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엽과의 대화

황재민

이상엽은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큐레이터학과 예술학을 공부했으며, 2020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동시대 미술과 장식의 새로운 관계성 연구: 미술로서 장식, 장식으로서 미술』을 썼다. 기획한 전시로는 《마음속》(봄바니에 뉴욕, 2023), 《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 (남산둘레길, 2021-2022), 《장식전》(캔파운데이션 오래된 집, 2020) 등이 있다. 최근 영성과 세속성 사이를 오가는 언어와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재민 오늘 함께 해주셔 감사드린다. 이상엽은 그간 《장식전》(2020), ‘살아 있는 관계’(2021-2022), 《마음속》(2023) 등 여러 기획을 펼쳐왔고, 웹진 등에 참여하며 미술 현장에 관여하는 글쓰기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글과 기획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는 어떠한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고, 인터뷰의 형태로 이를 펼쳐보면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해 초대하게 되었다. 혹시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할 수 있을까?


상엽 먼저 그간의 프로젝트를 흥미롭게 읽어주고, 지난 전시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간단한 소개로는 서울에서 독립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큐레이터학과 예술학을 공부했고, 석사학위 논문을 끝낸 후부터 현재까지 독립된 단위에서의 전시를 기획해 왔다. 기획한 전시들을 돌이켜 보면, 장소적으로는 화이트 큐브 이외의 다양한 전시 공간 경험에 대한 이끌림과, 주제적으로는 장르의 경계에 서서 양쪽에 위치한 것들의 위계를 다루거나 연결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장식전》

재민 《장식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다. 《장식전》은 2020년 성북구에 위치한 오래된 집에서 열린 전시고, 김수연, 김혜원, 박보마, 소민경, 이유성이 참여했다. 무엇보다도 서문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시는 장식이 미술에 종속되는 하위 개념이 아니라 미술과 동등한 층위에 놓이는 독립된 영역이라고 가정하고, ‘미술/장식’이라는 말을 빌어 미술과 장식의 위상 변화를 상상했다. 비교적 기획이 뚜렷한 전시였지만 기획과 작업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적절하게 어울리며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로웠다. 《장식전》은 어떻게 시작된 전시였을까? 현장에서 발생한 작업들을 관찰한 것이 먼저였을까, 혹은 ‘미술/장식’이라는 아이디어가 먼저였을까?


상엽 ‘미술/장식’이라는 아이디어가 먼저였다. 석사학위 논문을 미술과 장식에 대한 주제로 썼다. 2020년 8월에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리서치 단계의 논문 준비부터 마치기까지 약 2년 정도 장르로서 장식에 대한 관심 있었던 거다. 긴 호흡의 글인 논문을 마무리 지을 쯤 내가 글로 푼 것을 시각적으로, 눈으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때 아르코 지원 사업이 떴을 때라서, 기획의 글 형태로 축약한 글 한 편을 쓰고 지원을 했는데, 그게 됐다. 《장식전》은 그렇게 진행하게 된 전시였던 터라 개념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참여 작가의 경우, 정말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 같다. 동시대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중에서 관련 관심사로 작업의 지점들이 읽히는 작가들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사실상 모두 《장식전》을 꾸리기 전부터 관심있게 살피던 작가들이기도 했다. 5명의 여성 작가들의 작업을 장식의 맥락으로 읽어 보며, 한 자리에 펼쳐 보이면 흥미로운 장면이 탄생할 거라 예상했다. 사실 처음엔 미술가인 5명의 작가를 장식가로 초청하는 것에 조심스러움이 있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장식과 미술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어 보이고, 작업이 ‘장식적’으로 읽히는 게 곧잘 부정적이거나 묘하게 작업을 평가 절하하는 맥락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참여 작가들이 내가 캐치하고 문제시하려 했던 부분들을 잘 이해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여 주었고, “장식을 미술에 종속된 하위 맥락이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이 시각화 과정을 함께 고민하며 전시를 만들어 간 것 같다.


(이미지1) 《장식전》(2020), 전시 전경.

재민 전시 공간에 대한 질문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래된 집은 (이름처럼) 오래된 한옥을 전시 공간으로 고친 곳이였고, 여기서 작업은 유리창 사이 틈부터 마당, 화장실까지 구옥의 틈새 공간을 점유하며 알맞게 놓였다. 이와 같은 설치가 장식과 미술의 위계를 질문하는 전시의 방향과 잘 어울린다고 느끼기도 했다. 오래된 집은 어떻게 선택하게 된 공간이었을까?


상엽 이 전시는 장소가 정말 중요했다. 《장식전》을 꾸릴 때 레퍼런스로 생각했던 전시가 있었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1939-)와 미리엄 샤피로(Miriam Schapiro, 1923-2015)가 1972년에 기획했던 《우먼하우스(Womanhouse)》(1972)라는 전시다. 30여 명의 여성 작가들을 초청해 집 안에서 전시를 꾸리는 형태였고, 부엌이나 화장실, 신발장 등 실내 공간 전반을 활용해 전시가 열렸다. 집과 여성, 이 두 단어가 나란히 놓일 때 형성되는 의미가 참 복잡미묘한 것 같다. 집이라는 공간이 여성에게 있어 편안하고 안전한, 또 가정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가정적’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문제적인지도 생각하게 되는데, 전시공간으로서 집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양가적인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것 같다. 《우먼하우스》가 집과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는 공간을 전시 장소로 점유하면서 사적인 영역 바깥으로 공적 장소로 확장시킨 점이 흥미로웠고, 《장식전》 또한 이에 영향을 받았다. 《우먼하우스》가 장식을 전면에 주제로 다루고 있지는 않았지만, 개별 작가들이 집에 작업을 두거나 걸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장식적인 일이기도 해서 전시 도판과 자료들을 살피며, 장식적인 요소들을 다수 감지했다. 선례로서, 내가 장식을 다루려 할 때 보여주고 싶은 방향성과 비슷한 전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에 영향을 받아, 처음 전시 장소를 고려할 때부터 집의 형태를 갖춘 전시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 떠올렸다. 처음부터 한옥의 형태를 고려했던 것은 아니고, 생각해둔 집을 개조한 전시 공간의 전시 일정이 차 있어 공간을 확정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중, 주변 지인을 통해 ‘오래된 집’을 추천받아 가보니 테라스와 화장실, 부엌, 기둥 등 집의 요소가 적절히 배치된 공간이었고, 다양하게 활용 가능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도 공간의 요소들을 다수 활용한 전시가 꾸려졌다.


(이미지2, 3) 《우먼하우스》 전시 카탈로그, 포스터.

재민 《장식전》에서는 기획자의 존재감이 다소 두드러졌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오래된 집에는 마루 같은 것이 있었고… 그리고 거기에 텍스트가 놓여 있었다. 기획자의 글도 있었고, 참여 작가의 과거 도록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경우 전시를 둘러보고 꽤 오랫동안 마루에 앉아 텍스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왜 ‘장식 미술’ 혹은 ‘미술 장식’이 아니라 ‘미술/장식’이 필요했던 것인지, 기획자의 생각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었다. 이런 텍스트들 또한 단순히 장식적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치로 개입하여 관객을 전시와 밀착시킨다고 느꼈다. 당시 어떤 텍스트가 놓였는지 듣고 싶고, 또 왜 이런 텍스트가 놓여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상엽 우선 참여 작가들의 이전 전시 도록이나 프로젝트 단위의 책들 중에서 장식과 관련된 자료라 여겨지는 것들을 골라 작가들에게 요청해 가져다 놓았다. 이와 더불어 내가 이전에 썼던 장식과 관련된 글들(리뷰나 비평, 에세이 등)을 모아 편집해 놓게 되었고, 또 앞서 얘기해준 것처럼 내 석사학위 논문인 『동시대 미술과 장식의 새로운 관계성 연구: 미술로서 장식, 장식으로서 미술』이 있었다. 사실 전시 공간에 도록이나 관련 서적들이 읽기 자료로 놓이는 건 자연스러운 장치라 생각한다. 어쨌든 추가적으로 작업, 전시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자료들이 놓이니까. 한편 《장식전》경우 앞선 텍스트가 놓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먼저 테라스에 김수연 작가의 식물 작업들이 놓여 있었는데, 관객들이 충분한 시간 동안 작업을 바라보고 또 전시 전체를 느낄 만한 시간을 확보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전시를 훑듯 보고 빨리 떠나버리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그 공간을 좀 더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당과 이어지는 마루에 도록과 관련 읽기 자료를 놓았다. 또 하나는 주제와 관련이 있는데, 장식이라는 주제이자 장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장식이라는 문제적 용어를 소비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좀 가볍게 개념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이 주제를 고민해왔고, 이게 갑자기 전시를 이슈화하듯 사용하려고 등장시킨 주제가 아니라고 은연중에 전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살아 있는 관계》

재민 《살아 있는 관계》로 넘어가보자. 2021년부터 2022년까지 네 번 열린 일종의 연작 전시였고, 전시 장소는 남산 둘레길 및 남산 공원 인근이었다. 각각의 전시는 2021년 10월 11일, 2022년 2월 19일, 2022년 5월 22일, 2022년 7월 30일, 이렇게 단 하루 열린 뒤 사라졌다. 어쩌면 전시가 아니라 해프닝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전시를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기획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상엽 당시의 상황과 조건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2021년은 여전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해였고, 외부에서도 대부분 마스크를 낀 생활을 하고, 전시장에서는 필수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한 채 전시를 관람해야 했다. 일상에서 필수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생활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집 외에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공간이나 장소에서는 무척 해방감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그 시기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동네 근처 숲, 공원을 찾아 산책을 자주 했다. 사람이 없을 때 마스크를 벗고 걷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다. 과거였다면 자연스러울 이 경험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고, 이 기쁨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경험들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 같다. 뭔가 좋은 경험을 하면 이걸 더 많은 사람과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내가 자주 걷는 숲길에 작가들의 작업이 놓이고 작업을 따라 숲속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 있는 관계》는 자연 속에서 잠시나마 사람들이 해방감을 느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또한 먼저 말한 상황과 조건의 다른 맥락에서, 처음 이 전시를 진행하는 단계에서는 별도의 기금 없이 사비로 진행을 했던 터라, 보통 전시 비용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장소 비용인 대관비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이 프로젝트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미지4) 민백, 〈Nectar Robber〉(2022), 캔버스에 비닐, 유화, 안료, 글리터, 플라스틱폼, 120x110cm, 《살아 있는 관계 - 봄》(2022), 설치 전경.

재민 전시를 하루 하고 끝내는 게 아깝기도 했을 것 같다. 하루 말고 이틀이나 사흘을 해볼까, 그런 생각은 없었나?


상엽 그런 생각은 해봤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환경에 대한 변수가 너무 컸다. 관객을 전시 장소까지 오게 하기 위해서 편리한 루트를 짜고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관객 외에 등산객들이 수시로 지나가는 동선이라 전반적인 관리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등산객 한 분이 전시된 작업을 쓰레기로 오인해 주우려 하기도 했다. 한눈에 관객의 동선이 그려지고 시야가 확보되는 관리가 용이한 전시장이 아니라, 숲길 곳곳에 작업이 놓이거나 걸려 있으니 관리가 불가한 구조였다. 작업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도 따로 없었어서 이건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하루만 해야 하는 프로젝트라 생각했다.


재민 총 네 번의 전시 동안 꽤 많은 작가가 참여했다. 《살아 있는 관계》의 경우 야외에서 열렸기 때문에 작가 입장에서도 어떤 작업을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을 것 같고, 또 기획자 입장에서도 기획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작업을 요청해야 하는지 고민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함께할 작가를 생각할 때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궁금하고, 또 혹시 전시하는 동안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상엽 전시 제안을 했을 때, 생각보다 작가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줘서 전시 섭외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첫 가을 전시 이후부터는 현장에서 습득한 정보들을 반영하면서 다음 전시를 꾸렸고, 계절마다 전시를 찾아주는 관객들이 생기다보니 계절의 변화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또 다른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영으로 매체를 다양화해 작가를 선정했고, 같은 주제 안에서도 계절마다 다른 소주제를 설정해 그에 맞는 작업을 요청하기도 했다. 작가들의 경우, 지금에서 돌이켜보니 내가 제안한 전시가 정말 쉽지 않은 환경과 조건에서의 설치였겠구나 생각이 든다. 작업을 보호해주는 벽도, 비춰주는 조명도, 전담해 지키는 사람도 없이 하루 동안 모든 설치와 전시, 철수를 진행해야 했으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맙게도 함께한 작가들이 숲이라는 장소와 하루라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그 환경과 조건에 맞는 작업을 고민하고 펼쳐 주었다.


재민 매 회 경험을 쌓았으니, 뒤로 갈수록 좀 더 안정적으로 전시를 할 수 있었겠다.


상엽 자연은 안정감을 주지는 않는다.(웃음) 당일의 날씨도 예측할 수가 없고, 비가 와서 전시를 미룬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 여름 전시 때는 예기치 못하게 해당 장소의 공사 진행으로 한 번을 미뤘고, 연기된 다음 일정에서 전시를 열자마자 비가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했다. 작품에 비닐도 씌워도 보고 한여름 숲에서 온몸에 모기도 물리고 참여 작가를 정말 고생시켰다. 전시를 열고서도 오락가락하는 날씨로 작가와 전시를 연기해야 하나 고민이 오갔고, 어려운 상황에서 그래도 전시를 진행하기로 결단해야 했었다. 다행히 전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무사히 여름 전시까지 마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전시가 열리는 하루 동안은 내부적으로는 매번 변수를 대비해야 하는 조마조마한 상황이 있었다. 매 계절마다 다른 변수들이 발생하고, 다양한 변수들이 데이터로 쌓이니 점차 편안해지기보다는 고려할 사항들이 더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


재민 2023년 여름 양양 갯마을 해변에서 《소금물 주차장》이라는 제목으로 이틀 간의 짧은 전시를 열었다. 일반적인 전시 공간이 아니라 해변가와 같은 야외 공간에서 열렸다는 점, 그리고 짧은 기간 작업을 전시하고 사라졌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관계》와의 연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야외에서 벌어지는 전시 혹은 해프닝을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 있을까?


(이미지5) 고요손, 〈always together〉(2023), 서핑보드, 큐빅, 핸디코트, 스티로폼,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들, 가변크기,《소금물 주차장(SALTWATER PARKING LOT)》(2023).

상엽 《SALT WATER PARKING LOT》은 《살아 있는 관계》와 이어지는 전시가 맞는 것 같다. 《살아 있는 관계》겨울 전시의 참여 작가 한 분이 양양에 살고 계셨는데, 근처의 한 해변을 추천해주셔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오가다 전시를 진행하게 됐다. 그곳이 서울도 아니고 강원도라서 차로 2~3시간 이동을 해야 하고, 이동 시간이 길다 보니 ‘이걸 누가 보러 올까?’ 생각을 하긴 했다. 이틀 간 한 해변의 다른 위치를 설정해 하루마다 설치와 철수를 진행했다. 그런데 바다는 숲보다 더 변수가 많았다. 사전 답사를 두 번 갔었는데, 아늑한 풍경을 그리고자 전시 일정을 해수욕장 개장 전 시기로 잡았었다. 그런데 당일에 가보니 해수욕장 개장일이 전시일로 바뀌어서 그날 개장을 해 내가 본 풍경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장소가 되어 있었다. 갯마을해변이 원래는 조용하고 한적한 바다의 느낌이었는데, 코로나 이후 첫 해수욕장 개장으로 너무 많은 피서객이 왔고 바다 맞은 편 주차장에 캠핑카가 즐비해 있었다. 어쨌든 전시를 잘 마치긴 했지만 기획자에게도 작가에게도 어려운 진행이었고, 그래서 먼 길 와준 소수의 관객들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 숲에서의 전시보다 관객들과 더 가깝게 만나고 이야기한 경험을 했는데, 아무래도 바다의 특성이 그런 것 같다. 참여 작가들도 설치를 마친 후 놀고, 해수욕을 하고, 관객들과 샐러드와 커피도 나눠 먹고 마셨다. 전시와 놀이가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이어지는 풍경이 그려졌다. 야외 프로젝트를 또 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한 답변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대답해야겠다. 야외 장소를 경유해 전시로 보여주고 싶은 맥락들은 많이 보여준 것 같아서 당장에 야외 공간에서 전시를 할 계획은 없다. 그간 너무 전형적이지 않은 공간들을 사용하다보니 최근에는 오히려 전형적인 공간에서 전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렇지만 또 재미있는 공간과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면 야외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겠다.


재민 《살아 있는 관계》는 단 하루 열리고 막을 내렸지만, 작가 인터뷰 영상 등을 남기고 도록을 출판하는 등 전시 일부를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보고 기획자는 전시가 완전히 휘발되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오히려 여러 방식으로 남아있기를 바랐을까 궁금해졌다.


상엽 물론 모든 전시가 휘발될 수밖에 없지만 《살아 있는 관계》 는 더욱이 휘발되기 쉬운, 휘발될 수밖에 없는 전시였다. 하루의 몇 시간이라는 정말 짧은 순간을 사용했고, 아무래도 그 날 시간이 되는 소수의 사람 밖에 볼 수 없으니까 꼭 기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이때 전시를 영상으로 남기는 걸 처음 시도했다. 보통은 사진으로만 기록했었는데, 이 전시는 영상으로 남겨야하는 전시라 생각했다. 통제가 되지 않는 환경과 숲길을 따라 동선이 끝없는 곳에 펼쳐진 작업을 촬영하다보니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고, 만약 잘못 찍더라도 하루가 끝인 전시라 다시 촬영할 수 없다는 점도 난관이긴 했다. 지금 돌아보니 이걸 네 번이나 어떻게 다 한 건지 모르겠다(웃음). 그때 에너지가 참 많았다.


(이미지6) 임창곤, 〈누군가의 결, 흐르는 조각들〉(2021), 나무에 유채, 84.1x57.4cm,《살아있는 관계 - 여름》(2022).

재민 ‘살아 있는 관계’의 전시 서문도 재밌게 읽었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 1968-)을 인용한 글도 있었고,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를 인용한 글도 있었는데, 자연 속에서 전시를 한다는 기획이 코로나 상황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기획자가 지닌 이론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엽 당시 에코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도나 해러웨이의 관점과 그녀과 이론과 픽션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좋아했다. 이런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서 더 관심가지고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좋아하던 이론과 관점들이 전시에 영향을 미친 건지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두 개가 함께 갔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지난 2~3년 생태주의와 인류세 관련 전시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 주제가 너무 동시대적인 현안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끌려서 하는, 이 전시도 하나의 유행처럼 따르는 전시로 보여지지는 않았으면 했다. 전시를 사계절에 걸쳐 1년 동안 연 것도, 웃긴 이야기이긴 한데 진정성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생태라는 주제를 하나의 키워드처럼 소비하고, 그걸로 나를 드러내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주제가 자연스럽게 녹아 이해되는 전시를 하고 싶었다.


재민 ‘살아 있는 관계’를 만들 때 참조한 전시가 있었을까?


상엽 코로나 당시 해외에서도 야외 전시들이 꽤 많았다. 내가 재미있게 살핀 한 전시는 Collision’s Craft가 진행한 Walking Show 였다. 그중에서도 리플릿 개념으로 공유되는 지도가 흥미로웠는데, 간략한 지도 이미지와 함께 작가 작업 위치 표기, 시작과 끝 지점을 표시한 일종의 트래킹 코스 같은 리플릿 이미지를 재미있게 봤고, 살아 있는 관계 맵을 만드는 데도 일정 부분 참고가 되었다. 다른 한 전시는 Collision’s Craft와 Sinkhole Project가 공동 기획한 기찻길 위 다리에서 진행한 전시였다. 이 또한 리플릿이 흥미로운데, 해당 전시 구간에 기차가 언제 오는지 시간대 전부를 리플릿에 기재해 두어 전시와 함께 기차가 지나는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마음속》

재민 인터뷰를 위하여 《마음속》을 보았던 경험을 재차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마음속》은 어떤 전시다’라고 간추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문을 닫은 오래된 양복점이라는 장소적 맥락이 있었고, 또 양복이 흰색과 검은색이라는 상반된 색의 감각을 연상시키고 이로부터 마음 속 빛과 어둠이라는 은유(?)로 나아가는 등 자유연상을 거쳐 어딘지 모를 곳으로 관객을 이끄는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이야기가 듣고 싶다.


상엽 어쩌면 단순하게도 계속 야외에서 전시를 하다 보니, 실내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에서 전시를 하고 싶은데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작년에 마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살아 있는 관계》 전시를 네 차례 꾸리며 내가 뭘 보여주고 뭘 하고 싶은지 계속 되뇌어 보니, ‘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구나’하는 걸 느꼈다. 《살아 있는 관계》에서 관객들이 전시를 관람하는 모습, 표정, 장면 같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니까 누군가가 느끼는 감정, 이를테면 전시를 보며 기뻐하는 게 너무도 선명히 보이더라. 나는 이걸 보고 싶구나, 그러니까 전시를 단 하루씩 총 4일을 진행하기 위해 1년의 시간을 준비했으니 효율과는 정말 먼 선택이지 않나. 그런데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동하는 걸 보는 순간에 만족감을 느끼는 기획자구나, 나는 마음을 움직이고 싶구나, 그래서 그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인 마음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전시는 무엇일까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하는 과정에서 《마음속》이 만들어졌다. 당시 인상깊게 읽던 글에서도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엘리 핑(Eli Ping, 1977~)이라는 작가가 스테이트먼트에서 인용한 문장 중 이런 게 있었다. “마음은 영원히 자기 자신만을 알 것이고, 모든 곳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 또 좋아하는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의 문장 중에서“나를 가장 감동케 하는 건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내가 볼 수 없는 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라는 앞선 두 문장이 《마음속》전시를 전개하는 단서 같은 문장이 되었다. 이 문장을 바탕으로 전시를 어떻게 꾸릴까 고민하는데, 또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지는 작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머리로 이미지를 그려보는 중에 어떤 작가도 떠오르고 다른 어떤 작가도 떠오르는데, 그 둘이 합쳐졌을 때의 결이 상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른 결을 가진 두 번의 전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와 더불어 공간과의 연결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전시 공간으로 사용한 양복점을 상징하는 수트의 기본이 되는 검정색과 흰색을 키워드 삼아 이를 바탕으로 1, 2부로 두 개의 색을 나누고 전체 이야기를 꿰었다. 사실 1, 2부 중 어떤 전시가 검정이고 어떤 전시가 하양인지는 내 안에서는 미리 결정되어 있었지만 글에 명시하지는 않았다. 내 생각과 달리 어떤 관객들은 내가 설정한 색과 다른 색을 그 안에서 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마음속》에서 중요했던 게 사운드였다. 1, 2부 전시의 사운드 느낌이 확연히 달라서 전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번 전시를 구상할 때 사운드가 배경음악이 아니라 다른 작업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기를 바랐고, 그래서 크레딧 표기 또한 참여작가에 미술가와 음악가 이름이 나란히 표기되었다. 사운드적으로는 1부가 침잠하고 가라앉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면, 2부는 보다 가볍고 떠오르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이미지7) 《마음속》(2023) 1부 전시 전경.

재민 이번에도 전시 장소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속》은 봄바니에 뉴욕이라는 양복점에서 열렸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대리석 벽과 하얀 옷장 등 양복점의 집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장소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전시를 하게 되었을까?


상엽 전시 장소로 사용한 ‘봄바니에 뉴욕’은 오랫동안 양복점으로 운영되던 곳이다. 집 근처에 있어서 오가며 자주 본 공간이었는데, 볼 때마다 공간이 너무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지나가곤 했다. 작년 어느 날 보니 공간이 비어 있었고, 임대 문의가 붙어 있더라. 저 공간에 누가 들어올까, 뭐가 생길까, 궁금증만 갖고 있었는데 비어 있는 기간이 지속되길래 내가 한 번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가 양복점 주인도 공간 관계자도 아니지만, 그곳이 너무 아름답고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왜인지 이 공간의 마지막을 기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힌 연락처의 건물주 분께 연락해 한 달 동안 공간 월세를 내고 빌려 쓰게 되었다.


재민 《마음속》은 총 2회에 걸쳐 열렸다. 전시가 한번이 아니라 두번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가 궁금하다. 1회와 2회는 서로 어떻게 같았으며, 또 어떻게 달랐을까?


상엽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주제로 함께 하고 싶은 작가가 여러 명 떠올랐다. 그런데 공간이 좁다 보니 모든 작가를 한 번에 보여줄 수 없었고, 그들의 합을 머릿속으로 맞춰보았을 때 그 조합이 보여주는 느낌이 나에게 확 시각화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룹으로 나누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마음에는 항상 여러 면이 있다. 하나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마음이 있고, 그래서 여러 개의 방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지8) 《마음속》(2023) 2부 전시 전경.

재민 ‘살아있는 관계’에서는 김목인이, 《마음속》에서는 김도언과 이동열이 참여하는 등 사운드를 다루는 작가들과 종종 함께 작업한다. 미술 공간에서 사운드를 매체 삼아 연출해낼 수 있는 미적 상황에 관심이 있는가?


상엽 나는 시각 예술을 주요하게 다루는 사람이긴 하지만, 지향하는 전시의 방향성은 시각의 요소 뿐만 아니라, 보이고 들리는 것, 공간의 분위기, 조도, 그리고 향까지도, 이 모든 요소가 한 번에 잘 들어맞아 구현하는 장면과 그때 느끼는 감흥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전시를 보러 와서 갑자기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은 상황을 구현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관객으로서 그런 전시를 경험했을 때 오래 기억에 남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총체예술이라고 할 법한 것에 관심이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것을 지향하는 기획자인 것 같다.


재민 총체예술이라는 게 되게 모더니즘적인 개념처럼 들린다. 그런데 장식이나 생태적인 것, 그리고 마음과 같이 하위 층위의 것을 미술이라는 층위와 동등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총체예술이라는 개념을 전유하는 것처럼 들린다.


상엽 그렇게 연결해 이야기해주니 재미있다.


글쓰기에 관해

재민 전시 서문이나 잡지 기고 등 여러 형태로 평론을 해왔고, 또 와우산타이핑클럽과 아울 매거진이라는 웹진에 참여하여 글을 선보인 것으로 안다. 두 웹진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상엽 ‘와우산 타이핑 클럽’은 대학원 동기들과 꾸린 거였고, ‘아울 매거진’은 학부 동기들과 꾸렸다. 와우산타이핑클럽은 대학원을 한창 같이 다니던 시기에 만들어진 플랫폼이다보니, 서로 자주 만나게 되고 또 비슷한 상황들을 공유하고 전시도 함께 보며 특정 시기 동안 시너지있게 지속되었던 것 같다. 아울 매거진은 보다 사적인 관계망으로 형성된 그룹이다 보니 친밀도가 높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의견을 주고 받으며 꾸렸었고, 그런 점에서 자율도가 높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상황들과 생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고료 없이 진행되는 프로젝트이기도 해서 오래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두 글쓰기 모임 모두 자발적인 미술 글쓰기를 몇 년간 지속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 시기 동안 경험할 수 있는 기쁨과 배움은 확실히 있었다.


재민 최근에는 콜렉티브나 웹진과 같은 형태로 공동의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는 게 있나?


상엽 최근 그런 활동은 없다. 다만 조금 다른 형태로 구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최근 몇 년간 전시를 만들며 여러 기회로 작가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과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았다. 문득 이 이야기를 혼자 듣고 있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들이 공유된다면 어떨까, 완전히 포멀한 인터뷰 형식이라기보다 인포멀한 요소가 자연스럽게 섞인 인터뷰를 영상으로 담아 발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작가 연구의 차원에서 다양한 인터뷰 도큐멘테이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해외에는 검색 가능한 그런 자료들이 많이 있기도 하고,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작가 인터뷰 영상이 작가가 너무 경직되어 보이거나 대본을 읽는 듯 느껴지는 게 아쉽긴 했다. 사실 정말로 궁금한 거나 진짜 이야기들은 포멀한 형식에서만 나오지는 않는 것 같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번뜩이듯 작업과 공유되는 게 있고, 특정 작업은 그 과정에 녹아 있거나 그 이야기를 통해 설명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반쯤 공적이고, 반쯤 사적인 작가 또는 기획자와의 대화를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나 한 사람의 범위에서 만들고 편집하고 발행하는 게 곧바로 가능할지에 대한 실질적 고민은 있다.


재민 흥미롭게 읽은 글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버니의 장식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버니의 장식법」은 버니 로저스(Bunny Rogers, 1990-)의 작업을 돌아보며 그 속에서 장식에 대한 끌림을 읽어내는 글이었다. 버니 로저스의 작업을 다소 예외적인 주제에 기초하여 살피는 접근이 흥미로웠고, 또 장식이라는 주제어로부터 글쓴이의 관심이 드러나는 점이 흥미로웠다. 버니 로저스의 작업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또 그의 작업에서 어떻게 장식이라는 주제를 이끌어내었는지 궁금하다.


상엽 이 글을 썼을 때, 글을 발행한 플랫폼은 ‘아울 매거진’의 이름이 ‘유니버셜 씨드’였을 때다. 당시 대학원을 다니며 장식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는 초기 단계였는데, 주제와 연결된 것들을 공부하고 리서치하는 단계에서 호흡이 긴 글이 아닌 보다 짧은 호흡의 글들을 여러 편 쓰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니 로저스 작업을 어떤 경유로 알게 되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계속 흥미롭게 생각하던 작가였고 장식의 요소가 작업 전반에서 감지되었다. 버니 로저스의 작업을 장식의 맥락으로 읽은 글들이 없었고, 내가 감지한 작업의 장식적 요소를 글로 구체화하고 정리하는 식으로 한 번 다뤄보고 싶었다. 당시 유니버셜 씨드 웹사이트는 페이지마다 변형 가능한 요소가 많았다. 그래서 글을 볼 수 있는 페이지 배경도 바꿀 수 있었고, 움직이는 GIF 파일도 넣고, 스티커처럼 이미지를 붙여서 이미지를 클릭하면 버니 로저스의 홈페이지 이곳저곳을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 그 자체로 장식적인 글이었다. 사실 이게 어떤 글이었나 하면, 비평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작가 작업을 공식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글도 아니고, 내가 쓰면서도 신기한 글이라 생각했다. 쓰는 과정과 업로드하는 과정 모두 재미있었지만 어디에도 위치시킬 수 없는 글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이 글을 내 웹사이트에 옮겨 두었는데, 거기에는 빈 화면에 글만 있다. 이전에 업로드했던 형태가 사실은 맥락상 맞았고, 지금 올린 글의 형태는 어쩌면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재민 기획자로서 글을 쓸 때, 그리고 자신의 기획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글을 쓸 때의 태도가 달라지는가? 기획자로서의 글쓰기와 평론가의 글쓰기는 어떻게 다를까?


상엽 가장 단순한 차이는, 기획자로 글을 쓸 때는 나의 의지로 시작한다. 반면에 평론가로 쓰는 글은 보통 의뢰가 들어와 쓰게 된다. 일단 거기에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기획자로서 글을 쓰는 것에 좀 더 편안함을 느낀다. 물론 기획의 글이 참여 작가들을 설득해야 하긴 하지만 우선 내가 설득되면 되니까. 그런데 평론은 내가 그 작가의 작업 전반을 제대로 잘 읽었는가, 내 스스로에게 설득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작가와 작가의 작업을 궁금해 할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시켜 전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사실 작가의 작업을 볼 때 중심이 되는 맥락보다는 변두리에 있는 특이점에 관심을 가질 때가 많다. 그래서 그 지점들을 다루고 싶은데, 사실상 그런 걸 쓰게 되면 작업을 전체적으로 대변하지 못하니까 작가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 때가 많다. 그래서 평론이 점점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작가의 작업을 온전히 대변하는 글을 쓰지 못하고 공식화에 적합한 글을 쓰는 사람은 안 되는구나. 스스로 평론가로서의 옷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그걸 잘 읽어주고 언어화하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 그런 영역이 따로 있고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된다는 생각을 최근 많이 한다.


재민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기획이 있는지, 또 뭔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상엽 오는 7월에 현재 참여하고 있는 ‘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기획전이 열린다. 또 기금 상황 때문에 좀 더 늦춰질 수도 있지만, 하반기에 2인전 기획이 예정되어 있다. 또 상반기 다루고 싶은 주제와 전시들이 있긴 한데, 예산 문제로 불확실하긴 하다. 그중 하나는 작년 하반기부터 ‘하이힐’을 자주 떠올린다. 하이힐이라는 사물, 도구가 가진 생김새와 목적, 위상이 흥미롭다. 그걸 신음으로써 자발적으로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고, 의도적으로 보여지기를 원하고 대상화되는 것을 긍정하는 뉘앙스가 흥미롭다. 그래서 욕망되고 욕망하는 것에 대한 전시를 하고 싶은데, 가까운 시기에 진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하나는 기념일에 관한 전시를 하고 싶었다. 올해가 세월호 10주기이기도 하고, 오는 4월에 그 시기를 함께 애도하고 기념할 수 있는 전시를 하고 싶었는데 이건 기금이 안됐다. 여기에서 바로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해 전시 형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풀어볼 생각이 있다.


재민 흥미로운 전시였을 것 같은데, 성사되지 않아 아쉽다. 그래도 언젠가 열리길 기대하고 있겠다. 긴 시간 수고해주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