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름 손님

abs는 2021년 여름의 끝을 공포와 무서운 이야기, (도시와 인터넷) 괴담, 납량으로 붙잡는다. 생각보다 일찍 시원해져 다소 당황스럽긴 하다. 납량 특집은 매해 여름이 돌아오면 TV, 영화, 라디오 곳곳에서 떠들썩하게 준비되던 여름철의 단골손님이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것은 대체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와 관련된 것이었다. 눈에서 초록 레이저를 쏘는 M, 창백한 얼굴에 귀까지 찢어진 검은 입을 한 저승사자, 팔을 쭉 뻗고 콩콩 뛰어다니는 강시 따위의 것들은 공포라는 우리의 원시적인 감각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이에서 공포는 어떻게 혹은 무엇으로 다루어지고 있는가? 이제는 공포 영화나 괴담, 귀신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는 자조적인 어조, 공들여 제작하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 혹은 포스트-진실 상황과 교차하여 진지하게 읽어 버리기 등, 어떤 이유든 간에 장재현의 〈검은 사제들〉(2015) 이후로 <심야괴담회>(MBC)까지 때 아닌 오컬트, 공포 장르 붐이 다시 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abs도 여기에 빠질 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2호 「마지막 여름 손님」을 내어놓는다. 소위 ‘납량 특집’이라는 말과 조금이라도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현상과 감각들을 다루는데, 공포나 두려움의 본위를 고민하는 일에서부터 미디어 환경을 맞대어 보는 일까지, 범위를 넓게 두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시작하는 글로는 이지우의 답사기가 준비되어있다. 이지우는 서울랜드 방문에서 느낀 기묘한 감정을 ‘이상함’, 즉 키놉시아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하며 황량한 공포의 오라를 풍기는 시공간의 다양한 사례들을 좇는다. 유진영과 황재민은 의심과 믿음 사이를 오가는 괴담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진영은 TV와 유튜브의 말하고 보여주는 방식을 비교하며 도시괴담의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황재민은 인터넷 시대의 괴담, 크리피파스타를 살핀다.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가 만들어내는 현실은 새로운 괴담을 위한 새로운 장소가 된다. 그러나 ‘앨런’과 ‘데이지’라는 변종이 이 내러티브의 작동에 브레이크를 가하고 있다. 김얼터는 공포 영화를 선택했다.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와 나홍진의 ⟨곡성⟩을 교차하며 어떤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안팎을 더듬어본다. 불가해한 세계와 그것의 무심함을 바라보는 것은 쓸쓸하지만 익숙한 일이다. 잠시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다면 김호원의 ‘납량’ 도전기를 클릭하면 된다. 문자 그대로의 ‘납량’, 즉 시원함을 느끼기 위해 그는 현대인의 신체 중 가장 오랜 시간 더위에 갇혀있는 부위인 엉덩이에게 자유를 찾아주고자 한다. 김호원의 글 안에서 엉덩이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공간 ASMR을 통해 약간의 틈을 얻는다.


(lock with ink pen)과 🥠는 abs의 고정 코너로, 2호에는 김무영과 박세영을 초대했다. 전시 ⟪도끼와 모조머리들Axe and dummy heads⟫(2020)과 ⟪I told you I was no good. Bitch, are you sure to make me cry?⟫(2021)에 참여한 김무영은 책 페이지의 경계와 화면을 제어하는 카메라의 조작에서 공포와 죄의식을 발견한다. 그는 편집을 통해 하나의 몸을 두 개로, 두 개의 몸을 하나로 떼어내거나 붙여봄으로써 이 공포를 형상화한다. 한편, 영화와 비디오아트를 공부하고 단편영화 ⟨캐쉬백)(2019), ⟨Godspeed⟩(2020), ⟨금장도⟩(2021)와 비디오 작업 ⟨호텔과 시청 사이에서⟩(2020), 사진집 ⟨Monochrome Valley⟩(2021) 등을 발표한 박세영은 그의 몇 가지 작업에서 감지되는 공포 요소들에 대해 abs와 이야기를 나눴다.


지중해성 기후를 띠는 서양에서는 일조량이 적고 습한 겨울철에 납량 특수를 맞이한다고 한다. 스산한 가을 밤의 할로윈이나 하얀 설원에 붉게 물든 핏자국 같은 것을 떠올려 본다. 공포는 언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여름의 마지막 손님이자 다가올 추위의 첫 번째 손님으로 즐겁게 반겨주시길!



매혹의 키놉시아
이지우

거대한 둥근 돔이 세워진 곳을 배경으로 거북이 두 마리가 나오고, 환히 웃는 남녀가 시청자를 향해 팔을 뻗어 손짓한다. 동시에 얼굴 없는 합창단이 단조로운 패턴의 음조로 구성된 노래를 부른다. 단 몇 초 사이에 서울랜드의 전경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는가 싶더니, 한덕개발주식회사를 내걸고 개장일을 한 번 더 강조하며 마무리한다. 여기까지가 1988년에 방영된 서울랜드 개장 CF의 내용이다. 33년이라는 세월을 고려한다 치더라도, 영상 속 내래이터가 구사하는 어조는 과장 좀 보태 조선중앙텔레비죤의 그것과 당황스러우리만치 흡사하다.1



(이미지1) 1988년의 서울랜드 CF - 개장편


(이미지2) 2016년의 조선중앙텔레비죤

서울대공원 안에 있는 서울랜드는 BTO 방식의 민간투자사업으로 건설되었다.2 주식회사 서울랜드가 놀이기구를 기부채납해, 개장 초기 20년간 무상 이용 후 10년 이상 유상 이용한 뒤, 시설 운영권이 2014년 만료되었고, 사업자 재선정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2017년까지 약 3년의 대여 기간을 제시하면서 결국 주식회사 서울랜드와 광주패밀리랜드 두 곳만이 입찰을 했고 대기업들은 불참하게 된다. 이에 서울랜드는 우선협상대상자가 되어, 공개입찰 방식을 거쳐 2022년 5월까지 갱신허가를 받아 사용하고 있다(2020년 카카오가 ‘한국판 디즈니’를 꿈꾸며 귀여운 라이언과 어피치를 내세워 서울랜드를 인수하려 했으나 서울시와 경기도, 과천시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림돌이 돼 무산되었다고 한다3). 지금도 여전히 서울랜드의 개폐장 루머가 도는 상황. 방치되다시피 노후화된 어트랙션과 미흡한 시설물 관리의 문제, 테마곡 부재 및 다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 하는 가요곡의 선정, 유행이 지난(그러나 자랑스럽게도, 한국 토종 캐릭터들로 구성된) 캐릭터 조형물 설치 등등이 서울랜드 수요의 가파른 하락 곡선을 그리는 원인 중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서울랜드는 낡고, 오래되고, 멈춰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곳을 몇 주 전 방문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가 마주한 서울랜드의 첫인상은 ‘모든 것이 멈춰있다’였다. 놀이공원 입구를 지나 바로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핑거푸드 코트는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굳게 닫혀 있었고, 대신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모양새의 인테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그때 그 시절 롯데리아가 입장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레드벨벳의 ’빨간맛’(2017년 발매)이 매장 내에 흘러나오는 와중, 어릴 적 마지막으로 보았던 롯데리아 특유의 스칼렛 컬러 카운터가 반복되는 메들리와 기묘할 정도로 어울렸다. 사람들은 태연히 햄버거를 고르고 있었고, 그렇게 꿈과 희망의 나라는 차분하고 조용했다.4



(이미지3) 롯데리아 소공점(1호점)(1979)


(이미지4) 롯데리아 서울랜드점(2016)

한편 지난 4월, 북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서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밈이 물 위로 떠 올랐다.5 2019년 포챈(4chan)의 한 보드에서 시작된 이 밈은 익숙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낯선, 텅 빈 공간의 이미지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학술 용어로 리미널이란 문지방(threshold) 또는 주변(Margin)을 어원으로 하는 라틴어 리멘(Limen)에서 시작된 단어로, ‘문지방에 있음(being in threshold)’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지방은 통과, 교차, 떠남, 진입, 변화 등을 연상시키는데, 통상적으로 그곳을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6 리미널의 명사형인 리미널리티(Liminality)는 아놀드 판 헤네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인간 생애에 나타나는 여러 통과의례 과정 중 겪게 되는 모든 변화 양상을 설명하고자 리미널리티 개념을 제시했다. 변화의 당사자는 이 일종의 애매성을 통과하며 ‘미결정상태’에 놓이는 순수한 잠재성의 순간을 겪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순수한 잠재성의 순간이란 ‘가정법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채워진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바라본 긍정적 의미로서의 리미널리티는 제의, 카니발, 축제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며 이와 같은 사회 제도는 유희를 통해 사회 자체를 반성하고 비판하게 하는 틀이 된다. 200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더불어 파생된 여러 포스트 이론들은 이러한 리미널리티의 특성 즉, 일시적인 경계의 모호성, 불확정성, 유동성 등과 맥을 같이 했으며 당시 ‘리미널 스페이스’(또는 역공간)는 리미널리티와 연관된 키워드로 도시 사회학 및 건축 담론 속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예로 샤론 주킨은 역공간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문화와 경제, 시장과 장소 등을 가로지르고 결합하는 공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렇듯 리미널 스페이스는 누가 공간을 이용하고 점유하는지, 즉 공간 이용 주체가 그곳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지에 따라 새로운 공간이 되거나 보다 능동적인 공간점유의 장으로 바뀌는지에 관한 논의를 목적으로 소환되어 왔다.7


반면 집단적 아카이빙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 레딧의 리미널 스페이스 밈은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8 익명의 게시물에서 출발해 산발적으로 생산되는 크리피파스타를 경유하여 2019년 백룸(Backrooms)밈이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소셜미디어에서 리미널 스페이스와 관련된 이미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으로 레딧의 움직임이 가장 큰 것으로 소개되는데, 2019년 8월 레디터(Redditor) CaLaHa717의 게시물을 시작으로 2021년 5월 기준 약 20만 명의 유저들이 이 거대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9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리미널 스페이스는 여러 학술 담론에서 ‘가정법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지어져 명확한 바운더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밈 컬쳐’에서는 리미널 스페이스에 대해 그리 엄격한 잣대를 두지는 않으며 어떠한 주관적 이유에서든지 간에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이루는 공간이라면 그들은 그것을 그들만의 리미널한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모으는 이미지는 대체로 ‘황량한 분위기의 이미지’ 혹은 ‘낯설게 느껴지는 친숙한 공간’, ‘꿈속에서 가 보았던 곳’이 되거나 때로는 저주받은 이미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공간주의의 김음은 이러한 현상을 낯선 공간으로부터 느껴지는 ‘인간 활동의 부재’로 인한,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10 포스트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을 떠올려 본다면 훨씬 수월하게 역공간이 제시하는 감각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사람이 만들었고, 그래서 사람이 존재해야 할 공간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어쩐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여담이지만 관련된 사례로, 지난 7월에 한 스페인 남성이 자신이 2027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며 틱톡에 조작된 영상을 올려 여러 커뮤니티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11).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해방과 자유, 무법지대, 새로운 가능성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또한 레디터들에게 리미널 스페이스란 어떤 회고적 감각 안에서 작동하는, 말하자면 로우폴리곤의 RPG게임의 공간 혹은 드림코어(Dreamcore), 위어드코어(Weirdcore)12의 감각 아래 생산된 이미지 같은, 가시화된 과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파생된 트라우마와 향수라는 이 두 가지 감각은 서로 충돌하여 ‘불안’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공통의 기억이 된다.







(이미지5, 6, 7) 레딧의 '리미널 스페이스' 이미지들

리미널 스페이스에 의해 겪는 감정을 키놉시아(kenopsia)라고 한다.13 번역하면 ‘황량한 분위기’ 정도로 나오는데 키놉시아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데이빗(영화 A.I(2001)의 주인공)이라면 우리에게 이러한 감정을 대신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이미지8)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2001) 중

인류의 마지막 흔적인 데이빗은 외계인의 배려 덕에 마침내 과거에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2000년이 흐른 뒤의 세상에는 데이빗의 기억 속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집안을 돌아다니며 그는 ‘테디, 우리가 집에 왔어’라며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엄마가 그리운 아이는 무언가를 감지한 듯 파란 천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묻는다. ‘여긴 어디인가요?’. 이처럼 키놉시아는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새삼스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기이하고도 기묘한 감정이라고 본다. 그것은 공포도, 불안도, 불쾌도 아니며 단지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이상함’에 있다. 이후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상함은 공포가 되기도, 슬픔, 불안 혹은 불쾌가 되어 찾아오기도 한다.


다시 서울랜드로 돌아와, 조용한 환상의 나라를 떠올려보자. 그날따라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여든 비구름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랜드를 찾은 사람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으며, 대기줄이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인기 있는 어트랙션은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물론 롯데월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개장 당시 국내 최대 규모, 최장 운행 시간을 자랑했던 ‘킹바이킹’을 선두로 하여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차례대로 정복했다. 84인석을 보유한 킹바이킹의 탑승객은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는 어린 아들과 침착한 아버지, 고작 둘 뿐이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티아라의 ‘TTL(Time to Love)’(2009년 발매)을 들으며 즐겁게 대기했으나 탑승 직후부터 나는 3분 20초간 웃을 수 없었고 앞서 탄 부자의 여유로움에 속았음을 알았다(참고로 롯데월드의 ‘스페인 해적선’ 탑승 시간은 총 1분 30초다). 킹바이킹의 위엄을 몸소 깨닫고 다시는 서울랜드를 얕보지 말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겉보기에 소박한 ‘급류타기’의 급하강 구간에서 또다시 쓰디쓴 후회를 맛보았다. 또, 대기줄에서 터닝메카드(2015년 첫 방송)의 인기를 다시금 실감하며 추억의 범퍼카를 끌어보기도 했다(말이 터닝메카드지 범퍼카의 외형은 오래전 기억 속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어 당황스럽다). 조금 더 걷다 보면 ‘라바 트위스터’가 나온다. 지나칠 수 없는 라바의 귀여운 표정에 넘어가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의 빛바랜 등 위에 올라탄다면 당신은 전에 겪어본 적 없었던 크기의 원심력의 법칙에 의해 격렬히 응징당하고 말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알바생의 놀라운 센스인지 모르겠으나 라바의 등에서 내려와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내게 작은 위로가 되었던 것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년 발매)였다. 비열한 라바를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어느새 2PM의 ‘Heartbea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계산의 검푸른 능선을 배경으로 고개를 까딱이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만날 수 있다. 거대한 포식자의 머리 위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노란색 철도가 공중에 떠 있다. 무지개 끝을 따라가 보듯 기다란 철도를 따라가면 그 끄트머리에는 ‘블랙홀 2000’의 입구가 탑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이름만큼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놀이공원에서 가장 안쪽, 숲이 우거진 구석에 위치한 탓인지 가족 단위의 입장객들에게 사랑받지 못 하는 것으로 보였다. 시속 85km의 열차가 여전히 운행되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그곳은 매우 조용하고 음울했다. 여기까지가 나의 간략한 서울랜드 답사기다. 만일 당신이 평소 놀이공원에 자주 가는 타입이라면 나의 생각과 어떻게 다를지 모르겠으나 놀이공원에 다녀온 후의 기억은 대체로 그날 함께 간 사람, 먹은 것, 어트랙션이 제공하는 속도감, 긴장감, 혹은 장난감 매대에서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이미지 등으로 남는다. 그러나 내가 주로 기억하는 서울랜드는 희한하게도 거기서 들은 소리다. 보통 우리는 놀이공원에 가면 무슨 노래가 나오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테마곡으로 특정된 음악이 나와 그것은 군중 소리와 섞여 반복되는 소음 정도로만 들린다. 생각보다 꽤 많은 다양한 볼거리와 탈 것, 입장객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서울랜드가 황량함을 감출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내가 겪은 바와 같이 주체의 감각을 완전히 사로잡거나 채울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속할 수 없는(혹은 일시적인) 일상성을 보았고, 북적이는 사람들과 멈춰있는 어트랙션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 나는 되려 ‘대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왔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로 인해 나는 앞서 이야기한 키놉시아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불안이 아닌 오히려 기묘에 가까운. 이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H. G. 웰스의 「벽에 난 문」을 기이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분류하는 이유로 피셔는 세계 간의 ‘문턱’을 제시한다. 그는 기이한 소설이 갖는 힘은 일상적인 요소들로 묘사된 공간과 이(異)세계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하며, 「벽에 난 문」은 바로 그 문턱 가운데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야기가 완전히 문턱 너머에 자리한다면 그것은 기이한 현실에 관한 것이 아닌 판타지가 된다. 따라서 문, 문턱, 포털은 ‘사이’라는 개념으로, 기이함을 자아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갖고 있다. 한편, 「벽에 난 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월레스의 불행한 결말은 정신 이상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집중하고자 하는 바는 월레스의 트라우마 혹은 미쳐버림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보다 더 사실적인 무엇과의 조우에 관한 것이다.14


재밌는 것은 내가 물리적인 환경 속에서 겪은 것과 같은 시청각 버전의 키놉시아를 사이버 공간 안에서 구현하려는 시도가 레딧 외에도 적잖이 보인다는 점이다. 리미널 스페이스와 관련된 이미지,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조합하는 유튜버 float의 ‘Strangely familiar places with unnerving music’ 시리즈15가 그러하다. B급 감성을 자아내는 이 비디오는 한 가지 무드를 오랜 시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짧은 클립을 무작위로 한데 묶어놓았는데, 10초 간격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과 각각에 어울릴 법한 사운드 여러 개를 삽입하여 우리가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키워드 아래에 상상할 수 있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리미널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쏘아대는 폭격기처럼 시시각각 모습을 바꿔 눈과 귀 모두를 사로잡는 이것은 마치 게걸스레 스크롤을 내려 꼬리에 꼬리를 문 레딧의 보드를 빠르게 탐험하는 것과 비슷하다. 높은 시청률이 증명하듯 과연 이 밈의 추종자들을 만족시킬만하다.



(이미지9) 221만 뷰를 기록한 float의 strangely familiar places with unnerving music 시리즈 중 첫 번째 작업

서울랜드의 체험중심 어트랙션들 중 하나인 ‘착각의 집’을 소개하고 싶다. ‘착각’이라는 단어에 먹힌 듯한 이 공간은 외관뿐만 아니라 그것이 내세우고자 하는 테마조차 너무나 낡았고 그 자체로 이상하다. 관람객들은 공간 자체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passage)에 사로잡힐 것만 같은 기이한 불쾌함과 동시에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서울랜드는 2020년까지 ‘귀신동굴’을 운영했고, 현재는 문을 닫아놓았다. ‘착각의 집’은 공포보다는 불쾌를 겨냥해 만들어진 듯 하다). 커다란 큐브 형태의 이 공간은 거울로 둘러싸인 기다란 복도에서부터 출발한다. ‘흔들리는 방’이라는 이름을 지닌, 어두운 조명,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의 초상이 그려진 액자가 걸린 조악한 공간을 지나, ‘원근의 착각’, ‘중력착각의 공간’, ‘착각의 계단’, ‘거울미로’, ‘문 미로’ 등등의 공간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름에서 밝힌 것과 같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구현해내기 위해 각각의 공간들은 천고의 높낮이, 바닥의 기울임,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여러 장치들(에셔의 〈상대성 이론〉(1953)과 같은 착시 이미지 또는 거울 등)을 활용한 것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이처럼 이들이 정한, ‘착각’이라는 개념 아래 만들어진 공간, 그러한 공간 안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험(스스로가 ‘중력착각의 공간’ 안에서 정말로 ‘중력착각’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저 바닥을 뒹구는 어린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미지의 감각이 아닐까)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만들어진 착각’에 이르도록 지시한다. 나는 과연 이것을 순전히 내가 느낀 착각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거짓으로 만들어진 경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으스스함을 느끼는 걸까? 그저 단순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진실로 만들어내기 위한 어떤 염원 때문에 느껴지는 섬뜩함일까.







(이미지10, 11, 12)서울랜드 착각의 집 전경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베닝의 〈L. Cohen〉(2018)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베닝의 작업을 통해 무려 45분간 서서히 다가오는 키놉시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당신은 비행기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지나다니는 농촌 풍경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이름 모를 풀을 뜯으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가? 얼핏 보면 광활한 대지와 그 위에 버려진 드럼통 따위가 전부인 미동도 없는 풍경이다. 다이내믹한 서사도, 장면의 변화도, 개미 한 마리조차 등장하지 않는. 자연의 변화에 어쩔 수 없이 그저 몸을 내맡기는 것처럼 관객은 그대로 프레임 안에 갇히고 만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보면,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소리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러닝타임이 45분이라는 점을 재차 확인할 무렵, 세상에 어둠이 내린다. 절묘한 타이밍에 찾아온 이 어둠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일 뿐 어둠은 그것이 찾아온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간다. 제트기인지 뭔지 모를 비행체의 소리와 어디선가 간간이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 아이의 비명과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 레너드 코헨의 ‘Love Itself’ 등이 텅 빈 공간을 번갈아가며 채운다. 베닝은 줄곧 “내 작업의 가장 큰 화두는 지속(duration)이다”라며 변화하며 지속되는 시간을 이야기해왔다. 그런 그의 작품인 만큼 단일한 시퀀스로 이루어진 이 비디오는 놀랍게도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몇 번이고 바꾼다. 사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덧 없는 삶에 관한 메타포가 담긴 이 작품에 관한 적절한 감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독의 통제 하에 만들어진 다소 지루한 리얼리티에서 ‘황량한 공포’를 느꼈다. 장시간 낯설면서도 친숙한 풍경과 소리에 매혹되어, 감각과 감정의 변화를 한 자리에 멈춰서서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여기엔 작품 언저리에 존재하는 키놉시아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부동은 역설적으로 운동의 감각을 증폭시키며, 그것의 동력은 미지에 대한 공포다.



(이미지13) Still from L. Cohen(2018) by James Benning

버려진 시공간을 향한 높아진 관심은 과연 팬데믹으로 인해 마주하게 된 특수한 상황일까. 물리적이거나 혹은 가시화된 형태로 멈춰있는 과거를 우연히 발견하는 일은 살면서 종종 겪게 되는 흔한 일이다. 대청소를 명분으로 서랍장을 뒤질 때, 서랍장 안에서 무언가 발견했을 때, 길 가다 마주친 오래된 동네 안경점이 실은 부모님의 연애 시절 데이트 장소라는 사실을 서랍장에서 발견한 사진을 보고 알았을 때. 좀 더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싸이월드가 복구될 때(소름이다). 아무튼 나 역시 가성비를 찾아 서울랜드로 떠났지만(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망설임 없이 롯데월드에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겪은 기묘함은 오로지 팬데믹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경험이라고 본다. 다만 20세기 말 인터넷과 사이버공간의 등장으로 일부 도시학자들이 물리적 형태의 퍼블릭 스페이스의 쇠퇴 혹은 소멸 가능성까지 예견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사람들을 방구석 여행자 혹은 방랑자로 만들어버린 팬데믹이 이 유행의 가열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시공간을 넘어 텍스트로, 이미지로, 또는 이미지와 소리로 공유되는 이 감각은 어떻게, 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가? 애초에 이러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힘은 무엇인가? 진부하지만 한낱 인간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원초적 본능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봐도 될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우리는 도약한다. 그러나 도약을 위한 이런 미결정상태의 지속은 언제까지고 이어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문지방’ 위에 올라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여름의 무더위는 그렇게 우리를 멈춰서게 만든다.




1ㅤ88년도의 한국과 16년도의 북한. 시간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 내래이터의 어조를 들어보시라. 출처1, 출처2.

2ㅤ서울랜드의 역사가 매우 친절히 설명되어있다. 출처.

3ㅤ“[단독] 카카오 인수 무산 … 서울랜드 마스코트 ‘라이언’ 될 뻔한 사연”, 〈일요신문〉, 2020. 08. 24. 출처.

4ㅤ서울랜드 관련 이미지3, 이미지4, 이미지10, 11, 12 는 블로거들의 게시물들이다. 출처1, 출처2, 출처3.

5ㅤ이미지5, 6, 7은 해당 보드에서 가져왔다. 출처.

6ㅤ조대원 & 임종엽,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성과 건축적 적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계획계 23(1), 279-282, 2003.

7ㅤ조경진 & 한소영, 역공간(Liminal Space) 개념으로 해석한 현대도시 공공공간의 혼성적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한국조경학회지 39(4) : 49-59, 2011.

8ㅤ“The Pleasant Head Trip of Liminal Spaces”, 〈The NEW YORKER〉, 2021. 04. 16. 출처.

9ㅤ 2021년 8월 31일 기준 약 28만 4천 돌파. 출처.

10ㅤ리미널 스페이스가 제시하는 감각에 관한 이야기는 공간주의의 김음, 「리미널스페이스론」을 참고하였다.

11ㅤ2027년에서 왔다는 ‘시간여행자’를 시험하던 스페인 방송사가 발견한 소름돋는 장면 (영상)”, 〈엔터테인먼트〉, 2021. 07. 22. 출처.

12ㅤFandom의 한 보드, Aesthetics Wiki를 참조하였다. “온/오프라인 미학에 관한 백과사전”이라는 슬로건이 흥미롭다. 출처1, 출처2.

13ㅤ공간주의의 김음이 묘사한 리미널 스페이스가 자아내는 감각과 유사한 설명이다. 출처.

14ㅤ마크 피셔(안현주 역),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구픽, 2019, 51p.

15ㅤ마지막으로 업로드 된 날짜는 2021년 6월로, 여덟 번째 시리즈를 올렸다. 이외에도 fridgophobia(추위 공포증), claustrophobia(밀실 공포증), autophobia(격리 공포증), speluncaphobia(동굴 공포증) 등 여러 혐오와 관련된 영상들을 꾸준히 올린 것으로 보인다. 출처.

FOAF (Friend of a Friend)
유진영

“내 친구의 친구가 겪은 일인데...” 이 문장은 도시괴담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경적이자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얼마간의 사실성을 담보해주는 마법 주문과도 같은 말이다. ‘이건 내가 겪은 일이야.’라고 단언하는 괴담을 들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 할머니가 예전에 그랬대.’ 혹은 ‘내 친구의 친구가 거길 다녀왔대.’라는 식의 괴담의 간접적인 기생 방식은 사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만적인 자유와 그럼에도 일말의 실재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섞여 만들어낸 기묘한 결과물이다. 도시괴담의 포인트는 언제나 내가 직접 겪지 않았기에 미스테리하고 신비하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가 겪은 일이기에 그럴듯해 보인다는 현실감이 공존하는 데에 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같아 보이는 것, 혹은 사실이길 내심 바라는 것이 도시괴담의 정체인 것이다.


이는 종교의 존재 방식과는 사뭇 다른 것인데, 종교는 의심과 회유의 전략을 모두 적극적으로 구사하지만 결국에는 이를 통해 절대자와 신자 사이의 절대적인 믿음을 확립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 그러나 도시괴담은 확실하고 절대적인 것을 요구하는 일에서 일부러 자리를 멀리하며 얄팍한 의심의 장막을 이야기와 청자 사이에 넓게 펼쳐 놓는 방식을 취한다. 이때, 말과 글, 그림 그리고 영상 매체는 신앙에 의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 상상의 영역을 현실화함으로써 점차 더 강력한 믿음의 증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반면 도시괴담의 경우, 도시의 형성과 함께 (혹은 그 이전부터) 탄생한 이래 그 모든 매체를 경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가시성을 확보하는 것을 유보해왔다.


그렇다면 도시괴담이 시각화되는 일은 어떤 효과를 만들어낼까. 의심이라는 장막을 모조리 걷어내고 믿음의 가능성을 조금 더 증폭시켜 주는 일일까, 아니면 거짓말일 줄 알았다며 스스로를 그저 그런 낭설로 전락시켜버리는 일일까. 아니, 그보다 이에 앞서 대체 왜 도시괴담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시괴담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아닌가. 그러나 빨간 마스크 괴담, 노래를 끝까지 들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팥죽송 괴담, 시중에 납품되는 닭꼬치의 재료가 실은 비둘기였다는 괴담 등 비슷한 시간대를 공유한 이들에게 도시괴담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인지하는 꽤 강력한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뻥 뚫린 도로를 볼 때, 어떤 길을 걸을 때, 그리고 특정 역 앞을 지날 때 머릿속을 스치는 공통의 기억과 감각은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는 간접적, 사변적 방식이 된다. 여기에 도시괴담의 희미하게 반짝이는 가능성이 있다. (그 의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면의 위아래를 유연하게 오가며 애매한 진실을 재구성하고 현실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수행할 때 도시괴담은 존재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다시 도시괴담의 시각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구전을 거쳐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을 경유하며 모양을 달리해온 도시괴담은 이미지가 범람하고 이야기의 재생산 속도가 전례 없이 가속화된 동시대의 매체 환경에서 좀처럼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조각난 파편처럼, 격랑을 맞은 정보의 잔해처럼 도시의 저변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동시대의 도시괴담은 진실과 허구의 사이에서 의심을 자처하는 양가적인 태도가 스스로를 어쩌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으로 격상시켜주는 본질이라는 점을 주지하며 그 생존전략을 다시 한번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도시괴담은 이미지와 말의 상호 보충적 결과물로서 어떻게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을까? 도시괴담이 시각화된 사례들을 비교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에 앞서 간략히 도시괴담의 시각화 역사를 살핀다.1 이번 글에서는 국내 대중매체 내에서의 사례들을 살피는 것으로 한정한다. 제일 먼저 괴담이 매체를 타기 시작한 건 신문과 라디오이지만, 이들은 철저하게 도시괴담의 생존 법칙을 준수하며 오로지 언어를 통한 묘사로만 그 몸집을 부풀렸다. 텔레비전이 등장함에 따라 도시괴담의 생존 법칙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는데, 움직이고 숨 쉬는 이미지를 쏟아내는 텔레비전에서 더 이상 말과 글자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만으로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납량특집’ 하면 으레껏 제일 먼저 떠오르는 프로그램들이 몇 가지 있다. ⟨전설의 고향⟩과 ⟨토요미스테리극장⟩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둘 말고도 몇 개의 역사가 더 있는데, MBC의 ⟨다큐드라마 이야기 속으로⟩, 경인 TV에서 방영했던 ⟨미스터리 극장 위험한 초대⟩가 그것이다. ⟨미스터리 극장 위험한 초대⟩를 제외하고 이 세 개의 프로그램은 모두 1996년부터 2000년 이전까지 밀레니엄의 도래를 앞두고 이른바 ‘엽기’라는 기이한 코드가 사회를 장악했던 1990년대 말, 이상한 것들에 대한 열광과 함께 성행했다.2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사실과 거짓 사이에서 거짓이 되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를테면 ⟨토요미스테리극장⟩의 경우 최초의 프로그램명은 ‘토요미스테리’였으나 너무 사실 같아 공포스럽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을 이유로 4회 방송부터는 뒤에 ‘극장’을 추가해 허구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분명히 밝힌다. ⟨다큐드라마 이야기 속으로⟩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초기 제목은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였으나, 비과학적인 내용을 다큐멘터리라는 명칭으로 사실처럼 에둘러 포장한다는 방송통신위원회의 경고에 따라 ‘다큐드라마’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거짓이 되기를 선택함에 따라 이들은 더욱 자극적이고 허구적인 재연을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일괄 1999년을 전후로 비슷한 시기에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IMF 상황의 악화로 인해 사회 분위기 전반이 침체되었고 이에 국민에게 건강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방송계 전반의 기조에 따른 사실상 강제 폐지에 가까운 결과였다.



(이미지1) 이미지 1. (좌측부터 순서대로) ⟨전설의 고향⟩, ⟨토요미스테리극장⟩, ⟨다큐드라마 이야기 속으로⟩, ⟨미스터리 극장 위험한 초대⟩

이후 공포 프로그램의 역사는 20여 년간 맥이 끊겼다가 ⟨심야괴담회⟩(MBC)의 탄생과 함께 부활한다. 그러나 도시괴담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종류가 단순 공포만이 아니라 으스스하거나 기이한 것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도시괴담을 다룬 프로그램들은 꾸준히 지속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2002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19년간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건‧사고와 음모론 등을 재연의 형식으로 다룬다. 오랜 방영 기간으로 인해 내용이 점차 흥미 본위의 자극적이거나 엉성한 사건들로 점철되고는 있으나, 그럼에도 이 장수 프로그램이 미스테리, 괴담의 분과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분명하다. 서프라이즈에서의 재연은 조악한 분장과 어색한 연기를 전매특허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재연은 그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며, 그저 하나의 콩트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제공할 뿐이다(심지어 서프라이즈는 높은 확률로 실제 있던 사건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MBC에서 방송되었던 ⟨타임머신⟩ 역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과거의 신문 사회면에 실린 사건, 사고를 다뤘다. 각 사회의 분위기나 변화하는 구조와 밀접하게 연동하며 이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시괴담의 배경과는 가장 근접하지만 명백한 사실들만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는 다른 것들과 분리되는 지점에 놓인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소재의 고갈에 따라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미지2)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의 구린 재연 장면 (691회, 2015.11.29. 방영분)


(이미지3) ⟨타임머신⟩(MBC)

한편, 앞서 잠시 언급했던 공포 프로그램 ⟨심야괴담회⟩ 역시 패널들의 사연 읽기와 재연이 결합된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심야괴담회⟩는 시청자 제보를 기반으로 하는데, 제보자가 직접 겪었거나 친척 내지는 지인이 겪은 일들이 주를 이룬다. 이따금, 당시 현장의 모습이라며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 함께 제시되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누구도 보장하지 않으며, 여전히 누군가(패널)를 한 번 더 매개되어 전해진다는 점에서 그것이 제보자가 직접 겪은 일이든 아니든,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는 지점은 강도 높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재연에 있다. ⟨심야괴담회⟩를 통해 전해지는 도시괴담은 말하기와 보여주기 사이를 진동하며 보는 이의 몰입을 고조시키지만, 대체로 시각적인 재연의 강도에 의해 보여주기가 말하기를 압도해버린다. 과도한 몰입을 막으려는 듯, 중간중간 겁에 질린 표정을 한, 혹은 한껏 진지한 모습으로 사연을 읽어 내려가는 패널들의 모습을 비춰주지만, 그 장면들조차도 보여주기의 적극적인 장치로 활용되어 버리며, 말과 보기 사이의 균형을 붕괴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미지4) 호들갑스러운 ⟨심야괴담회⟩ 패널의 모습


(이미지5) 무서운 재연 장면

이처럼 텔레비전에서의 도시괴담의 시각화 역사는 대개 유사한 결말을 맞이하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줄다리기하는 것에 실패한 채 허구성만을 강화해온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들은 도시괴담이 스스로의 생존방식에 대해 재고해보아야만 하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주지했듯 도시괴담은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차원의 문제이기보다는, 절대 진실이어서도 절대 거짓이어서도 안 된다는 경계자의 숙명을 갖고 있음에 방점이 있다. 이는 사실과 허구, 혹은 픽션이라는 이분법적 경계가 무화되었다는 자명한 사실에 관한 것으로 두 항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각 구성 성분에 일정 정도의 지분을 주고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밀폐된 공간에서의 선풍기 사용과 관련된 사망설이 퍼지자 대법원에서 이를 사망원인으로 적시하고 재해로 인정한 사례와 같이 가짜뉴스가 먼저 유포된 후 현실이 그에 맞춰 수정되는 것처럼 말이다.3 그렇기에 (다소 낡은 감은 있지만) 도시괴담은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시대의 작동 메커니즘을 참고하며 조금 더 교묘하게 유포되는 방식으로 그 생존전략을 수정해야만 한다. 진실의 조건이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혹은 진실이 조건부로 존재하는 세계 내에서 불확실하게 존재하기에 비로소 당위를 얻는 것, 그것이 도시괴담이 가진 커다란 힘인 것이다.4 눈치챘겠지만 이 논의들은 히토 슈타이얼(Hito Styerl)의 디지털 이미지론에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이 글 안에서 슈타이얼의 논의를 면밀하게 짚고 넘어갈 능력은 없으니 도시괴담이 이들과 연결되는 지점을 자연스럽게 살피는 것을 간략하게나마 시도한다.


2009년 『스크린의 추방자들』부터 지속되어온 디지털 시대 이미지의 존재론적 변화와 위상의 변화에 대한 슈타이얼의 진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유효하다. 슈타이얼이 옹호하는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는 해상도와 선명도가 떨어져 이미지 계급의 하위권에 위치하며 전송, 압축, 복제, 리핑, 리믹스5 등 유통의 구조와 과정을 자신의 너절한 빈곤함으로 체화한 이미지이다. 자본주의와의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가시성의 정치학’의 작동 원리를 따라 선별된다.6 생산과 유포, 순환을 포함한 빈곤한 이미지의 실천은 모두 물신주의의 체제를 적극 수용한, 혹은 그 내부에서 배태된 부산물이지만 가시성의 선별 기준에는 미달한 존재들이기에 그 나름의 변장과 위장의 전술을 이용하여 체계의 틈새를 파고들며 스스로를 가시화한다.


도시괴담의 재현은 이러한 동시대 디지털 이미지의 포스트-재현적 실천을 따를 때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더 이상 건강하고 긍정적인 것만을 국가 강령처럼 제시할 필요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도시괴담의 이미지들은 필연적으로 ‘빈곤한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보자면 도시괴담의 이미지는 그 원형부터 이미 빈곤했다. 이는 도시괴담 자체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들은 단 한 번도 고해상도이거나 명료하게 증명 가능한 형태를 갖춘 적이 없었고 갖출 필요조차 없었다. 특정 괴담의 원형들이라며 전해져오는 것들이 있지만 그 자체도 실은 원본이 아니라 오직 사본의 형태로만 존재해온 것이다. 수많은 더미 중 하나쯤은 분명 누군가의 진실된 경험담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이 도시괴담의 형태로 소비되는 순간 이야기는 그 즉시 n번째 사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도시괴담은 지시체와 일대일로 조응하지 않으며 매개체와 유통의 확산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를 분화하는 포스트-재현의 양식을 충실히 수행한다.7 수많은 말과 매개를 덧붙여서 생산되고 확산되는 도시괴담은 그 과정에서 도시에 관한, 혹은 동시대에 관한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한 장면들을 발생시키며 현실을 우회적으로 이어낸다. 도시괴담은 도시의 저변에서 생존을 거듭하며 우연찮게 갖게 된 이 같은 힘을 스스로 더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빈곤한 이미지의 불완전함이 야기하는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도시괴담의 재현 시 제1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현은 현실을 모사하는 일이기보다는 진실을 상상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때 상상의 영역은 도저히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나 재현 불가능한 것에 도달하려는 것이기보다는 현실의 규칙과 질서로부터 유예된 무언가를 찾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진실의 조건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슈타이얼의 글과 이미지가 서로를 완성하는 상호보충적인 관계인 것처럼 도시괴담 역시 다양한 방식의 말하기와 보여주기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8


그렇다면 도시괴담이 미디어를 통해 우후죽순으로 시각화되는 일을 달리 막을 방도가 없을 때, 그 이미지는 어떤 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지를 위의 논의들을 전제로 삼으며 더 고민해보자. 이때 초점은 보여주기와 말하기 사이의 균형에 있다.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가, 혹은 빈곤한 이미지가 더 이상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며 재현할 수 없듯이 괴담의 이미지들 역시 그 불가능성에 집중하며, 재현 불가능한 실재를 도시괴담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 방식이란 은밀하되 어떤 징후를 감지할 수 있으며, 무언가를 예고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때 도시괴담이 예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실재가 되어버리는 도시의 불규칙한 프랙탈이 된다. 말하기의 불완전함은 보여주기의 직접성으로, 보여주기의 과도함은 말하기의 은밀함으로 보완하며 나아가야 한다.


미디어 환경과 연동하여 생존하는 도시괴담을 살필 때, 살펴보아야 하는 곳은 당연 유튜브이다. 앞서 보았듯 텔레비전 시대를 거친 도시괴담은 그 기세를 잃은 뒤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다(이야기들이 모여드는 게시판 형식의 웹사이트는 언제나 예외다. 웹사이트는 언어를 중심으로 전유 되는 신문과 라디오의 계보에 더 가까이 위치하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도시괴담의 썰을 푸는 곳이거나 괴담 자체가 만들어지는 생산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해내고 있다. 썰을 푸는 채널의 경우 텔레비전 방송과 비슷한 내레이션과 재연이라는 구조를 골조로 삼으나 삽입되는 이미지나 영상들이 인터넷을 떠도는 헌 짤이거나 파운드 푸티지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한편, 유튜브를 통해 생성되는 괴담은 대체로 어느 날 문득 올라온 이상한 영상 자체에 대한 것이거나 라이브 스트리밍 도중 발생하는 기이한 현상들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괴담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으니 재현/재연과 유통에 중심을 두고 도시괴담을 전파하는 몇몇 채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국내에서 이 분야 부동의 1위를 달리는 채널은 ‘디바제시카’ 채널인데 이 채널은 말하기의 적절한 완급조절과 보여주기의 허접함 사이의 균형에서 그 동력을 얻는다.9 원래 직업이 영어 강사였다던 디바제시카의 말하기는 한국인의 말하기 포인트를 관통한다. 이따금 혼자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따라 해 본 적이 있거나 사교육 시장에 오랜 세월 자의로든 타의로든 몸담아 온 사람이라면 디바제시카의 말투가 어딘지 익숙할 것이다. 신뢰감을 주는 저음의 목소리로 강조점에서는 별표를 치듯 더 힘을 주고 그 외의 부분에서는 쿨한 번역 투를 사용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디바제시카는 한국 대중들의 보편적인 기억 한 지점을 건드리는 힘을 갖고 있다. 이야기와 함께 제시되는 이미지는 여기저기서 갖고 온 사진과 짤로 이야기 중에 있는 디바제시카 옆에 엉성하게 몽타주 되어 나온다. 개중 일부만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이미지이다. 여기에서 이미지의 역할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해 보이지만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을 때는 어딘지 부족한 기분이 든다. 같은 내용이어도 칠판에 필기를 보면서 듣거나, 줌 화면 속 누군가를 보며 듣는 것이 소리만 듣는 것과는 집중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비슷하게 괴담을 다루는 채널들로는 ⟨괴담라디오⟩, ⟨숫노루 TV⟩, ⟨미미미미⟩ 등이 있는데 이들 역시 전체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화자 보다는 이미지를 더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들이 촉발해야 하는 것은 공포감 그 자체보다는 이상하거나 찝찝한 무엇이어야 한다. 그럴 경우, 디바제시카의 유려한 말솜씨는 기승전결이 잘 구성된 이야기보따리에 더 가깝기는 하겠다. 그럼에도 디바제시카를 포함하여 유사 채널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도시괴담의 이미지들은 직접 제작하거나 촬영한 결과물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여기저기서 떠돌던 낡은 디지털 잔해들을 그러모아 약간의 사실들과 교묘히 교차시킬 때 믿음과 의심 간의 적절한 비율이 조제된다. 누더기처럼 기워진 조악한 이미지들은 디지털 이미지의 작동 방식 안에서 추동력을 얻으며 말하기와 따로 또 같이 읽힐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동영상의 대문 사진이자 콘텐츠의 인상 자체를 좌우하는 썸네일 역시 중요한 이미지 장치이다.


여기에 더하여 댓글이 괴담의 구조를 완성해주는 듯해 보이는데, 댓글 창에서 시청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아는 이야기, 혹은 겪었다던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 익명의 군중들은 친구의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던 전통적인 도시괴담의 전승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의 웅성거림은 불특정한 개인들이 호소하는 불확실한 진실들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괴담은 연기처럼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며 유포된다.



(이미지6) 디바 제시카 채널 스틸샷


(이미지7) ⟨괴담라디오⟩, ⟨숫노루TV⟩, ⟨미미미미⟩

이를 현재진행형인 ⟨심야괴담회⟩와 비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심야괴담회⟩는 공포프로그램을 종말의 말로로 이끌었던 텔레비전 매체의 오래된 작동방식을 그대로 수행 중에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직접 제작한 영상은 너무 정성스럽게 연출되어 있기에 매끄러운 공산품으로 보인다. 이 반질반질한 영상은 의심의 물꼬를 틀어막는다. 모든 재연 프로그램이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한 회에서는 무당이었다가 한 회에서는 사연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식의 연기자의 반복 출연 역시 회차가 쌓일수록 처음의 낯선 감각을 잃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댓글 창의 역할과 비교할 만한 대상도 있는데, 바로 패널들이 소개한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44명의 어둑시니들이다(숫자며 명칭이며 모든 것이 다 노골적이다). 시청자들 중 추첨을 통해 매회 어둑시니를 선정하여 스튜디오에 얼굴을 띄워놓고 라이브로 녹화 과정에 참여시킨다. 이들이 말을 하거나 특별한 일을 수행하지는 않지만, 얼굴을 드러내놓는 행위 자체, 무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위치 자체만으로 많은 제약을 만든다. 또한, ⟨심야괴담회⟩ 역시 각 사연들을 잘라 유튜브에 업로드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유튜브의 생태계를 살피는 일과는 그다지 관련 있어 보이진 않다. 종합하자면 ⟨심야괴담회⟩는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제작진, 패널, 제보자, 시청자들이 괴담의 재가공 즉, 포스트 프로덕션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전통의 반열에 오른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서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유튜브 채널의 모든 요소들(이미지, 이야기, 댓글)은 서로를 도와가며 그 빈곤함을, 불완전함을 확대시킨다. 물론 이 채널들의 최대 약점인 빈곤하다 못해 어떠한 미감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는 유의할 필요는 있다. 말 그대로 데이터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90%는 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예시들이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긴 글을 구구절절 쓰는 내내 궁극의 예시를 찾고자 분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도시의 사변적 존재에 대한 다분히 개인적인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글이지만 사실 도시괴담으로부터 파생 가능한 논의들은 무수히 많다. 인프라로서 미디어 환경에 대한 이해, 도시의 비가시적 영역에 관한 관심,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모호하지만 새로운 장면에 대한 기대 등 이 모든 것이 얽히고 응축되어 도시괴담을 의미 있는 것, 혹은 의미 있을지도 모르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본 글에서 논의해보고자 했던 지점은 미디어를 경유하며 이어지는 도시괴담의 전승 방식에서 시각화의 양상을 살피고 더 적절한 방법을 찾아보는 데에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유튜브와 디지털 네트워크로 미디어 플랫폼의 이양은 이미지 생산 방식의 근원적 변화뿐 아니라 언어와 이미지의 작동 방식과 그 관계에도 변화를 창발시켰다. 유튜브의 시대에 다다라 도시괴담 속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는 말하지 않고 보여줄 수 없으며, 보여주지 않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호불가분의 관계로 거듭나고 있다. 도시괴담은 이 전략을 충분히 인지할 때, 사회 전반을 은은하게 장악했던 2000년대 초반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설령 스스로 원하던 바가 아니었을지라도 생산과 유포의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시지각적 유대나 공통의 정서는 일획적인 도시의 구성 체계를 인지하는 대안적 방식으로서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과장된 망상에 가까운 이 기대가 더 괴담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어떤 대상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언제나 더 기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화답하곤 한다.




1ㅤ관련 정보들은 도시괴담과 각종 미스테리 관련 정보의 보고인 나무위키, 위키피디아를 참고했다. 유저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완성되는 위키 사이트들은 이야기들이 쌓여 변형된 버전들이 창작 및 유통되는 괴담의 구조와 가장 유사하게 작동하며, 정보의 괴담화, 괴담의 정보화에 훌륭하게 이바지 하고 있다. 언급되는 프로그램들이 단지 도시괴담만을 다루고 있다고 소급할 수는 없으나 정사로부터 벗어난 소문, 음모론, 괴담을 폭 넓게 다룬다는 점에서 재연의 역사로 정리해본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2ㅤ 〈미스터리 극장 위험한 초대〉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방영된 프로그램으로 다른 두 프로그램보다는 비교적 늦게 시작했으나 경인방송 내부의 문제로 종영되었다. 〈전설의 고향〉의 경우 1977년 처음 시작한 이래로 1989년까지 1기가 방영되었고 1996년부터 1999년까지 2기가 방영되었다. 2008년에 잠시 부활했으나 이듬해 종영되었다. 그러나 〈전설의 고향>은 전통 설화, 괴담 등을 다룬 드라마로 나머지 프로그램과는 결이 다른 것으로 분류한다.

3ㅤ선풍기 사망설은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괴담으로 197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인터넷과 뉴스를 오가며 무분별하게 확대 재생산된 케이스다. 70-80년대 여름 변사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근거 없이 활용되다가 1991년에 이르러 대법원에서는 한 사건 케이스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으로 인정하며 재해 판결을 내리기 까지 한다. 선풍기는 공기 성분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기 때문에 공기 농도 변화에 의한 질식사는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답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풍기 괴담은 꽤 오랜 시간 정설로 믿어지며 에어컨이 보급화되기 전 우리의 유년 시절을 지배해왔다. 출처

4ㅤ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안규철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21 의 논지를 짚고 있다.

5ㅤ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8, p. 41.

6ㅤ 김지훈,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포스트 인터넷: 히토 슈타이얼의 이론과 미술 프로젝트」, 『현대미술학 논문집』, 21(2), 2017, p. 64.

7ㅤ 위의 글, p. 55.

8ㅤ Sven Lutticken, “Hito Steyerl: Post cinematic Essays after the Future,” Too Much World: The Films of Hito Steyerl, ed. Nick Aikens (Berlin: Sternberg Press 2014) p. 48. - 김지훈, 2017. 재인용

9ㅤ 이 채널에 대한 기본 아이디어는 abs의 공동 편집인이자 여타 채널들에 조예가 깊으신 황재민님이 제공해주셨다. 압도적 감사를 드린다.

크리피파스타 레시피
황재민

1.

무서운 이야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만들어 낼까? 무서운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입에서 와서 듣는 이의 마음으로 간다. 그리곤 입과 마음 사이의 텅 빈 곳, 메시지가 영원히 닿지 않는 손실의 공간을 점유한다. 말하자면 무서운 이야기는 수신 장치와 송신 장치 사이, 항구적인 손실, 그 잡음의 공간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손실은 어마한 현실에 의해 발생하고(텔레비전은 우주배경복사를 포착해 노이즈로 출력한다), 또한 모든 미디어의 공통 조건이다. 그러므로 무서운 이야기는 현실을 포집하고자 애쓰며, 동시에 기술을 타고 편재한다. 몇 가지 예가 있다.


1938년, 오손 웰즈(Orson Welles)는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의 장편 『우주 전쟁(The War of the Worlds)』(1897)을 라디오 드라마로 개작했다. 화성인의 침공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실제 뉴스 방송처럼 연출했는데, 청취자들은 이것을 그만 실제로 오인했다고 한다. 1993년, 영국 BBC는 할로윈 특집 드라마로 《고스트왓치(Ghostwatch)》를 기획했다. 귀신 들린 집을 직접 찾아가 중계한다는 내용의 방송이었다. 이것은 생방송처럼 꾸민 드라마였지만, 몇 가지 오해로 인해 시청자들은 그것을 진짜 생방송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TV 속에서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현상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크게 충격받았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으며 정신적 피해가 보고되었다. 그리고 1999년, 《블레어 위치(The Blair Witch Project)》가 개봉했다.


구전 설화에서, 라디오 드라마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리고 극장에서. 각각의 미디어 기술은 스스로를 대표하는 무서운 이야기를 갖는다. 그렇다면 인터넷의 시대,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의 시대에 무서운 이야기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블레어 위치》 이후, 《블레어 위치》보다 성공한 무서운 이야기가 드물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더 많고 다양한 정보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발전한 리터러시를 갖는다. 그리고 이 변화는 공포에 비견될 만한 손실을 허용하지 않는다. 혹은 정반대의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다. 더 많고 다양한 정보는 진실을 가리고,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모든 뉴스가 곧 무서운 이야기로 변한다. 괴담이라는 잡음을 허용치 않는 미디어 환경, 또는 현실이 괴담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미디어 환경. 둘 중 무엇을 바라보든 무서운 이야기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괴담은 꾸준히 기능하고자 했다. 이 중 하나의 사례로 크리피파스타(creepypasta)에 대해 말해볼 수 있다.


2.

크리피파스타는 카피파스타(copypasta)의 변형이다. 카피파스타는 ‘복사, 붙여넣기(copy & paste)’하여 파스타처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인터넷 기반의 내러티브를 가리키는 속어다. 크리피파스타는 무수히 많은, 또 끊임없이 확장하는 카피파스타 중, 특히 무섭고 등골 섬찟한 것, 기괴한 것 등을 특정하는 파생어다. 여러 맥락을 제거하고 옮긴다면 ‘공포썰’, 아니면 ‘귀신썰’ 정도의 뉘앙스가 될까? 혹은 그냥 ‘도시괴담’? 아무튼 이것은 현대의 디지털 구전 설화로 공간도 시간도 없는 장소, 인터넷을 통해 확장되고 덧입혀지고 변형되며 공유되는 바이럴 내러티브의 일종이다.1


인터넷에 전적으로 의지한 미디어로써 크리피파스타가 갖는 명료한 특징이 있다. 이것은 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취하는 헌신, 그리고 참여에 의해, 무엇보다도 진실성(sincerity)에 힘입어 지탱된다.2 물론 헌신이 담긴 진실성 같은 것은 진실 이후의 시대에서 작동하기 어려운 가치다. 하지만 대신, 여기엔 규칙이 있다. 온갖 무서운 이야기를 공유하는 레딧(Reddit)의 게시판(서브레딧 subreddit), ‘잠들 수 없는(nosleep)’의 게시판 규칙 8번 항목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있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 심지어 진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Everything is true here, even if it's not.)”3 먼 과거, 무서운 이야기는 자연 발생하는 믿음에 기생해야 했다. 순진한(naïve) 믿음에 올라타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시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괴담은 순진한(naïve) 믿음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한(ironic) 믿음, ‘알면서 믿는’ 믿음에 의지하며, 규칙을 통해 공간을 확보한다.4 이 공간에서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확장되며, 곧 선동적 믿음을 만들어낸다.


크리피파스타가 인터넷의 문법에 익숙한 참여자들에 의해 전달된다는 점, 이를 통해 모종의 공간의 감염시킨다는 점은 중요하게 보인다. 이들의 헌신에 의하여, 크리피파스타는 여러 인터넷 플랫폼(internet platform)을 자발적으로 횡단한다.5 트위터에서는 트위터의 문법으로, 레딧에서는 레딧의 문법으로, 또 블로그를 통해서는 조금 더 고전적인 포스트로 행세하며, 이 내러티브는 어색함 없이 자리 잡는다. 참여자의 크리피파스타 ‘복사, 붙여넣기’, ‘복붙’은 각 플랫폼에 기설정된 구조를 차용한 다음 그것을 단순 변용하면서 ‘비창조적 글쓰기(uncreative writing)’를 실천한다.6 자연 발생적인 순진한 믿음에 기초하는 괴담은, 현실성을 포집하고 점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보편화된 인터넷과 ‘탈-진실’의 시기, 이제 더는 점유할 현실이 남아 있지 않기에, 크리피파스타는 본능적으로 플랫폼을 점유한다. 현실과 플랫폼이 분리 불가능한 시대에 적극적으로 플랫폼을 오염시키는 내러티브. 그것은 새로운 괴담을 만들어낸다.


또,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 구조에 대해, 한 가지 첨언이 더 필요하다.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네트워크화(networked)한다.7 인터넷에서, 내러티브는 단순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플랫폼의 관성에 맞추어 변형되거나 혹은 반복적으로 열화되면서 변화한다. 또한 내러티브는 다양한 인터넷 인간의 진실된 참여와 함께, 텍스트를 뛰어넘는다. 포토샵을 이용해 편집된 이미지로, 또 유튜브의 DIY 비디오 모놀로그로, 가능한 모든 형식을 차지하며 확장되는 것이다. 크리피파스타는 단 한 줄로도 만들어질 수 있고, 그렇기에 정제될 때는 너무 빈약한 내용일 때가 많다. 이 사실은 영화나 소설처럼, 이미 확립된 형식으로 내러티브가 정제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되려 크리피파스타의 구조를 견고하게 한다; 저자가 튀어나오기 어려운 환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크리피파스타는 여러 플랫폼을 넘나들며 꼬이고 고장난 끝에 새로운 이야기로 파열된다고 해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인식되지 않고, 또 ‘2차 창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저자성이 격하되지도 않는다. 만일 당신이 레딧의 ‘잠들 수 없는’ 게시판에 들러 “나 어제, 백룸에 다녀온 것 같아”8라고 쓴다면, 그 누구도 당신에게 “이 세상에 백룸 같은 건 없어. 미안한데 너 인터넷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으니 나가서 산책을 좀 해보렴.”이라고 차갑게 대꾸하거나 “와 찐이네… 이곳은 곧 성지가 됩니다 엔시티 제노를 영업합니다 미모 실화냐?”라고 매정하게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게시판의 8번 규칙에 입각해, 사람들은 “그래? 어땠어?”라고 되묻거나 “마침 나도 어제 다녀왔던 것 같은데… 혹시 우리 같은 레벨에 있었나? 그때 쾅 소리를 냈던 게 혹시 너야?”라고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질문과 답변이 이어질 것이고, 그것은 또 하나의 내러티브 감염체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크리피파스타가 ‘네트워크 내러티브(networked narrative)’를 만들어내게 돕는다. 이렇게 네트워크화된 내러티브 객체는 원본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복사본도 아닌 상태, (말하자면) ‘귀신 들림(haunted)’을 겪으며 주체와 객체와의 이분법을 분쇄하는 내러티브 공간을 창출한다. 요컨대 새로운 괴담을 위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이제 현실은 괴담을 위한 바탕이 된다.9


3.

그리고, 슬렌더맨(Slenderman)이라는 괴물이 있다. 2009년 한 인터넷 게시판에 게시된 이래 예외적인 명성을 얻은 이 괴물은, 크리피파스타라는 내러티브 양식, 혹은 내러티브 공간을 대표한다. 이목구비가 없는 새하얀 얼굴에, 언제나 검은 양복을 입고 있으며, 사지가 믿을 수 없이 길고 또 원하는 대로 늘릴 수 있다고 알려진 무언가. 슬렌더맨은 갑작스레 나타나 아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며, 자신의 얼굴을 맞댄 사람을 죽거나 미치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그 어떤 인간도 슬렌더맨을 직접 목격할 수 없다.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눈 깜빡하는 사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진, 슬렌더맨이라는 현상을 신체로 느꼈거나, 혹은 광학기기에 우연히, 정말 우연히 포착된 그것의 잔상을 ‘힐끗 보(glimpse)’았을 따름이다.10



(이미지1) 카메라에 우연히 포착된 슬렌더맨의 모습

포토샵 된 이미지 한 장과 그리고 짧은 상황 묘사로 출발한 슬렌더맨은 곧 수많은 내러티브로 확장되었다. 설정이 덧입혀졌고 캐릭터가 늘어났다. 슬렌더맨의 팔이 왜 늘어나는 줄 알아? 그건 사실 그게 기다랗고 매혹적인 촉수라서 그래. 슬렌더맨은 사실 기원전부터 살아남은 존재야. 인류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지… 슬렌더맨은 숲속에 있는 거대한 집에 살고 그 집엔 그의 하수인들이 있어. (그리고 슬렌더맨은 가끔 그 하수인들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을 때가 있는데…) 슬렌더맨이 나타난 곳에는 항상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는데, 그 종이를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되냐면… 내러티브는 곧 세계가 되었고 세계관은 곧 ‘슬렌더버스(Slenderverse)’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11 슬렌더맨은 위키피디아와 팬덤 위키에 기록되었고, 또 ‘마블 호넷(Marble Hornets) 시리즈’와 같은 성공적인 2차 창작 미디어로 연결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그저 평범한 2.5D 놀이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슬렌더맨의 내러티브가 네트워크화하는 동안 발생한 의외의 현상이 있었다. 괴물이 실체를 갖게 된 것이다.


연구자 안드레아 키타(Andrea Kitta)는 늦은 밤이나 새벽, 어딘가 어두운 곳에서 슬렌더맨을 보거나 느꼈다는 증언을 여럿 소개한다. 그들은 집 화장실이나 부엌 한 켠에서, 혹은 귀갓길의 어둠 속에서, 실제로 슬렌더맨의 존재를 느꼈으며 공포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 놀며 “조심해! 슬렌더맨이 쫓아온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았다고도 쓰는데,12 슬렌더맨이 진짜로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이것은 착각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슬렌더맨이 착각을 만들어냈다는 사실 자체다. 이야기꾼의 입과 듣는 이의 마음 사이, 송신 장치와 수신 장치 사이의 갭에서, 사라지지 않을 그 손실의 한 가운데에서, 슬렌더맨은 그간 유령이라 불린 괴물을 대체하며 실체화한다. 아이러니컬한 믿음이 조형한 선동적 믿음의 유희가 순진한 믿음을 경유하여 자연 발생적 믿음으로 발달한다. 자연 발생적 믿음은 신체적 믿음을 동반하는데, 그 신체 속에서,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현실이 된다.


조형된 괴담의 양식에 진정성 있게 거짓을 이입한 수많은 인터넷 플랫폼 지박령들의 (말하자면) ‘진짜 가짜’ 숭배가 바로 이 신화를 지탱하며 현실을 감염시킨 주범이다. 누구나 승인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비창조적 글쓰기’의 귀신 들린 내러티브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괴물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 이 괴물이 유령으로 대표되는 원시적이고 신체적인 믿음의 영역을 점거하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한없이 고무적이다. 무서운 이야기는 드디어 힘을 갖는다 – 이제 더 많은 괴담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물컵을 움직이는 괴담부터 세상을 무너뜨리는 괴담에 이르기까지. 이제 모든 텍스트 생산자는 괴담의 생산자로 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멈추는 곳은 어디일까?


4.

이것은 수사적 질문이 아니다.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는 2014년 5월 31일, 미국 위스콘신 워케샤 카운티의 한 어두운 숲속에서 마침내 멈춰서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자.


2014년 5월 31일 워케샤 카운티의 한 숲 근처 도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행인이 있었다. 그는 곧 까만 플리스 재킷을 입은 청소년이 바닥에 누워 쓰러진 것을 발견한다. 놀란 행인은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곧 청소년이 심각한 상처를 여럿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진찰 결과, 온몸에 19개나 되는 자상을 입은 사실이 밝혀진다. 어느 새벽, 어두운 숲 속에서 일어난 잔인한 범행. 다행히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둘이었고, 모두 피해자와 평소 절친했던 또래였다. 경찰은 두 사람의 가방 속에서 피 묻은 흉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사건 당일 새벽, 발견 장소 인근 숲 속에서 숨바꼭질하며 함께 어울렸다는 정황을 바탕으로 둘을 검거했다. 하지만 한 가지 퍼즐 조각이 비어 있었다.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피해자와 친했던 두 사람이 날카로운 칼로, 19번이나, 피해자를 공격했을까? 범인은 증언했다. 슬렌더맨의 대저택에서 하수인으로 살고 싶었다고. 하수인이 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고. 이 답을 들은 청자의 머릿속에선 무슨 소리가 울렸을까? 그것은 내러티브가 실재를 파열시키는 소리였을까, 혹은 내러티브가 실재 앞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바람이 빠지는 소리였을까?13


사건에 대해 정리하며, 워케샤 카운티의 경찰서장 러셀 P. 잭(Russell P. Jack)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둡고 이상한 것(Dark and wicked things)에 아이들을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인터넷은 위험한 공간입니다.14 두렵고 무섭고 고통스러우며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이상한 것. 이 표현은 ‘유치한 것’이라는 뜻으로 당장 바꿀 수 있을 듯해 흥미롭다. 크리피파스타의 내러티브 실천은 결과적으로 유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슬렌더맨 내러티브의 참여자들 또한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믿음으로 선동적 믿음을 길어 올리며, 누구도 슬렌더맨의 실존을 믿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러나 그들이 남긴 내러티브의 감염체를 워케샤 카운티의 두 청소년은 믿어버리고 말았다.


민속학자(Folklorist) 제프리 A. 톨버트(Jeffrey A. Tolbert)는 이 ‘슬렌더맨 사건(Slender Man stabbing)’ 이후 발생한 여러 논의를 추적하며, 관련 커뮤니티, 크리피파스타의 발원지에서 형성된 패닉을 기록한다. 패닉은 슬렌더맨이라는 공포스러운 대상의 현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패닉은 선동적 믿음이 사회의 가장 약한 구성원, 이를테면 청소년을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에 발생했다.15 믿음은, 괴담은, 위험은,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충격하기 전에 먼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향한다. 무서운 이야기 속에서, 슬렌더맨은 강력하고 온전할 뿐만 아니라 끝없이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르가 갑작스럽게 범죄 드라마로 바뀐 다음, 슬렌더맨의 존재감은 쪼그라든다. 그것과 함께 크리피파스타가 형성한 감염의 엔트로피는 예기치 못한 곳으로 향한다. 괴담이 성공적으로 변할수록, 마침내 실체를 얻은 이후, 즉각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향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직시할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말해, 이제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믿음을 현실화시키며 테러리스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순종할 것인가?


5.

됐고… 무서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데이지 브라운(Daisy Brown)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운영된 이 채널엔 핸드폰 하나를 대충 들고 찍은 듯한 브이로그나 메이크업 튜토리얼이나, 손으로 그린 어설픈 드로잉 같은 게 올라오곤 했는데,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유튜브 채널이나 다름없었는데, 한 가지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채널의 거의 모든 영상에, 앨런(Alan)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 그랬다. 더 나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만, 희뿌연 눈알과 짓무른 푸른 얼굴, 듬성듬성 난 가는 이빨이 눈에 띄는 앨런은 어디를 보아도 괴물이었다.


데이지 브라운 채널은 첫 영상이 바이럴된 후 관심을 끌었다. 〈내가 앨런 밥 주는 법(How I feed Alan)〉(2017)이라는 제목의 영상엔 괴물 앨런이 전면을 차지한 썸네일이 놓였는데, 확실히 거기엔 누구나 한 번쯤 눌러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수상함이 있었다. 영상은 3분 남짓으로 짧았으며 내용도 별 게 없었다. 데이지가 포대기에 싸여 움직이지 못하는 작은 앨런에게 설탕 캡슐을 먹이는 장면이 다였다. 호기심에 끌려 영상을 보게 된 사람 중 몇몇은 “또다시 인터넷의 이상한 영역에 들어왔다”라며 관심을 껐을 테지만, 그 외 누군가는 분명히 이 채널을 구독하거나, 최소한 꾸준히 지켜보았을 것이고, 얼마 뒤 이 채널이 크리피파스타의 확장된 내러티브를 차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내가 앨런 밥 주는 법(How I feed Alan)〉

그 뒤 채널엔 드문드문 영상이 업로드되었고, 이야기는 아주 천천히, 1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작은 앨런을 돌보는 데이지, 사라진 아빠에 대해 말하는 데이지,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못하며 혼자서 끊임없이 외로워하는 데이지. 그리고 앨런이 데이지 브라운의 사라진 아빠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또 다른 괴물이 있으며 데이지의 아빠가 사라진 건 그 괴물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아빠는 데이지의 유일한 친족이었으며 그러나 폭력적인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앨런은 마침내 데이지의 돌봄이 필요 없는 큰 괴물로 자라나고 마는데, 마치 사라져버린 아빠와 똑같이 위협적으로 굴기 시작했다는 것 등등.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데이지 브라운이 보여주는 내러티브에는 빈칸이 많을 뿐더러, 숨겨진 부분도 많다. 데이지의 신체 일부는 언제나 스크린 바깥으로 튀어나가 있고, 음질은 버석하며, 카메라는 흔들리고 자막은 가공되어 있지 않다. 이 (의도된) 아마추어리즘은, 무언가를 말하고 전달하는 대신 누락하고 숨기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온전히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비어 있는 부분들은 데이지 브라운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16 (영상 내 자막이 아닌) 유튜브 자막을 통해, 또 이 내러티브를 굳이 분석하려 드는 익명의 참여자들과, 참여자들이 기록한 팬덤 위키 내 문서들과, 또 ‘리뷰 유튜버’들의 비디오 에세이를 통해, 그러니까 네트워크된 상황을 경유해 퍼즐 맞춰진다. 말하자면 이 내러티브는 네트워크를 유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비어 있다. 마치 슬렌더맨을 둘러싼 여러 파생물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슬렌더맨이, 이를테면 ‘페이크 다큐멘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듯, 데이지 브라운의 유튜브 채널 역시 슬렌더맨을 둘러싼 크리피파스타 내러티브와는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가장 큰 차이는 아마 괴물의 존재일 것 같다. 앞에서 말했듯, 슬렌더맨은 ‘힐끗 보기(glimpse)’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은 등 뒤에서 나타나거나 시선 바깥에서 튀어나오고,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지 않고 노이즈와 함께 분산된다. 그것은 손실을 경유해 현실에 기생하는 이미지이며, 흐리고 저화질일수록 효과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데이지 브라운의 채널에서, 괴물은 갑작스러운 곳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기법으로써 ‘점프 스케어’ 정도는 존재한다.) 괴물은 내러티브가 시작되는 첫 순간 모습을 드러내고, 가장 약한 모습을 전부 보여준다. 손실을 노리고 조형된 디지털 이미지가 아니라 손으로 만든 공예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괴물 앨런은 그 무엇도 속이려 들지 않는다.


무엇도 속일 생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무서운 이야기-네트워크의 중요 노드가 되는 현상. 아마 이것이 데이지 브라운의 작동 방식이 슬렌더맨의 그것과 가장 다른 지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데이지 브라운은 괴담을 생산하지만, 그 경로는 안정되어있고, 그렇기에 위험으로 뻗어 나가지 않으며 비교적 안전하다. 슬렌더맨이 자연이라면 데이지 브라운은 정원이다. (이 비유에는 큰 비약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을 마냥 더 나은 괴담이라고 포장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데, 슬렌더맨의 존재론, ‘힐끗 보기’를 포기한 크리피파스타의 DIY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첫 영상이 업로드된 후 약 1년 정도 지난 뒤, 간헐적으로 업로드된 이 누더기 같은 내러티브도 드디어 결말로 접어 든다. 그에 따라 어느 정도 드라마가 격렬해지는데, 문제는… 몸싸움이 벌어지고, 비밀이 밝혀지고, 앵스트가 폭발하는데도, 그 어쩔 수 없는 어설픔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참고 봐주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심지어 대사조차… 움찔거리며 설탕 캡슐을 받아먹던 작은 괴물에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난 괴물 앨런은 울부짖는 데이지를 가로 막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제일 아끼는 작은 다이크가 이렇게 빠져나가게 그냥 놔둘 것 같아?” 장난하냐고… 하지만 크리피파스타가 빠르게 관습화된 후, 그 배경 위에서 형성된 내러티브로써, 데이지 브라운은 진짜 믿음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포기한 대신 가짜 믿음 위에서 확고하게 정상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를 위해 실재는 물론 필요하지 않으며, 더는 허구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내러티브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진 이 엉망진창의 무언가가 과연 내러티브이기나 할까? 하지만 이 엉망진창 내러티브에 누군가는 마음을 이입한다. 이야기는 거칠지만 효과적이다. 유일한 친구이자 내가 애쓰며 돌보던 무언가가 나 몰래 매일 자라나 나를 해치기 시작한다는 것. 천천히 자라나 말을 배우고 팔 다리가 생긴 괴물 앨런은 데이지 브라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니네 아빠는 어디 있어, 데이지?”) 스트로베리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죽인다. 게다가 데이지 브라운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이 채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데이지를, 그리고 데이지의 영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괴물 앨런을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데이지는 울면서 말한다. 사람들은 다 앨런만 보고 싶어해. 아빠는 내가 있는 데도 왜 앨런을 만들어낸 거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싶은 이카리 신지적 감정과 함께, 채널에 올라온 마지막 영상에서, 데이지 브라운은 그 동안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방법, 마침내 집을 나가버리는 방법을 실천에 옮긴다. 그러나 괴물 앨런은 시시덕거리며 그를 막아서고, 하지만 데이지는 어떻게든 집을 나가야 하기에, 또 한 가지 그 동안 해본 적 없던 일을 저지르는데, 그것은 바로 유일한 친구였던 그 괴물을 죽여 없애는 일이다. 많은 것을 간추려 말하자면, 데이지 브라운의 이야기는 유독한 관계에 고통받던 누군가가 결국 집을 뛰쳐 나오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 해방감 같은 것은 없고, 그저 집을 나온 뒤에도 상실과 고통은 계속되리라는 익숙한 감정이 자리한다.



(이미지2) 데이지 브라운 채널에 올라온 마지막 영상의 마지막 장면.

〈내가 어떻게(그리고 왜) 데이지 브라운을 만들었는가(How (and why) I made Daisy Brown)〉

데이지 브라운의 창작자 줄리아 대퍼(Julia Dapper)는 올해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다. 비디오 에세이 비슷한 콘텐츠를 게시하는 이 채널을 통해, 대퍼는 “내가 어떻게(그리고 왜) 데이지 브라운을 만들었는가(How (and why) I made Daisy Brown)”라는 제목으로 늦은 후일담을 공개한다. 대퍼는 비슷한 형식의 유튜브 영상들, 그러니까 (슬렌더맨의 파생 내러티브인) ‘마블 호넷’과 같은 시리즈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되뇌었지만 이 아이디어는 끝까지 사라지질 않았으며… 어느 날 데이트 상대에게 이 머릿속 계획에 대해 털어놓게 된다. 그러자 상대방은 대퍼에게, 그런 걸 대체 왜 하냐고… 사람들이 전부 비웃을 거라고 말했고, 대퍼는 그 다음 날 바로 괴물 앨런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컨대 데이지 브라운의 내러티브 안에는 크리피파스타와 같은, 어둡고 이상한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10대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 세상에게 품은 앙심(spite) 비슷한 게 있다. 누군가 영상에 이입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만약 이것이 내러티브로 허용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앙심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는 어쩌면 기존의 내러티브와 데이지 브라운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차이점을 갖는지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가 되느니 세상을 저주하는 10대가 되는 게 더 낫다는 점에서, 나는 이 이야기가 슬렌더맨의 충격 위에서 들여다볼 만한, 교훈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보기로 한다.




1ㅤJoe Ondrak, 「Spectres des Monstres: Post-postmodernisms, hauntology and creepypasta narratives as digital fiction」, 『Horror Studies』 9(2), October 2018, 3p.

2ㅤJoe Ondrak, 위의 글, 12p.

3ㅤ"r/nosleep Rules", 2021년 8월 25일 접속. 출처.

4ㅤJeffrey A. Tolbert, 「"Dark and Wicked Things": Slender Man, the Folkloresque, and the Implications of Belief」, 『Contemporary Legend series』 3, 2015, 13p.

5ㅤJoe Ondrak, 위의 글, 18p.

6ㅤJoe Ondrak, 위의 글, 8p.

7ㅤKevin Cooley, Caleb Andrew Milligan, 「Haunted objects, networked subjects: The nightmarish nostalgia of creepypasta」, 『Horror Studies』 9(2), October 2018, 194p.

8ㅤ'백룸(The Backrooms)'이라는 크리피파스타와 그 성질에 대해서는 abs 2호에 실린 이지우, 「매혹의 키놉시아」를 참조.

9ㅤPaul Manning, 「Monstrous Media and Media Monsters: From Cottingley to Waukesha」, 『Slender Man is Coming』, 2018, 168p.

10ㅤAdam Daniel, 「‘Always Watching’: The Interface of Horror and Digital Cinema in Marble Hornets」, 『Global Media Journal: Australian Edition』, 10(1), 2016, 5p.

11ㅤ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팬덤 위키 내 슬렌더버스 위키를 훑어보라. 출처.

12ㅤAndrea Kitta, 「“What Happens When the Pictures Are No Longer Photoshops?” Slender Man, Belief, and the Unacknowledged Common Experience」, 『Contemporary Legend series』 3, 2015, 70-71p.

13ㅤ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위키피디아 문서를 참조. 가해자인 애니사 와이어(Anissa Weier)와 모건 게이저(Morgan Geyser)는 각각 2급, 1급 살인미수로 기소되었다. 출처

14ㅤJeffrey A. Tolbert, 위의 글, 42p.

15ㅤJeffrey A. Tolbert, 위의 글, 44p.

16ㅤ계정은 아직도 살아 있다. 출처.



무너져
김얼터

언어는 세계를 테라포밍(terraforming)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테라포밍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및 위성, 기타 천체의 환경을 지구의 대기 및 온도, 생태계와 비슷하게 바꾸어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일차적으로 테라포밍은 자연을 이용 가능하게,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특정 형태를 부여(form)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글은 테라포밍의 범주를 확장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안전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언어도 일종의 테라포밍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로 3차원을 가로지르고 4차원으로 도약한다. 언어는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어쨌든 직접 만질 수 없다는 인류 최대의 약점(이자 강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착각을 생산하기 위한 기계다. 혹은 보잘것없는, 미미한, 너무 작고 가벼워서 잊히고 말 것을 위한 기계. 언어는 세계를 구획하는 동시에 우리를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울타리다. 그런데, 언어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리 애스터(Ari Aster)의 〈미드소마(Midsommar)〉(2019)와 나홍진의 〈곡성〉(2016)은 어느 날 갑자기, 또 우연히 닥친 사건에 사람들이 휘말리는 광경을 그린다. 귀신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공포 영화로 장르화되는 두 영화는 고어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 주지만 휘말리는 광경을 그린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전자의 사람들은 어떤 마련된 환경 안으로 침입하거나 초대를 받아 들여보내지고, 후자의 사람들은 그들이 마련한 환경을 침투당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또 우연히 닥친 사건’이라 함은 미스터리하고 오컬트적인 제의/굿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영화들에서 주요한 사건이자 유일무이한 사건은 바로 그들이 세계라고 알고 있는 것의 장막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이 글은 근 몇 년간 많은 공포 영화 중에서도 유달리 찬사와 비난의 대상이었던 〈미드소마〉와 〈곡성〉을 차례로 짚는다. 또한 내가 그동안 써 온 글들보다는 영화 감상문에 가까울 것임을 미리 밝힌다.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는 감독의 전작인 〈유전(Hereditary)〉(2018)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우리는 모두 욥

〈미드소마〉의 대니와 〈유전〉의 애니의 가족들은 매우 불행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이 불행은 인과율에 기반하지 않는다. 즉, 이 불행은 그들이 어떤 금기를 어겼거나 인간의 분수에 넘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찾아온 복수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나 보통의 영화 주인공들이 할 법한 절망(왜 하필 나일까! 왜 이런 고통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에게 찾아온 걸까!)을 하지 않는다. 이런 류의 절망, 즉 아무런 이유 없이 닥치는 불행과 잘못한 것도 없이 맞이해야 하는 재앙, 그리고 ‘왜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누릴 자격 없는 사람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전혀 새롭지 않다. 사람들은 기원 전부터 이에 관하여 질문했다.


성경 속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 욥은 신실한 믿음으로 신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고 있었으나, 어느 날 사탄이 욥의 믿음이 신실한 것은 신이 욥에게 내린 축복들 때문이고, 축복을 앗아간다면 욥은 신을 저주할 것이라고 내기를 건다. 신은 이 내기를 수락해 욥의 모든 재산과 부, 가족들까지 빼앗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자 사탄은 그의 몸에 피부병을 일으켜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 그가 믿음을 저버릴 것이라고 다시 내기를 건다. 신은 또 이 내기를 받아들여 욥이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허용한다. 욥의 아내는 신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고 폭언을 하고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잘못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신에게로 돌아가 조아리라고 조언하지만, 욥은 이 재앙이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에는 이유 없이 닥치는 불행과 재앙, 무결함의 관계, 그리고 세계의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이 잘 담겨 있다. (어찌 되었든 욥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신의 축복을 되찾는다.)


대니와 애니의 세계에서는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아니, 아예 인과관계가 없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사건들의 연쇄는 언어로 세계를 논리정연하게 구조화하려는 언어의 안쪽에서는 비상식적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약간 바꾸어서, 우리에게 불행인 많은 것들은 멀리서 바라본다면 단지 서로 관련 없는 사건들의 연쇄거나 우연한 겹침일 뿐, 여기에는 어떤 가치 판단도 개입되지 않는다. 대니와 애니는 미시적으로는 불행이고 거시적으로는 그냥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 이 사건들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대니와 애니의 주변 사람은 이 혼란을 언어화하여 세계를 테라포밍하고자 한다.


그 사고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이지!

〈유전〉과 〈미드소마〉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인과관계가 먼저 있고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거친 뒤에야 인과관계가 비로소 구축된다는 것이다. 애니의 직업은 미니어처 아티스트로 그녀는 극 내내 미니어처를 제작한다. 그녀의 작품은 애니가 자신의 삶에서 발췌한 장면들을 재현하는데, 주로 모종의 불쾌함을 안고 있는 장면들(침대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애니를 바라보고 있는 친정 엄마 같은)이다. 여기서 미니어처 작품들은 그 상황에 놓여 있던 애니가 1인칭으로, 그러므로 수평적 시선으로, 사건 안에서만 바라볼 수 있던 세계를 외재화하여 3인칭으로 바꾸면서 전체를 수직적 시선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애니의 남편이 몸서리를 쳤던 작품 중 하나는 애니의 딸인 찰리의 목이 떨어져 죽은 장면을 재연 혹은 재현한 것인데, 남편이 설마 이 작품을 찰리가 죽을 때 함께 있었던 피터에게 보여 줄 것이냐고 묻자 애니는 “걔 보여 줄 거 아니야, 그 사고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이지!”라고 대답한다. 이를 보충하듯, 제작된 미니어처를 보여 주는 카메라의 위치는 종종 애니의 가정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여 주는 카메라의 위치와 겹쳐진다. 마치 이 세계 또한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도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수용해야만 하는 인간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일 뿐, 누가 이 세계를 창조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른 한편 〈미드소마〉에서는 대니 대신 그녀의 동행들이 이 역할을 맡는다. 대니의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은 학위 논문 리서치를 위하여 호르가(Hårga) 마을의 하지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이 축제에 동원되는 모든 것을 학문적 언어와 지식으로 포획, 객관적인 사실로 정리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으며 실제로 그런 야망을 실행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지제의 신성함은 작동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들 중 한 명은 호르가 마을의 상징적인 나무에 소변을 보는데, 이에 분노하는 마을 주민을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냥 나무를 가지고 왜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황당해한다. 이 장면은 세계의 신비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하는데, 호르가 마을의 주민들은 세계를 바꾸거나 변혁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거스르지 않는다기보다 인간이 세계를 거스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유지 보수, 세계라는 흐름에 동참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이나 섹슈얼리티,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분노, 즐거움 모두는 예비된 절차를 따르는 것일 뿐 그 무엇도 특별하지 않다. 호르가 마을의 사건을 논리적 언어로 구조화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죽는다. 그러나 이 역시 건방지게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에게 향하는 세계의 리벤지는 아니다.


또한 그들에게 진정한 종류의 소통이란 언어를 경유하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장면을 목격한 대니가 신체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올리는 절규에 주민들은 ‘그런 놈은 그만 잊어버리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세요’ 같은 대사가 아니라 함께, 짐승처럼 절규하는 것으로 합일을 시도한다. 대니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얻지 못했던,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바로 이런 언어 외의 일로 가능하고, 대니가 오월의 여왕이 된 것은 외로워서일지도 모른다. 호르가 마을은 인간의 소위 지성이라는 것과 그 지성으로는 절대 무너트릴 수 없는, 오히려 세계가 언어를 무너지게 만드는 결투의 장소다.


버섯과 언어의 바깥

그런데 언어와 세계가 맞붙는 지점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전에, 또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니와 남자 친구의 관계는 불안정하다. 잘은 모르지만 과학적으로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실제로는? 사랑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의 삶을 짓누르기도 하며, 우리에게 그런 힘이 숨겨져 있었다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의 효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사랑은 우연을 운명으로 건설하고 운명도 우연으로 전락하게 한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만들고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내가 지금껏 써 온 몇 가지 글에서 ‘신비’라고 칭하는 것, 즉 ‘언어로 모조리 설명해 버린다 하더라도 소거되지 않는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에는 사랑의 존재 방식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세계를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세계에는 언어로 소거되지 않는 것이 계속 남는다. 우리는 사랑을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사랑에는 언어로 소거되지 않는 것이 계속 남는다. 사랑은 내가 앞서 설명한 세계처럼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기 때문에, “머리론 아는데 가슴으론 그게 안 돼……. 내 심장은 그에게만 끌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어…….”라는 문장이 작동하는 장소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혹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바로 그 이유로 영원히 좇게 되는 것, 그것이 저편에 있다. 나는 이것이 신비의 작동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예술은 이 신비에 도전한다. 상상력은 이를 위한 도구다.


〈미드소마〉에서 호르가 마을의 하지제는 90년에 한 번 9일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시기의 축제다. 이 9일이라는 기간 동안 언어의 안쪽,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만큼의 인과응보적 세계와 언어의 바깥, 비상식적이고 불가해한 초자연적 세계, 인과관계 없이 계속 발생하기만 하는 세계가 서로에게 트인다. 그러나 여기에 언어의 은총과 수호를 받고 있는 자는 들어갈 수 없다. 호르가에 도착한 대니 일행은 우선 마약 성분이 있는 차를 마신다. 이는 〈곡성〉에서도 마찬가지다. 〈곡성〉에는 두어 번 정도 환각 버섯을 먹은 사람들이 일으킨 사고에 관한 뉴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의 상태에서, 즉 언어의 가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뉴스거리가 될 수 있다.


이외에도 여기서 정리한 특징들은 나홍진이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각본을 쓴 최근작 〈랑종(The Medium)〉(2021)에서도 마찬가지로 견주어 볼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랑종〉은 태국어로 ‘무당’을 뜻하지만, 영어 제목은 ‘중간’이다. 무당, 영매 등 처음부터 언어의 안팎 그 중간(medium)에 있는 사람들만이 언어의 안팎이 트이고 세계와 ‘진정한 의미에서 합일’하는 엑스터시에 입장할 수 있다. 즉, 신비는, 사랑은, 세계는 믿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미드소마〉의 대니가 오월의 여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참가한 춤 대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발등에서 돋아난 자연을 환각으로 보며 빙글빙글 도는 춤을 반복해서 춘다. 결국 그녀는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처럼 꽃과 한 몸이 되어 세계 안으로 스며들고 마침내 웃는다.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외롭고 괴롭고 아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기쁨뿐.


이쯤에서 우리는 ‘인간의 좁은 시야로 볼 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로 가득 찬 이 세계에 인간이 좋든 싫든 살고 있다(우리는 모두 욥). 인간은 이 세계를 언어로 구조화해서 인과관계를 만들고 선형적이든 아니든 어떤 종류의 내러티브를 축조, 즉 테라포밍한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운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그 사고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이지) 그게 엄청 잘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어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언어의 바깥에 닿기 위해서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버섯과 언어의 바깥).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언어의 안팎이 트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는 놀랍도록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는 다른 종에 비해 더 특별한 종도, (환경 문제는 매우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이지만) 이 우주에 엄청난 반향을 끼칠 수 있는 종도 아니다. 이 생각도 엄청나게 새로운 생각은 물론 아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삼상 12:16)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욥 37:14)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은 다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일뿐이다.



이제 겨우 〈곡성〉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곡성〉과 〈미드소마〉 양자는 모두 언어의 바깥에 주목하고 세계를 언어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무용함과 그 앞에 선 우리 존재의 미미함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미드소마〉의 대니는 세계와 합일하며 웃지만, 〈곡성〉의 종구는 언어의 안팎이 트이는 곳에 입장한 자신의 딸 효진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남겨진다. 여기서는 〈미드소마〉를 볼 때 서사에 집중했던 것보다는, 무당 일광이 살을 날리기 위해 굿을 하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생각해 본다. 〈곡성〉이 재미있는 영화라면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추리를 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광이 외지인과 같은 훈도시를 입었다느니, 무명이 박춘배의 겉옷을 입고 있었다느니 같은 것을 근거로 들어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이 장면이 유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이 “이 사고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려 노력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일광이 살을 날리는 굿을 시작할 때, 귀신에 씌었다고 생각되는 효진은 효진의 방에 있고, 외지인은 자신의 집에 차려 놓은 제단 앞에서 자기만의 굿을(혹은 역살을 날리는 굿일 수도) 시작한다. 이때 외지인의 집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땅을 구획하기 위해 제작한 사회적 시스템인 주소가 없는 곳이다. 통계 바깥의, 정식이 아닌, 동사무소 시스템과 지도 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장소. 그는 곡성에만 외지인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에도 외지인이다.


어쨌든 이 세 개의 장소는 서로가 서로에게 겹치며 등장하는데, 이 일련의 장면들은 앞서 〈곡성〉이 편집된 암묵적인 문법을 뒤엉키게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경찰과 범인이 몸싸움을 벌이는 어떤 장면을 생각해 보자. 경찰이 주먹을 뻗는 씬이 먼저 보인다. 그러면 거의 99%의 확률로 다음 씬은 얼굴을 맞는 범인의 모습이 나온다. 주먹을 맞은 범인이 쓰러졌다가 다시 경찰에게 덤빈다. 그러면 또 거의 99%의 확률로 다음 씬은 경찰에게 덤비는 범인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 줄 것이다. 이는 영화 편집이 인과관계와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다. 영화 편집은 어떤 순서도, 선후 관계도 없이 존재하는 동시다발적인 사건들을 하나의 시간으로 엮어 여러 개의 무관한 장면을 서로 관련 있는 사건으로 만들며, 이는 우리가 언어 밖의 세계와 맞붙는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일과 꼭 닮았다. (심지어 이렇게 치밀하고 교묘하게 이어붙여 완성된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언어를 거쳐 인과관계가 구성되어야 하는 날것의 상태로 있다. 애니의 미니어처가 그러는 것처럼, 대니의 동행들이 수양하는 학문적 지식들이 그러는 것처럼, 〈곡성〉에 등장하는 수많은 직업들이 상징하는 것(경찰-법, 치안이라거나, 신부-종교 등)처럼, 우리는 날것의 세계를 세공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항상 재현을 통해서 완성되며, 그러므로 사후적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편집 문법이 〈곡성〉의 제의 장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살을 날리는 무당 일광이 나무로 된 인형에 못을 박으면 방 안에 있는 효진이가 인형의 못 박힌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는 자기 신체 부위를 감싸 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면 관객은 ‘어? 혹시 일광이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게 아니라 효진이를 죽이려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에서는 외지인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럼 관객은 다시 ‘어? 효진이를 죽이는 게 아니라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말미에는 갑자기 무명이 나와서 ‘즈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 들어가믄 니 딸 죽어.’라고 말한다. 그럼 ‘어? 혹시 무명이가 효진이를 저렇게 만든건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외에도 일광이 누구에게 공격을 당하는지, 외지인이 누구 때문에 산에서 굴러떨어져 죽는지, 일광은 왜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챙기는지 등, 서사를 더 명료히 하고 인과관계를 더 명확히 할 수 있는 장면들은 생략되어 있다. 종구는 고통 받는 효진을 보다 못해 결국 일광의 굿에 깽판을 놓는다. 그제서야 효진의 고통도 멈춘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굿이 끝나 버렸기 때문에 효진의 고통도 멈춘 걸까? 외지인의 굿도 비슷한 시기에 끝나지 않았나? 종구의 상상은 현실이 되나?


어쩐지 편집이 덜 된 것 같은, 그러므로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장면들을 시간상 연달아 보기는 하지만, 관객은 앞에 나오는 장면과 뒤에 나오는 장면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신부가 초자연적 현상을 이야기하는 종구에게 “직접 봤어요?”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사실 종구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 악마일 것이라거나 외지인과 일광이 한패라고 추리하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은 무명이 효진이를 저주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나? 외지인의 집에서 효진이의 실내화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효진이가 귀신 들릴 만한 일을 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나? 〈곡성〉은 무엇이 사실이거나 사실로 인준을 받을 수 있냐고 묻는 영화가 아니다. 〈곡성〉은 사실의 개념 자체를 무너지게 하고 우리가 딛고 있는 언어가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에둘러 말한다.


이런 지점에서, 〈곡성〉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자신이 만들어진 바 사이에 교묘한 공명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영화다. 인과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로,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탐구하면서, 관객이 스스로 인과관계를 만들어 가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그 노력을 무화하는 다른 장면을 함께 보여 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는 일, 다만 세계를 바라보기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를 삶이라고 설명하거나 삶을 영화라고 말하는 일은 느끼하지만 유효하다.


할 수 있는 일이 목격밖에 없다는 것은 절망일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 글의 주요 주장은 세카이계, 포스트-진실, 짜라투스트라 등으로 확장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아래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약간 어리버리하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양이삼 신부가 외지인을 찾아가 그에게 묻는다.


“あなたは誰?”


세계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우리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엉덩이의 무거움*
김호원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1984년 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차용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 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서울: 민음사, 1999, 2011), 13.


1.

오늘 하루 엉덩이가 맞닿아 있던 표면을 떠올려 보자. 혹은 엉덩이가 느꼈던 감촉을. 이 일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한 번쯤 자신의 엉덩이가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란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 뒷근육을 잘 사용하지 않아 힘이 약해지고 쇠퇴하는 증상”1을 일컫는다. 엉덩이 주위의 근육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엉덩이 기억상실증은 근육의 기능과 관련된 증후군이지만, 이는 피부와 감각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엉덩이 근육의 기억상실은 엉덩이가 감내해야 하는 동시대의 생활 방식 자체, 즉 한 표면에 오래 앉아 있는/있어야만 하는 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TV와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HMD와 같은 VR 기기로 앉은 자리에서 일과 여가 모두를 해결한다.2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대부분의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그 편리함 밑에는 엉덩이의 문제가 깔려 있다. 아니, 깔려 있는 엉덩이가 있다.


2.

납량(納涼)의 의미가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 것"3이라 할 때, 납량물(納涼物)은 여름날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콘텐츠를 의미할 것이다. 대표적인 납량물로는 납량특집으로 제작되는 공포물이나 여름 휴가철을 겨냥하여 개봉하는 공포 영화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붙은 ‘납량특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공포물이나 공포 영화가 실제로 전달해 주는 시원함은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4 납량물이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에 따른 호르몬 작용으로 시원함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의학적인 근거에도 불구하고,5 그것이 가지는 실제적인 납량의 효과가 미미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깔린 엉덩이 때문인 것은 아닐까? 납량물을 관람하는 동안 우리의 혈관이 수축하고 식은땀이 난다고 하더라도, 엉덩이는 여전히 거실에 놓인 소파나 영화관 의자에 깔려 있기에. 그렇게 납작해진 엉덩이에는 납량의 틈이, 시원함이 들 수 있는 틈이 없기에.


그리하여 이 글은 앉은 생활로 그 기억을 잃은 엉덩이가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는 가능성, 이른바 엉덩이의 납량 가능성을 탐구한다. 특히 이 글은 전통적인 납량물로 여겨지는―또한 지나친 공포감 조성이나 가학성 등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공포 영화와 공포물 대신, 최근 유튜브에서 많은 사람에게 각광받는 ‘공간 (상상) ASMR’(이하 ‘공간 ASMR’로 통일)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이 글은 하나의 납량물로서 공간 ASMR이 엉덩이와 그 표면 사이에 틈을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실제적인 납량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이미지1)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배경인 호그와트의 그레이트 홀 ASMR / YouTube: asmr soupe

‘앰비언스(ambience) 비디오’라고 불리기도 하는 공간 ASMR은 일반 ASMR의 사촌뻘 되는 오디오-비주얼 콘텐츠로6, 괄호친 단어 ‘(상상)’이 보여주듯 가상의 시공간을 재현한 사운드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7 기존의 ASMR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을 트리거(trigger)로 팅글(tingle)을 느끼게 하는, 즉 그런 소리를 기제로 기분 좋게 소름 돋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면8, 이 공간 ASMR은 가상의 시공간에서의 현전의 경험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간 ASMR은 어떻게 납량물이 될 수 있을까?



(이미지2) 공간 ASMR 이미지 제작 과정 / YouTube: New Bliss


(이미지3) 위의 제작 과정을 통해 완성된 공간 ASMR 이미지 / YouTube: New Bliss

공간 ASMR은 관람자의 신체를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위치시킴으로써 납량물로 기능한다. 비록 관람자의 엉덩이가 실제 현실의 물질적인 표면에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가상 현실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체를 재인식하게 하고 엉덩이와 표면 사이에 틈을 만들어 시원함이 깃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과 기대라는 심리적 상태에 따라 신체의 병세가 실제로 호전되는 플라시보 효과와 비슷한 현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공간 ASMR은 시청각적 요소를 접하는 것만으로 관람자가 빠르게 가상의 시공간적 상황을 믿고 기대할 수 있게끔, 즉 몰입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단순한 정신적 반응 이상의 신체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시각적 요소로서 이미지는 공간 ASMR이 재현하고자 하는 가상의 시공간을 한눈에 보여주며 관람자들에게 몰입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 이미지는 주로 실재하는 장소를 촬영한 사진이나 3D 프로그램으로 렌더링한 파일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며, 공통적으로 관람자가 더욱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편집의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많은 제작자들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1인칭 시점으로 공간 ASMR의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이는 관람자가 해당 시공간을 직접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공간 ASMR 이미지에는 다른 인물이, 더 정확하게는 관람자를 바라보는 다른 인물의 시선이 부재하는데, 이는 관람자가 주관적으로 가상의 시공간을 그려낼 수 있게 한다. 한편 공간 ASMR 이미지에 가미된 간단한 애니메이션들, 이를테면 흘러내리는 빗방울이나 다리를 핥는 고양이는 관람자에게 그것이 그려내는 공간이 실제 환경처럼 시간이 흐르고 변화가 일어나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주어 관람자가 더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끔 돕는다.



(이미지4) 공간 ASMR 사운드 제작 과정 / YouTube: Ambient Storyteller

이렇게 공간 ASMR의 이미지가 가상의 시공간에 더욱 빠르게 몰입할 수 있는 출발선이 된다면, 사운드는 관람자가 지속적으로 그 몰입을 이어나가 현실과 가상을 서로의 영역으로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에서 밝히고 있듯이 몰입형 콘텐츠에서 청각 정보는 해당 콘텐츠가 얼마만큼 몰입을 유도하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 기준 중 하나이다. 특히 공간 ASMR의 이미지가—입체적인 시공간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HMD 기반의 가상현실과 달리—고정된 시점과 평면적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사운드는 공간 ASMR이 그려내는 시공간에 대한 몰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작자들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사운드 편집 과정에서 시간차와 레벨차를 고려하여 관람자가 귀로 직접 듣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다양한 샘플들을 배치한다. 이는 관람자가 공간 ASMR의 시공간을 실제 환경처럼 3차원적으로 인식하고 1인칭 시점의 이미지를 수평면상으로 확장시킬 수 있도록 하는 효과를 낸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ASMR이 플라스틱을 두드리는 소리 등 특정한 한 가지 소리만 집중했던 것과 달리, 공간 ASMR의 사운드는 특정 시공간에서 들릴 수 있는 또는 들릴 법한 소리를 전부―일상생활에서는 노이즈로 여겨지는 소리까지―담아냄으로써 관람자가 해당 시공간을 더욱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인식하게 돕는다. 이렇게 공간 ASMR의 사운드는 관람자가 고정된 시점의 평면 이미지 너머로 3차원적인 가상의 시공간에 자신의 신체를 장시간 동기화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틈을 만들고 그 속에서 실제와 가상 환경에서의 경험이 서로 교차할 수 있게 한다.



(이미지5)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배경인 별장 ASMR에 달린 댓글 / YouTube: yuza asmr

공간 ASMR의 관람자들은 유튜브 댓글로 자신의 관람 경험을 공유하는데—몇몇은 자신이 단순한 몰입 너머 과몰입의 경지에 다다른 ‘과몰입러’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공간 ASMR이 지니는 실제적인 납량 효과를 확인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관람자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배경인 1980년대 이탈리아 근교의 어느 별장 ASMR을 자신의 정신이 맑아졌다고 밝힌다. 그 관람자를 따르면, 새벽녘에 관람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ASMR은 관람자의 방 안에 해가 뜨게 하고 방 안을 나른한 오후처럼 따뜻하게 만들었다. 물론, 관람자의 방에 정말로 해가 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ASMR은 관람자가 실제 햇볕을 받을 때와 동일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신체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믿으면 병리적 현상이 소거되는 플라시보 효과와 같이, 해당 ASMR은 그 관람자가 단순히 이탈리아 근교 어느 별장의 소리와 모습이 담긴 사운드-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체가 실제로 해당 시공간에 있다고 느끼게 하여 감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공간 ASMR이 가상 환경에서의 경험을 실제 환경에서의 경험으로 교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HMD 등을 통한 가상 현실 경험은 관람자가 착용한 기기가 피할 수 없는 재매개의 느낌을 발생시킨 반면, 공간 ASMR을 통한 가상 현실 경험은 기기의 매개 없이—있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스크린이나 오디오 장비 정도—이루어지기 때문에 둘 사이의 경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한다. 이로써 공간 ASMR을 통해서 관람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실제 환경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주변에 놓인 사물들을 다른 맥락 속에 배치하여 사물 간의 관계를, 그 사물들과 신체의 관계를 그리고 더 나아가 물질들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배치 그리고 새로운 구성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기존의 것들과 겹쳐지고 또 충돌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틈이 만들어진다. 엉덩이와 그것이 맞닿은 표면 사이의 틈, 납량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틈.


4.

공포물이나 공포 영화를 관람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 ASMR를 듣고-바라보는 우리의 엉덩이는 여전히 표면에 붙어 있다. 그러나 공간 ASMR은 관람자를 둘러싼 환경-사물-물질들의 배치를 바꾸고 틈을 만들어냄으로써 심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신체적 차원에서도 변화를 이끈다. 그리하여 공간 ASMR은 엉덩이가 맞닿은 그 표면을 거실 소파나 영화관 의자 대신 알프스 산자락의 나무 의자나 바닷가의 해먹으로 느낄 수 있게 하여 실제적인 납량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미지6)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영화 ⟨터미네이터⟩(1999), ⟨써로게이트⟩(2009), ⟨월-E⟩(2008), 드라마 ⟨이어즈&이어즈⟩(2019)

그러나 여전히 엉덩이 기억상실증의 문제가 남아 있다. 공간 ASMR을 통해 엉덩이가 맞닿은 표면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짓눌려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짓눌린 엉덩이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이 되어버린 걸까? 인간의 존재 방식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져 소프트웨어화된 가상 현실을 떠돌고 아바타로 몸을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엉덩이의 무게는 그대로이다. 인간을 우주로 이주 보내거나 인간의 몸에 이식된 칩으로 전자기기를 다루는 미래를 그려내는 서사에서 앉거나 누워 있는 인간의 모습을 빼놓을 수 없듯이.


5.

어쩌면 이러한 모순이, 그러니까 앉은 생활로 기억을 잃어가는 엉덩이와 앉은 자리에서 피서지로 떠나려는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모순이, 실은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아닐까? 시간적-공간적-금전적인 이유로 피서를 갈 수 없는 엉덩이는 공간 ASMR을 필요로 하고, 공간 ASMR은 그 여정을 위해 그리고 시원함을 느끼기 위한 실제의 엉덩이가 있어야 하니. 1929년에 태어난 밀란 쿤데라는 20세기 후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존재로 전락한 인간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는 삶의 굴레에서 원대한—혹은 무거운—가치를 창출하려고 하는 모순에 관해 썼다. ⟨생각하는 사람⟩(1904)이 보여주듯 삶의 무게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가벼우나, 그 가벼움이 무겁고 단단한 청동 조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2029년은? 21세기 전반의 인간 존재는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쓴 시대보다 더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네트워크에 올라타는 것만으로, 즉 오디오-비주얼을 경유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제 다른 시공간에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그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하는 케이블 선을, 수없이 얽혀 그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조차 모를 케이블 선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쉽게 그리고 빠르게 가상 현실에 가닿기 위해 더 선명한 화질의 스크린과 더욱 깨끗한 음질의 오디오 장비를 만들어낼 것이다. 가벼워지려는 욕망은 모순적으로 수많은/무거운 장비에 대한 욕망을 낳는다.


우리는 엉덩이와 함께 태어난 존재이기에 엉덩이 없는 자유를 꿈꾸고, 그 어느 때보다 쉽고 빠르게 취할 수 있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정교하고 견고한 장비와 그 표면에 맞닿은 엉덩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여름에도 짓눌린 엉덩이를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엉덩이와 표면 사이의 틈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1ㅤ네이버 지식백과 - 시사상식사전. 검색어: 엉덩이 기억상실증.

2ㅤ실제로 한국인의 하루평균 앉아서 보내는 시간의 추이가 매년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양해원, "[카드뉴스] 엉덩이도 기억상실증에 걸려요," 매경헬스, 2019년 7월 16일 출처.

3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어: 납량.

4ㅤ손봉석, “공포영화 보면 시원하다” 14.8% 그쳐, 경향신문, 2007년 7월 21일. 출처.

5ㅤ유상연, "제철 맞은 공포영화, 보면 정말 시원해질까," 한겨레신문, 2009년 7월 17일. 출처.

6ㅤ공간 ASMR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개별 콘텐츠 사례는 다음의 기사를 참고. Eliza Brooke, “The Soothing, Digital Rooms of YouTube,” New York Times, February 16, 2021, 출처.

7ㅤ그러나 공간 ASMR이 꼭 가상의 시공간만을 그려내는 것은 아니다. 공간 ASMR은 판타지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공간을 모티브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를 테면 파리와 같은 도시 길거리나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 ASMR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8ㅤ 네이버 지식백과 - 시사상식사전. 검색어: ASMR.



🥠: 박세영
대답하는 사람: 박세영, 질문하는 사람: 이지우, 기록하는 사람: 김얼터

🥠는 ‘까 봐야 안다’를 슬로건으로 하는 인터뷰 코너다. 인터뷰의 형식을 경유하지만 특별한 목적지는 없기 때문에, 대화의 방향은 그때그때의 포춘(fortune)에 맡긴다.

박세영 영화를 만든다. 영화를 만들지 않을때에는 비디오 작업과 각종 이미지 작업을 한다. 최근에는 사진집과 단편 몽타주-무용 실험영화, 그리고 공포/코미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서울에서 활동한다.


지우 만나 뵙게 되어 반갑다.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세영 학부에서는 영화를 전공했고 현재는 비디오아트과에서 공부 중이다. 다음 주부터 마지막 학기이고, 영화와 비디오 작업을 병행하며 최근에는 사진집을 발표했다.


지우 개인 작업부터 상업씬까지 굉장히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납량 특집이라는 주제 안에서 세영 님의 작업 몇 가지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2019년 발표한 단편 영화 〈캐시백〉에서 시작하면 좋겠다. 코믹 스릴러라고 장르를 정해 두었는데, 관객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코믹한 부분들이 먼저 다가온다.


세영 원래 영화를 구상할 때는 코믹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배우들이 다들 실제 친구들이고 전문 배우가 아니다 보니 대부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서사와 연기가 흘러갔다. 나 또한 ‘기승전결’ 구조를 모범적으로 따르는 영화는 처음 제작해보는 거라... 이런 지점들이 오히려 내가 예측하지 못한 분위기를 더해 주는 것 같다. 학부 때 2시간짜리 장편 영화를 졸업 작품으로 찍었는데, 교수님이 ‘이걸로는 졸업 못한다. 이게 무슨 영화냐.’라고 평가하셨다. 결국 적은 예산으로 짧은 기간 동안 빠르게 다시 찍은 것이 바로 이 영화다. 그래서 조금 러프한 부분들이 있다.


지우 전개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이 작업의 줄거리는 중고거래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겪은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상하는 단계에서 어떤 출발이 있었나?


세영 내 모든 작업이 직접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에 중고거래를 많이 했었다. 어떤 날에는 8번 정도 중고거래를 하고. 물건 하나를 판 돈으로 다른 걸 금방 또 사고 다시 팔고 또 사고 그런 밤이 있었다. 이때 중간에 거래가 하나라도 펑크 나면 그다음 계획들이 전부 망가져서 플랜을 다시 짜야 했다. 사기도 당했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왜 이러고 있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걸 기초로 했다.


지우 여기에 스릴러가 접목된 것이 흥미로운데, 스릴러적인 요소는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나? 스릴러란 무엇일까?


세영 영화에서, 인물이 어딘가를 보고 걸으면 스릴러를 위한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목적지를 향해서 쭉 걸어가는 게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다른 것을 바라본다거나, 뒤를 자꾸 본다거나, 뭔가에 쫓긴다는 느낌이 있어야 스릴러답다는 생각도 들고. 이때 무엇에 쫓기냐 하는 것은 꼭 일반적인 괴물이나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적인 것일 수도, 공간적인 것일 수도, 감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다양한 것들이 스릴러를 만들어낸다.


지우 주인공인 고우의 임기응변이라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의 발생이라든지, 그런 지점에서 남모를 짜릿함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화면이 어둡게 깔려 있었는데 학이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밝아지는 과정이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미지1) 〈캐시백〉(2019) 스틸컷.

세영 영화의 다른 모든 장면보다 학이 날아가는 장면을 먼저 찍었다. 〈캐시백〉 만들기 몇 개월 전에 고향에 갔었는데, 아빠랑 산책하는 길에 학이 있어서 그걸 찍었고, 이 학을 촬영한 이미지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런데 우표에 있는 새가 학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맥거핀처럼 작동하는 지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일부러 의도하거나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설계한 것은 아니다.


지우 그 새가 학이 아니었다니... 앞으로 대비(contrast)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미리 한번 짚었다.


세영 대비를 통한 효과는 어떤 것이었냐면, 〈캐시백〉을 만들 당시 그때가 촬영 관련해서 혼자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때였다.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이 일종의 규칙들이었다. 노출을 절대 날리지 말고, 그림자도 너무 누르지 말라는 것. 당시에 그런 점들을 실험해 보았던 것 같다.


지우 전시 《범프! (Bumper!)》(2021, 2/W)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거기서 선보였던 작업들은 어떤 것인가?


세영 이소정 작가와 함께한 2인전으로 다섯 작품씩 총 열 작품을 전시했다. 화면 비율이 점점 길어지도록 작품을 설치했다. 나는 영상 문법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컷을 리듬, 시간과 연관 지어 그것을 얼마나 비틀 수 있는지를 큰 주제로 잡았다.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주제는 캐나다와 뉴욕을 여행했었는데 가능한 한 거기서 찍은 소스들로만 채우려고 했다. 그중 메인은 마이클 스노우라는 옛날 구조주의 영화감독과 관련이 있다. 그가 토론토 해변에서 찍었다는 신작을 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보지 못했다. 우리가 그의 시놉시스를 따라 그가 찍었을 법한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의견을 나눴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지우 《범프!》의 작업들은 이후에 하시는 작업들과 다른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카메라에 관한 실험이 《범프!》에서 조금 더 두드러졌다면, 이후 작업들은 조금 더 영화적이라고 생각되는데. 뒤에서 이야기할 작업들인 〈호캉스〉, 〈극도공포대극장〉, 〈Monochrome Valley〉는 모두 배급과 유통 방식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같은 연도에 각각 극장, 전시,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세영 일단 기본적으로 내가 제작하는 모든 작품은 다 영화제에 출품하고 있다. 그래서 내 작품이 어떤 것, 이를테면 비디오 아트라거나 실험 영화라거나 그냥 단편 영화라거나 하는 것은 극장이 결정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정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냐에 따라서 결정하고 있다.


지우 미술 영상과 영화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의외다. 홈페이지에는 필름과 비디오라는 카테고리가 있지 않나?


세영 그 맥락에서는 인물 중심적인 서사가 있으면 영화제에서 받아주기 때문에 영화로 취급한다. 서사가 없으면 영화제에서 받아주지를 않는다. 방금 말한 홈페이지의 그 카테고리도 남들이 지금까지 작품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에 따라 분류했다.


지우 극장에서의 〈호캉스〉와 전시장에서의 〈극도공포대극장〉을 연달아 제작하며 겪었던, 경험적 차원의 차이가 있었다면?


세영 두 작품은 거의 동시에 진행했다. 아이디어를 동시에 구상하여 몇 주 간격으로 촬영했고, 번갈아가면서 편집했다. 차이라고 한다면, 〈호캉스〉는 관객을 생각하면서 만든 영상이다.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이 있었고, 이 생각이 후반 작업의 모든 과정에 영향을 끼쳤다. 반면 〈극도공포대극장〉은 관객을 생각하는 작업이 아니다. 이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보다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불투명도, MD(midtone density)를 이렇게 하면 질감이 독특해지는구나 하면서 〈호캉스〉보다는 여유롭게 작업했다.


지우 개인적으로 〈호캉스〉랑 〈극도공포대극장〉이 서로 다른 부분이 확연해 구상을 함께 하셨다는 지점이 흥미롭다. 〈호캉스〉는 우연히 5성급 호텔에서 머물게 된 한 커플에게 벌어진, 상상도 못 한 일에 관한 영화다. 플롯 상 그들이 겪은 이야기가 실존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결말이었는데. 언제쯤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사진, 번개가 낙뢰하는 지점, 오이의 효능, 시, 방귀, 사랑(투투 챙기기), 장난전화 등 영화 전반에 ‘저 말이 사실일까?’ 와 같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허구들이 가득하다. 영화를 계획할 때 생각했던 내용들에 대해 묻고 싶다.


세영 표면적으로는 코미디를 만들고 싶기는 했다. 연기가 어설퍼서일 수도 있고, 너무 대충 만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대충이라는 건 성의없이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빠른 시간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영상이라는 뜻이다. 노린 건 코미디였는데, 그 코미디가 실패하면서 이질적이고 불편한 정서를 만드는 것 같다. 내가 의도한 공포보다 기이하고 부담스럽고 이상한 형태의 영화가 나왔다. 이 작업은 끝난 다음에도 실패한 것 같고 부끄러워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당시 커미셔너였던 유지원 기획자님께서 작업을 매우 좋게 봐주셔서 영화관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한 다음에는 조금 의아했지만 내가 원한대로는 아니어도 어쨌든 성과가 있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지우 코미디도 공포도 멜로도 아닌 반인반수 같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그점이 〈호캉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공포 영화를 기획했는데 실패했다고 말씀하셨다. 원래 기대한 바는 무엇이었나? 레퍼런스로 삼은 다른 영화나 사례가 있다면?


세영 실패라는 거는 나 스스로 때문인 것 같다. 나, 그러니까 극 중에서 내가 맡은 역할인 ‘영배’는 원래 헬창이라는 설정이 있었다. 그 역할을 하려고 했는데, 캐릭터 구현에 실패하면서 캐릭터끼리 충돌시켜 이벤트를 발생시키려는 당초의 계획이 실패했다. 그리고 몰입이나 감정선 구축에도 실패한 것 같고. 그런데 이 어설픔 때문에 관객이 오히려 영화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원래 의도한 건 그냥 클래식한 영화여서 관객이 이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이었는데...


지우 그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는 요소로 보여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극도공포대극장〉으로 넘어가겠다. 〈호캉스〉에서는 인물 중심의 서사가 있었던 반면에, 후자에서는 인물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기술적인, 매체적인 장치들이 조금 더 두드러진다. 역재생된 컷의 배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든지, 갑자기 등장하는 호러라든지. 궁금해지는 요소가 많았던 작업인데, 어떻게 구상하였나?


세영 두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다. 처음에 이 영상을 만들면서 하고 싶었던 거는, 싸구려 〈테넷〉(2020, Tenet)을 만드는 것이었다. 〈테넷〉은 영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굉장히 스펙터클한 영화다. 재생과 역재생이 한 화면 안에 있는 게 너무 좋아서 〈테넷〉의 싸구려 버전을 만들어 보자는 게 첫 번째 생각이었다. 〈극도공포대극장〉은 이야기 순서에 맞게 테넷처럼 하고자 했다. 돈은 없어도 재미있게 해보고 싶었다. 작업을 하며 시도한 것은 촬영을 5번 정도 하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가서 콘센트 꽂고 다시 빼고 빠져나오는 그 과정을 한 다섯 번 정도 촬영하고. 이 소스들을 편집으로 기워내고 이어붙이고 자르고 하면서 촬영한 다섯 번과는 아예 다른 움직임을 완성했다.



(이미지2) (좌) 〈극도공포대극장〉(2021) 스틸컷. (우) 〈호캉스〉(2021) 스틸컷.

지우 〈극도공포대극장〉은 구석에서 얼굴들이 막 튀어나오지 않나. 〈호캉스〉에서 보았던 곰팡이의 존재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세영 그건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아까 이 두 작업을 비슷한 시기에 제작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첫 번째로 〈극도공포대극장〉이 시간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내가 그때는 엄청 작은 원룸에서 살았는데, 부실공사 때문에 모서리에 핀 작은 곰팡이에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몰라봤다. 한 달이 지나고 비가 오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커져 버렸는데도 거기서 삼 년을 살았다. 나름대로 곰팡이를 없애려고 보수 공사도 하고 벽지도 덮어 놓고 했는데 건물 자체가 부실 공사라 습하기만 하면 곰팡이가 그냥 계속 커졌다. 그래서 영화 〈언컷젬스〉 포스터를 거기다 걸어 놨다. 한번 들춰 봤다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다. 〈호캉스〉에서는 곰팡이가 사랑과 비슷하게 작동한다. 더럽고 벗어날 수 없고 지저분한데 떼어낼 수 없는… 반면 〈극도공포대극장〉은, 그때 애인이 친구랑 집에 놀러왔었는데,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편집 작업하는데 집중이 잘 안 됐다. 탓하는 건 아니고 그냥 내 정신이 분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집안 곳곳에 공포가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고, 애인을 집에 세워두고 아이폰으로 바로 촬영해서 삽입했다.


지우 방 안의 존재는 왜 귀신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나?


세영 사람들을 실제로 무섭게 하려는 계획은 아니었지만 공포라는 요소를 넣어 특정한 무드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요소라면 뭐가 있을까 하며 키워드를 모아보니 귀신, 명찰, 엄마가 사과 먹으라고 싸 준 불투명한 천 등등이 있었다. 집에 있을 것 같은 흔한 것들을 여기저기 심어 놓으면서 의도한 무드를 만들어보려 했고. 그게 시간 속에서 뒤틀리면 어떤 이질적인 효과를 자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우 명찰을 막 만지던데.


세영 명찰 만지는 건 테이프가 자꾸 떨어져서 그런다.


지우 〈Monochrome Valley〉로 넘어가 보겠다. 비디오로 작업하다 사진집을 내었다. 사진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세영 일단은 사진을 너무 못 찍어서 시작했다. 본업이 영상이고 돈도 다 영상 제작으로 버는데, 건축 사진 아르바이트가 들어온 적이 있다. 그때 정말 인생 최악의 아웃풋을 냈다고 생각한다. 영상 찍는 거랑 사진 찍는 게 왜 이렇게 다르지 싶어서 사진을 잘 다루는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습해서 자존감을 키워 보자고 다짐을 했다. 그래서 하루에 천 장을 찍기로 계획하고 그걸 몇 개월간 하면서 인생 계획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또 다른 주제인 장례식에 관해서는… 친가족이 모두 코로나에 걸렸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안 하고 싶었는데, 큰아빠가 이걸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셨고 서울과 대구를 왔다갔다하면서 찍힌 이미지들을 가지고 어떻게든 종결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리하자면 사진 매체에 관한 도전, 장례식이 작업을 이루는 큰 줄기였다. 그리고 보정을 엄청 심하게 했다.


지우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다. 영상과 사진은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나? 제작 과정은 어떻게 다른가?


세영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 감독이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화만 생각하면서 일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다루는 것도 움직이는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지 누가 손을 뻗을 때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뭐가 움직일 때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같은 고민들을 지속하며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공간을 통과하거나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떻게 찍는 건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아까 말했던 건축 사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 어떻게 해야 되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질문과 함께 완전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아예 접근하는 방법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사진에 대해서 처음부터 공부를 진행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어떤 이미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감이 오고 있는 상황이다. 전에는 이미지의 모든 정보를 노출하는 것 자체가 무게감 없게 느껴져서 내가 할 수 없는 종류의 작업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렇지만 영상에서 지켜온 규칙들을 여기서 완전히 파괴해 보자는 생각으로 모든 빛을 다 날리거나 모든 그림자를 다 눌러 보는 방식으로 보정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블랙핑크의 뮤비를 보면 질감이 친절하다. 피부톤도 밝고 뽀샤시 하고, 창문 밖에 있는 풍경도 다 노출이 되고, 모서리에 있는 빛이 닿지 않는 공간도 쨍하게 다 보인다. 여기에는 이질적인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나는 이미지를 다룰 때 그런 식으로 보정을 하면 항상 찝찝해서 톤 대비를 주거나 조금 더 밝힌다거나 한다. 이게 나의 규칙으로 굳어진 게 있었어서, 안전망을 벗어나 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지우 사진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들도 다 좋았지만, 팬데믹 시대의 새로운 장례 절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부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 작업 노트였다. 큰 흑백 대비가 장례식과 결이 맞는 지점은 어떤 것일까?


세영 사진집을 엮을 때 집이 아닌 공간에서 찍은 것들을 위주로 모아 선별했다. 어디를 방문하거나 서울에서 대구로 이동 중일 때와 같이 주로 집이 아닌 곳에서 찍은 것들이다. 의도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다 골라 놓고 보니 ‘산책’이라는 콘셉트가 떠올랐다. 텍스트도 그렇게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든 스스로 정리해 보고 싶어서 작성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애초에 장례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내용은 별로 없다. 어릴 때 천사를 본 적이 있다. 2층집이었는데 모서리 쪽에 되게 하얀 빛 덩어리가 있었다. 그게 사람의 형체로 팔을 뻗고 나한테 오라는 것처럼 서 있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본 것만은 확실하다. 놀라서 부모님을 불렀는데 그게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게 계속 떠오르는 와중에 부모님께 내가 그걸 봤다고 한 일이 기억나시는지 여쭤봤다. 그런데 부모님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완전히 없어진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때 그걸 천사라고 생각했을까 계속 고민했는데, 빛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디에 비친 햇빛이나 그런 게 아니라 자체발광하는 불가능한 빛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있는데 있지 않은 양가적인 것. 사진 보정 과정에서 그림자를 누르거나 밝히다 보면 검정색 안에 다른 형태가 숨어 있을 때가 많다. 분명히 시각적으로는 정보값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노출을 날리거나 어둡게 하다 보면 뭔가 다른 형상이 떠오르거나 형체가 떠오른다.


지우 천사 이야기도 재미있고, 날리거나 누른 부분들에서 상상할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흥미롭다. 특히 〈단색의 골짜기〉, 〈나무그림자〉에 관하여 이야기해보고 싶다. 먼저 〈단색의 골짜기〉부터 보자면, 보통 군중을 찍은 사진을 보면 그것이 다수의 익명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데 마스크가 두드러지는 이 작업은 좀 더 개개인의 존재감을 역으로 부각해주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미지3) 〈단색의 골짜기〉, 2021.

세영 그 사진 보정이 가장 오래 걸렸다. 모든 사진은 슬라이드 포지티브 필름으로 촬영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네거티브 필름은 반전시켜서 색을 살리는 것이라면, 포지티브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색상으로 찍는 것이다. (포지티브 필름을 보면 네거티브 필름처럼 반전되어 있지 않고 색상이 똑같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노출값을 다 맞추고 설정을 다 한 다음에 사진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색상의 반사가 너무 심해서 노출이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 지점이 보정하면서 재미있었는데, 영상이든 사진이든 인물을 찍을 때는 인물의 몸에 붙는 가장 밝은 부분에 맞춰서 촬영을 진행한다. 그런데 마스크에 노출을 맞추면 광원량이 말도 안 되게 올라가 버린다. 그래서 마스크를 착용하기만 하면 다 날아가 있었고. 그냥 인물과 마스크를 쓴 인물을 카메라로 다루는 일은 엄청 다르다.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 이상한 요소가 덩그러니 얼굴에 있으니까 어떻게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이상함이 사진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이미지4) 〈나무그림자〉, 2021.

지우 〈나무그림자〉도 좋았다. 미지의 존재에 관한 물음이 생기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아까 말했던 천사인 건가? 그런 생각도 들게 하고, 내가 직접 마주할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 이 사진집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철학적인 질문을 해서 웃길 수도 있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 것에 대한 믿음은 언제 생긴다고 생각하나?


세영 사진과 연결해서 말을 하면 약간 뻥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저 날은 진짜로 햇빛이 너무 못생겼었다. 아무런 방해물 없이 구름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냥 폭격처럼 내리쬐는 해였다. 12시 쯤에는 빛이 위에서 오니까 그림자가 거의 없다. 그러면 너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럼 그걸 바탕으로 완전 진하게 만들어 보자 해서 가상으로 그림자를 거의 그림 그리듯이 넣어서 만들었다. 거의 스무 마리의 그림자를 만들었는데 서로 다른 형체를 가졌다. 이게 실제인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끔 만들어보고자 했는데, 보는 사람이 ‘그림자가 왜 이렇게 짙지?’라고 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적인데 사실적이지 않은 사진.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파리 여행을 혼자 갔다.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니 외롭고 그래서였는지 어딜 가든 예전 기억 속 어떤 사람이 자꾸 보였다. 정말 그 사람이 여기 있어서 보이는 게 아니라 누가 지나가는데 머리카락이 비슷하다거나 냄새가 똑같다거나. 그런 경험이었다. 거기서 〈실비아의 도시에서〉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화자가 거리에 있고 파리 어딘가에 앉아 있는데 앞에 있는 낯선 이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인 것 같아서 따라다니는 내용이다. 당시 내 상황이 영화 내용과 비슷했다. 그 영화는 우리가 보는 시각에서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그리고 영화 내에서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 주는 게 있다. 그런 지점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우 잘 모르는 영화인데 흥미롭다. TMI이지만 7살인가…밤에 자다 일어났는데 조그맣게 생긴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를 깨워서 보여드리려 했는데 없어졌다. 나중에 물으니 부모님은 (당연하게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어떻게 보면 좌절일 수도 있는데, 그런 기억을 붙들고 작업을 해나가는 동력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했다. 앞서 이 사진집의 매력에 대해, 마주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각각의 제목들이 마치 ‘그만 상상해’와 같은 느낌으로 대상을 지시하고 있다. 작품 제목은 어떻게 정하나?



(이미지5) (좌) 〈골프공〉, 2021. (이미지6) (우) 〈황금소망의집 뒷산〉, 2021.

세영 제목 같은 경우는 그게 찍힌 공간이나 대상으로 빨리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냥 불규칙하게 붙어 있는 것 같다. 여기가 정확히 어딘지 알려주는 공간적인 정보가 없는 사진들이다. 그래서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아까 장례식에 관한 대답처럼 서사는 빌미고 그걸 바탕으로 형식, 질감 탐구에 더 집중했다. 최근에 광고를 하나 촬영했는데 아이돌이 모델이었다. 그런데 생으로 찍은 영상을 딱 보면 그걸 절대 그대로 내보낼 수가 없다. 데드라인 전날에 전화가 와서 얼굴에 CG 처리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떤 것을 없애고 어떤 것을 뽀샤시하게 만들지 리스트를 받아서 그걸로 밤샘 작업을 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피부 질감이 나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수습한 부분으로 인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피부까지 다 건드려야 되는 상황이 왔다. 결국 완성본을 보니까 사람 대신 젖어있는 찰흙 조각이 거기 있었다. 예전에 〈인사이드 르윈〉이라는 영화에도 그런 사람이 나왔었는데.


지우 좋은 말씀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세영 님께 홍보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는 것으로 마치겠다.


세영 아직은 홍보할 게 없다.


지우 요즘에 뭘 하나?


세영 장편영화 준비 중이고, 내년에 촬영 들어가는데 각본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작업해 온 방식과는 다르게 좀 더 책임감 있게 준비하고 있다.


지우 기대된다. 인터뷰를 슬슬 마무리하며, 독자들을 위해 베스트 공포영화 세 개를 추천 부탁드린다.


세영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2001), 〈큐어〉(1997)를 추천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공포는 아닌데, 〈언컷 젬스〉(2019). 처음부터 끝까지 숨 쉴 틈을 안 준다.


지우 즐거웠다.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하며 꼭 챙겨보겠다.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Glasses
김무영

(lock with ink pen)은 이모지 🔏를 풀어 쓴 코너의 제목처럼, 이미지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텍스트를 게재하는 코너다. 작업이거나, 작업에 관련되었거나, 지금은 작업과 뚜렷한 관계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도 모르는 텍스트를 요청한다.

김무영 김무영은 ⟪도끼와 모조머리들Axe and dummy heads⟫(인사미술공간, 2020)과 ⟪I told you I was no good. Bitch, are you sure to make me cry?⟫(갤러리175, 2021)의 전시에 참여했다.


1.

성 제발트의 성골함을 기록한 도판집은 이 성골함의 뼈대에서 자라나거나 새겨져 있는 인물 조각들을 이야기별로 촬영해 나열해 두었는데, 그 중 ‘눈먼 자를 고치심(Heilung des Blinden)’ 이라는 제목이 달린 장이 있다. 대부분의 다른 사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풍경이 두 쪽에 걸쳐 인쇄되어 있지만 풍경의 정중앙에 사람의 머리가 있었던 상황과 제본 공정의 실수 때문에 페이지 사이 홈에서 같은 얼굴이 두 번 반복되어 인쇄되어 있다. 머리는 하나일 때도 선글라스는 눈처럼 두 알이라서 표면에서 같은 풍경을 양옆으로 두 번 보여준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눈동자 속 제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볼 때 그 사람 얼굴이 가진 두 개의 눈알 중 하나를 선택한 뒤 보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매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의 홈에서 이탈해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진 얼굴의 표면이 어디서부터 쪼그라들어 본래의 가장자리가 되어야 하는지는 보고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다음으로, 양 페이지에서 서로를 바라보도록 인쇄된 두 사람, 그 순서가 아니라면 마주 보는 두 사람이 양 페이지로 뜯겨 갈라선 책 페이지의 모습이 있다. 두 사람의 이미지가 책으로 펼쳐질 때 서로를 완벽히 마주 보아야 할 두 쌍의 눈동자는 갈매기 모양으로 펼쳐진 책의 곡률에 갇혀, 서로의 얼굴이 버젓이 맺혀있을 상대의 눈동자에 미처 도달하지 못하는 동시에 너머를 뚫는다. 두 명이 마주 보려면 모두 고개를 안쪽으로 돌리고 눈을 맞추어야 하는 데 반해, 한 사람이 카메라를 쳐다본다면, 이 영상 속 하나의 머리는 이제 잠재적으로 무한히 많은 머리들과 동시에 눈을 맞출 수 있게 된다. 숏/리버스숏은 한 배우가 다른 배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연출한 뒤, 다른 배우가 첫 번째 배우를 돌아보는 모습을 연출하는 영화 기법이다. 두 배우의 고개가 반대 방향으로, 즉 안쪽으로 꺾여있기 때문에 관객은 이 두 배우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고 가정한다. 한 번의 화면에 단 한 명만 나오지만 화면마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명암의 닮음, 건축의 반복이 마치 책장의 홈처럼 둘을 봉합하고 있다. 렌즈가 여과한 화면에서 시선의 동시성에 대한 정황은 잇기 위해 자르는 절차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2.

두 개의 독립된 머리와 목을 갖고 어깨 아래부터는 한 몸인 Y형 일란성 샴쌍둥이가 한 화면에 잡힌다. 둘은 말을 하기 시작한 나이 즈음이다. 늘 건강했던 둘은 갑자기 그들 머리 사이에 둘의 머리만 한 혹이 생겨 분리 수술을 하게 된다. 부모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동시에, 한 명만 살아남았을 때의 두 가지 그림을 마음속에서 무한히 시뮬레이션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는 그들이 껴안은 이 동물적인 리허설과 무관하게, 수술을 집도할 의사의 경험치, 현대 의학의 선례들, 두 자매가 공유하는 내장의 상태가 그 순간 누구에게 더 우호적이었는지 등으로 미루어 수술로 결국 누구를 죽일 것인지 미리 안내받았을 것이다. 둘 중 한 아기가 두 팔을 사용해 어머니의 얼굴을 만지고 있고, 카메라는 그 두 팔의 여전한 주인이지만 그것이 만지는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는 머리 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패닝 한다.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화면은 꽤 오랫동안 암전되고, 다음 화면은 직전에 걸렸던 아이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화면은 다음으로 그 아이 머리와 인접한 팔을 나선형으로 휘감은 흉터를 보여준다. 관객은 이 아이들의 생김새를 바로 변별하지 못하더라도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샴쌍둥이를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익숙한 번역 감각으로 처참할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화면에 안 나온 머리가 하나 더 있고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화면의 크롭과 두 자매의 물리적 잘림을 일치시키는 가학적이고 아주 논리적인 공포가 발생한다. 카메라는, 예상해버린 내용에 대한 가책을 줌 아웃하며 최대한 천천히 보여준다. 화면의 여백이 벌어지는 느린 속도는 관객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고, 아무런 반전 없이 그 얼굴 옆에 다른 얼굴이 이제는 없다는 것, 하나의 몸에 하나의 머리만 달린 살아남은 아이의 온몸을 천천히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로 했을 때 제작진이 이 사건의 발생—분리 수술—을 예상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나에게 상상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지만, 내가 보고 있는 완성된 영상에서 이 장면은 견디기 힘든 절정의 순간으로 편집되어 도착해 있었다. 어떤 기계의 가장 간단한 조작들(패닝—암전—줌아웃)로, 정작 기계가 가장 기계다운 소임을 다할 때 내 몸과 마음이 맺은 밑바닥의 조건이 거북하게 드러난 듯했다. 눈—공포와 슬픔, 입과 고개—자아와 섭취에 대한 통제권, 어깨 아래의 모든 기관—폭력과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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