 우리 작업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생각해 볼 때 직접 보고 경험했을 때 알 수 있는 다양한 레이어가 분명 있는데 단순히 이걸 영상 작업으로 소급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소설가와 시각 예술가가 함께 작업한다고 하면 뭔가 소설의 내용을 시각 예술가가 읽고, 그것을 좀 더 상상하기 좋게 시각화하는 걸로 생각하기가 가장 쉬울 것 같은데, 또 그런 작업인 것만은 절대 아니고. 그래서 우리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서로 했던 것 같다. 작업에서‘픽션’을 축으로 둔다고 하면 그 앞에 무엇을 붙이면 좋을까를 고민 했다. 우리는 제목을 지을 때 엄청 심사숙고 하기보다는 그냥 막 이런 기운의 이름이면 좋겠다, 혹은 생각나는 모든 단어를 말해보자 이런 식의 아이데이션 과정을 거치는데, ‘모션-픽션’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나왔던 것 같다. 장소통역사도 사실 그렇게 나왔었고. 그냥 우리 마음에 드는 단어들끼리 붙여 놓고 나중에 수습하는 편인 것 같다(웃음).


진영 소설과 미디어 아트, 혹은 글과 시각 예술, 두 개의 매체적 차이 같은 게 ‘모션-픽션’이라는 용어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은데 두 분의 작업 방식들, 서로 다른 언어들, 이런 것들의 차이가 어떻게 작업으로 이어지는지 작업 과정도 궁금하다.


추영 ‘모션-픽션’도 일단 움직이는 이야기라는 것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픽션이라는 것 자체가 전시장, 혹은 전시 자체를 은유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저야 장소통역사를 하기 전까지는 전시장의 문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시 설치나 이동에 관한 것은 익수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낸다. 익수케는 움직임을 굉장히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쩌면 ‘모션-픽션’이 익수케라는 사람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작업 방식은 보통 내가 질문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내가 먼저 시작을 하고 익수케가 문을 닫아주는 편이다. ‘나는 요즘에 뭐에 관심이 있다’하면서 와다다 쏟아낸 다음에 ‘넌 어떻게 생각해?’하고 거의 물음표 살인마처럼 계속 묻는다. 그럼 익수케는 정말 성실하고 꼼꼼하게 답을 해준다. 재미있는 이미지 레퍼런스나 떠오르는 감상들을 던져 주기도 하고. 나는 그걸 또 다 캡쳐 해 놓고 나중에 이런 거 해보자, 저런 거 해보자 얘기한다. 그러면서 매 작업마다 작업 방식을 다양하게 시도해보려고 하는 것 같다.


진영 ‘모션-픽션’이라는 단어가 어쨌든 이야기, 픽션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움직인다는 구조에 가까운 걸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익수케님이 먼저, 혹은 시각적 이미지에서 먼저 출발하여 그게 역으로 이야기가 되는 경우도 있나?


익수케 당연히 있다. 근데 이게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서 단계별로 나누어 설명하기 힘든 경우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추영 주제를 추동시키는 자극은 익수케에게 받는 편이다. 익수케에게 자극을 받고 내가 그것을 주제화, 언어화한다. 그래서 보통 누가 시작점이 된다기 보다 동시다발적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 같다. 옛날에 괴짜 같은 수집가들의 방을 ‘분더카머(Wunderkammer)’라고 했다더라.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장소에 막 뒤엉켜 있는 방을 떠올려볼 수 있다. 얘가 왜 쟤랑 같이 있지? 하나로 설명되는 것을 거부하는 방이다. 얘는 바다 아래 살고 얘는 하늘에 있는 애인데 왜 같이 있는 거지? 냅다 함께 놓여진 사물들을 분석, 해석하는 거다. 나는 장소통역사 작업을 하는 일이 분더카머에 들어가 보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장소통역사의 장소가 익수케일 때도 많다는 생각도 하고.


진영 서로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엄청나게 넘쳐야 가능한 작업의 방식들인 것 같다. 단순히 그냥 같이 작업을 만드는 동료나 동업자를 넘어서 진짜 서로가 궁금해야 가능한 것들이지 않겠나. 장소통역사의 장소가 익수케라는 말이 너무 재미있는데, 장소통역사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이어 나가면서 두 분 각자가 따로, 또 같이 통역하고 싶은 장소라는 게 어떤 건지, 그 장소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익수케 나에겐 어떤 곳, 혹은 어떤 것 자체보다는 그것을 장소라고 생각하는 주체가 아주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장소로 인식을 하고, 어떤 감도를 찾느냐에 따라서 아웃풋으로 나오는 모습이 천차만별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게 감정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신체 부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박물관이나 용산공원 같은 실제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이것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범주의 단어라고 생각이 든다. 또 이제 서로의 언어가 다르고, 감각하는 정도가 다르다 보니까 그게 점점 더 커져가는 것 같고. 장소라는 범주를 이미지로 생각하면 무수하게 많이 찍힌 좌표점들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추영 나의 불안정성, 나를 불안하게 하는 장소들을 통역하고 싶었던 게 가장 컸던 것 같다. 왜 그렇지 않나. 어떻게 보면 누구나 불안정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것을 언급하기 위한 모종의 자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사람들 모두가 각자만의 불안을 갖고 있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범주에서 나의 환경이 그리 불안정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이게 인터뷰 시작할 때 진영님이 남들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 같은데, 나 스스로도 ‘왜 다른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느끼는 데서 나는 불안을 느끼지’, 혹은 이게 단순히 징징대는 것이거나, 아니면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계속 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은 불안들이 분명히 내 안에 존재하고, 결국에는 이런 것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 그리고 이걸 첫 번째로 읽게 되는 사람이 대체로 익수케인데, 익수케가 ‘나도 그런 적이 있어’라는 말을 해주면 그 자체로 많은 힘을 얻는다. 익수케가 주체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에 나도 완전히 공감이 가는데 이걸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보자고 할 때 그럼 그곳은 어떤 공간일까? 어두울까, 밝을까 아니면 흔들리거나 엄청 뿌열까, 아니면 엄청 명료할까?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이 우리가 장소를 통역하는 차원인 거고, 어쩔 때는 그게 용산공원처럼 실제 공간일 수도, 어쩔 때는 현실의 범주를 벗어나는 장소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뭔가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장소 그 경계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우리가 계속 통역하고 싶어 하는 장소들은 완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는 상태 같다. 어긋난 세계의 불완전한 틈새들을 계속해서 찾고 보여주는 거다. 아, 우리가 진짜 장소를 그대로 스캔한 작품은 ⟨Fire-ing House⟩(2021)가 있다. 익수케가 직접 어떤 집을 스캔한 거 였다.


(이미지8) 장소통역사, ⟨Fire-ing House⟩(2021).

익수케 제주도에 있는 감귤 창고를 리모델링해서 카페로 운영하는 집을 스캔 한 거였는데 스캔을 하고 보니 그게 약간 종이를 찢어 놓듯이 다 파편화가 돼 있었다. 이 분절된 데이터 쪼가리들을 합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하도 갈기갈기 찢어져 있어서 스캔이 망한 건 줄 알았었다. 그 상태로 얼기설기 허름하게 이어 붙였지만. 근데 그 허름한 모습이 오히려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집의 분위기랑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추영 익수케는 사실 실제 집을 태우고 싶어했는데 그건 스케일이 도저히 감당이 안되고 그래서 그냥 온라인으로 태우자고 합의를 봤다. 아무튼 그래서 집 전체를 스캔했는데 당시 협업했던 개발자 분은 이 허름한 스캔의 상태를 보고 너무 아쉬워 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히려 좋아’ 였는데, 실제 돌창고 건물은 장난감 집처럼 단단하고 단정하게 생겼지만 우리가 데이터로 만든 장소가 갖고 있는 이상한 허름함이 주는 역설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 게 우리가 만드는 장소, 우리가 번역을 하고 싶어 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장소의 틈새를 메우는 활자적 번역을 하는 것 같고, 익수케 작가는 그걸 어쨌든 우리가 인지할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시각화하는 번역을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달라진다.


(이미지9, 10) 장소통역사, ⟨Fire-ing House⟩(2021).

진영 통역이랑 번역은 또 어쨌든 다르지 않나. 원전이 존재할지라도 번역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의 창조적 행위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차원에서 장소통역사의 작업은 장소번역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추영 장소번역사는 글씨가 너무 안 예뻤다.(웃음) 그리고 통역에 더 즉각성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번역은 좀 더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는 좀 더 짜잔 하고 통역하듯이 약간의 오류가 있고, 조금 허름해도 상관 없는 그런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진영 스캐닝 한 집의 질감이 실제 돌의 질감과 달랐다는 말을 들으니 온라인, 웹의 비물질성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앞에서도 온라인 작업에 대해 잠깐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온라인 미디어 작업을 지속하는 것, 그리고 그걸 온라인상에 아카이빙 하는 것, 이런 게 웹의 비물질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실제 전시나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장소통역사가 더 오래 존속할 수 있는 견고한 장소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히 장소통역사의 경우 홈페이지가 너무 재미있게 잘 되어 있더라.


추영 사이트를 익수케가 다 만들었다.


진영 아예 다 직접 작업하는 것인가.


익수케 어렵지 않게 웹사이트 제작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 아무튼 원래 홈페이지는 더 난리법석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분류하지 고민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획부터 작품 제작까지 하면서, 전시나 워크숍 등의 형태로 선보인 프로젝트들이 막 섞이다 보니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기가 어렵더라.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그냥 이미지로 클릭을 하면 관련된 프로젝트를 다발로 볼 수 있게 묶어 놨다. 장소통역사가 분명 온라인으로 시작을 하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게 전부가 아니게 되었다. 오프라인 전시도 하고, 퍼포먼스나 워크숍까지 여러 가지를 하고 있다. 덧붙여서 온라인 공간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면, 나 스스로도 미디어 작업을 하는 작가로서 뭔가 기술에만 의지한 작품을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봄쯤에 내가 첫 개인전을 열게 됐는데 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내가 쥐고 있는 주제들이 결국에는 영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조각으로 갈 때가 있고, 또 회화로 갈 때도 있다.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뭔가 물질이 갖는 힘을 믿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온라인이라는 장소가 작품을 접할 때 강한 휘발성과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장소적 아우라가 좀 약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VR, AR 기술을 배워볼까 했는데 그것들이 갖고 있는 명백한 기술적 한계 때문에 흥미가 떨어지더라. 아무튼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에게 온라인은 작품 형성에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장소에 가까운 것 같다. 원하는 요리를 위해서 장을 보듯이 재료를 찾고, 수집하는 그런 장소.


추영 또 웹이 재미있는 장치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은 우리가 했던 게 어쨌든 웹 상에 남아 있으니까 우리를 계속 발굴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 되는 순간들을 종종 마주하는 거다. 우리가 특별히 웹 상에 거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계속 홈페이지의 월세를 내고 있다 보니까 어떤 식으로든 웹의 거주자가 맞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매년 월세 관련 회의를 한다.


익수케 늘 작업물을 어떤 방식으로 아카이빙 할지 항상 고민이 많이 된다. 한꺼번에 뒤집어엎을 수도 없고, 기술적으로 한계가 또 있다 보니 돈도 많이 들 것 같아서…... 이걸 죽여, 살려…... 매번 고민한다.


추영 그래도 아까운데 냅둬야 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웃음). 그런데 어쨌든 작품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너무 아쉬운 것 같다. 온라인에만 올라가게 되면 우리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까 한 번 봐 줘 하면서 홍보하기에는 되게 쉬운데 확실히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이 직접 보고 느끼고 갔을 때 오는 피드백과 온라인으로만 감상했을 때의 피드백에 차이가 있긴 하더라. 그렇다고 온라인을 놓을 수도 없는 것이고. 웹을 어떻게 하지 이런 부분들이 일종의 과업처럼 늘 고민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앞으로 새로운 온라인 작업을 하게 된다면 실험실에 가까운 형태가 될 것 같다. 일기장처럼 야금야금 작업 과정이나 리서치한 것들을 올리는 식의. 아마 맞는 형식의 웹을 찾아 계속 이주민처럼 떠돌아다닐 것 같다. 웹이라는 공간 자체가 방대하다 보니 작업자로서 가장 적합한 플랫폼을 찾는 일은 어려운 것 같다.


진영 한창 코로나 시기부터 온라인 공간이나 가상 세계가 정말 완전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일종의 기대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그런 설레발이 강하게 있었지 않나. 그럼에도 여전히, 혹은 오히려 그에 대한 반작용처럼 물질성이나 오프라인에서의 실제 전시 등을 추구하는 경향이 더 강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작년 정도부터 계속 들더라.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웹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게 있어서 계속해서 웹에 적합한 작업, 혹은 적합한 기록 방식이라는 게 뭘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통역사의 웹사이트가 웹으로 살펴보기에 굉장히 즐거운 사이트였다. 자꾸 길을 잃게 돼서 조금 어려운 면도 있긴 했는데 그것 자체도 웹사이트를 둘러보는 즐거움으로 작용했었다.


추영 맞다. 익수케가 정말 애썼다. 내가 귀엽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웹사이트가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계속 뭔가를 눌러보고 하면서 이 안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 말이다. 앱 개발자들도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게 그런 거더라. 그래서 이사 갈 때 짐을 하나씩 버리는 것처럼 웹사이트를 꾸릴 때에도 뭘 덜어내야 할지를 계속해서 염두에 두게 된다.


진영 점점 더 무거운 것을 추구하기에는 힘든 시대여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역으로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업에 임하는 작가분들의 태도를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경이롭고 신기하고 그런 마음이 든다. 웹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들의 태도에는 특별함을 느낀다.


추영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약간 멋있는 것 같다. 근본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


진영 그런 마음이 안 들 수는 없더라. 그러면서도 역으로 점점 더 가벼워지는 요즘의 작업 경향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더 납득이 가게 되는 것들도 있고.


추영 우리 둘도 거의 인터넷 인간이다보니 밈을 알지 못하면 추적이 불가능한 작업을 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숨겨두고 따로 각주를 달지 않아도 이해하는 인터넷 인간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진영 그런 건 설명하는 순간 정확히 망하게 된다.


추영 맞다. 그래서 약간 비밀 은어처럼 이해한 사람만을 머물게 만드는 그런. 그게 AI 작업이랑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AI도 사실 써먹어 본 사람들이 훨씬 잘 쓰지 않나.


진영 AI와 공존하는 것의 핵심은 질문을 잘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성골 인터넷 인간이기 때문에 장소통역사의 작업을 들여다보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별별 이야기를 다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인터뷰가 좀 길어졌는데, 다시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와서 슬슬 마무리로 향해보고자 한다. 두 분은 이동과 장소에 관한 특별한 경험이 있는가? 물리적 경험도 괜찮고, 비물리적 경험도 괜찮다.


추영 앞에서 진영님이 말해준 것과 비슷하게 나도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보지는 못했지만 다와다요코(多和田葉子, Tawada Yoko, 1960-),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 등의 디아스포라 문학을 읽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고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늘 지니고 있었다. 늘 그런 궁금증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뿌리내림이 확고한 단일민족 정체성을 중시하는 국가의 국민으로 살고 있는데 이런 불안정한 정체성과 이동에 자꾸 매력을 느끼고 그 주위를 배회하는가. 아직도 그 대답을 찾고 있지만 사람마다 누구나 불안정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고 내가 환대 받는 땅과 마을, 장소를 찾고 싶어 하는데 그 환대, 거부당하지 않음, 편안함을 얻는 것이 생을 살아갈수록 더 어려운 것 같다는 걸 느끼게 된다. 자꾸 의심하게 되고. 소설을 쓸 때도 이런 걸 주제로 삼지만 장소통역사로 할 때는 조금 더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해 보고 있는 것 같다. 소설만이 아니라 장소통역사로 활동하며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해 볼 수 있게 된 거 같아서 작업의 기반이 더 넓어졌다고 느끼고 있다.


익수케 나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었다. 앞으로도 몇 번 더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10번 정도? 그 사이에는 어학을 목적으로 영미권 나라에서 짧게는 한달, 길게는 일년 넘게 살았던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물리적 변화에 적응을 잘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딘 사람이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오히려 그 경험들로 내가 어떤 것에 더 예민한지 빨리 알 수 있었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기 용이해졌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다닐 나이일 때는 이사를 가고 친구들과 멀어지는 관계의 연속이다 보니 인간관계에 대한 애착이 덜해서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는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오해도 생겼겠지만 그걸 애써 설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자기 확신형’이란 타이틀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게 작업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더라. 나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 감각! 온도! 습도! 조명! 너희들도 좀 느껴봐! 라는 식으로 작품과 관객들을 전시공간에 같이 던져 놓고 반응을 살핀다. 그대로 해석하는 관객을 만나면 나와 주파수가 같은 사람인가 하고 왠지 반가운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진영 이야기를 나눌수록 두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나 성향, 성격들이 정말 다른 것 같은데 그런 다른 지점들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업에 있어서는 이것을 추구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착하고 싶은 혹은 도달하고 싶은 궁극의 장소가 있을까? 각자의 삶에서든, 장소통역사의 여정에서든.


추영 질문을 듣고 ‘내가 정착하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안정되고 싶다가도 안정 자체를 경계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안주하게 된다면 흐릿하게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도달하고 싶은 궁극의 장소가 있다면 익수케와 함께 작업을 시작했을 때 가고 싶은 장소이며, 도착하는 순간 떠나도 괜찮은 장소가 될 것 같다. 너무 질문에서 이탈해버린 건 아닐까 걱정된다. 그래도 끊임없이 환승하는 태도로 함께 작업하고 싶다. 환승 연애는 못 나가지만 환승 작업은 가능하지 않을까?


익수케 나는 우리가 맘껏 작업할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각자 다른 작업실이 있는데, 나중엔 장소통역사를 위한 그리고 장소통역사를 거쳐간 작업자들의 공간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하고 싶다.


진영 두 분 모두 서로를 재미있게 바라보며 환승하듯 작업을 이어 가다가 언젠가는 두 분만의 공간도 꼭 꾸리길 바란다. 긴 시간 많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홍보의 시간 드리겠다! 앞두고 있는 프로젝트, 혹은 그냥 알리고 싶은 것 모두 모두 이야기해 주시라.


익수케 당장 올해에는 아니지만 기금에 기대지 않고 하는 장소통역사의 개인전을 열고 싶어서 긴 호흡으로 준비해 보려 한다.


추영 책을 같이 하나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도 하고 있고, 올해는 너무 소진하지 말고 은은하게 타들어 가듯이 각자 작업을 좀 해보자고 생각하고 있다. 아, 그리고 <공포워크숍>을 다시 한 번 하자는 이야기도 나눴다. 저희가 은은하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장소통역사 인스타그램(@jangso_2020)을 팔로우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