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리알과의 대화

김여명

여명 먼저 바쁜 연말연시에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하다. 앱스를 공동 운영하는 김여명이라고 한다. 마테리알은 등장에서부터 그 혁신성으로 가장 인지도 있는 비평지로 알려져 있지 않나 생각한다.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는 소개글이 마음에 드는데, 아직 마테리알을 모를 수도 있는 독자들에게 단체명과 설립 취지, 설립으로부터 지금까지의 행보를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연선 2019년 창간 때부터 계속하고 있는 편집인이자 발행인인 함연선이다.


동현 마테리알 4호에 글을 청탁 받아 쓰고 6호 말미에 편집 동인으로 합류해서 ‘오픈 스페이스’부터 같이 기획을 시작한 금동현이다.


상희 마테리알 2호에서부터 필자로 가끔 참여하며 연선의 동료로 지내다가 2023년부터 편집동인으로 같이 하게 된 이상희라고 한다.


석영 이번에 새로 참여하게 된 편집동인 양석영이다. 구독자였다가 러브레터를 써서 함께 하게 되었다.


구윤 마찬가지로 이번에 새로 참여하게 된 편집동인 권구윤이다. 필자로 청탁을 받은지는 2년이 더 되었고, 그 시간을 마테리알 곁에서 보내다 결국 합류하게 되었다.



연선 ‘마테리알’이라는 이름은 영화이론가자 미술이론가인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 1904-2007)의 『예술로서의 영화』 국역본 초판에 나오는 ‘material theory’를 음차한 것이다. 함께 참여했던 동료들과 함께 이 용어에 속된 말로 꽂히게 되었는데, 당시 잡지를 만들려고 했을 때 작업의 내용보다는 어떤 형식이나 물질성에 조금 더 주목하는 비평을 개진하려는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편하게 말하자면, 다른 여러 가지 후보들(예를 들면 ‘기백’)도 있었는데, 이런 게 너무 능청스럽고 동인지 같아서 기각되었고 마테리알로 결론이 났다. “스루패스로의 비평”은 지금까지 자주 설명해 왔지만, 내가 좋아하는 축구 용어인 스루패스에서 시작되었다(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의 아스날이라는 팀을 좋아한다). 이 스루패스라는 것은 사람에게 하는 패스가 아니라 빈 공간으로 보내는 패스를 가리킨다. 상대편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의 어떤 애매한 공간에 공을 던져서 우리 팀 공격수를 특정 공간으로 보내어 득점 찬스를 상상하는 패스다. 어떻게 보면 뭔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렇지만 이 패스로 인하여 뭔가 발생될 수도 있는 어떤 득점의 기회, 득점의 찬스 같은 걸 상상할 수 있는 패스라고 생각했고, 그런 동세를 만드는 비평을 만들고 싶은 마음을 담아 잡지를 시작하며 슬로건과 선언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비평들이 재미가 없고, 특히나 영화 비평 씬이 엄청 답답하고 막혀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동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설립 취지는, 여러 것을 회고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마테리알의 탄생 이유를 물으면 특히 영화 비평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만 말하고 영화를 영화로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느껴졌다. 극 영화 속 인물들이 하는 행위나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탕으로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내용 비평으로부터 거리를 둔 비평, 형식이나 물질을 다루는 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그 당시에 어떤 것을 걱정하거나 겁 먹지 않고 글을 내어보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내어놓아 세상도 변하고 우리도 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설립 당시부터 오늘까지 우리가 중요하게 지향했었던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불만이나 사소한 욕심, 욕망 이런 것들에 갇히는 게 아니라 영화와 무빙 이미지 씬, 비평계, 넓게는 예술문화계에 공적으로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적인 맥락이 아니라 큰 맥락에서 기여를 할 수 있는 야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명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다. 연달아 생각나는 것들이 있긴 한데, 진행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겠다. 이번 인터뷰에 나는 마테리알과 마코를 섭외했다. 웹과 매거진의 합성어인 웹진은 뛰어난 접근성과 초기 비용 마련의 용이함, 비교적 정기 발행이라는 틀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간의 느슨함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앱스의 경우 공동 운영자들이 그때 그때의 현장 이슈에 대응하는 식으로 글을 모으고 발행하는데, 마테리알 또한 이와 비슷하게 발행 시기가 비정기적이고, 대신 앱스나 마코와는 달리 매번 오프라인 인쇄물을 발행하고 있다. 글을 발행하는 과정과 운용 방식에 대하여 말해 보면 좋겠다. 마테리알의 경우, 오프라인 인쇄물을 항상 겸해서 발행하고 판매한 다음 과월호가 되면 이전 호의 글들을 공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런 방식으로 글을 발행 및 공개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


연선 온라인으로 과월호 글을 싣게 된 이유는 공공성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랬던 것이 가장 크다. 우리 것을 사야지만 볼 수 있는 상품이면 안 되고, 모두가 봐야 한다고. 필자들에게도 웹에 공개되는 게 좋은 일일 거고, 장기적으로 득이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웹에 모두 아카이빙 하는 것으로 싣게 되었다. 잡지 자체는 비정기적으로 내고 있고, 한 호를 내는데 기획 회의부터 필자들에게 시간을 주고 편집과 교정교열, 인쇄 과정을 생각해 보면 한 5개월에서 6개월 정도는 걸린다.


여명 인쇄물을 만들어야겠다는 판단은 무엇에 기인한 것이었는지? 앱스는, 완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으로 엮어서 나올 만한 정도의 볼륨이나 깊이를 가진 글을 쓰지 말자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다들 글쓰기나 비평에 있어 (생업과 병행한다는 의미에서) 아마추어이고, 이걸 연습하면서 글을 쓰고 발행하는 근육을 키워보자는 이야기도 있었고. 우리의 문제의식은 사람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이유가 어려워서거나 너무 먼 곳의 이야기여서 때문이 아닐까 하는 데에 있었다. 나는 학문적인 배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미술이 아닌 곳에서 왔고, 그래서 처음에 비평을 접할 때 진입 장벽이 높았다. 따라서 앱스를 만들면서는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선 마테리알의 인쇄물 같은 경우 다른 잡지들처럼 책이 아니라 신문의 형태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동세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독자로 하여금 물리적 동세를 만들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했다. 펼쳐서 보고 접고 할 때의 움직임을 만드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신문이니까, 크고 얇고 뭔가 좀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다른 잡지들과 다르게 가볍고 막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이 있었다. 조금 어려운 글이 있다고 하더라도 접어서 가지고 다니거나 조금 더 일상으로 들어와 구겨지고 접히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햇빛 막거나 비 올 때도 쓸 수 있게.


여명 나도 내가 돈 주고 배워서 만들었다…….


연선 배워서……?


여명 네, 배워서.


상희 나도 여명이 들은 그 수업을 들었고, 앱스 홈페이지의 초창기 모델을 네오시티에서 봤다.


연선 네오시티가 뭐지? NCT?


상희 뭐라고 해야 되지? 무료로 호스팅을, 아니면 좀 저렴하게 주는 서비스다.


여명 우리 모임 기밀이 빠져나가는 중이다. 빠르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마테리알의 그간 여러 종류의 활동을 살펴보면 좋겠다. 초기에는 잡지의 형태만을 가졌는데, 요즘에는 별도의 연재 코너를 만들고 이를 ‘스루패스 총서’로 발간하거나 행사 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활동 형태가 분화한 계기 같은 것이 있을까?


(이미지1) 〈비평의 비평〉 포스터.

(이미지2) 〈제1회 오픈 스페이스〉 포스터.

연선 〈오픈 스페이스〉는 마테리알이 오프라인 행사를 정기적으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획했던 행사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주제에 맞게 연사들을 초청해서 강연이나 대담이나 토크를 하는 행사다. 제목은 역시 축구와도 관련이 있고, 영화 감독 장선우가 말한 열린 공간, 열린 영화와도 관련이 있다. 스루패스 총서 관련 이야기는 동현에게 부탁하고 싶다.


동현 인터넷 연결이 조금 불안정한 곳에 있어서 끊길 수도 있는데, 양해 바라겠다. 연재 같은 경우에는, 오픈 스페이스 이후 7호를 기획할 때 나왔던 이야기로 기억한다. 마테리알이 연 2~3회 정도만 발행을 하다 보니까 노출 빈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큰 볼륨의 글에 대한 욕심도 있었고. 그래서 나원영 필자와 한민수 필자를 물어왔다. 연재를 하고 최종본을 잡지에 실어서 판매고를 높이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나원영 필자 같은 경우에는 하는 도중에 글이 계속 더 만들어지고 늘어나고, 우리에게 보내 주는 글의 양 자체가 되게 커지고, 청탁 드린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글이 도착하는 일이 계속됐다. 연재를 따라온 독자분들은 이미 아실 거다. 그래서 편집인들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건 책으로 묶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과정에서 아예 총서를 계획하게 되었다. 총서 이름은 당연히 스루패스로…… 잡지 이름을 스루패스로 해야 됐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웃음). 나도 축구를 좋아해서.


여명 그런 활동들은 마테리알의 비전과 어떻게 상응하나?


연선 마테리알이 어떤 굉장히 구체적인 비전, 그러니까 마테리알이라는 걸 가지고 우리가 비전을 모으고 그 비전 아래에서 어떤 계획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마테리알 전체 입장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비전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오픈스페이스도 정서적으로 임박한 문제를 다루고자 했기 때문에 비전과 상응한다고 하면 좀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이런 행사들이 사실 단체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고. 다른 모든 모임들이 그렇듯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것도 있다.


동현 그런 맥락에서 좀 스루패스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과정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대를 대상으로 골을 넣겠다가 아니라, 스루패스라는 과정만 있는 게 재미있다. 그래서 그때그때 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느끼는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으로서 마테리알은, 「대체현실유령」이나 「해적질을 옹호하며」 같은 것도 그렇고 그때 필요한 글, 그 글이 뭔가 우리의 인식적인 틀이 아니라 당시에 되게 임박하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그런 정서가 기획에 묻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비전이 있다면, 그런 정서적인 비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명 긴 답변 감사하다. 이번 질문은 마테리알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과정에 관한 질문이다. 리뷰할 전시와 작품, 주제 선정, 필진 섭외 과정에 대한 질문이다. 앱스는 기획 회의를 하고 각자 기획을 고려하여 한 쪽으로 편중되지 않는 각자의 글 포지션을 잡는다. 그리고 그 포지션에서 완전 벗어나는 글들을 각자 써오고, 거기서 맞춰서 기획을 약간 수정하는 방식으로 한 호를 발행한다. 필진으로 참여하며 내가 마테리알에게 감사한 것은, 언제나 글에 대한 피드백을 정성스레 작성하여 보내 준다는 것이다. 마테리알에 글을 수록하게 될 때, 어떤 독자들에게 내 글이 노출되었다보다는 마테리알의 편집 동인들이 이걸 읽어 줬다는 점이 더 중요하기도 하다(내 글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에 늘 죄송할 뿐). 독자들에게 글이 가 버리면, 그 이후로는 글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쓰는 사람은 통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피드백을 받아볼 수 있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한 호를 발행하는 과정에서의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하여 말하는 것 모두 좋겠다.


일동 (잠시 침묵)


여명 예를 들자면…… 펑크를 내는 필진도 있나?


연선 말해 줄 수 없다…….


여명 알겠다. 내가 마테리알의 독자로써 좋아하는 점을 말해 보겠다. 필진 발굴을 정말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 그렇게 섭외를 하는지? 어떻게 잘하지?


연선 그 섭외의 가장 큰 공은 동현에게 있다.


동현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내가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나원영 필자 같은 경우 내가 재밌어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다 알아낸 사람이고, 한민수 필자는 내가 (어떤) 영화 보고 싶다고 맨날 트윗 올리면 그 사람이 그 영화를 맨날 보내 줬다. 그러다 알게 됐는데, 나원영 필자는 우선 블로그를 엄청 열심히 한다.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사람들 물어온다고 할 때는 아까도 말했듯 정서적인 불만이 기존 평단에 있다면, 그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사람들로 자기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불러왔었다. 트위터나 블로그에 재미있는 말을 남기는데, 왜 더 안 하지 싶어서 데려오고자 했다.


연선 마테리알 초반에 조금 더 그랬던 것 같은데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같은 데서 재미있는 주제로 뭔가를 쓰고 싶어 하거나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접근을 많이 하려고 했었다.


동현 그때가 뭔가, 소위 말하는 블로그스피어나 트위터스피어가 부글거리던 시기였는데 그때 있었던 필자 분들이 이름표를 받지 못한 분들이었고, 이런 부글부글대는 정서를 마테리알이 잘 흡수? 잘 알아채고 초대한 것 같다.은


여명 요즘은 누구를 주목하시나? 영업 비밀이라 안 될 것 같지만.


연선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말하겠다. 그리고 마테리알 매호를 구성하는 또 하나는, 마테리알 1~6호는 매호 특집 기획, 예를 들면 퀴어 영화, 졸업 전시, 시리즈 등의 기획 섹션이 있고, 나머지는 궁금한 주제나 궁금한 필자들 관련한 글을 보탰는데, 7호부터는 전체적인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올해 나올 8호와 그 이후의 호들도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될 것 같다.



여명 이어지는 질문이다. 이번 인터뷰에 참여하는 또 다른 플랫폼 마코와 달리, 마테리알은 창간호부터 꾸준히 하나의 주제에 매진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보단 우리가 소위 ‘영상 문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영상, 무빙 이미지, 영화, 작업, 무엇이라고 부르든 이런 것들에 관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특징적인 기술을 요구할까? 혹은 어려움이 있다면? 예컨대 저는 영상 매체를 보고 쓰는 글은 그 작품의 모든 것을 기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쓴다고 해서 그것의 모든 것을 기술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 같다. 설치미술이라면 ‘여기 세 개의 사과가 있다’ 같은 문장이 물론 가능하겠지만, 그 역시도 세 개의 사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읽는 사람이 즉시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미술에 대해 쓸 때엔 가급적이면 작품의 ‘외양’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데, 영상 매체의 경우에서는 아예 이런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지보다는 이미지를 엮는 구조나 규칙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는데, 이럴 때 영상 매체에 대하여 쓰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욱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마테리알은 제가 지목을 해야 답변을 하시는 것 같으니…… 석영에게 묻고 싶다. 자기소개 때 말한 러브레터는 어떤 내용이었나?


석영 마테리알의 독자로 느꼈던 것은, 여명이 방금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은데, 우선 무빙 이미지, 영화, 작업, 한 가지 대상을 두고 파고드는 세심함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회화는 한 순간이 정지된 채로 유지되는 매체인데, 영상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어떤 안건이나 대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쓰고자 노력하면서 그 입장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케이스를 특징적으로 가져온다. 마테리알에서 특정 작가 작품이나 작업에 대하여 쓰는 것을 보면 한 쇼트에서 나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핸드 헬드, 렌즈, 구도, 재료, 카메라 종류 등 엄청 많은 기술적인 부분을 언급해야 하고 그렇게 쓰는 글들도 많이 읽어 봤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거대한 계보에 대해서, 엄청 거대하고 큰 철학적 개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그러나 마테리알의 글은 조금 다른 결의 비평이 있었던 것 같고, 그게 예를 들자면 작은 부분에 마음이 독려되고 건드려져서 그런 지점을 끈기 있게 풀어내는 작업을 많이 하는 것처럼 읽혀 필자로도, 편집 동인으로도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선 나는 다른 매체에 대해 써 본 적이 없어서 이 질문이 조금 생경하게 다가온다. 영상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더욱 그랬다. 비평을 쓰고 싶게 만드는 게 나한테는 사실 영상뿐이다.



여명 그렇다면 우리가 비평을 크게 두 개로 분류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작업에 대해 쓰는 글이 있고, 제도에 대해 쓸 때가 있다.


연선 어.


여명 조금 이따 말해 주셔도 된다.


구윤 영상 비평의 곤란에 부쳐, 마테리알이 좌표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말할까 한다. 기실 남한에서 처음으로 이 소위 말하는 영화비평계라고 하는 것이 활성화된 시점 90년대로 는다면 그때 가장 중요했던 게 기억술이다. 신문 지면으로 이루어지던 남한 영화 비평의 초기에서부터 그랬지만, 90년대에 중요했던 건 그 영화를 메모하며 보고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보기를 불사해서라도 완수해야 하는 기억술, 가장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있고, 그 영화를 기억해서 다시 조합하여 구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기억술이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이 든다. 마테리알이 다루는 영화랑 마테리알이 다루는 무빙이미지가 놓인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마테리알이 시작한 시점은 VOD나 OTT 같은 것들이 활성화되면서 영화를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시점, 즉 이제 더 이상 기억술로서의 영화 비평이 유효하지 않은 시점이다. 이 시점부터는 어떤 특정 장면에 대한 비평이 장면의 선후 관계나 사실 관계에 대한 오류를 범했을 때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영화에 대한 기억술로부터에의, 해방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큰 부채로부터 탕감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영화학이나 영상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정립된 지가 이제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거기서 참조하고 있는 많은 문헌들이 2차, 3차, 4차 문헌에 불과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근본이 없는 학문이다. 그 근본 없음을 근본 있음으로 가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영화뿐 아니라 이론에 대한 기억술 또한 굉장히 강조했다. 그러나 마테리알이 잘 드러내 준 것은, 이제 더는 어떤 이론을 참조할 때 그 이론을 종합적으로 온당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대일로, 즉 축자적으로만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것이 실은 앞서 짚은 기억술에 붙어 있는 부록 같은 지점이었는데, 이 맹장을 절제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억술로부터, 사변과 속도의 기술로 넘어가는 글쓰기를 연 것이다. 말 정리할 겸 비유를 들자면, 데카르트의 제2성찰 중 밀랍 논증에 대해 말하고 싶다. 밀랍의 여러 감각적 성질들이 계속 변하는데 이게 계속 밀랍인 이유가 뭐냐는 것이 질문, 즉, 밀랍은 프레임 단위로 계속 변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게속하여 밀랍이라고 아는 까닭에 대한 물음이다. 데카르트는 그 무수한 프레임들을 상상만 가지고는 통람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이제 정신 그 자체의 능력이다, 라고 대답한다. 그전에 데카르트식으로 표현하면 미약한 상상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었던 어떤 영화 비평의 집착 같은 것을 저희가 아예 순수 사유라는 장치 자체가 펼칠 수 있는 장으로 전환시켜 놓았다고 생각한다.


상희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 말을 편집할 때 적절한 곳에 넣어 달라. 비평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단 편집 동인, 혹은 에디터로서의 이야기인데, 우리가 요즘에 내부적으로 무엇을 지면으로 다룰 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 고민은 영상 비평지라고 해서 영상 매체만을 주 대상으로 삼으면 우선 현장의 시기별로 공급량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발행 시점이 정해지면 그전까지 마테리알은 필진도 섭외하고 필자들에게 글을 쓸 시간도 주어야 하지만, 그런 준비 기간 동안 다루고 싶은 전시나 작업이 없는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 측면이 하나 있고, 또 다른 고민은 무빙 이미지 혹은 영상 비평지를 지향한다고 해서 다루는 대상을 미술 영상이나 시네마로 한정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그 또한 어떤 구분에 입각한 채 접근하는 거여서, 어떤 한계를 직면하는 순간들이 생겨난다. '주목을 할 만한 작업'을 찾는 일도, 이미 우리 안에 암묵적으로 있는 기준에 부합하는 작업을 색출하거나 그런 작업을 무한정 기다리는 일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지 하는 걱정도 든다. 아니면 (장르라든가 영상예술의 여러 역사에 대해서) 경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혹은 무엇 때문에 경계가 지어지는지 고민하지 않은 채 경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채 접근하면 어떤 종류의 영상은 이런 게 있어, 이런 식으로 어떤 경향을 진단하는 방식으로 빠지기도 쉽다. 이런 경우, 당시에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나중에 다른 시간에서 돌아보면 비평이 아니라 호도였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글감의 비율도 고민이 많이 된다. 빈칸 채우기처럼 될까 봐. 그래서 영상이라는 매체에 대해서, 그리고 감상, 관람, 생산 등과 같이 영상을 둘러싼 문화와 조건에 대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자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굴려가고 있다.


동현 돌아보니까 영화 쪽에 글을 좀 쓰긴 썼지만 영화나 영상 매체에 대해서 많이 쓰진 않은 것 같다. 영화를 쓰게 되면 영화의 분위기를 역사 자료로 우회해서 기술하지 않고 덮는 식으로 썼고. 나에게 영화에 대해 쓴 어려움이란 계속 회피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고, 그것을 직면하고 잘 쓰고 있는 필자들이 부럽다. 예를 들면 이보라 평론가. 영상 매체에서는 어떤 기술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요소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포기가 호기심을 불러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야구와 축구를 비교하자면, 물론 불가능한 부분도 있겠지만, 야구는 통계를 내고 시대 보정까지 넣어서 객관적으로 어떤 선수가 위대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축구는 그게 안 되는 스포츠다. 어떤 전혀 계산 불가능한 스포츠. 그런 감성적 측면이 영화에 훨씬 크다는 인상을 받고, 나는 그냥 회피하고 있다.


여명 그런데 두 분은 왜 축구 웹진은 안 만드는 건가.


동현 케이리그에서 이미 잘하고 있다.


여명 이미 개척된 시장이구나.


구윤 혹시 조금만 더 붙여도 되나? 여명은 아까 제도 비평과 작업 비평이라는 분류를 사용했는데, 내 생각에는 마테리알에게 제도와 작업 비평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특히나 영화랑 무빙 이미지에서 이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예컨대 영화 같은 경우에는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고, 무빙 이미지에서는 그러한 프로덕션에 대한 논의를 예컨대 포스트프로덕션 등의 논의로 대체해야할 수 있지만, 마테리알 창간호를 보면, 기본적으로 그 영화를 어떻게 찍었는지, 그 무빙 이미지를 어떻게 생산했는지 살피고 있고, 마테리알에 한해서는 두 개가 같이 가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명 감사하다. 다음 질문은 비평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미술을 시작할 때부터 비평은 위기다, 비평은 죽었다, 비평만 죽은 게 아니라 예술까지 다 죽었다, 같은 어떤 상투화된 슬로건처럼 사용되는 문구를 자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예술에 관하여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화답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인데 우리 개개인에게 글을 쓴다는 게, 그리고 그런 글쓰기로 개입을 자꾸 시도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이야기해 보면 좋겠다. 나는 게으른 필자이고, 고객의 니즈를 충족해 줄 필요가 없는 글쓰기를 앱스를 통해 하고 있다. 돈을 받고 쓰는 글에서는 객관적인 태도를 챙기기가 어렵다. 자꾸 편을 들어 주고 싶고, 예뻐해 주고 싶고, 그런 마음이 든다. 또 어떨 때는 글을 받았으나 대상에 대해서 어떤 흥미도 느낄 수가 없을 때가 있다. 그래서 정말 꾸역꾸역 써서 내고 나에게도, 글을 받는 분에게도, 글을 읽으며 꾸역꾸역 썼음을 느낄 독자들에게도 죄송하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작업이 아니면 쓰기로 결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한편으로 ‘주례 비평’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 해당 작업에 그만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주례 비평 또한 (나락도 락이듯) 비평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질문이 조금 길어졌는데, 글쓰기의 대상을 선정하는 계기부터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겠다. 나와 다르게 그냥 건조하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 구성이 좀 비어서 이걸 쓰기로 했었다고 대답해도 좋고, 편하게 말씀 부탁드리겠다.


연선 나 같은 경우는 마테리알을 통해 쓰는 글은 돈을 받는 게 아니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거나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주목하고 싶은 것에 관하여 쓰게 된다. 예술이나 작품에 관하여 쓰는 것은, 예전에는 뭘 보고 그게 너무 좋으면 그게 왜 좋은지 설득하려고 글을 썼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어떤 작품을 보고 너무 좋으면 그 작품의 어떤 점이 좋은 걸까, 그런 ‘좋음’에 관하여 고민하게 된다. 이 작품에 감화되는 나를 조금 더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설득에서 작업에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글쓰기를 요즘에 도전하고 있다.


상희 나도 여명처럼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한 깨달음의 경험이 있어서 그걸 말하겠다. 타인의 작업이랑 너무 가까이 놓이는 글을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문 같은 거. 이해관계 때문에 솔직하게 쓰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만, 내가 창작자로서 타인의 작업을 보는 관점이나 태도와 비평으로 작업에 다가가는 태도는 겹쳐지면서도 분명 다른데 작업과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운 글은 쓰면서도 혼란스러운 경험들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와 거리가 있거나 내 역할이 아닌 것 같다면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겠다고 깨달았다.


여명 어떤 작업 하고 있는지?


상희 주로 영상 작업 한다.


연선 이런 이야기도 했다. 행사도 비평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 예전에는 필자로서 글을 많이 쓰는 것에 욕심이 많았는데, 이런 행사 같은 것을 기획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글쓰는 욕망을 이렇게 배분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미지3) 〈제2회 오픈 스페이스〉 행사 사진.

여명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는지?


연선 마테리알을 만드는 것 자체가 비평 활동일 수 있다. 오프라인 행사도 의제를 정하고 맞춰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평적인 활동이다. 요즘에 글이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글을 잘 써야지, 이 글에 내 모든 것을 응집, 응결시켜서 하나의 좋은 글을 완성해야지, 이런 욕망이 아니라 양적으로 많은 글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라도 글 대하기를 조금 더 조심스러워하게 되었다.


여명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내 영혼을 모으는 게 너무 힘들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럴 때일수록 글쓰기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예전에는 돈 주면 나는 영혼도 쓸 수 있어 했었는데 다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많이 발표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양질의 글을 쓰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뭐 오늘날의 사회는 양적으로 내리붓는 것도 중요한 측면이 있어서…….


연선 나도 여명이 그런 말 한 거 기억난다.


여명 취소하겠다.


석영 (손 들었다가 갑자기 퇴장)


여명 나가셨다. 다른 분의 답변도 들어보자.


구윤 질문이 뭐였지? 작품과 비평의 거리, 혹은 비평이 어떻게 비평의 글감을 선택하는가였나?


여명 맞는데, 왜 하필 우리는 왜 글을 쓸까가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구윤 명확한 모델이 있는데,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푸코를 빌리자면, 영화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게 해서 영화라는 사물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말과 사물을 순환시키는 것, 그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이런 구도에서 놓고 보면 글쓰기의 매력도 분명히 있지만, 해야 되니까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커진다. 글이란 가장 가깝게 두고 사용하는 매체니까 그걸 하는 게 아니겠는가. 영화-말하기와 영화-보기라고 하는 두 개를 순환시키는 작업으로서 비평의 책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작업과 제도를 엮어서 다루는 마테리알처럼, 이 두 개를 함께 보지 않고 또 순환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시네필리아라고 하는 것과 시간 혹은 역사라고 하는 것이 갖고 있는 특수한 관계가 몇 개 있는데, 가령 시네필리아는 어떤 시점이 지나면 그것을 죽여야 함에도 그것을 죽이지 못하고 유령이나 좀비 상태로 살려둔다. 다른 한편 시네필리아는 영화의 미래를 근심한다. 기존에 훌륭한 영화가 많으니까 이제 영화는 내일 망해도 나는 볼 거 많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네필리아는 없고, 상상도 잘 안 된다. 시네필리아는 자신의 미래 혹은 영화의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 분명히 전체적인 구도에서 어떤 종류의 순환을 바라는 습성이 있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 습성에 이끌려서 영화 보기와 영화 말하기의 순환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니까 글을 쓰는 것 같다.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쓰기의 즐거움조차 이끌어내서 동원해야 하는 시네필리아적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여명 새 멤버를 뽑은 기준이 멋지게 말하는 능력인지 궁금하다.


구윤 멋지게 말하는 능력? 뭐라고?


연선 새로운 멤버 뽑는 기준이 그거냐고.


구윤 감사하다. 칭찬이네. 감사하다.



석영 (다시 입장, 우는 이모티콘)


여명 다시 오셨네. 원고 드릴 때 여기 덧붙일 말씀이 있으시다면 서면으로 답변 부탁드리겠다. 울지 마시라. 거의 왔다. 아까 했던 이야기와도 조금 이어지는데, 글이 발표되는 어떤 장소를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마음을 물었었다.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비평의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면 어떤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마테리알은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많이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어떤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집담회 모델이 반드시 필요하고, 공신된 영리 매체가 아닌 곳에서 글을 쓰는 아마추어 글쓰기 하는 사람들이 좀 더 집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개인이 모이는 것이 아닌 단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구윤 사람들이 생각할 시간을 좀 벌기 위해서 말해 본다. 세 가지가 있다.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형식, 표현의 차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제도를 비판하는 글 중에서 매섭고 신랄하게 공격하는 글들이 여러 예술 분야에서 생산이 되는데, 그런 제도 비판의 글들이 형식까지도 비판의 정신을 밀어붙였는지 가려내 볼 필요가 있다. 비평에도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을 급진적으로 쇄신하지 않으면 비평이 제도로 흡수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쟁점에 관한 것이다. 마테리알에 발행된 글들은 대체로 쟁점이라는 문제를 두고 진동하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공개 서한은 일종의 필화를 일으켰고, 마테리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도 많은 기여를 했으며 마테리알이라는 이름을 유통하는 데에 중요한 루트가 되었다. 심지어 공개 서한은 쟁점을 넘버링하여 지적하는 글이었고 그러므로 그 의의는 투쟁의 장을 열었다는 데에 있다. 쟁점을 나열하고 쟁점을 열어 온 것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사례가 있다. 하나는 너무 직접적으로 쟁점만 제공을 해서 그것이 진짜 쟁점의 의미로 불리지 못했던 경우, 다른 하나는 쟁점을 피한다기보다 쟁점을 투과해서 넘어가는 종류의 사변소설적인 비평의 경우이다. 앞으로의 마테리알을 주목하면, 이 두 종류의 사례 사이에서 쟁점과 잘 관계하는 그런 종류의 비평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벌거벗은 성질이 있기 때문에 글이 아니더라도 영화나 영상과 관련된 행사, 또 글로 이루어지는 비평이라고 분류되기 어려운 형식적인 전환들과 함께 쟁점과 잘 관계하는 비평을 보여 주고자 한다. 세 번째는 순환이다. 영화를 직접 현장에서 찍는 사람이 마테리알을 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평은 소비자의 즐거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공통된 입장이다. 하여 우리는 작가들과 어떻게 스루패스가 가능할지 고민한다. 해서 현장이나 영화의 산업 구조, 동향,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들을 조금 더 소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르포르타주 같은, 조금 더 현장에 가까운 글들을 생산해 낸다거나 할 예정이다. 조금 더 현장에 가까운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작가분들도 이걸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그런 불안감이 들 때까지 노력할 것이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 순환에 조금 더 전념할 것 같다.


연선 모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것 같다.


여명 이미 잘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최근의 영화 비평의 생산과 소비의 순환 구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연선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은 독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작가나 감독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내 생각에 영화계에서는, 대중 영화들은 특히나 비평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비평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비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예 주고받는 게 없다. 대중 영화에 대한 비평을 보면, 그 비평들이 내재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비평을 읽는 소비자들의 즐거움에 그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떻게 디펜스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


구윤 내 생각에는 모든 종류의 영화 매체의 방향성이 작가라는 개념을 제거하고 하도급자 내지는 하청업자라는 개념을 다시 내세우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눈치 빠른 학교는 다 알고 있고 그에 맞춰서 커리큘럼도 정해진다. 그러니까 더 이상 작가라는 이름으로 영화제 서킷을 돌아서 입봉하는 식의 구조가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하도급자로서 피칭 잘하고 돈을 잘 따내는 종류의 맥락이나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중간 지대로서 전해질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비평이라면, 그 칸을 아예 도려내 버리는, 되게 큰 곤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3개 있다. 아까부터 3이라는 숫자의 안정성에 도착적으로 기대는 것 같다(웃음). 하나는 새로운 작가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모델을 답습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문제적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작가성인가, 기존의 위대한 작가성인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두 번째는 스파이, 자객, 닌자 만들기다. 앙드레 바쟁이 시스템의 천재성을 말했듯, 그것을 하이재킹하는 시나리오도 써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비평이 트로이 목마 같은 작전에 가담할 수 있다고 생각도 들고. 세 번째는 그냥 우리끼리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대안적, 유동적 네트워크. 90년대나 00년대랑은 조금 다른 식의 대안적 공간이나 상영 네트워크가 많이 생기고 있고, 대신 그것이 훨씬 분자적이라 덩어리진 계량화 내지 법칙화할 수 있지 않기 때문에 거명되고 호명되고 그런 기호들이 유통되지 않다뿐이지, 대안적 네트워크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명 역시 멋진 답변이다. 2024년 활동은?


연선 이거 꼭 써 달라. 아르코를 떨어져서.


여명 아니, 그런데 이번에 정말 너무 조금 뽑지 않았나?


연선 조금 뽑았, 맞다. 아무튼 화가 났다. 떨어졌기 때문에 자생적 구조를 찾으려고 회의를 계속하고 있고, 아르코에 공모를 썼으니까 큰 주제는 있다. 8호 주제는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다. 비판을 해서 제도로부터 나가 떨어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처럼 되는 게 우리의 미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주제이다. 한국 사진계와 사진 담론계에 대한 비판, 미디어 아트의 스펙터클에 대한 앱스 황재민의 글 등이 실릴 예쩡이다. 더불어서 봄에서 여름까지 연재를 하나 기획하고 있다. 윤아랑 비평가와 아직 밝힐 수 없는 젊은 평론가의 연재를 계획하고 있는 중이어서 기대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