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리와의 대화

유진영

노혜리는 서울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사물과 몸을 연계하고 말을 하는 퍼포먼스를 한다.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정확하게 애매하기를 목표로 작업을 만든다.

진영 우선 인터뷰에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혜리 사전에 공유주신 질문들이 다 재미있었다. 뭔가 개인의 삶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작업과 관련되어서든 나에게 중요한 키워드들인데 한 번도 이걸 직접적으로 생각하고 말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새삼스럽고 반가운 기분이었다. 어떻게 시작하면 될까?


진영 짧게 자기소개로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을 것 같다.


혜리 내가 자기소개를 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개인 웹사이트 내 'about' 페이지 하단에 랜덤하게 바이오가 나오는 버튼이 있다. 지금 눌러서 나온 것을 읽어보겠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가평, 부천, 캘리포니아 산타로사(Santa Rosa, California )에서 자라고 시흥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신촌에서 첫 대학 생활을 시작하였고 20살 때 처음으로 가 본 압구정에서 귀를 뚫었다. 한 잔에 7천 원이던 칵테일을 좋아하던 친구들보다는 2700원짜리 레드락 생맥주를 즐겨 마시던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정말 TMI 넘치는 소개가 나왔다. 뭐라고 해야 될까. 사실인 듯한 어떤 내용을 기반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기 소개,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떤 배경으로 살아왔고 어떤 가치관이나 취향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살아왔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계급이나 인종과 같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이슈와 연계 될 수 있는가를 염두 하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썼다. 어떤 면에서는 이중성, 그러니까 양가성에 대해 작업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데 자기 소개로 그런 부분들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인터뷰의 주제와 조금 더 연계된 자기 소개를 해보자면 저는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이후에는 아마 지금은 다 셀 수도 없을 것 같지만 30번 이상을 이사를 해오면서 살았다. 어릴 때는 경기도에서 살다가 캘리포니아 주 산타로사에서 잠시 살았고 다시 경기도로 돌아와 한국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녔으며, 지금은 뉴욕에서 거주하며 미술 작업을 하고 있는 노혜리라고 설명드릴 수 있겠다.


(이미지1) 노혜리 웹사이트.

진영 30번이라니. 저는 심지어 같은 동네 뿐만이 아니라 그냥 이사 자체를 두 번인가, 세 번 밖에 안 해봤다.


혜리 그야말로 어릴 때 내가 너무 부러워한 경우다.


진영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한테는 이게 굉장히 흔한 삶의 형태인데 또 미술하는 사람들한테는 오히려 나 같은 케이스가 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말 그냥 그 동네 어딘가에서 태어나서 온 가족이 같이 살고 한 동네에서 몇 번 정도의 이사를 하고. 대부분의 동네 또래들과 초중고를 다 같이 나오고. 단 한 번도 서울을, 심지어 서울의 서부권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삶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와서 어떤 종류의 이동하는 삶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럴수록 더욱 궁금해지고. 어떤 부분에서 요즘은 정체성이나 국적같이 나를 규정하는 것들을 무화 하려고 하는 태도들도 강해지고 있는데,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들이 자신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갖고 싶은 무언가가 되지 않나. 이렇게 삶의 형태가 여러 갈래로 나뉜다것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한 곳에만 계속 있었으니까 나의 문화적, 혹은 국가적 정체성 자체를 인지할 필요가 사실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주어진 상태로 살고 있을 뿐. 그래서 누군가와, 사실은 당사자들과 이야기를 너무 나눠보고 싶었는데 또 이게 굉장히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전혀 가벼운 마음으로 묻는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는 삶에 맞닿아 있는 것이자, 생존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니까 뭔가를 물어보기가 쉽지 않더라. 이 말들이 자연스럽게 공유 드렸던 질문이랑도 이어지는 것 같은데, 최근에 한국계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어떤 한국적인 요소들, 근데 그게 사실은 본인과 전혀 관련이 없는, 혹은 자기가 직접 그것을 자신의 문화로 경험해보지 않은 요소들을 작업으로 많이 갖고 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을 계속해서 자신을 구성하는 일종의 정체성으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게 어떤 마음인지가 어렴풋이 이해가 가면서도 의아함이 늘 있었다. 이들과 혜리 님의 케이스는 확실히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래도 두 곳에서 다 학교 생활을 해 보셨기 때문에 활동의 기반이 양쪽 모두에 있기도 하고 두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 더 체화된 게 있을 것 같다. 양쪽의 차이를 느끼는 지, 느낀다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지 아니면 그런 것을 크게 개의치 않고 그냥 작업을 전개하는데 체화 되어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지도 궁금하다.


혜리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민자만 놓고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 내부에 굉장히 여러 가지 카테고리가 있는 것 같다. 쉽게는 유학생처럼 한국에서 온 한국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계 미국인, 그러니까 이민자 부모님이 계셔서 어릴 때 이민을 온 경우도 있고. 그 안에서도 부모님 직업에 따라 다른 갈래가 있는데 부모님이 유학생이었다가 정착한 경우와 그냥 삶의 터전을 옮겨 이민을 온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이제는 이민 2세 뿐만 아니라 3세, 4세까지도 있다. 아무튼 내 눈에도 언급해준 지점들이 많이 보이고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경우에 한국적 정체성을 상징이나 기호로 다루는 작업들이 많이들 눈에 띨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나라에 살면서는 그들에게 그런 것이 요구된다는 측면이 굉장히 강한 것 같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너의 뿌리가 뭐야?’하는 질문들을 받게 되는 거다. 그게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볼 때는 계속해서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되고,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스스로 그걸 찾아 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미국 미술계 내지는 미술 시장은 이른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관련된 작업들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것이 이미 하나의 정착된, 작업을 읽을 수 있는 렌즈가 되었기 때문에 이 렌즈를 갖고 ‘너는 한국인, 내지는 너의 부모님은 한국에서 온 이민자인데 너의 작업에서는 그런 면을 다루는 내용이 있니’ 하고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눈에 띄게 활동을 빠르게,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 분명 그런 경우들이 있는 것 같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전략적으로 선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경우들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각 작가마다 그런 작업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실제로 그런 영화들도 최근에 몇 편이 있었지 않나. ‘미나리’(2021)나 ‘라이스보이 슬립스’(2023)처럼 어린 시절에 겪은 기억과 본인이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된 어떤 것들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진영 혜리님 역시도 이런 요구들을 직접적으로 받은 적이 있나. 혹은 어느순간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의식하게 되었다거나.


혜리 이런 지점들을 개인적으로는 대학원을 다닐 때 많이 느꼈었다. 그게 직접적으로 언어화되어서 나오는 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대학원을 다니는 2년 동안 이상하게 계속 한국의 역사나 이런 걸 들여다 보게 되는 거다. 사실 대학원 시절에 만든 작업들은 웬만해서는 포트폴리오에 넣지 않고 있는데, 이 시기의 작업들이 원래 내 작업의 결과 다른 느낌이 들어 그렇다. 학교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보면 미국 미술계의 시스템이 반영되는 측면이 당연히 있다. 기획자든, 작가든,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작업을 읽는 렌즈가 다채롭지 않다. 특히 외형적으로 이민자의 외형을 갖고 있으면 정말로 딱 그 렌즈만을 장착하고 ‘근데 나는 너의 작업이 이해가 안 되는데.’ 이런다거나. 아니면 어떤 부분들을 나는 전혀 한국적으로 생각해서 만든 게 아닌데 ‘이런 부분은 역시 네가 아시안이니까 이렇게 한 거 아니냐,’ ‘너는 왜 작업이 계속 바닥에 있냐’ 등등 모든 것을 문화적 코드로 읽어내려는 게 너무 지속적으로 보이니까 자연스럽게 스스로도 ‘이 길이 내 길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측면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그걸 더 적극적으로 탐구했던 작업들도 있었던 것 같고. 이제는 대학원을 졸업한 지 2년 반이 조금 넘었는데 지금 미술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친구들의 졸업 전시를 보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런 게 보일 때가 있다. 꼭 한국인이 아니어도 아시안이나 다른 소수자의 바운더리에 속하는 친구들이 원래 작업은 그런 맥락에 있지 않았는데 대학원을 가더니 저런 얘기를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됐다 거나 하는 경향을 보면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그런 태도를 좀 더 요구하는 측면이 분명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근데 좀 그 무렵에 대학원 다닐 때 좀 흥미롭게 봤던 것 중에 하나가 박이소 작가가 미국 생활하던 시기에 미국 미술에 대해 쓴 글을 봤었다. 꽤 수십 년 전인데 지금과 거의 같은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계시더라. 벤다이어그램으로 주류 미술계, 아시아 소수 민족, 제3세계 이런 식으로 해서 분류해 놓은 걸 보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똑같은 거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무튼 여기서는 정체성을 다루지 않은 소수 민족의 작가 중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나 작업들을 진짜 거의 보기 힘든 것 같다.


진영 그럼 대학원을 졸업하시고서는 그래도 그때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됐던 부분들이 다시 많이 변했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때의 경험들이 영향을 많이 주고 있나?


혜리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그 영향이 완전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근데 기본적으로 김치가 됐든, 막걸리가 됐든, 조선이 됐든 소위 말해 어떤 코드, 기호나 상징으로 대표되는 요소들을 활용해서 작업을 하는 거에는 원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만드는 사물에는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는 이 세상의 것들이 들어가 있지는 않으니까. 대학원 시절에도 그런 면에서는 영향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어떤 역사를 참조한다거나, 실제 역사와 평행되는 이야기를 진행해본다거나 그런 시도들은 있었지만.


진영 그게 참 유럽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더라. 아시안이든 다른 민족이든 간에 그걸 보는 어떤 기준과 잣대가 너무 한정되어 있는 거다. 그래서 그 기준에서 벗어난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읽어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작가분이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었는데, 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다양성(diversity) 문제와 함께 지배적인 질서나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나름대로 대대적인 개혁을 실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미술관 안으로, 시스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민족적) 소수자의 예술이 정말 원시 미술에 가까운 한정된 작업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곳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에게는 선택지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또 들었다. 물론 유럽 역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포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 유럽의 미술 시스템이나 시장에는 여전히 미국보다 더 견고한 울타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혜리 약간 우스갯소리로 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랑 하던 얘기는 뭔가 설명이 명확하게 바로 안 되고 소위 말해서 아무거나 할 수 있는 권리는 백인들에게만 허용된다는 얘기들도 했었다. 그룹 크리틱을 할 때 정확히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어떻게 해서든 더 섬세한 레벨에서 해석을 하려 하고, 읽어보려고 하는 태도를 보이는 작업들은 결국에는 백인 남성, 이른바 어떤 정체성의 문제에도 해당되지 않는 헤테로 백인 남성들이더라. 미술사에서 공고하게 역사화 된 작가들이 대부분 다 그런 작가들이었으니까.


진영 그 외의 것을 뭔가 수고롭게 들여다 봐줄 의향이 별로 없을 것 같다.


혜리 또 어떻게 생각하면 소위 말해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고등 교육을 받은, 그러니까 나나 진영 님,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 안에서는 일종의 주류, 각자의 세계에서의 백인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왜냐하면 한국에도 이민자가 없는 게 아닌데 우리의 위치에서는 볼 필요가 없거나, 안 보이게 되는 이유 같은 것들이 다 사회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거니까.


진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게 또 그 다음 질문이랑도 잘 연결되는 것 같다. 설명해준 것처럼 시스템의 차이를 학교 같은 데서 이미 가장 극명하게 체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데, 혜리님은 어쨌든 양쪽에서 다 학교를 다녔고,⟨나성(LA-sung)⟩(2016)부터 ⟨폴즈(Falls)⟩(2022), 가장 최근의 ⟨모은점(Lunares)⟩(2023)까지, 크게는 이민이나 개인의 삶에서 파생된 경험과 감정에 관한 작업들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지 않나. 미국에서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런 정체성이나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 봐주는 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사실 한국에서는 역으로 그 지점들에 대한 관심이나 깊은 이해가 많이 부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양 쪽에서 받게 되는 피드백이나 시선에서 차이를 많이 느끼는지 궁금하다.


혜리 비교하기에는 좀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엄밀히 따지면 같은 작업을 한국에서도 전시를 하고, 미국에서도 전시를 한 케이스가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에.


진영 같은 태도를 갖고 있는 작품들, 퍼포먼스든 오브제든 간에 이것들을 보여주었을 때 한국에서는 그냥 그 작업 자체로 읽히게 되는 일종의 순기능이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얘기했듯이 한국 사회에서 다수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은 소수자 문제에 둔감하지 않냐. 자기들만의 공고한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바깥의 삶에 당연히 너무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레이어를 읽어내는 눈 자체가 없지 않겠나. 그런 차이를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하다.


혜리 집중해서 보는 포인트 같은 게 달라질 수는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플라워 햇(플로어)(flour hat (floor))⟩(2021)을 한국과 미국에서 전시했을 때의 경험들이 생각난다. 미국에서는 전반적으로 영상과 설치의 느슨한 연결 고리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문화적 차이도 있는 것 같긴 하다. 한국어로 지원서를 쓸 때와 영어로 미국 어딘가에 지원서를 쓸 때, 같은 내용을 1대1로 번역해서는 전혀 소통이 안 된다고 많이 느낀다. 이게 사람들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어서 인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문장에서 목적어나 주어가 생략되어도 중의적 의미 같은 것들이 대부분 허용이 되지 않나. 그리고 그런 것들이 시적 허용이라는 차원에서 더 적극적으로 포용되기도 하고. 그런데 미국에서 선호하는 글쓰기는 더 직설적이다. 그래서 지원서나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도 한국인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너무 노골적이다, 작가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언어로 작업을 설명해야 한다니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작성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무튼 이 〈flour..〉 작업을 볼 때에 미국은 보다 정확한 답을 요구해 관객들이 혼란스럽게 느낀 것 같고, 한국에서는 그것과는 약간 다른 반응들을 감지했다. 그 작업에는 밀가루와 모자와 플로어 퍼포먼스라는 세 가지 직업과 가족 3대의 서사가 담겨 있는데, 미국에서는 밀가루가 왜 1950년대에 한국에 들어갔는지 등의 역사적 사실이 언급되었을 때 더 흥미를 갖고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내 작업을 완전히 처음 접한다기보다는 이전부터 내 작업을 봐왔던 분들이 이 작품을 보았다. 이 분들은 오히려 영상과 설치 작업이 어떻게 퍼포먼스 할 때와 유사하게 전환되는지 이런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흥미롭게 봐주시기도 했다.


(이미지2) 노혜리, ⟨플라워 햇(플로어)(flour hat (floor))⟩, 설치, 548x548cm(18x18').

(이미지3) 노혜리, ⟨flour hat (floor)⟩(2021), 싱글 채널 비디오, 7분 22초.

혜리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 수있을 것 같다. 지금 뉴욕에 지낸 지 2년이 되어 갈랑말랑 하는데, 아직은 이곳을 잘 안다고 말하기엔 어렵지만 그래도 갈수록 뉴욕과 한국의 차이를 더 많이 느끼기는 한다. 뉴욕의 첫 인상은 뭐랄까, 하나로 딱 상품화될 수 있을 법한 상태로 정리되고 마감된 조각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게 왜일까 생각해 보면 여러 사회적, 물리적 조건들을 연결해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뉴욕 시티라는 작은 땅에 굉장히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또, 시장이 굉장히 발달된 도시이자 나라이기 때문에 시장의 논리와 맞물려 있는 것들이 주로 살아남게 되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악명처럼 월세가 굉장히 비싸기 때문에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같이 큰 기관의 뮤지엄이나 블루칩 갤러리가 아니고는 갤러리의 사이즈 자체가 아주 작아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지 몇 년 안 된 신진작가들이 활동하는 갤러리들,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든 상업 갤러리든 간에 그런 곳들의 경제적, 물리적 제약이 크고. 같은 맥락에서 작가들 작업실도 가족의 도움이나 어떤 기반이 있지 않는 한 사실은 제대로 갖춰 놓은 상태로 꾸려 나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 역시도 집 한 부분을 작업실로 만들어 쓰고 있다.


진영 많은 대도시가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서울도 말해주신 것들을 젊은 작가들이 대부분 겪고 있다. 뉴욕처럼 비싸진 않지만, 어쨌든 서울의 월세도 너무 비싸고 여기에 또 특수하게는 한국의 전세 제도 안에서 그 2년 주기에 따라 공간의 생존 여부가 계속해서 갈린다. 그래서 특정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비영리 공간, 과거에는 신생 공간들이 막 생겼다가도 2년이 지나고, 또 그 다음 2년까지는 어떻게 버텨도 4년째 되는 해에는 대부분 고비를 겪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여기에 작품을 어떻게 올려다 놨지 싶은 컨디션의 전시 공간들이 계속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고. 그에 맞춰서 작품들이 사이즈가 되게 작아지거나, 조립형으로 가벼워지는 경향도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젊은 작가들의 경우에는 작업할 공간 뿐 아니라 그걸 보관할 공간도 없으니 작아지거나, 폐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 같고. 아무튼 도시에서 산다는 게,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조건이 우리의 모든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 같아서 가끔 씁쓸해 진다.


혜리 듣다 보니 미국, 그러니까 뉴욕이랑 서울의 공공기금 시스템의 차이를 좀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진영 안 그래도 그게 진짜 궁금했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분들은 그래도 한국의 기금 시스템이 잘 돼 있다고들 종종 말씀해 주시는데, 나 역시도 지원의 규모 같은 게 적다고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지만, 근본적인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하게 된다. 이를테면 지원의 주기가 너무 한 시기에 몰려있다는 게 가장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특정 시기에 모두 경주마처럼 지원서를 쓰고 연초에 발표가 나고, 그 뒤 6~7개월 사이에 발표를 하고 사업을 마무리하면, 다시 또 기금철이 돌아오고. 크고 작은 단위의 재단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강력한 기금의 주체가 서울문화재단 아니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렇게 두 개가 다이다 보니까 한국(내지는 서울)의 비영리 미술씬의 이클이 그 시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게 좀 슬픈 거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미국은 사립의 펀딩 시스템이 좀 더 많이 있을 것 같고, 그만큼 주기가 약간은 산발적으로 다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직접 그걸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늘 너무 궁금했다.


혜리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굉장히 많은 돈이 미술에 투입되고 있긴 한 것 같다. 근데 오히려 개개인의 작가보다는 기관, 사립 재단이나 미술관들이 그런 기금 시스템에 많이 기대고 있다. 한국은 어쨌든 작가가 직접 본인의 프로젝트를 지원할 수 있는 기금의 파이가 있다고 한다면, 미국에서는 정말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작가가 아니고는, 혹은 커뮤니티를 위한 공공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닌 이상은 개별 프로젝트로 공공 기금을 따는 것이 꽤 어렵다고 들었다. 그 외에 사립 재단의 펀드들도 보통 직접적으로 작가에게 간다기 보다는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에 기부를 하면, 그걸 공간 차원에서 분배하는 시스템인 것 같다. 그래서 사실은 한국은 근래에는 이제 막 학부를 졸업하고도 전시를 꾸릴 만큼의 기금 지원을 받는 게 가능해 졌는데, 뉴욕에서는 비슷한 경력의 작가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의 규모가 500불, 1000불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진영 뉴욕의 물가를 생각하면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혜리 그리고 또 인건비가 전반적으로 한국에 비해 훨씬 비싸니까 작업 과정에서 외부에 제작을 맡기는 것에 제약이 많아 작업의 규모나 범위라는 게 다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진영 정말 현실적인 문제들인 것 같다. 아무튼 한국의 기금 시스템에 대해 문제 의식은 갖고 있는데 사실 이것 없이 굴러가는 방법은 불가능한 것 같고, 그랬을 때 이게 어떤 식으로 운영되어야 건강한 사이클을 만들 수 있는지가 고민이 많이 되더라.


혜리 전반적으로 다변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1년 주기의 공공 시스템이 있는 와중에 작은 규모나 성격의 기금들도 생겨서 선택지가 여러 개가 될 때 생태계가 풍부해질 것 같다.


진영 동감한다. 그래서 오히려 코로나 시기에 급 생겼던 일회성의 기금들이 재미있는 역할들을 했던 것 같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주로 온라인 미디어에 한정될 수밖에 없긴 했지만, 역으로 온라인 작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 기회에 또 시도해 볼 수도 있었고. 근데 그런 게 이젠 다 사라지고 다시 딱 정례화된 기금만 남았으니 이게 참. 갑자기 기금 얘기를 너무 진지하게 하게 된 것 같다. 다시 질문을 이어가 보겠다. 퍼포먼스 작업을 주로 진행 하고 있지 않나. 앞의 대화들을 나누며 새삼스레 들었던 생각은 다른 것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등장하여 자신이 경험하고 감각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배출하는 태도가 멋있다는 것이었다.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신체가 곧 이동을 발생시키고, 받아들이는 주체가 될 텐데 그 주제나 대상이 얼마나 거대하든지 간에 인간 신체의 속도와 범주 안에서 오롯이 상황을 맞닥뜨리고, 만나고, 이동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신체를 벗어나는 범주의 어떤 이동이나 속도 같은 것들을 더 넓게 끌어안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으신가?


혜리 아직은 여기에 할 얘기가 많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게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내가 작업에서 관심 있게 보는 부분 중에 하나는 무엇인가가 다른 무엇인가와 만났을 때 그 조우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어떤 재료와 어떤 형태를 가진 사물이 다른 형태와 질감과 재료로 이루어진 사물을 만났을 때에 일으키는 감각이 있는지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처음으로 어떤 낯선 장소를 맞닥뜨렸을 때, 아니면 이 사람이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가, 그런 순간들을 상상하며 퍼포먼스를 구성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야기가 너무 많고, 평생을 거쳐서 이런저런 부분들을 보아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첫 번째 대학, 그러니까 나의 첫 전공이 사회과학 분야였고 중고등학교 때부터 깊이 관심을 갖고 있던 부분 중 하나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이 사회 속에서 어떠한 분류가 일어나고, 그런 것들이 개별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런 것들이었는데 그 관심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조금 더 확장해서 보자면 사물과 몸이 만나는 순간들, 내지는 동물이 감각하는 사물과 인간이 감각하는 사물의 공통점과 차이점 같은 것들로도 연결되는 것 같다. 사루비아에서의 전시가(⟪진희(Jinhee)⟫, 2022,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그런 예였다. 근데 인간 신체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에는 어떤 게 있을까?


(이미지4) 노혜리, ⟨마주(Maju)⟩(2023), 퍼포먼스, 노혜리 개인전 ⟪진희 Jinhee⟫(2022-2023,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진영 글쎄. 퍼포먼스가 아닌, 이를테면 어떤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혹은 휴먼 스케일을 넘어서는 뭔가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가능성들이 생각난다.

혜리 물론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내가 퍼포먼스를 시작하게 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는데 원래 학부 시절에는 그림도 많이 그렸었다. 좋아하기도 했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왜 그림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러니까 회화의 역사가 너무 깊고, 회화를 감상하는 법은 여전히 잘 모르지만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데 이게 나의 일은 아닌 것 같은 거다. 그럼 나는 하고 싶은 게 대체 뭔가를 생각했을 때 실재하는 것과 그걸 내가 직접 감각하는 것, 그리고 이걸 보는 사람들 역시 무엇인가를 감각했으면 좋겠다 라는 열망이 컸었던 것 같다. 그게 이제 퍼포먼스라는 매체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지 않았을까 싶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이것만 할래’ 이런 건 아니지만, 아직은 여기서 할 얘기가 조금 더 있다 이런 정도로 정리하고 싶다.


진영 혜리님의 작업과 태도가 서로 잘 일치한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법을 전공하지 않았나. 그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방금 이야기했듯이 사회의 큰 사건이나 역사 같은 것들이 인간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텐데, 이걸 어쨌든 지금은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게 법이나 인문학적인 무엇이 아닌, 예술의 형태로 표현되어야 하는 이유, 너무 거창하다면 그냥 작업을 한다는 게 혜리님 개인에게 어떤 의미와 이유를 갖는지가 궁금하다.


혜리 결국은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더 중요하고, 더 좋고 이런 측면이라기 보다는 다 필요하고, 다 해야 하는 일인데 그 중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법을 전공하고 법조인의 길로 가는 선택에서 미술로의 전환은 내 개인적으로도 큰 결정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때 그게 미술, 예술의 언어를 이용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법대를 가게 된 계기는 중학교 3학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경기도 시흥에서 머물게 됐었다. 거기가 안산이랑 굉장히 가까운데, 같이 교회를 다니던 언니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안산으로 이주 노동자 센터에 봉사를 같이 가자고 제안을 받았었다. 가서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던 것은 법이라는 게 이렇게나 엄밀하게 써 있는데 이 정보를 몰라서, 혹은 읽을 줄을 몰라서 본인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한 3년을 매주 봉사활동을 갔던 것 같은데, 센터에 있으면서 상담을 오는 이주 노동자나 산업 재해로 상해를 입고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분들의 통역을 했다. 안산의 풍경 자체가 그랬다. 소위 말해서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이주 노동 이민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한국어가 서툴거나 법을 몰라서 부당한 일을 당하며 살고 있었다. 미국에 살 때는 아버지도 영어를 잘 못하셔서 내가 아버지가 일하실 때도 통역을 하곤 했다. 아무튼 이런 경험들을 겪으면서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정보에 접근하지 못해서 겪는 일들에 대한 충격과 그런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라는 게 법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좀 더 실질적으로 삶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이게 어떤 면에서는 어떤 종류의 서사를 담은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많이 벗어나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술이 아주 직접적이거나 적극적인 도구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진영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다 자기만의 언어가 있는 거니까. 그래도 어떤 큰 줄기 안에서 그때 그때의 방법들이 바뀌는 거지 그 줄기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간에 어쨌든 작가님의 삶의 궤적 안에서 이런 측면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할 수밖에 없게 하는 순간들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나의 삶은 그냥 사는 것에 가까웠다. 뭔가 스스로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찾아서라도 했어야 하는 거지만.


혜리 이번에 한국에서 사온 『IMF 키즈의 생애』(2017)*라는 인터뷰 집이 있다. 이게 꽤 재미있다. 1980년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7명인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인터뷰한 글이다. 저자가 ‘막 IMF가 이래서 어린 시절 IMF를 겪은 사람들은 이렇더라’하는 결론을 내려는 태도는 절대 아니고, 각자가 IMF를 경험한 방식이나 기억하는 방식은 다 다르더라도 서로가, 우리가 감각하는 유사한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태도와 관점으로 인터뷰이를 선정하고 진행을 한 결과물이었다. 아직 반 정도밖에 안 읽은 상태이지만 한 명 한 명의 인터뷰마다 나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더라. 신기하기도 하고, 어딘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서로가 다르면서도 유사하게 공유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이 분은 글로, 누군가는 더 사회과학적인 연구 논문이나 액티비즘으로 옮기고 전달을 하는데 나는 그걸 미술로 해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아직까지 진지하게 그런 마음이 든 적은 없지만, 어쨌든 미술에 대해 회의가 들거나 이걸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들 때면 과거에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들이 분명하게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오만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는 변호사가 될 수도 있었을 거고, 아니면 검사가 됐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것도 아니면 사회운동가가 되거나 정치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런 선택들을 했을 때 ‘내가 즐겁게 지속할 수 있었을까’를 상상해보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미술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이 있지만 나는 이것을 일종의 짝사랑처럼 계속 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내가 미술을 잘하고 있는지, 대체 잘하는 게 뭔지, 계속할 수 있는지 이런 의문들은 당연히 사람이니까 생기곤 하지만 나는 이게 너무 재미있고, 잘 하고 싶고, 하다 보면 정말 한두 명에게라도 뭔가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냥 그거면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진영 내가 좋아하는 도구, 나의 언어를 찾았다는 것은 정말로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기획자도 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창작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각 언어가 정말 특별하다고 느낀다.


혜리 감사하다(웃음). 뭔가 중심과 주변에 대한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의 삶에서 느낀 거기도 하지만, 또 아까 언급한 책에 나오는 어떤 인터뷰의 가족의 삶에도 너무 똑같이 등장하는 상황인데 서울에서 태어나서 계속 밀려나는 거다. 특별히 무언가를 엄청나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조금 조금씩 밀려서 서울 중심에서 인천이나 수도권 어디, 거기서 조금 더 먼 경기도 외곽, 그 다음은 전라도, 이런 식으로 이동하는 거다. 서울과 경기도에 대한 생각을 최근 몇 년간 많이 하고 있다.


진영 이 얘기에는 나도 진짜 공감한다. 사실 우리 집도 IMF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던 집이었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당시에 아버지가 잘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으로 나오셨고, 그때 받은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또 당연히 그 사업이 망하고 그런 시기를 겪었다. 나는 한 동네에만 있긴 했지만 같은 동네 안에서도 사실은 집의 상태라든지, 위치라든지 이런 것들이 계속 바뀌었다.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정통으로 겪은 거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밀려나는 삶이 어떤 건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나는 우리 동네를 정말 좋아하지만, 어쨌든 서울의 중심부에서 살짝 벗어난 오래된 동네이고, 이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크게 움직이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이 안에서 평생을 살면서 해 왔었다. 한국에서 부자가 되려면 집도 주기적으로 옮겨 다니면서 부동산 차익도 얻고 해야 하지 않나. 근데 이 동네는 정말 다들 막 3-40년씩 산 사람들 밖에 없는 거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 내일을 사는 것에 크게 의문이 없는 상태. 나 역시도 그 동네에 동화되어 살면서도 너무 답답하다는 생각들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삶의 형태가 뭘까 이런 것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고.


혜리 보통 이동은 그게 어떤 열망이나 야망에 의한 거든 아니면 전쟁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진영 한국은 현대사가 너무 짧으니까, 시기마다 단계 단계를 점프하는 개인의 역사가 많지 않나. 그랬을 때 이 동네는 그 현대사의 역동성을 약간은 빗겨 나가 있는 것 같다. 다른 방식으로 많은 현대사를 수용하고는 있지만. 그래서 아무튼 종종 우리 부모님이 이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에서 처음 터를 잡았으면 또 다른 삶의 형태들을 꿈꿨을까 하는 상상들을 하곤 한다. 두 분의 성향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이 동네의 삶의 형태에 너무 동화되어버린 것은 아닐지가 궁금한 거다. 나는 어쨌든 내가 선택한 게 아닐지라도 두 사람이 만들어준 형태를 많은 부분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 매우 TMI 넘치는 이상한 얘기였지만.


혜리 서울에도 그런 동네가 있다는 게 재미있다. 우스개 소리로 정말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고 하는, 누가 누구랑 지나가면 동네에 소문 다 나는 그런 마을처럼.


진영 그렇다. 우리 동네도 막 계속 같은 동네 살던 초등학교 동창들끼리 몇십 년 후에 갑자기 결혼하고 그런다.


혜리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브루클린의 동네도 좀 그런 편이다. 우리야 새로 유입된 인구이지만,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막 여기서 태어나서 초중고를 다 나오고 20대 때 잠깐 맨해튼이나 어디 직장 많은 곳에 잠깐 기웃거리고 갔다가 다시 결국에는 돌아와서 지낸다고 한다.


진영 오, 브루클린에도 그런 동네가 있다니.


혜리 여기는 미디어에 나오는 힙한 동네는 아니고 맨해튼까지 거리가 좀 있는 지역이라 더 그럴 수도 있다. 아무튼.


진영 다양한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는 것 같다. 마침 선택에 의한 이동과 강제성에 의한 이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내 생각에 이동은 자의적인 것인지, 타의적인 것인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와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너무 다를 것 같다. 혜리님의 이동은 사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섞여 있을 것 같다. 인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것들도 있었을 것 같고. 이동에는 누군가와의 이별, 새로운 만남, 변화까지 정말 많은 부수적인 것들이 동반되지 않나. 이런 것들에 정말 이골이 났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동에 수반되는 다양한 변화들을 어떤 식으로 감당하거나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혜리 흠, 그러게. 근데 무슨 역마살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과 나 모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동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러니까 처음에 서울에서 태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다시 서울로, 그리고는 미국으로 경제적인 이유나 가족 간의 이유들 때문에 이동을 계속 했다. 그 과정들에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선택도, 나의 선택도 존재한다. 근데 내가 어렸을 때는 어느 해에는 막 다리가 무너지고, 어느 해에는 백화점이 무너지고 그런 일들이 하도 일어나서, 원래 세상에는 이런 천지개벽 할 일들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거구나 하는 감각이 있었다. 이동도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이사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냥 원래 삶의 방식이 그런 거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히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어려움이 늘 있었겠지만 그냥 원래 이런 거라고 받아들였던 거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런데 성인이 된 이후의 이동은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자의적인 게 많았다. 첫 대학을 다닐 때 교환 학생으로 프랑스에서 1년 정도 살아 본다 거나, 대학원을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가는 걸 선택한다든가. 미국에 와서는 지금 이 집에서 산지 이제 거의 2년쯤 되어가는데, 여기가 대학 졸업 이후에 가장 오래 산 집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에는 기숙사에서도 살다가, 근처 다른 집으로 옮기기도 하고, 집 계약 기간이 비는 동안에는 LA에서도 한두 달 살고, 이런 식으로 계속 짐을 싸고, 보관하고, 이동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미술을 시작한 이후에는 이런 삶의 경험들을 차라리 더 적극적으로 포용하려고 한다. ‘언젠가 다 작업에 들어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진영 어떤 식으로든 배출할 수 있는 창구를 찾게 되어서 그런 경험들을 더 즐겁게, 혹은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혜리 사실 이전에는 이런 지점들을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2021년 무렵에 지금의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왜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문득 ‘너는 오히려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계속 미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걸 주제의 연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더 넓게 보면 삶에서 일어난 일을 관찰하고, 그걸 어떻게든 소화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작업이 되는 그런 일종의 순환의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 얘기를 처음 듣고는 그런가? 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었다.


진영 그전에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됐던 일이었는데.


혜리 맞다. 그게 요즘에는 조금 더 의식의 차원으로 살짝 넘어간 것 같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이게 또 막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라! 본인의 필드가 아닌 것을 경험해봐라! 이런 관점은 아닌 것 같다.


진영 일부러 막 어떤 고난을 자처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웃음).


혜리 그냥 내가 그걸 뭔가를 겪었을 때 이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 근데 뭐 작가의 경우에는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삶의 경험을 작업에 녹여내는 것 같다.


진영 그렇겠다. 작가님의 경우는 그런 게 직접적인 주제나 사물로 드러나게 되는 것 같고, 좀 더 형식에 집중한 작업을 하는 분들은 뭔가 작업하는 태도에서 그게 드러나기도 하는 것 같고 그렇다.


혜리 진짜 내가 모든 걸 인식은 못해도 다 삶에 묻어나게 되는 것 같다.


진영 슬슬 인터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과거와 현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니 미래에 대해 묻고 싶다. 작업에서는 물론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삶에서든 어떤 부분에서든 궁극적으로 정착하고 싶은 곳이나, 원하는 형태의 삶 같은 것들이 있는가?


혜리 정착에 대해서는 늘 많이 생각한다. 뉴욕에 온 이후에는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이사를 할 계획이 없는데도 맨날 부동산 앱을 켜고 이 동네 월세는 어떤지, 저 동네 집값은 어떤지, 집을 언젠가는 과연 살수 있는지 이런 걸 취미생활처럼 들여다보곤 한다. 주변에 나보다 조금 더 삶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가능한 한 빨리, 넉넉한 작업실을 확보하는 것이 길게 봤을 때 훨씬 이득이라는 거다. 당연히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확보라는 것은 구매일 거란 말이다.


진영 그러니까.


혜리 월세든 전세든 이게 계속 오르는데, 수입이 늘어나지 않는 한 이걸 계속해서 감당할 수 없지 않나. 그러니까 나도 계속해서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부동산을 보면서 도시에서 얼마만큼 멀리 떨어져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구매가 가능한지를 가늠해보곤 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 실질적인 경제적인 가능성을 떠나서 이런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다. 우리가 둘 다 작가니까 우리가 실질적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그러니까 돈의 측면을 떠나서 그냥 정말 원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삶의 방식일까? 하는 거다. 뉴욕에, 맨해튼일 필요는 당연히 없고. 아마 퀸스든 브루클린이든 아무튼 뉴욕에 어느 정도 규모의 각자의 작업실이 확보되는 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도 방문할 때마다 머물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으면 좋겠고. 그리고는 동북부에, 뉴욕에서 한 2~3시간 차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에 별장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 정도…... 물론 말도 안 된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


진영 아니, 전에 작가 세 분을 모시고 어떤 전시와 연계된 토크를 했었는데, 질문 중 하나가 ‘나의 작업을 위한 궁극의 공간이 어떤 형태를 갖고 있었으면 좋겠냐’는 거였다. 막 질문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낭만적인 생각으로 천고는 어느 정도 되면 좋겠고, 빛이 오후 3시에는 아름답게 들어오면 좋겠고 이런 답변들을 기대했었는데 한 분은 ‘그냥 비가 안 새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답을 주시고, 한 분은 완전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재단 설립이나 작품 판매에 관해 이야기해 주시는 거다. 재단은 어떤 식으로 운영되면 좋겠고, 본인 작품을 많이 갖고 있는 컬렉터에게 작품 보존과 전시를 위해 어떤 것을 전달해 놓을지 이런 걸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계셨다. 이게 분명 우리가 바라던 방향의 대답은 아니었지만 또 너무 생각지도 못하게 현실적이고도, 필요한 대답들이어서 너무 재미있었다.


혜리 그러게. 나도 진짜 작업을 죽을 때까지 많이 만들고 싶다는 게 유일한 꿈이다. 그러면서 피카소처럼 작업이 어디에나 소장이 되어 있는 다작하는 작가가 되겠다 그런 상상들을 했는데, 구글링을 해봤더니 피카소가 기네스북에 올랐더라.


진영 다작한 걸로? 작품 수로?


혜리 회화는 막 만 몇 점 되고, 판화도 몇 만 점 되고 그렇더라. 아무튼 그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만드는 건 좋은데, 그걸 만들어서 폐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근데 그게 말해주신 것처럼 컬렉터가 딱 있거나, 기관이 다 소장해 주지 않는 이상 결국에는 작가가 보관해야 하는데 작품의 보관에는 또 굉장히 많은 조건들이 따라붙는다. 비도 당연히 안 새야 하고, 온습도 컨트롤도 되어야 하고, 당연히 어느정도 넓어야 하고. 그러니까 결국에는 계속해서 공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최근에 창고 이사를 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진영 사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지만 당장에 감당할 수 있는 시드머니라는 게 없으니까.


혜리 뉴욕에 저드 파운데이션(Judd Foundation)이라는 곳이 있다. 도날드 저드가 살던 곳을 개조해 예약제로 운영하는 곳인데 거길 가보면 작가가 본인의 작업이 어떻게 보여지고 어떻게 유산으로 남는가에 대해 살아있는 동안에 굉장히 많이 생각한 사람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생활과 작품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잘 보이고.


진영 그런 상상은 말 그대로 너무 재밌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필요한 것 같다. 뭔가 작업의 생명은 대부분 그걸 만든 이의 생명보다 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 이후를 어떤 식으로든 상상해 놓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근데 특히 아직 한국 작가들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단계나 사례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으니까, 이걸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는 일이 어색한 것 같다.


혜리 근데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게 좀 오만한 것 같아서, ‘내가 감히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라는 마음이 든다.


진영 그러니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생각까지도 굳이 일부러 안 하게 되는 건데, 그냥 좀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또 거기에 맞춰서 삶의 형태나 작업의 형태도 따라가는 것 같아서 가끔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이야기가 약간 샛길로 빠진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엔 다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 정말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앞두고 계신 프로젝트나 계획, 아니면 그냥 뭐든 홍보하고 싶은 게 있다면 홍보의 시간 드리겠다.


혜리 상반기에는 7월에 오픈을 앞둔 뉴욕에서의 개인전 준비를 집중해서 할 것 같고, 그 외에는 크고 작은 그룹전에 참여하게 될 것 같다. 올해는 한국에서의 전시는 아직 예정된 게 없고, 주로 뉴욕에서 활동을 하려 한다. 아, 그리고 사루비아에서 같이 퍼포먼스를 진행했던 루카스 야스나가(Lucas Yasunaga)라는 친구랑 사운드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계속 이어가 보려고 한다. 이상이다.


진영 정말 감사하다. 긴 시간 진심으로 수고 많으셨다.


혜리 즐거운 대화였다.


* 안은별, 『IMF 키즈의 생애』(코난북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