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net as Shine Muscat

인터넷은 죽었는가? 이 질문은 2021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제안되었다. 아마 누군가는 인터넷이 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하기 위해, 혹은 죽었다기보다 그냥 그 이름 하에 관찰되는 현상들이 약간씩 변했고 이 변화한 인터넷 개념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고안된 질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마음대로 변화해 버려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을 좀처럼 견디기 힘들어하는 듯하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고. 그러나 세계는 우리의 사소한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마음대로 변화무쌍하다. 2020년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나? 오바마 당선을 예언했던 불가리아의 유명한 예언자 바바 반가는 2021년 인류가 암을 정복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9년을 겨냥한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도, 2012년을 겨냥한 마야인들의 달력도, 빗나갔다.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를 생각해 본다. 어떤 태도나 의도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과관계의 기초다. 이때, 행동은 의도한 결과를 낳아야만 한다. 그러나 의도와 행동, 즉 원인과 결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 나라에서는 ‘신 포도(Sour Grapes)’ 우화를 예시로 인지부조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한 마리의 여우가 있다. 여우는 담장 너머에 있는 포도를 먹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포도를 먹을 수가 없어 의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아주 불쾌한 상황, 여기까지가 인지부조화이고, 그러므로 저 포도는 어차피 아주 아주 셔서 먹을 수 없는 포도일 것이라는 생각을 덧붙이면 자기합리화를 통해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만약 신 포도를 포기한 여우가 어딘가에서 샤인 머스캣을 사먹는다면, 그것은 신 포도를 잊기 위한 보상 행위인가? 신 포도와 샤인 머스캣 사이의 인과관계는 유효한가? 굳이 신 포도가 아니었더라도 샤인 머스캣은 늘 맛있다.


2021년을 기준으로 하는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에 관한 질문들도 이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많은 일 중 하나는 전시를 하거나 보는 일이다. 그러나 2020년, 우리는 전시를 하거나 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시를 하거나 보는 일이 점점 ‘정상화’되기는 했지만서도, 어쨌든 코로나 이후 전시를 위시한 많은 예술 실천들이 온라인을 ‘차선’으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서두의 질문을 약간 비틀어서, 인터넷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인터넷은 불가능해진 원래의 삶이라는 신 포도를 해소하기 위한 샤인 머스캣인가? 인터넷은 실재의 대안인가, 대체인가? 인터넷은 대안적 실재인가? abs 1호는 이러한 질문들에 그렇다/아니다라는 단선적인 대답보다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라는 이름 하에 발견할 수 있는 현상들이 약간씩 변했으며 우리는 이 변화한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 개념에 적응해야 한다고 대답하려 했다. 최소한 관심 있는 독자 분들을 위한 새로운 질문들을 기획하고자 했다.


먼저 황재민과 유진영은 범유행 감염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임한다. 황재민은 우리가 소위 넷 아트, 포스트 인터넷 아트라고 부르는 것들을 고민한다. 코로나 이후 전시-웹 브라우저-인터넷을 가로지르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재)배치되면서 이런 예술들을 생각하기 용이한 배경이 형성된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내용은 코로나와 관계없는 유효타로 구성되었다. 유진영은 김희천의 몇몇 작업에서 몇 번이고 재구축되는 공간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벽을 더듬으며 하나의 공간이 복수의 시간을 담지하고 그럼으로써 시간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버리는 일에 대하여 썼다. 한편 김호원과 이지우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이를 왕복하는, 혹은 병행하는 경험에 기초하여 인터넷과 웹 브라우저에 기반한 활동들에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를 고민했다. 김호원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몸의 관계를 짚으며 메타(meta)와 유니(uni), 그리고 세계(verse)가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지우는 몇몇 온라인 전시에서 구체적인 작품이 보여지는 방식을 딛고 온라인 전시가 놓인 독자적 환경을 포착했으나 그것이 오프라인 전시의 그것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시선은 다음 방향에 둔다. 김얼터는 시 읽는 구멍인 《시홀(seehole)》을 보고 생각한 인터넷과 SNS, 웹 브라우저 이후 시의 시각적인 부분, 형식, 유통에 관하여 썼다.


(lock with ink pen)과 🥠는 abs의 고정 코너로, 1호에 초대된 사람은 각각 구자명과 최영, 권태현이다.


구자명은 개인전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0)을 열었으며, 이번 호에는 「분자생물학을 통해 분석한 웹의 생태 원리와 코드의 생장 과정」이라는 제목의 글로 참여한다. 웹과 웹을 구성하는 코드가 대안 접합(alternative splicing)의 원리에 의거해 외부에서 유입된 이질적 코드가 원본의 질서를 재조정하고 의미를 변형하는 과정에 주목하며 향후 이 현상이 갖추게 될 형태를 탐색하기 위한 필요를 모색했다.


이번 호 🥠에는 특별히 두 명을 섭외하였다. 한 명은 《Quarantine Études》, 《CENTERS(중심들)》을 기획하고 ‘컴퓨터 뮤직 클럽(Computer Music Club)’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뮤지션이자 DJ인 최영이고, 다른 한 명은 《광장/조각/내기》, 《Nothing Theater》의 공동 기획, 《IGMO: Ignorant Mobility》를 기획한 권태현이다. 2020년과 2021년 발표한 온라인 기반 예술 실천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 고민하는 인터뷰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실천들이 있었지만, 여러 번의 온라인 실천을 진행하며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인터넷/웹 매체에 관해 공유할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여 구성한 목록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우리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처럼?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변했을 것이며 ‘예전처럼’이라는 말은 아무데나 적용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말이다. 마스크를 벗고 대로에서 연인의 귀여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얼굴은 이제 이전과는 무척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샤인 머스캣 이후의 포도계에 격변이 있었던 것처럼. 즐거운 읽기가 되기를 바란다.

네트워크의 소각로에서ㅡ예술은 발생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황재민

1.

디지털 기반의 예술을 지원하고 연구하기 위한 플랫폼, 리좀(Rhizome)이 2019년 전시 《예술은 여기서 발생한다: 넷 아트의 아카이브적 시학(The Art Happens Here: Net Art’s Archival Poetics)》을 기획했을 때, 그것은 당연히, 하지만 조금 늦게, 넷 아트(Net Art)라는 흐름을 역사화한 이벤트로 보였다. 전시는 리좀이 2003년부터 오랜 제휴 관계를 이어 온 뉴 뮤지엄의 1층 공간에서 열렸고, 기록 사진을 통해 훔쳐본 결과, 그리 인상적인 모양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래된 컴퓨터의 CRT 모니터와 주사선의 가로줄, 시대 감각이 어긋난 웹페이지 인터페이스, 넷 아트 전시의 클리셰를 반복하는 전시의 풍경은 이미지 차원에서도 흥미로울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욱 흥미롭게 보였던 것은 리좀이 전시와 함께 공개한 웹페이지, 『넷 아트 앤솔로지(Net Art Anthology)』였다.1 동명의 책으로도 발행된 이 아카이브엔 리좀이 정리한 넷 아트의 짧은, 혹은 긴 역사가 담겨 있었고, 전시에 비해 웹 아카이브가 보다 풍부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넷 아트는 “여기서”, 네트워크의 종단이 아니라 노드와 노드 사이 링크에서,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현실과 가상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짧은 역사로부터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인지, 몇 가지 사례를 골라보자. 타임라인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인 것은 1985년, 에두아르도 칵(Eduardo Cak)이 선보인 〈리브라카다브라(Reabracadabra)〉였다. 이것은 구체시(Concrete Poem)에 영향받은 원시적 형태의 디지털 시로, 구식 단말 디스플레이에서 한 열씩 특정 텍스트가 로딩된 끝에 이미지로 귀결되는 형태였다. 작업은 넷 아트 역사의 첫째 열에 놓이기에 손색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명 과도기적인 측면이 있었다. 〈리브라카다브라〉는 우리가 아는 웹 프로토콜이 아니라 비디오텍스토(Videotexto)라는 초기 정보 제공 시스템에 의지해 제작된 작업이었고, 비디오텍스토가 제공할 수 있는 네트워크는 보다 국지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인터넷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2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WWW)과 HTML, 웹 브라우저와 TCP/IP 프로토콜,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의 요소가 반영된 넷 아트는 1990년대에 접어 들며 시작된 듯 보인다. 넷 아트라는 카테고리를 크게 대표하는 작업 중 하나인 올리아 리알리나(Olia Lialina)의 〈내 남자친구가 전장에서 돌아왔다(My Boyfriend Came Back from the War)〉(1996)는 특정 브라우저가 제공하는 상호작용 인터페이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관객, 혹은 사용자(User)는 웹 페이지에 접속한 뒤 이미지와 텍스트를 클릭하며 참여해 이야기를 따라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작업은 일부 영화적인 내러티브를 전개하며, 그러므로 〈내 남자친구〉는 웹 환경에 영화의 문법을 들여온 사례로 설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내 남자친구〉는 넷 아트의 ‘특정성(specificity)과 분명한 연관을 갖는 작업이었다. 올리아 리알리나는 넷에 있는 것은 반드시 “넷 언어(net.language)”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특정적 의견을 강조하며, HTML 언어에 의존한 작업인 〈내 남자친구〉는 이런 의견을 분명하게 반영한다.3



(이미지1) 올리아 리알리나, 〈내 남자친구가 전장에서 돌아왔다〉, 1996. https://sites.rhizome.org/anthology/lialina.html

하지만 넷 아트의 다음 타임라인에서, 특정성을 주장한 올리아 리알리나의 의견은 빠르게 소강 되는 듯 보인다. 인터넷은 더 빠르게, 더 많은 데이터를 전송하며 결과적으로 ‘재매개(remediation)’된다 – 스크린의 편재를 초래하며 ‘스크린 기반 예술(Screen-based Art)’의 일종으로 확장된다. 2000년대의 넷 아트에서, 브라질의 예술 콜렉티브 코포스 인포마티코스(Corpos Informáticos)는 작업 〈텔레프레센스2 (Telepresence 2)〉(2002)를 통해 신체 이미지가 웹캠을 거쳐 송신되며 ‘로-파이(lo-fi)’하게 변형, 탈신체화되는 수행적 상황을 다루고, 라이언 트레카르틴(Ryan Trecartin)은 (당시로서는) 신생 플랫폼 중 하나였던 유튜브를 하나의 갤러리로 탈바꿈한다. 그는 가짜 리얼리티 TV쇼를 연출해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작업을 TV와 인터넷 사이, 오래된 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 사이에 놓는다. 또 페트라 코트라이트(Petra Cortright)는 〈VVEBCAM〉(2007)에서 웹캠으로 촬영한 자신을 전시하는데, 필터로 꾸며진 선구자적 셀피(selfie)를 이용해 웹캠 기반의 스크린 문화를 차용한다. 어쨌든 인터넷은 많은 것을 매개하며 거대해지고, 한번 증폭된 전송량은 다신 내려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앤솔로지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몇몇 작업은 인터넷으로부터 이탈한다. 대표적인 두 사례가 있다. 올리버 라릭(Oliver Laric)과 아티 비어칸트(Artie Vierkant), 두 작가의 작업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의 공유지를 갖는다. 이제 작업은 웹 브라우저를 떠나 실제 전시장에 놓이며, 능히 그럴 수 있게끔 실제 물질로 만들어져 전시된다. 1969년 미 국방부 고등 연구 계획국(ARPA, 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의 네트워크로 시작해 이내 전세계를 하나의 장소로 엮는 거대한 인프라로 확장된 인터넷은, 갈수록 강력해진 끝에 네트워크 바깥, 현실의 침입을 허용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

리좀이 정한 전시의 제목, “예술은 여기서 발생한다”는 넷 아트의 경제와 형식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작가 듀오 MTAA의 다이어그램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간단한 넷 아트 다이어그램(Simple Net Art Diagram)〉(1997)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면은, 이름처럼 간명하다. 두 개의 컴퓨터가 있고 그것을 연결한 네트워크 케이블이 있으며, 예술이 발생하는 곳은 그 케이블의 중간지점이다. 물질적 공간으로서 광섬유 케이블에는 오직 전류만이 머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넷 아트는 물질과 관계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게 당연하다. 이에 더해 미디어 이론가이자 큐레이터인 틸만 바움가르텔(Tilman Baumgärtel)은 작가 그룹 ‘넷.아트(net.art)’의 예술을 분석하며 그들의 ‘매체 특정성(Medium specificity)’에 대해 부연한다. 그것은 상호 연결성(connectivity), 전지구적 접근 가능성(global reach), 멀티미디어성(multimediality), 비물질성(immateriality), 그리고 상호작용성(interactivity)과 평등성(egality)으로, 넷 아트는 물질적 현실과 갈등을 빚는 예술이며 전시장에 전시하기 어려운 예술임이 틀림 없었다.



(이미지2) MTAA, 〈간단한 넷 아트 다이어그램〉, 1997. http://www.mtaa.net/mtaaRR/off-line_art/snad.html

하지만 더 빠르게 많은 것을 전송하는 네트워크가 된 인터넷은 현실을 수용하고, 넷 아트가 ‘특정성’을 의지했던 인터넷의 속성과는 전혀 달라진다. 인터넷은 너무나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인프라스트럭처의 일부로 안착했기 때문에,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개인은 24시간 인터넷과 연결된다. 당신의 정체성은 SNS에 있고 자산 역시 디지털화된다.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진, 이 ‘인터넷 이후(Post-Internet)’의 세상에서, “넷 언어”라는 가정은 무의미해지며 물질의 세계가 다시 한번 나타난다; 비물질화된 물질, 혹은 물질화된 비물질의 모습으로.


그렇다면 여기서 넷 아트는 특정성을 상실하며 사라지고, ‘포스트-인터넷 아트(Post-Internet Art)’로 전환, 혹은 발전되고 마는 것일까? 하지만 두 카테고리가 선형적인 선후 관계를 갖는지, 한 쪽이 한 쪽으로 서서히 흡수되는 것인지, 혹은 완전히 단절되어 버리는 것인지 사실을 가리는 것은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이것을 모더니즘에 대해 포스트 모더니즘이 취하는 용법과 비교하기도 하는데,4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저 그만큼의 복잡함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로 이해해보기로 하고, 다만 넷 아트와 ‘포스트-인터넷 아트’, 각자의 온도차를 비교할 수 있는 오래된 의견을 잠시 정리해본다.


알렉세이 술긴(Alexei Shulgin)과 나탈리 북친(Natalie Bookchin)이 함께 쓴 「넷.아트 개론 (1994-1999) (Introduction to net.art (1994-1999))」5은 1990년대 후반에 쓰였고, 그 자체로 넷 아트, 나아가 인터넷에 투영된 기대를 자가 해설하는 사례로 읽힌다. 글은 마치 강령을 정리하듯 넷 아트의 규칙과 매체성, 또 가능성을 도열하며, 인터넷이라는 미증유의 기술을 타고 예술이 마침내 선사할 긍정적 전망을 열거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골라내보자: 넷 아트(혹은 넷.아트)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 저항적 형식이다. 인터넷 위에서 생산자와 수용자의 경계는 의미 없이 허물어지며, ‘저자’는 확실하게 죽어 없어진다. 이들은 인터넷 안에서 미술관, 혹은 박물관이 곧 상점이나 포르노 유통사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되리라 위협하고, 이 모든 것은 네트워크에 연결되기만 하면 벌어지는 실제 상황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포스트-인터넷 아트’와 관련된 담화 속에서 “연결”의 가치는 재고된다. 기술로써 인터넷은 극적인 순간이동과 무한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novelty) 것이 아니라 평범한(banality) 것이 된다.6 치명적으로 일상화되며 동시에 비가시화된 인터넷은 연결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네트워크 연결 없이도 ‘인터넷적인 것’이 발생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감각이 생성되자, 넷 아트의 희망은 낡고 감각적 현실이 변화한다. 이미지는 인터넷 레디메이드로서 물질로 번역되며 개인은 완전 몰입형 자율성을 갖는다.


넷 아트와 ‘포스트-인터넷 아트’ 사이에는 선형적인 연결이나 확실한 단절이 아니라, 중간지점이 너무 흐려 잘 보이지 않는 디졸브 효과가 적용되는 것 같다. 넷 아트가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라면, ‘포스트-인터넷 아트’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넷 아트가 온라인 환경을 도구로 활용했다면, ‘포스트-인터넷 아트’는 온라인 환경을 하나의 의식으로 인지한다. 넷 아트가 장르라면, ‘포스트-인터넷 아트’는 장르를 넘어, 하나의 상태(Condition)가 된다.7


넷은 현실로 나가고 싶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그 무엇보다도 출처를 알 수 없는 형식처럼 보이는 넷 아트지만, 역사적 근거로 꼽히는 경향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들은 넷 아트의 근거를, 플럭서스 작가인 레이 존스(Ray Jones)가 시도한 ‘메일 아트(Mail Art)’로부터 찾는다.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것은 우편 통신 체계를 하이재킹해 해프닝을 벌인 결과인데, 넷 아트를 근본적으로 우편 통신 체계인 인터넷을 하이재킹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분석은 옳다. 누군가 말했듯, 우편 체계에는 언제나 청개구리 같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다8 - 지켜야 할 규칙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이 규칙을 우회하고자 말썽을 피운다. 넷 아트는 이 말썽의 미학화된 사례였고, 현실, 간추려 말하자면 제도, 그리고 시장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넷.아트 개론」에서, 알렉세이 술긴과 나탈리 북친은 명료하게 말한다. 넷 아트는 제도에 대해 0%의 타협도 없는 형식이다.9 여기선 현실 대신 가상이 옳으며 신체 대신 탈신체가 옳고 제도와 시장 대신 인터넷이 옳다. 하지만 그들의 단언과는 다르게, 넷 아트는 결국 제도, 그리고 시장 안으로 천천히 포섭될 수밖에 없었다. 넷 아트는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의 원주민들에게보단 미술관 관객들에게 더 익숙한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넷 아트의 저항적 태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이 카테고리가 제도, 그리고 시장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제도는 넷 아트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고,10 시장 역시 그들을 그렇게까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인터넷 아트를 사고 싶어하는가?11)


이런 상황에서 넷 아트의 꾸준한 기여자인 올리아 리알리나의 온 고잉 프로젝트, 〈킬로바이트 시대의 1 테라바이트(One Terabyte of Kilobyte Age)〉(2010-)는 의미 심장하다. 이것은 도산한 웹 호스팅 서비스인 지오시티(Geocity)를 복구하는 프로젝트로, 새로움으로 들떠 있던 기술이 드디어 낡음을 매개할 수 있도록 변했다는 사실, 고고학이 가능한 역사의 세계로 퇴적되고 말았다는 증명이었다. 넷 아트 역시 노후화하여 뒤처지며, 혹은, 닷컴버블이 터져 사라졌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미지3) 올리아 리알리나, 〈킬로바이트 시대의 1 테라바이트〉, 2010-. https://oneterabyteofkilobyteage.tumblr.com/

3.

그러나 작년, 그리고 올해에 걸쳐, 이제 무용해진 듯했던 넷 아트의 존재론이 재차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의 범세계적 유행 이후 제도는 일시 정지된 후 재배열되었고, 이 과정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많은 전시 형식이 넷 아트로 수렴된다. 또한 블록체인 기술로부터 파생된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 토큰)의 발행은 넷 아트가 시장과 맺던 갈등 관계를 재구축한다. 넷 아트는 제도, 그리고 시장과 전연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며, ‘포스트-인터넷 아트’라는 완충재 없이 현실로 급작스럽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마치 넷 아트와 현실 사이엔, 원래 어떤 공백도 없었다는 듯이.


물론 인터넷은 한 번도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적 없었다. 해저 케이블부터 인공위성까지, 인터넷의 어마어마한 비가시성 뒤에는 그것을 가능케 해준 단단한 미디어 인프라스트럭처(Media Infrastructure)가 자리했으며 이제 우리는 전자 쓰레기(Electric waste)와 디지털 자산이 초래할 해수면 상승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다. 넷 아트 역시 항상 마찬가지였다. 에이브 링컨(Abe Linkoln, Rick Silva)은 MTAA의 ‘간단한’ 다이어그램을 리믹스해 〈복잡한 넷 아트 다이어그램(Complex Net Art Diagram)〉(2003)으로 변형한다. 이 복잡한 다이어그램에서, 예술은 “여기”, 거의 세계 그 자체에 가깝게 보이는 카오스적 도면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가며 혼란스럽게 “발생한다.” 그리고 이 다이어그램의 정확도는 MTAA의 간명한 버전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이미지4) 에이브 링컨, 〈복잡한 넷 아트 다이어그램〉, 2003, 부분 크롭 이미지. 전체 http://www.linkoln.net/complex/

이처럼 인터넷이 어디에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매여 있는지 따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인터넷에 대해 더 구체적인 분석을 가능케 하며 현실에 대해서도 예기치 못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다만 문제는 이것이 예술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되기에 앞서 갑작스럽게 해소되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위에서 말한, 엮였되 엮이지 않은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COVID-19의 범유행에 대한 긴 이야기는 짧게 정리하도록 한다. 감염병이 오프라인 전시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자, 네트워크로 연결된 인터넷 공간이 예술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각광받는다. 예술가들의 계획과 생계가 불확실해지자 제도적 지원이 뒤따르고 웹 기반의 프로젝트는 공인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전시는 웹 인터페이스를 적극 활용하고, 어떤 전시는 가상 미술관(Virtual Museum)을 만들어 작업을 옮겨 둔다. 혹은 게임의 문법이 참조된 사례도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넷 언어”로 구성되지만 넷 아트라고는 불리지 않는다.


억지 트집으로 보일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나는, 어째서 넷 아트는 인터넷을 미학적 매체로 선점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그것은 네트워크가 이미 무의식적인 차원으로 스며들어 비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넷 언어”가 HTML을 탈출해 고급화되는 과정에서 계급화되며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인터넷이 예술로는 분절할 수 없는 거대한 현상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넷 아트 형식이 보존과 소장이 쉽지 않은 탓에, 연속되지 못하고 쉽게 사라져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넷 아트의 방법은 넷 아트가 삭제된 채 현실로 가까워지며, 제도의 일부로 공인된 디지털 예술은 이미 지나간 과거사를 굳이 들여다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넷 아트와 시장의 관계는 더욱 골치 아픈 일이었다. 넷 아트가 실제로 판매되고 누군가는 그것을 소장하는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질문이 뒤따랐다. 대체 누가 인터넷 예술 같은 걸 소장하고 싶어하는데? 하지만 NFT라는 일이 일어난 후 질문에는 대답이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파일을 소유할 수 있게 되자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NFT와 관련된 소란스러운 이야기 또한 짧게 줄여본다.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유튜브나 기타 다른 검색 엔진에 NFT를 찾아보면 더욱 전문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다.12 어쨌든 이것은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뜻이며, 블록체인(block chain)에 등록되어 소유권을 조작할 수 없게 공인된 디지털 자산이다. 블록체인이란 일종의 신뢰 프로토콜이며, 새로운 블록이 만들어질 때 반드시 직전의 블록을 참조해야만 하는 구조의 분산원장 기술(Distributed Ledger Technolog, DLT)이다. 하나의 블록을 침해하거나 변조하기 위해서는 전체 블록을 수정해야만 하는 구조를 갖춤으로써, 블록체인은 데이터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기존의 취약한 인터넷 인프라 보안이 진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3의 존재, 이른바 ‘중개인(Middle Man)’을 요구했다면, 블록체인은 중개인의 자리에 수십 억 개로 나뉜 전 세계의 디바이스가 참여하는 P2P(Peer to Peer) 네트워크를 대신 놓는다. 블록체인은 인터넷을 정보가 아니라 실제 가치를 교환할 수 있는 프로토콜로 전환시키며, 이 모든 일은 2008년, 정체 불명의 디지털 인간인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가 비트코인(Bitcoin)이라는 이름의 P2P식 전자 결제 프로토콜을 제안하며 벌어진 일이다.13 NFT가 가치를 의지하는 영역은 이 새로운 인터넷 발명이다.


NFT는 등장 이후, 거의 즉시 예술의 관심을 끌었고, 디지털 예술가 비플(beeple, Mike Winkelmann)의 작품 〈매일: 첫번째 5000일(EVERYDAYS: THE FIRST 5000 DAYS)〉이 크리스티 경매에서 (수수료 포함) 6930만 달러에 판매된 뒤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다.14 개 중 하나를 참조해보자. 지난 3월 발행된 글 「NFT와 디지털 르네상스」에서는 오디오 채팅 소셜 미디어인 클럽하우스에서 만나 NFT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고, 이내 작품을 발행하기에 이르는 한국 예술가들의 좌충우돌이 묘사된다. NFT를 발행하려는 작가들은 커뮤니티를 형성해 방법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흡사 디지털 살롱을 연상케 하는 가상 공간에서 만나 의견을 자유롭게 공유한다.15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 인터넷 네트워크 위에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쉽게 작업을 소개하며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 동시에 무단 복사와 저작권 침해, 그리고 가치 보증의 불가능성이라는 약점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인터넷 시장, NFT에 대한 희망적인 이야기는 어쩌면 넷 아트의 초기 참여자들이 강조했던 몇 가지 기대를 되풀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무한하게 재생산될 수 없는 인터넷 재화가 과연 어떤 미학적 주제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이미 너무나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시장, 그리고 상품과 관련된 논쟁을 다시 한번 불러들이는 셈이 되지 않을까? 미술사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은 NFT를 ‘역전된 레디메이드(Readymade reversed)’라고 풀이한다. 레디메이드는 결과적으로 대체 가능한 예술이었고, NFT는 이 발견을 뒤집는다. 뒤샹은 상품으로부터 물질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예술이라는 카테고리를 이용했다. NFT는 자유롭게 접근 가능한 정보를 자산으로 사유화하고자 예술이라는 카테고리를 이용한다. NFT라는 아이디어에서 미학적 전유는 불가능해진다. 조슬릿은 NFT가 물질적 경험보다 사유물의 가치를 앞세우는 사회적 계약이라고 평하며, 블록체인이 보증하는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와는 달리, 이 사회적 계약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16


보수적인 의견이지만, 타당한 의견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 영역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그것은 내가 의견을 보탤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블록체인은 혁명적 기술이며 NFT 역시 계속해서 많은 가능성을 가질 것이다.17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불만을 몇 가지 늘어놓는 것으로 이 단락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만일 넷 아트에서 ‘넷에 있는 것은 넷 언어로 쓰여야 한다’는 의견이 가능했다면, 어느 정도 ‘더 나은 넷 아트’처럼 보이는 NFT에서는 비슷한 의견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NFT는 블록체인을 무엇이라고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더리움(Ethereum) 플랫폼을 어떻게 비평할 수 있을까?


나아가 한 가지, NFT 예술가들이 직면할 것처럼 보이는 당혹스러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NFT를 포함한 블록체인 생태계 전반에서, 밈(Meme)의 정치가 예술의 정치를 분명하게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직접 소유 가능한 크립토 자산(crypto ../assets)으로 초반에 각광받았던 것들이, 이를테면 유명한 밈 ‘페페(Pepe)’가 묘사된 디지털 트레이딩 카드 이미지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2021년 현재 이더리움 플랫폼이 NFT를 위한 ‘물질적’ 토대라면, NFT가 의지하는 문화적 토대는 예술이 아니라 밈일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도지코인을 둘러싸고 펼쳐진, 파멸적으로 흥미진진했던 자본주의 오페라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다. 혹시 이더리움의 공동 창업자이자 아이콘인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컨퍼런스에서 ‘오소리 노래(Badger song)’에 맞춰 춤추는 장면을 본 적 있는지? 나는 그의 크립토 지갑에 예술가들이 발행한 NFT보다는 밈에 대한 소유권이 더 많지 않을까 추측한다. NFT 시장이 활발해진 뒤, 주요 경매사, 혹은 미술관에서 개최하는 소장전이 열린다고 생각해보자. 어쩌면 그때 보게 될 것은 밈 소장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예술이 예술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새로운 인터넷에서 자유로워지리라는 확신은 아직 과신처럼 보인다.



(이미지5) 2018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이더리움 개발 컨퍼런스. 유튜브 비디오 캡처. https://youtu.be/kUheuFDHSvI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감염병 범유행이라는 사건과 NFT라는 기술은 넷 아트의 낡고 지친 이념을 제도와 시장에 각각 성공적으로 기입한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은 현실에 조금 더 가까워졌고 앞으로 계속해서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 이행에서 자꾸만 공동이 발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도는 넷 아트가 아니라 ‘인터넷 위의 예술’을 공인하며, NFT는 넷 아트의 실패와 기대를 반복하며 같은 구호를 사용한다. 넷 아트라는, 철 지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지금 어떤 이야기가 어떤 차원에서 반복되는지, 돌이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스마트카(Smart car)와 AR, VR, 메타버스(Metaverse)를 둘러싼 소란부터 블록체인까지, 네트워크 기반의 기술 인프라는 점점 더 빠르게 현실화된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가 아니다. 이미 수십 년 전 상상된 적 있는 낡은 미래일 뿐이며 여기선 숨은 그림을 찾듯 예견된 미래적 과거를 현실과 짜맞추는 일만이 가능한 것 같다. 새로운 상상이 불가능하며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흠집을 살피고 보완해 조금이라도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할지 모른다. 세상은 가끔 소각로 같고 안에 넣은 것이 다 타면 부스러기가 남는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이 남았을까?



1ㅤRhizome, 『Net Art Anthology』, 2021년 5월 22일 접속, https://anthology.rhizome.org/

2ㅤ비디오텍스토는 데이터 통신을 이용한 양방향 정보 매체의 초기 구현체 중 하나인 비디오텍스(Videotex) 서비스의 일종으로, 브라질에서 서비스되었다.

3ㅤJosephine Bosma, “Olia Lialina interview Ljubljana,” nettime, 1997년 8월 5일, 2021년 5월 22일 접근. http://www.nettime.org/Lists-Archives/nettime-l-9708/msg00009.html

4ㅤJennifer Chan, 「Notes on Post-Internet」, 『You Are Here: Art After the Internet』, Omar Kholeif, eds., Cornerhouse Publications, 2014, 107p.

5ㅤNatalie Bookchin and Alexei Shulgin, “Introduction to net.art (1994-1999)”, 2021년 5월 22일 접속. https://bookchin.net/projects/introduction-to-net-art/

6ㅤMarisa Olson, 「Postinternet: Art After the Internet」, 『Foam Magazine 29』, Winter 2011, 61p.

7ㅤLouis Doulas, “Within Post-Internet, Part One”, pooool.info, 2011. 원문 소실, 백업된 글을 통해 확인. http://s3.amazonaws.com/arena-attachments/191659/f9920b982e5457c97374810db32c6924.pdf?1390438645

8ㅤ케이티 해프너, 매튜 라이언, 『인터넷의 기원』, 이재범 역, 지식함지, 2016, 262p.

9ㅤNatalie Bookchin and Alexei Shulgin, 위의 글.

10ㅤ리좀은 『넷 아트 앤솔로지』의 짧은 서문에서, 앤솔로지를 엮은 의의 중 하나로 가장 중요한 작업조차 접근하기 어렵다는 상황을 거론한다.

11ㅤJennifer Chan, “From Browser to Gallery (and Back): The Commodification of Net Art 1990-2010”, pooool.info, 원문 소실, 백업된 글을 통해 확인. https://www.academia.edu/2541835/From_Browser_to_Gallery_and_Back_The_Commodification_of_Net_Art_1990_2010?source=swp_share

12ㅤ혹은 바이낸스 아카데미를 참조하라. https://academy.binance.com/ko/articles/a-guide-to-crypto-collectibles-and-non-fungible-tokens-nfts

13ㅤ돈 탭스콧, 알렉스 탭스콧, 『블록체인 혁명』, 박지훈 역, 을유문화사, 2018, 111-115p.

14ㅤKabir Jhala, “WTAF? Beeple NFT work sells for astonishing $69.3m at Christie’s after flurry of last-minute bids nearly crashes website”, The Art Newspaper, 2021년 3월 11일, 2021년 5월 22일 접근. https://www.theartnewspaper.com/news/beeple-sells-for-christie-s-nft-art-auction-cryptocurrency

15ㅤ박성미(Shura), “NFT와 디지털 르네상스”, 2021년 3월 28일, 2021년 5월 22일 접근. 이 중요한 글을 소개해준 것은 abs의 공동 편집인인 김호원이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sungmipark/4

16ㅤDavid Joselit, 「NFTs, or The Readymade Reversed」, 『OCTOBER 175』, Winter 2021, 3-4p.

17ㅤ이 글을 쓰는 동안 추가된 새로운 소식 하나를 덧붙여본다. 3월 18일, 디지털 예술가 션 윌리엄스(Sean Willams)는 인스타그램이 NFT 플랫폼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공개했다. 작가 트위터 스레드 참조. https://twitter.com/iArtSometimes/status/1394686534348062725?s=20

김희천과 아뜰리에 에르메스: 타키온의 세계에서
유진영

1.

지하철에서 내려 제법 걷다 보면 초록빛이 가득한 도산공원을 지나치게 된다. 공원과 맞붙어 있는 멋진 외관의 브랜드스토어를 몇 개 지나자 오렌지빛의 건물이 보인다. 이어서 정장 차림의 친절한 직원이 열어주는 정문으로 들어서 장인이 한 땀, 한 땀 손바느질 했다는 나선형의 가죽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면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음악, 그리고 대화 소리가 들린다. 약간의 멋쩍음을 이겨내고 카페 공간을 가로지르면 마침내 깨끗하고 정갈한 화이트 큐브에 도착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직접 방문하기까지의 물리적 여정이다. 숱한 전시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뜰리에 에르메스를 떠올릴 때 내게 가장 먼저 찾아드는 기억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이처럼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때로 전시장이라는 장소이기보다 공간 그 자체로 기억되곤 한다.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는 세계에서 실제 공간을 잇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김희천에 의해 몇 차례나 재구성되었다. 김희천의 작품 속 공간은 언제나 실재하는 특정 장소에서 출발하지만, 그가 반복해서 재구축하는 공간은 자신의 불안감을 추동하는 기원으로서의 서울을 제외하고는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실제 전시 공간과 작품의 구조를 다차원적으로 연결하고 시공간을 새롭게 직조하는 시도를 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공간은 김희천이 세운 파리한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몇 겹의 의미를 얻거나 혹은 모든 의미를 상실해 버리기도 한다.


2.

“너 어디임? 네 목소리가 엄청 울려, 평소에 접속하던 곳 보다 더 큰 공간에 있는 것 같아서.”


이제부터 저 사람이 있는 곳을 추측해보자.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김희천에 의해 처음으로 재구성된 것은 2017년 전시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2017.5.20-7.23)의 커미션 작업으로 제작된 〈멈블〉에서 였는데, 이 작업에서 공간은 세 가지 버전으로 재현되었다. 첫 번째는 영상의 주인공인 시각장애인이 더듬더듬 손을 짚어가며 감각하는 실제 전시장 공간이다. 당시 재개관을 앞두고 한창 공사 중이었던 화이트 큐브를 촬영한 장면으로 비계와 공구, 페인트 등 각종 장애물로 가득 차 있다. 두 번째는 주인공이 헤드기어를 착용해 접속한 가상 세계인데 이곳에는 공사 현장의 도구들 뿐 아니라 어질리티 쇼(Agility Show)의 장애물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재되어 있다. 마지막은 안내견을 은퇴한 노년의 폴라가 참여한 가상 어질리티 쇼의 경기장으로 각종 난코스 장애물이 번쩍이는 라이트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스크린이라는 평평한 세계 위에서 각자 다른 공간감을 드러내는데, 이때의 공간감은 시각장애인과 개의 속도감의 유비를 통해 증폭된다. “가상의 환경을 그보다 작은 물리 환경에 구겨 넣는 방식입니다”라는 내레이터의 말을 따라 관객은 세 곳의 크기를 계속해서 비교하도록 안내받는다. 길잡이 안내견 폴라를 잃어버리고 조심스레 길을 헤쳐나가는 시각장애인 주인공의 공간은 몹시 비좁아 보인다. 두 번째 공간인 가상 세계에서 그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전으로 인해 공간의 규모를 한 번에 가늠할 수 없다. 이곳에서 역시 그의 속도는 느리다. 다른 한편, 난코스를 헤쳐가며 질주하는 폴라의 공간은 한없이 넓게 느껴진다. 얼핏 보기에는 이 세 곳이 같은 공간임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 공간을 세 개의 각기 다른 공간으로 한 번 더 굴절시킴으로써 관객의 공간감을 더욱 혼란하게 만든다.


김희천은 최근, 한국-러시아 상호교류 3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온라인 전시 《네 번째 차원을 본 사람》(2020.12.18.-2021.3.31.)에서 다시 한번 아뜰리에 에르메스를 재구현하는데, <멈블>을 온라인 버전인 〈나 홀로 ‘멈블’ 보기〉(2020)로 재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한 겹의 레이어가 더 추가된다. 영상을 관람하는 장소, 즉 전시 공간으로서의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작품의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다. 영상이 끝나도 뒤로 가기를 클릭하지 않는 이상 관객은 여전히 그가 만들어 준 가상의 전시장 안에 머물러 공간을 둘러볼 수 있는데 이는 실제 공간에 남아 영상을 한 번 더 보기로 결정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문제이다. 영상 속의 주인공이 접속했던 가상 공간과 유사한 조도를 갖고 있는 그곳은 사실 내가 그 주인공이었으며, 이곳이 바로 그가 접속했던 가상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는 혼란을 야기한다. 다만, 장애물이 가득 차 있던 그곳은 이제 텅 빈 폐허에 가까워졌다. 어둠을 헤치고,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찾는 관람자의 느린 움직임은 시각장애인 주인공의 그것보다 더 축소되었다. 이곳에서 관람자는 한 발자국도 직접 움직일 필요 없이 손으로 스크롤을 몇 번 내리거나 방향키를 조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현실보다 비대한 가상의 공간을 헤매는 일은 이들을 금세 지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자 저 멀리 스크린에서 새어나오는 어슴푸레한 빛이 눈에 들어온다. 질주하는 개와 움직이는 사람, 몇 겹의 이야기 구조에 의해 뒤틀린 입체감으로 가득했던 아뜰리에 에르메스라는 공간은 딱 스크린의 두께만큼 평평해졌다.


한편,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다른 작업에서 한 차례 더 재구현되었다. 바로 <나 홀로 ‘멈블’ 보기>보다 한 계절 앞서 2020년 여름에 만들어진 〈다섯 명의 ‘저택관리인’ 쓰기〉에서 이다. 이 작품은 전시 ⟪다른 곳⟫(2020.8.28.-10.25)을 위해 에르메스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이번에도 역시 그는 영상의 안팎에서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공간을 세 번 재구현했다. 작품에는 자신의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유튜버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출근하는 길을 영상으로 담는데, 그의 출근지인 에르메스는 앞서 밝힌 나의 경험과도,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험과도 사뭇 달라 보인다. 이곳은 내가 가 본, 혹은 알고 있는 그곳과 동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추리 소설가이기도 한 주인공은 자신이 오가는 출근지인 아뜰리에 에르메스를 배경 삼아 추리 소설을 집필 중이다. 이때 공간은 다시 한번 소설가의 언어로, 그리고 구조가 끝없이 반복되는 3D 가상공간으로 변주된다. 시체도, 범인도 밝혀지지 않은 모호한 밀실이 된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물리학 법칙에 등장하는 한 덩어리의 식빵과 같아 보인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체계를 벗어나 덩어리로 존재하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시공간은 유튜버, 소설가, 그리고 김희천에 의해 각기 다르게 절단되며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고 읽힌다.


3.

왜 아뜰리에 에르메스일까? 많은 작품 중 〈멈블〉을 웹으로 옮기기로 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저 그와 공간 사이의 인연이 깊었던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앞서 주지했듯 아뜰리에 에르메스 만큼 방문자에게 공간 자체에 대한 기억을 뚜렷하게 남기는 곳이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거나, 확정적이지 않다는 전제를 딛고 공간을 파악할 때 물리적 실체로서의 공간은 수많은 경험, 관계들과 겹쳐 매듭을 만들고 생동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라는 공간을 두고 여러 대상들이 생성한 매듭들은 각기 또렷한 모습을 띠고 있기에 그 상대성을 감각하는 데 적절하다. 그렇다면 몇 번의 간격을 두고 재구축된 김희천의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김희천 특유의 파국의 정서와는 도무지 겹치지 않는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공간은 공사장으로, 폐허로, 밀실로 분파하며 의미를 거듭하여 갱신한다. 김희천이 만들어낸 세계는 도저히 빠져나올 요량이 없는 밀실인가? 혹은 어디로 이어지든 전혀 상관이 없는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일까? 그렇게 김희천의 세계는 갈수록 좁아지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이 어두워져 간다. 그 어둠 속을 더듬더듬 헤쳐나가는 우리의 더딘 속도는 쉼 없이 시공간을 질주하던 어떤 궤적을 파기한다. 이 느린 여정에서 관람자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이접된 면을 발견하게 된다. 기이하게 맞붙은 시공간 안에서 관람자는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공간의 끄트머리에 닿을 수 없으며, 그곳을 완전히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렇게 스크린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좁지만 깊은, 깊어서 모두가 연결되어버리는 세계는 가능한 한 교묘한 방식으로 여기 어디쯤의 현실 세계를 가리킨다.


정신이 신체보다 늙어버린 10살의 폴라를 떠올린다. 인간의 시간과 개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 한 개체 내의 시간 역시 뒤죽박죽 엉켜 다르게 흐른다. 공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멈블〉과 〈나 홀로 ‘멈블’ 보기〉에서 시간의 함수인 속도에 의해 끝없이 그 크기를 달리하며 감지되었다가, 〈다섯 명의 ‘저택관리인’ 쓰기〉에서 피드백 루프 안에 공간 자체를 가둬버림으로써 분기한다. 각 공간은 ‘흐른다’라는 시간의 존재 양태에서 벗어나 서로 분리되기를 포기한 채 나란하게, 병렬로, 동시에 존재한다. 평소보다 넓지만, 보폭을 좁혀 종종걸음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렇게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물리적 실체로, 영상으로, 3D와 웹상의 데이터로 그 거처를 옮기며 불안정한 속도로 편재한다. 현실 세계와 여기 어딘가가 아닌 다른 곳, 모두가 서로의 간극을 감각할 수 없게 뒤틀리고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시를 보는 그대에게
김얼터

동시대에 시를 읽는 일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참고로 나는 정식으로 시를 공부한 적 없으며, 그냥 시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이 글에는 무지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먼저 써 보이면 누군가 바로잡아 줄 것이라는 기대로 임한다. 나에게 시는 (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행간과 자간이 먼 글쓰기를 요구하는 종류의 글이다.


어쨌든, 동시대에 시를 읽는 일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는 물론 우리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글쓰기 도구들이 더 더 더 짧은 글쓰기를 요구하고, 혹은 클럽하우스와 같이 쓰기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다거나, 단 한순간도 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각적 스펙터클 기계가 깊은 읽기를 방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시를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집에는 없는 책장을 생각한다. 시는 책이다. 시가 책의 형태로 유통되기 때문에 시를 읽으려면 책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책장은 우리의 집에 넓은 공간을 요구한다. 책상 위에 가로로 쌓을 곳도 부족해져 바닥에 책을 쌓다 보면, 이 집은 나를 위한 것인지 시를 위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2018년부터 두 번의 이사를 거쳐 버리거나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에 내다 판 책이 거의 백 권에 이른다. 팔면 안 되는 책을 팔아 버려 두 달 뒤 재구매한 적도 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처분되는 것은 시집과 소설 종류다. 나는 문학을 전부 팔아 버리고 알라딘에서 크레마를, 당근마켓에서 킨들을 구매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것은 엄청난 배신이었다. 줄을 치며 읽는 습관이 있는 나에게 줄을 칠 수 없는 이북 리더기는 눈이 그려지지 않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재미밖에 줄 수가 없다. 심지어 전자책 구매 후 시나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다. 시를 읽는 일은, 시를 꾸준히 읽는 일은, 시의 최종적 형태가 책이라는 매체로 귀결되는 한, 최소한의 생활 반경 외에 추가적인 물리적 장소를 필요로 하는데, 우리의 주거 환경은 그러한 여유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 읽기가 봉착한 첫 번째 난관이다.


시 읽기가 봉착한 두 번째 난관은, 시가 동시대의 무드나 속도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오글과 중2병, 진지병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그나마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그러한 단어들에 관한 반성적 성찰과 자정의 움직임이 있기는 있으나 조금만 평이한 어조를 벗어나도 그것은 (감성이 아니라) 갬성으로 지목되어 곧 사장되고 만다. (그러나 페이스북의 텍스트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또다른 동시대 무드는 틴더의 인터페이스에서 참조할 수 있다. 거기서 사진 게재자가 직접 작성한 텍스트, 즉 해당 셀피의 긴 캡션은 상대를 오른쪽으로 스와이프할 때 필수적인 요건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버튼 한 번을 더 눌러야 볼 수 있는 추가적인 것이다. 로켓 배송 시대에 먼 자간과 행간을 가지는 글쓰기는, 어느 것이 더 낫고 어느 것은 못됐다의 문제를 떠나 그냥 다른 종류의 인간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시 읽기는, 이번 난관은 시 쓰기에 조금 더 가까운 난관인 것 같기는 한데, 시가 보이는 페이지의 크기가 너무 작아져 버렸거나 너무 넓어져 버린 상황을 모두 의식해야 한다. 시는 물론 언제나 읽기를 요구하면서 보기와 듣기도 함께 요구하는 글이었지만, SNS의 등장 이후의 시들에서는 시를 본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조금 더 명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전히 ‘정식’ 시는 책으로 유통되지만, 트위터의 수많은 시 봇들은 시의 일부를, #시스타그램은 시를 이미지화해 유통한다. 이 과정에서 시의 한 행을 차지하는 문장은 제멋대로 두 행이 되거나, 폰트 크기가 제멋대로 작아지거나 커져 버리고, 특정 문장만이 발췌되어 손가락으로 스프레드(Spread)된다. 필요 없는 것은 핀치(pinch)되어 다시 작은 글자로 돌아간다. 또 시의 장평은 마음대로 늘려지며, ‘ㅏ’의 한 귀퉁이는 열화되어 보이지 않게 되고, 평행선이 아니라 책의 펼침을 따라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온 렌즈로 보여지게 된다. 시의 보이기(to be seen)는 2560x1760px와 320x568px라는 두 해상도 사이에서 요동을 친다. 서두가 길었지만 중요한 것은 시가 읽히는 것만큼, 시가 보거나 듣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2010년대 초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詩)팔이 하상욱의 시는 이처럼 자꾸 벌어지는 시와 세계 사이의 상처를 상당히 봉합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트위터에 들어가기 알맞도록 140바이트를 넘지 않으며,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단번에 읽을 수 있도록 이미지로 만드는 일에도 알맞도록 행이 짧다. 그의 작품이 좋거나 나쁘거나를 평가하는 일을 떠나서, 그의 시가 ‘진짜’ 시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시를 읽는 환경이 도무지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을 후련하게 인정해 버린 시는 내가 기억하기로 애니팡이 처음이다.


그러나 진성 고독 매니아인 나에게 하상욱의 시는 지나치게 즐겁기만 해서, 소위 ‘진짜 시다운 시’에 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진짜 시다운 시 같은 건 사실 없기도 하다. 시의 한계는 어디일까? 특히 시가 마음대로 재단되기 쉬운 온라인에서는? 2020년 온라인을 자기 장소로 사용한 수많은 예술 활동이 있었다. 이 글은 그 중 하나인 시홀을 살핀다. 나는 앞서 시가 읽는 것만큼이나 보거나 듣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글은 시 읽기와 시 보기에 집중하면서 사운드는 조금만 건드릴 것이다.


시홀은 구멍 안의 시들을 총 세 가지로 분류한다. 「귓속말로 읽어주고 싶은 시」, 「오늘 쓰고 버린 시」, 「도망치는 시」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기존의 시가 사용하는 ‘읽기’와 ‘보기’를 이어받으면서 ‘더듬기’, ‘지우기’, ‘떠돌기’ 같은 몸짓으로부터 파생되는 서로 다른 감각을 제안한다.


더듬기

귓속말은 물론 일반 대화와 다른 양상을 가진다. 귓속말은 조금 더 내밀한 대화이며, 이때의 대화는 어깨를 숙이고 손으로 귓가를 가리는 등 혀보다 몸을 더 사용하기 때문에 조금 더 직접적인 피부들의 접촉이고,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숨소리나 호흡에 의미가 투사되는 대화다.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를 보러 들어가는 관객은 가우시안 블러 처리된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는데,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마우스를 중심으로 한 원에 블러 처리가 사라지고 아래에 있는 이미지가 원을 통해 보인다. 그 이미지는 사람의 피부나 털, 귀 같은 기관이 틀림없지만 동시에 사람은 아닌, 마치 사람의 피부를 평면으로 펼쳐 놓은 것 같은 어떤 것이다. 관객은 마우스를 움직여 이 표면을 더듬는다. 술래가 눈을 가리고 숨는 사람은 박수를 치며 따라 다니는 숨바꼭질처럼, 사운드를 따라 이미지를 더듬다가 시 조각을 찾게 된다. 1번부터 11번까지 시 조각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내가 찾은 각각의 시 조각들이 가진 사운드가 중첩되는데, 이는 블러 처리 된 표면 아래 이것 저것을 모아다 망치로 두드려 평평하게 만든 것 같은 이미지와 공명하는 측면이 있다. 어쨌든 이 시 조각을 눌러야 드디어 시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시를 보는 것도 쉽지 않다. 마우스 반경의 투명한 원 때문에 글씨가 자꾸만 가려진다. 결국 관객은 시를 찾기 위해 마우스로 이미지를 더듬었던 것처럼 문장을 더듬어야 하는데, 이때의 더듬기는 역(逆)더듬기다. 문장을 피해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더듬기와 디지털 매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특히 거의 모든 스크린이 터치 기반으로 넘어가면서 이미지는 눈으로 보이기만 한다기보다 손 끝으로 만져지고, 더듬어지고, 걸러지고, 확대되거나 잘리거나 축소된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눈들을 위한 보는 시가 아니라, 손가락 끝을 위한 더듬는 시다. 그것은 언어 너머의 ‘순수’한 세계에서 손으로 방해되고 보이지 않게 되면서 기묘하게도 미술에서 가장 오래된 테마 중 하나를 건드린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화면을 더듬는 우리의 손가락 끝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홀은 데스크톱으로 시 보기를 추천한다. 역더듬기를 구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터치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스크린에는 마우스가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는 역더듬기를 구사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마우스와 손가락의 차이에 관련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지우기

「오늘 쓰고 버린 시」는 화면의 바디 부분에 삽으로 땅을 파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깔려 있고,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시-div들이 널려 있다. 바탕에 있는 이미지를 일정 단위로 분할한 것 같은 각각의 시-div를 누르면 마우스 커서가 빨간색 타원으로 변하고, 이 마우스를 지우개처럼 사용해 위에 있는 이미지를 지움으로써 시의 모습이 드러난다. 지우는 목적이 시를 읽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문장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위주로 지울 수밖에 없다. 이 div에서 나가기 위해 바탕을 누르면 확인한 시-div는 사라져 있고, 파지지 않는 땅을 파는 이미지만이 남아 있다. 「오늘 쓰고 버린 시」는 하나의 사운드만을 제공하고, 보는 사람이 이 사운드를 언제 만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다시 시를 읽는 환경을 환기한다.


우리의 주변은 시집 하나를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상황일까?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그것은 벤야민이 정신 산만한 것이라고 불렀던 환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떤 문장이 다음 줄로 넘어갈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읽는 사람이 거기 머무르기를 선택하거나 더 이상 이 시를 읽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이런 결정은 시가 아주 오래 전 소리내어 읽기를 목적으로 했던 때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시를 시집, 즉 책의 형태로 읽었던 때, 그리고 시를 아무렇게나 절삭해서 읽는 지금 같은 때에 모두 적용되는 생각이다. 이제 시와 시 읽기는 손 쉽게 지워지거나, 취소되거나, 쓰고 버려질 수 있다. 이제가 아니라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종이 시는 조각 조각 잘라져서 인용되고 RT되었으며, 함부로 이미지로 발췌되어 #시스타그램의 재료가 되었다. 사람들이 시를 어떤 마음으로 읽는지 알 수 없으므로, 이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다. (인용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좋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시가 더 이상 하나의 유기체같이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킬러다.


떠돌기

마지막으로 「도망치는 시」는 360도로 시점을 돌려 볼 수 있는 3D 영상이 있고, 시들은 그 세계에 부유 중이거나, 흐르고 있거나, 울룩불룩한 상태로 있다. 하나의 시를 읽을 만한 시간 후에, 누군지도 모를 나는 카메라에 이끌려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시를 본다. 시를 보는 행위와 시가 보이는 것이라는 측면은 특히 「도망치는 시」에서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해체되면서 동시에 대단히 가시화된다. 종이 시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문장 두 개 사이의 거리인 행간과 연 두 개를 구분하는 공백은 중요한 시각적 요소이지만, 「도망치는 시」에서 이런 시각적 요소들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아예 없어진다. 「도망치는 시」는 종이에 가지런히 적히지 않고, 종이를 떠나 떠돈다. 보는 사람은 떠도는 시와 함께 이미지 사이에 이끌려 떠돈다. 시는 심지어는 내 눈을 피해 움직이기 때문에 시는 나를 쫓아오지 않지만 나는 시를 쫓아가야 한다. 이것은 마치 비참한 방식으로 애인을 차 버렸지만 사실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인 감각이다…. 나는 시를 사랑한다. 시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나를 버리지도 않는다. 시는 나를 완전히 가지고 놀 생각인 것이다.


「도망치는 시」는 의미의 측면에서나 문장 형식의 측면에서나 이미지의 측면에서나 모두 도망친다. 그러나 이 도망은 완전히 사라지기를 목표로 하는 도망이 아니다. 이 도망은 붙잡히기 직전의 순간을 계속해서 지연하는 도망이다. 다시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 예시를 생각해 본다. 이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술래를 피해 영원히 숨어 있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붙잡히는 일이라고 한다. 「도망치는 시」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드라마틱한 상황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드디어 시를 볼 수 있는 고정된 시점을 찾았다고 생각하다가도, 그 좌표가 겨우 3초만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화면을 움켜 쥐어 시점을 옮기게 된다. 시는 와중에도 내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쿨한 모습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나 시홀에서 무엇보다 시적인 부분은 메인 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다음 문구다. 서울문화재단에서 돈을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자신이 놓인 상태를 직시하면서, 상냥하되, 품위를 지키면서도, 약간의 시니컬함을 더해, 앞으로 나아가기. 시는 이제 어디로 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메타버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김호원
* 2019년 출간된 김초엽 작가의 작품집의 서명이자 해당 저서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 소설 제목에서 발췌.


1.

앤드류는 대뜸 묻는다, 우리가 앞으로 춤을 추게 될 방식에 대하여. 우리는 근미래에 어떻게 춤을 추고 있을까? 금요일 밤, 침대에 누워 불과 일 년 전 사람들이 춤추던 모습을 보고 있는/있어야만 하는 앤드류는 바로 지금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좋은 때라 생각한다. 물리적 장소로서의 클럽은 전 세계적 전염병으로 여닫기를 반복하며 시공간의 흐름이 느려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또 동시에, 온라인 공간에서의 클러빙 이벤트는 나날이 새롭게 또 빠르게 등장하고 있으니. 어쩌면 기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코로나가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찾아왔다 떠나가는 냉방병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모든 것은 자연스레 그리고 당연히 예전처럼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앤드류는 이내 생각을 바꾼다, 지난 일 년간 이미 너무 많은 변화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금요일 밤 침대에 누워 무심히 스마트폰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앤드류에게 물리적 장소로서의 클럽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이 이제는 낯설게 되어버린 것이다. 밀폐된 지하 공간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로 밀착되어 춤추는 모습을, 연기 속에 가득 찬 호흡을 그리고 침과 알코올로 뒤범벅이 된 바닥을 떠올리는 일이. 그리하여 앤드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우선 오늘은, 꼭 이 금요일 밤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편이 낫겠다고. 베개를 받치고 누운 앤드류는 대신 유튜브에서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되고 있는 디제이 믹스셋 영상을 켠다. 리듬에 맞게 발을 까딱거리며, 앤드류는 묻는다. 우리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춤을 추게 될지. 불만족스러운 채로, 그저 발을 까딱거리며.



(이미지1) CO.KR | Boiler Room X Vans: House Of Vans Seoul (Youtube)

물리적 장소로서의 클럽이 온라인상의 공간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이미 꽤 오래전의 일이다. 이러한 현상을 대표하는 것은 영국 기반의 음악 플랫폼인 보일러 룸(Boiler Room)이다. 2010년, 언더그라운드 클럽의 한쪽 벽면에 고정시킨 웹캠으로 그 역사를 시작한 보일러 룸은1클럽이나 다른 이벤트 공간에서의 디제잉을 실시간 스트리밍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보일러 룸은 티켓 판매 등을 통한 수익 창출을 위해 온라인 스트리밍 이전의 오프라인 공간 이벤트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보일러 룸이 제공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는 클럽을 비롯한 여타 장소의 물리적 시공간을 대체하기보다는, 여러 제약으로 해당 시공간을 신체적으로 점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보완재로서 기능해왔다고 볼 수 있다.2 보일러 룸을 비롯한 온라인 디제잉 스트리밍은 분명 클럽 문화를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자기 스스로 원본의 온라인 이벤트가 되기보다는 오프라인에서의 이벤트 경험을 더욱 확장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온 것이다.


2.

앤드류는 같은 믹스셋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 실시간 채팅창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의 방에 클럽 느낌을 내보기 위해 미러볼을 샀다는 사람의 글을 읽는다. 앤드류는 고개를 돌려 자기 방을 둘러본다. 잠들기 좋은 노란 불빛을 내는 스탠드 하나가 천연덕스럽게 서 있다. 비록 미러볼은 없지만, 앤드류는 자신의 방에서 춤을 춰보기로 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앤드류는 방 한쪽에서 나뒹굴고 있던 헤드폰을 끼우고 볼륨을 키운다. 눈을 감고, 나름대로 리듬을 타려 애쓴다. 방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어도 아무래도 한밤중이니 다리는 많이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앤드류는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본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각자의 방에서 춤을 추고 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그러다 몸이 휘청하자 앤드류는 살짝 눈이 떠졌고,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책상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과 문고리에 걸어둔 수건. 앤드류는 순간 허탈한 마음이 들어 웃었다. 혼자 있었지만, 소리 내어 웃었다. 앤드류는 어쩌면 자신이 이러한 일상의 사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러니까 돌아오는 월요일에 다시 들여다봐야만 하는 서류 뭉텅이나 빽빽한 일정이 적혀 있는 달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클럽을 갔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주중 한낮의 일상-사물로부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이미지2) United We Stream Tbilisi: MTKVARZE (Twitch)

물리적 장소로서의 클럽은 어떻게 마술적 치유의 공간이 되는가? 클러빙을 하나의 의례 절차로 이해해보자.3 먼저 클럽 내외에서는 일종의 규율로서 어떠한 코드가 작동한다. 이를테면 저마다의 클럽은 각기 다른 복장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주중 한낮의 의복, 즉 직장에서의 의복과는 다른 복장을 요구한다. 또한, 클럽에서 적절한 음주를 통한 자아도취는 허용되지만, 지나친 주정은 금기시된다. 이외에 클러버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때 통용되는 비언어적인 신호 같은 것도 존재한다. 이러한 코드 위에, 디제이가 군림한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비로소 클럽에서야 마주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디제이는 현대판 샤먼처럼 클러빙이라는 의례 절차를 이끌어 나간다. 디제이는 반복적인 리듬을 토대로 어떤 클럽이나 이벤트의 성격에 맞는 믹스셋을 준비한다. 이러한 믹스셋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음악들을 통해 디제이는 클러버들을 동시에 움직이고 춤추게 하며 집단적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주중 대낮에는 각자 다른 지위와 다른 배경을 가진 클러버들은 주말 한밤중에 평등하고 또 동일하게 황홀경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클러버들은 자기치유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직장에서의 몸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고, 클럽에서의 몸을 재구성하면서. 그런데 디제이들의 모습을 온라인 스트리밍하는 것으로 이러한 치유의 효과를 느낄 수 있을까? 내장을 진동시키는 음파나 감은 눈도 어지럽히는 조명 없이도 우리의 몸이 재구성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다른 클러버들 없이 오직 디제이만을 유일하게 비추고 있는 코로나 시국의 실시간 스트리밍은 하나의 의례 절차로 이해될 수 있을까?


3.

괜히 머쓱해진 앤드류는 오늘은 그저 영화를 보다 잠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앤드류는 랩탑을 켜고 볼만한 영화를 찾는다. 그러다 광고 하나가 눈에 띈다. "콘서트의 미래는 가상에 존재합니다. 이 혁명에 동참하세요." 보아하니, 메타버스 공간에서 클럽 공연이나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서비스를 홍보하고 있다. 앤드류는 그 서비스의 웹사이트를 흥미롭게 둘러보다가 오늘, 이 새벽에, 지금 오프닝 이벤트가 열린다는 문구를 발견한다. 앤드류는 고민이 된다. 스스로에게도 민망한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한 것 같기에. 메타버스에 있는 클럽에 간다고 한들, 결국 나는 방 안에 있는데 뭐가 달라질까? 거기서 춤을 추다 눈을 뜨면 똑같이 내 방이 보이지 않을까, 아니 거기서 눈을 뜰 수 있기나 할까. 그러다 앤드류에게 몇 개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간다. FPS 게임을 할 때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아바타를 앞으로 뛰게 하며 자신의 몸을 같이 기울이고 높이 점프를 시킬 때 자신의 목이 함께 꺾이는 모습이. 그리하여 아바타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이. 앤드류는 메타버스 클럽에서 동기화할 수 있는 아바타를 보기 위해 오프닝 이벤트의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먼저 찾는다. 기왕이면 웃기고 재밌게 생긴 아바타가 많았으면 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앤드류는 영상을 켠다. 모니터를 마주 보고 있는 앤드류의 얼굴이 번쩍거린다. 가상의 클럽 속에서 바삐 돌아가고 있는 레이저와 네온 조명들이 앤드류의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앤드류의 눈에 아바타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 다르게 생긴 아바타들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춤추고 있다. 이제, 적어도 오늘 앤드류는 더 이상 혼자 춤을 출 필요가 없다. 메타버스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하는 앤드류의 손이 분주해진다.



(이미지3) Sansar 소개 창: "The future of concerts is virtual. Join the revolution."


(이미지4) Tobacco Dock Virtual: Little Gallery (Youtube)

온라인 공간 속에서 다양한 디제잉 이벤트가 개최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클러빙의 구분은 점차 옅어져 갔다. 그러던 찰나에 발생한 코로나는 방역을 이유로 물리적 공간으로서 클럽의 정상적인 운영을 어렵게 했고, 이는 독특한 현상을 낳는다. 바로 온라인 공간에서의 클러빙이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클러빙을 보완해주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자체가 원본 이벤트가 되어 오프라인 클러빙을 대체해버리는 것. 그중에서도 특히 산사르(Sansar)와 같은 메타버스 기반의 서비스는 오프라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클러빙 경험을 제공한다. 산사르는 가상현실 속에 여러 테마를 가진 클럽을 만들고 그 클럽에서 다양한 디제이와 아티스트의 공연을 개최한다. 산사르의 사용자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공연을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다른 사용자들과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며 관람 경험을 공유할 수도 있다. 산사르와 같은 메타버스 클러빙은 기존의 라이브 스트리밍이 디제이의 믹스셋을 2차원 영상으로 매개해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용자들이 직접 3차원의 가상 클럽 공간 속에서 다시점/다각도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메타버스 클러빙은 주술적 치유의 경험을 다시 가능하게 할까? 아바타로 대체된 모습이긴 하지만, 다른 클러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그 경험은 메타버스 클럽에서의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인지하는 아바타의 몸은 어떻게 구성될까?


4.

86%, 87%, 88%, 89%, … …… ………… …………………… ………………………………………… 90% … 100% 다운로드가 완료되자마자 앤드류는 기쁜 마음으로 소프트웨어를 실행한다. 로딩을 기다리는 동안 앤드류는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메타버스 클럽의 공간을 미리 익힌다. 얼른 저기에서 함께 춤추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순식간에 회원가입과 로그인을 마친 앤드류는 아바타를 고른다. 왠지 사람보다는 외계인이 더 재밌는 것 같아 외계인으로. 그런데 방금 앤드류가 고른, 프로그램에 우뚝 서 있는 이 외계인과 온라인 스트리밍 영상 속에서 춤추고 있는 저 외계인은 무언가가 다르다. 뭘까? 이윽고 앤드류는 그것이 해상도의 문제임을 알아챈다. 프로그램 화면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외계인의 몸에는 픽셀이 자글자글 껴있지만, 스트리밍 영상 속 저 외계인은 점 하나 없는 매끈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앤드류는 이 외계인 역시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저해상도여도 픽셀은 여전히 화면 속을 흐르고 일렁일 수 있을 테니. 그리하여 앤드류의 외계인은 프로그램 실행 첫 화면이자 클럽 입장의 관문인 넥서스에 도달한다. 그러나 앤드류가 자신의 외계인을 움직이기 위해 W 키를 눌렀을 때, 그리고 그 외계인이 넥서스에서 첫 몇 걸음을 가상하게 내디뎠을 때 앤드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져내렸다. 그래픽을 감당하고 있지 못한 그의 랩탑 화면에서, 그의 외계인은 프레임 단위로 끊어지며 순간이동 하듯이 움직였다. 그가 방향키를 누를 때보다 조금씩 늦게, 그마저도 매우 느리게 그리고 힘겹게. 춤을 추러 가기 위해서.



(이미지5) 아바타를 고르는 장면 (Sansar)


(이미지6) NEXUS에 처음 입장한 장면 (Sansar)

앤드류는 자신을 잘 따라주지 않는 외계인을 데리고 꾸역꾸역 메타버스 클럽 안을 돌아다닌다. 다른 아바타들이 그의 외계인 곁을 스쳐 지나간다. 목각인형들처럼. 앤드류는 생각한다. 저 목각인형들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화면에서 나의 외계인은 매끄러운 몸으로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을까? 앤드류는 라이브 스트리밍 영상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아바타들을 바라본다. 그의 외계인보다 높은 해상도로 끊임없이, 아니 끊김 없이 춤을 추고 있는 그 아바타들을. 앤드류는 계속해서 끊기는 화면에 멀미가 날 지경이지만, 오늘은 하필이면 금요일 밤이고 또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한 것이 억울해서라도 꼭 저기 보이는 춤추는 공간에 가야만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앤드류의 외계인은 걷는다. 모두가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메타버스 클럽 속을. 이윽고 그의 외계인이 검은 문이 보이는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때, 어렴풋이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앤드류는 그것이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보여주는 공간의 음악과 같은 음악인 것을 알고 이제 영상을 끈다. 오로지 메타버스 클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의지하며 앤드류의 외계인은 검은 문으로 다가간다. 웅웅대는 음악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마침내 앤드류의 외계인은, 앤드류는 그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의 외계인이, 그가 춤출 수 있는 공간으로.



(이미지7) Tobacco Dock Virtual: Great Gallery에 입장한 장면 (SANSAR)


(이미지8) Tobacco Dock Virtual: Great Gallery (Youtube)

그의 외계인은 외롭다. 아니, 앤드류가 외롭다. 앤드류의 외계인은 다른 아바타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앤드류는 각기 다른 춤이 입력된 키를 하나둘씩 차례로 눌러본다. 그러나 그 춤들은 어차피 다 똑같이 보인다. 프레임마다 끊기며. 그래서 앤드류는 자신의 외계인이 불쌍하다고 느낀다. 랩탑이 아닌 데스크탑으로 혹은 더 좋은 랩탑으로 이 메타버스 클럽에 접속했더라면, 그의 외계인은 매끄럽게 춤출 수 있었을까? 그의 외계인은 다른 아바타들과 코드를 나누며 집단적 황홀경에 빠질 수 있었을까? 이런 해상도를 가진 그의 외계인은 금요일이면 춤을 추고 싶을까? 저열한 픽셀로 꾸역꾸역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외계인을 보는 것이 안쓰러워, 앤드류는 랩탑을 덮는다. 한창 새벽이고, 음악 소리가 없는 방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오늘 중 두 번째로 혼자서 소리 내어 웃는 앤드류의 소리가 새벽의 방 안을 채운다.


5.

실제 세계에서 우리의 몸은 다양한 방식으로 맵핑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피부와 장기는 생물학적으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에 의해서도 다층적으로 구성된다. 물질과 비물질이 켜켜이 쌓인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 가상현실에서도, 우리를 대신하거나 대행하는 아바타의 몸은 다양한 물질적/비물질적 층위로 구성된다. 실제 세계의 몸에 따라, 각기 다른 하드/소프트웨어와 이를 사용하는 저마다의 관습에 따라 아바타의 몸은 다르게 지각된다. 그런데, 가상현실에서 우리의 아바타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우리의 아바타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면? 아바타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어 서로 동기화하지 못하고 따로 존재하게 된다면? 메타버스에서 우리의 아바타를 구성하는 픽셀은 단순한 해상도의 단위가 아니라, 재현의 단위이자 우리의 몸을 인지할 수 있는 척도로서 기능한다. 만약 누군가가 더 좋은 디스플레이와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 누군가는 자신의 아바타를 더욱 친밀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제 생각과 행동에 매우 근접해 있는 어떤 외계인에 대해. 정말, 춤 출 수 있을까? 앤드류는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친다. 앤드류는 자꾸 눈에 밟히는 몇 문장을 반복해서 읽다가 살짝 잠이 든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4

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앤드류는 책을 덮는다. 금요일 밤에 춤이라도 춰보겠다며 요란하게 밤을 지새웠다. 그래도 앤드류는 아직 토요일이니까, 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앤드류는 잠들기 전 눈을 지그시 감고 돌아올 평일을 생각한다. 주중의 대낮을.




1https://boilerroom.tv/about

2ㅤBen Assiter, “No Screenshots on the Dance Floor,” Dance Cult Vol. 12 No. 1, 2020, https://dj.dancecult.net/index.php/dancecult/article/view/1170/998

3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Christina Goulding and Avi Shankar, "Club Culture, Neotribalism and Ritualised Behaviour," Annals of Tourism Research, Vol. 38, No. 4, 2011, pp. 1435-53을 참고.

4ㅤ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서울: 허블, 2019, p. 181.

Nobody is Newbody (신체 없는 신체)
이지우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 즈음, 전시 《HOMEWORK》와 《Girls in Quarantine》 그리고 난지의 오픈 스튜디오 《OPEN SOURCE STUDIO》를 봤다. 왕왕 나열한 이 제목들은 알다시피 모두 웹사이트를 기반으로 하여 열린 전시들이다. 이전보다 더욱 심화된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공간 사이의 간극, 그에 따라 변화된 어떠한 특정 양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던 시기였다. 세계는 넓어진 반면 감각경험이 줄어드는 온라인 전시의 특성상, 현재로선 흐릿한 기억만을 붙잡고 세 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3개월 전의 내가 남긴 메모를 살펴보면 당시의 나는 몇 가지 사항을 염두 하여 해당 전시들을 선택하고 감상했음이 분명하다:


첫째, 오프라인 공간을 3D, AR 등등의 형태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닌, 온라인 전시 그 자체로서 기능할 것
둘째, 온/오프라인 각각의 공간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진 전시일 것
셋째, 이전에 오프라인에서 내가 여러번 마주쳤던 작품 혹은 작가가 참여한 전시일 것(그러므로 국내 전시로 한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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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겹다. 이 글을 장장 몇 개월간 마무리 짓지 못 하고 끌고 온 이유는 내가 부지런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지겨워서다. 온라인도 팬데믹도 엔에프티도 테이크아웃 커피잔도 무거워진 몸뚱아리도 그리고 한탄하며 키보드를 두들기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어서 더 그런 걸까나. 벌써 선풍기 없이는 타이핑을 칠 수 없는 계절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전시를 연다. 말은 참 쉽지만 사실 무언가를 열기, 혹은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다. 겨우 두 눈과 손가락 몇 개와 약간의 손실(내 머리카락...)만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 전시(물론 눈과 손과 머리카락만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지만)는 오프라인 못지않게 손 가야 할 곳이 많다. 넷-아트, 인터넷 아트에 관한 담론은 그간 간헐적으로 출현했던 주제이지만 이를 전시 전반에 관한 것으로 가져오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작품, 전시 공간이기 이전에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람 형태를 요구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이것을 인지하고 있는 여러 온라인 전시의 비판적 실천에 긍정을 표하며, 세 전시를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국내 온라인 전시 상황을 정리하고 되짚어 보고자 글을 엮는다. 웹 브라우저에 기반한 앞으로의 전시에서 어떤 것을 보게 되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전시 《HOMEWORK》와 《Girls in Quarantine》

아트선재센터의 《HOMEWORK》와 (N)YTN의 《Girls in Quarantine》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의 공통점은, 기존의 미술 전시에서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완결된 형태의 작업이나 혹은 작품을 위한 작품이 아닌, 미술가 개인의 감상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 열린 형태의 작업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상이었다. 여기서 나는 ‘온라인’이라는 신체를 경유한 전시 공간이 미술 일상 전반에 미치는 어떠한 영향을 감지했는데, 본래 인터넷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볍고도 속도감 있는 일상과 너무나도 깊이 맞닿아 있다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플랫폼에서 비일상의 영역에 가까운 예술 작품을 전시해야 한다는 약간의 난해함, 당혹감, 혹은 오히려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등을 생각했다. 또한 소위 말하는 작품의 ‘퀄리티’ 혹은 그 존재감 하나하나를 온전히 담기에 웹 전시가 선사하는 감상의 깊이는 극단적으로 얕거나 깊었으며(우리는 ‘전시장’에 ‘게재’된 5분짜리 영상 작품을 5초 만에 넘길 수도, 혹은 원 없이 50분 동안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미술가 홍길동 씨의 작품과 아무개 씨의 작품 등등이 참여한 전시 《블라블라》’가 아닌, ‘작품 N가지가 모여 있음으로써 완성된 전시 그 자체’로 보이게끔 만들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작품보다는 전시 서문이 궁금해지는데, 기획과 작품의 보다 더 촘촘한 관계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것은 어쩌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는 말인 것 같아 부연을 하자면, 전시에서 기획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것에 대해 긍정하는 이유는 ANT가 미끄러지는 부분에 대하여 설명한 하먼의 명사적 객체 읽기와 동시대를 ‘작동하는 허구’로 명명한 오스본의 말을 등에 업어, 전시의 서사를 맵핑 하는 주체의 존재 혹은 아티스트-큐레이션의 실천은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 2020 난지의 오픈 스튜디오 《OPEN SOURCE STUDIO》

지난겨울, 당해년도에 입주한 작가들의 활동을 소개해 온 난지의 오픈 스튜디오가 팬데믹 상황에 맞추어 온라인 기반의 행사로 진행되었다. 스튜디오의 건물과 주변 환경의 위치, 시각정보를 LiDAR 카메라로 촬영해 그것을 데이터화 하여 홈페이지 메인을 꾸미는 등 물리적 공간 개념을 비물질적인 웹 공간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했고, 이에 ‘확장된 신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오프라인 전시 공간을 3D, AR 등등의 형태로 옮기는 것에 그쳤던 기존의 온라인 전시공간에 관한 문제의식을 내비쳤다. 참여한 작가는 총 23명으로, 평면, 사진, 조각, 설치 등 각각의 영역에서 진행한 작업물들을 선보였는데 흥미롭게도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연구한 흔적이 보였다. 누군가는 자신의 SNS 계정 링크를 걸거나 Vimeo 링크를 걸어 다이렉트로 작품을 보여주었고, 같은 평면, 조각, 설치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보여주는 방식과 플랫폼이 서로 달랐으며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보다 다양했다. 또, 《Girls in Quarantine》에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참여했던 장서영의 또 다른 작품을 이번 난지의 오픈 스튜디오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같은 작가를 두 웹 전시에서 마주하니 오프라인 전시 공간에서 하는 고민과 유사한, 상황별로 달라지는 보여주기의 방식이 비교적 플랫한 온라인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Girls in Quarantine》의 ‘스크리닝’과 ‘프로젝트’ 두 갈래 중, 관계를 매개하는 장치를 탐구한 챕터 ‘스크리닝’에서 선보였던 그의 작품 〈LDR-ASG〉(2020)은 텍스트 중심의 영상 작업으로, 스크린과 카메라 렌즈 사이를 경유해 나타나는 물리적/관계적 모순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 《OPEN SOURCE STUDIO》의 〈Infinity Pool〉(2020)도 동일한 주제의 연장선으로, 현실과 가상을 잇는 대리적 감각을 극대화하여 보여준 영상작품이다. 8분 남짓한 길이의 이 작품은 실제로 촬영한(것 같은) 수영장 풀 속 상황에서 시작된다. 이때 다소 메디테이트한 톤의 내레이션이 물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내가 너에게 한없이 다가가도, 결코 닿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며 실재와 가상을 넘나드는 기묘한 가상적 현실을 친절히, 대신, 부정해준다. 그러다 영상 말미에 가서는 어느 순간 갑자기 수영장을 마치 처음부터 3D로 구현된 세상에 던져놓았던 것처럼 전환시켜 감각되는 공간의 경험을 확장시킨다. 즉,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던 가상과 실재가 중첩된 감각 안에서 가상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밝혀내 그러한 합의된 감각을 배반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가상-실재의 중첩으로 인해 나타나는 오류를 직관하게끔 만든다. 작가는 《Girls in Quarantine》에서의 〈LDR-ASG〉(2020)와 《OPEN SOURCE STUDIO》의 〈Infinity Pool〉(2020) 모두 동일하게 Vimeo 링크를 걸었으나, 각각의 전시에서 보여준 인터페이스를 서로 달리했으며 이는 작품의 성질에 맞게 바꾼 것으로 보였다.


3) 《HOMEWORK》, 《Girls in Quarantine》, 《OPEN SOURCE STUDIO》

앞서 예로든 장서영의 작업과 비슷하게, 다른 작가들의 작업에서 또한 마찬가지의 고민이 언뜻 보였다. 나에게 초면이었던 장서영의 두 작품은 각각의 웹 전시들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구면인 다른 작가들의 작품인 경우 이전에 오프라인에서 작품을 마주했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웹 전시에서 그들의 작품을 색다르게(?) 감상할 수 있었다. 온라인이라는 신체는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는 약간 미션 같이 보였다(늘어나는 확진자 수와 동시에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 상황이었던 지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해보자는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웹 브라우저를 전시 공간으로 가지는 전시는 아무래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집중력은,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요구되는 어떤 성의를 의미한다(그만큼 웹 전시는 감상에 있어 방해되는 요소가 많다. 예를 들어 각 전시 별로 상이한 인터페이스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서부터 진입 장벽이란 것이 존재하니, 컴맹에게는 그닥 매력적이지 못하다). 따라서《OPEN SOURCE STUDIO》의 서문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온라인이라는 신체는 오프라인 전시의 대체물이 아닌 ‘확장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그것이 유효한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것이며 확장의 의미 또한 재검토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세 전시를 경험한 후 3개월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 온라인 전시 공간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주제가 되지 못하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로 고려되는 듯하다. 자유자재로 PC(Player Character)의 옷과 스타일링을 바꿔치기하듯이 공간도 그렇게 미술가 개인의 상황과 기호에 맞춰 바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서영의 작업이 유독 인상 깊었던 이유도 플랫한 성질의 웹 전시와 작품의 결이(서사가) 일치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아무튼 좋았다는 뜻이다).


4) 내가그린기린그림은 잘그린기린그림이고 네가그린기린그림은 잘못그린기린그림이다

디지털 기술(을 경유한 예술)은 물질적인 무언가(thing), 즉 물감이나 아이소핑크, 프로젝터와 같은 구체적인 재료가 보이지 않는 형식이기에 기존의 그 어떤 매체보다도 이미지의 지표적 특성을 드러내는 중재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데이터화된 시각 정보들은 분배를 통해 만연해지고, 동시에 지식과 진실은 모두 감소하지 않는다. 즉, 이미지의 실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데이터값이 끊임없는 복제를 통해 아무리 내려간다고 한들, 그것의 의미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이미지 대 정보가 아닌, 정보 대 서사라는 대결구도로 이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물질에서 벗어난 것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왠지 허전함을 느끼고, 내가 방금 무엇을 본 것인지 모르겠고, 마치 어제 먹은 저녁 메뉴가 생각나지 않듯 나의 뇌가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로 처리해버리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게, 디지털에 의해 전유되는 미술은 오로지 서사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외출 횟수가 현저히 줄어듦과 동시에 옷차림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이 덜한 요즘, 일종의 보상심리인지 인터넷 쇼핑이 더욱 즐겁다(이참에 닥치는 대로 옷입기를 자제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옷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그 와중에 신체 없는 신체는 유유자적하며 언젠가 자신에게 관심 가져 줄지 모르는 주체들 사이를 누비고 있다.

🥠: 최영
대답하는 사람: 최영, 질문하는 사람: 황재민, 기록하는 사람: 이지우

🥠는 ‘까 봐야 안다’를 슬로건으로 하는 인터뷰 코너다. 인터뷰의 형식을 경유하지만 특별한 목적지는 없기 때문에, 대화의 방향은 그때그때의 포춘(fortune)에 맡긴다.

최영(Yeong Die) 뮤지션. DJ. 비주얼리스트. 우스꽝스럽고도 씁쓸한 것, 무섭지만 끝까지 보고 싶은 것을 만든다. 정규앨범 〈Pizzapi〉(2018), 〈Threshold Value〉(2020)을 발매했고, 2019년부터 음악감상 방식에 대한 실험 〈だいだい 다이다이〉시리즈를 진행해오고 있다. 웹 컨텐츠 《Quarantine Études》(2020), 기획공연 《CENTERS(중심들)》(2020)에 뮤지션과 기획자로 참여했다.



재민 먼저 가장 수상해 보이는 프로젝트로부터 인터뷰를 시작해볼까 한다. 2018년, 〈Background Eraser〉라는 이름으로 지속하던 사진 프로젝트를 아카이브해 『Jonh Berger - Ways of Seeing』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펭귄북스에서 나온 존 버거(John Berger)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를 샘플링해 제목을 붙이고 표지 작업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Background Eraser〉 시리즈와 『Jonh Berger - Ways of Seeing』이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이며, 어떻게 기획하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이미지1) 〈Background Eraser〉 시리즈(2018-)

성인이 된 후의 일인데, 유년 시절 사진을 몽땅 폐기처분당한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 광적으로 셀피를 찍기 시작했다. 우리 세대에게 셀피를 찍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고, 그래서 나에겐 셀피가 많았다. 또 한편으로는 밈(Meme)을 모으는데 미쳐 있었다. 사진첩에 셀피부터 고양이 사진과 밈까지, 잡다한 이미지가 넘쳐났지. 그것들을 재료로 시작한 작업이 〈Background Eraser〉 시리즈다. “Background Eraser”라는 무료 어플리케이션의 이름을 작업 제목으로 정한 것이었는데, 처음부터 작업 개념으로 시작한 건 아니다. 단순히 친구들을 웃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최대한 웃기게, 이상하게 사진을 합성해 SNS에 한두 장씩 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어느날 지인이 ‘그거, 작업 아니었어요?’라고 물었고, 며칠이나 그 말을 곱씹게 됐다. 본격적으로 작업량을 늘리고 인스타그램 계정(@iaaw_)을 만들어 게시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책을 만들게 된 이유는 순전히 해당 년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책 『Jonh Berger - Ways of Seeing』은 〈Background Eraser〉 시리즈 작업 500개를 넘버링하여 모은 책이다.


(이미지2) 『Jonh Berger - Ways of Seeing』(2018)

재민 왜 존 버거였나? 펭귄북스 에디션을 사용한 이유는?


좋아하는 책이었고, 내 작업과 엮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와 밈이 미친 듯이 불어나고 있는 지금의 온라인 세계에서, 어떤 이미지라도 내 얼굴을 넣으면 내 걸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표지에 내 얼굴을 넣은 것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이 책이 놓여 있으면 사람들이 진짜 이상하게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최대한 이상하게 보이고 싶었고, 실제로 재미있는 반응도 많았다. “어, 나 저 책 아는데?” 하고 책을 펼쳐보면 내 얼굴이 있는 거지. 그런데 그 앞에 내가 앉아 있으니까 나랑 책을 번갈아 보고… 작업의 넘버링 작업과 내지 에디팅은 직접 했고, 표지를 무단 카피하는 건 디자이너인 친구가 도와줬다. 저작권 관련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용기가 대단하다.


재민 〈Background Eraser〉 시리즈는 셀피에 대한 즐거운 농담인 동시에 뒤틀린 방식의 자기 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작업은, 이를테면 잘 정리된 포트폴리오처럼 기능하는 인스타그램 피드 같은 것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사례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관련해서 음악가, 혹은 작가에게 인스타그램이라는 SNS의 위상에 관한 생각은 어떠한가.


유명세가 돈으로 직결되는 요즘의 시대상이 가장 잘 반영된 하나의 문화 아닐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세이클럽, 싸이월드, 버디버디까지만 해도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인스타그램의 팔로워수는 대변인처럼 나서서 그를 소개한다. 어떤 컨셉과 무드로 피드를 꾸미는지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나도 팔로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피로감과 허무감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재민 그 다음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은 프로젝트는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2019)다. 이것은 무척 혼란스러운 매쉬업을 가능케 만드는 일종의 DIY 디제잉 장치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지 설명을 부탁한다.


(이미지3)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2019)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2017년 PERFORM에서 선보인 〈Dizzy Desk(책상정리)〉인 것 같다. 두 명이 나란히 책상을 놓고 앉아 한 명은 데스크탑에 늘어놓은 음원을 하나씩 재생하며 삭제하고, 한 명은 책과 종이조각들을 늘어놓고 읽고 나서 버리는 퍼포먼스였다. 2019년에 퍼폼에서 다시 나를 초대해 주셨을 때, 나는 조금 더 확장된 버전의 〈Dizzy Desk(책상정리)〉로써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를 제작했다(다이다이라는 말은 1:1 대결이라는 뜻이 있다). 디제잉의 핵심은 두 곡을 섞고 잇는 것인데,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는 이것을 보다 단순화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체험하도록 만든 작업이다. 과거에 통신장치로 사용되었던 ‘오디오 스위치 박스(Audio Switch Box)’를 구해, 음원을 재생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소리도 좀 빈티지한 느낌으로 났지. 당시 총 10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관객은 2개의 음원을 1차적으로 선택하고, 2차적으로는 30분의 음원을 순간 순간 선택해서 들어야 했다. 이걸 멋있게 포장해서 ‘디제잉과 게임을 접목시켜 또 다른 음악 감상의 방식을 제안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내가 매료된 디제잉의 맛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두 곡을 한번에 재생해 듣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행해지지 않는 음악 감상 방식이기 때문에.


재민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의 라인업에는 이윤호, 한진, 허현정, 헤테로포니 등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을 프로젝트에 포함시키게 된 경위를 물어보고 싶다.


내가 그들의 개인 작업을 좋아했고 그들이 음악적으로 어떤 작업물을 내놓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음악에 조예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모두의 음원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특히나 음악인이 아닌 분들의 음원은 보다 특별했고 빛났다. 당시 관람해 준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와 하이파이브를 전한다.


재민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2〉가 문화비축기지 《2020 글로벌 위크》에서 공개된 것으로 안다. 그리고 라인업은 놀랍게도 클로드 드뷔시(Claude-Achille Debussy)와 Yeong Die였는데, 여러 작업자들이 참여한 것에서 왜 두 명으로 축소했는지, 그리고 드뷔시라는 역사적 대상이 어떻게 소환된 것인지 궁금하다.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에서도 두 채널이라는 점은 동일했다. 다만 선택과정을 축소한 것이다(10트랙 중에 2개를 고르는 과정을 삭제한 것). 주변의 디제이 몇을 후보로 두고 오래 고민했다. 그러다 나온 것이 내가 또 한편 좋아하는 사람, 드뷔시였다.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2〉는 저작권이 만료된 드뷔시의 레코딩 5곡과 내가 만든 5곡을 동시재생하여, 관객은 어느 때라도 와서 헤드폰만 착용하면 바로 그 중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과 마찬가지로 기기의 노브를 돌리면 반대편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재민 2020년 CLIPP.ART 레이블을 통해 두 번째 앨범 〈Threshold Value〉를 발매했다. 그 뒤 3D 아티스트 을지로김과 협업해 두 편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는데, 이 협업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몇 번 인사만 나눈 사이였는데, 무작정 연락해 뮤직비디오를 의뢰하고 싶다고 했다. 돈은 어떻게든 만들어오겠다고 했다. 그런 허술한 제안에 감사하게도 응해준 사람이 을지로김이었다. 지금은 무척 바쁠 텐데, 다행히 좋은 타이밍에 내가 부탁을 했던 것 같다. 뮤직비디오 작업을 시작하면서 잦은 미팅을 하며 무수한 레퍼런스를 나누었는데, 미감이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즐거웠다. 《Quarantine Études》를 구상하며 그를 또 한 번 떠올린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추구하는 미감 부분에서도 공감대 형성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함께 구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이미) 있었다. 을지로김이 다른 인터뷰에서 ‘어느새 우리의 미감은 거의 동기화되어 있었다’고 말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뮤직비디오와 《Quarantine Études》 둘 다 정말 즐겁게 작업하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다.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들이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재민 《Quarantine Études》는 앞서 이야기했듯, 3D 아티스트 을지로김, 그리고 개발자 박성천과 함께 협업한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기획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준다면.


(이미지4) 《Quarantine Études》(2020) 포스터

《Quarantine Études》는 공연장에 갈 수 없는 상황을 역으로 이용한 작업이다. 사실 내가 공연장에 자주 가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니 간사하게도 공연장에 너무나도 가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돈을 주고 구매한 내 자리, 공연을 보며 잠깐씩 조는 즐거움, 일면식도 없는 이들과 한마음으로 박수를 치는 일, 공연장의 공간감, 음악이 시작되기 전의 긴장감 같은 것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Quarantine Études》는 이러한 감각들로부터 출발한 기획이다. 나는 실제의 공연장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아주 이상한 그림을 원했다. 나는 3D 아티스트와 개발자에게 최대한 큰 공연장을 주문하며, 그 바깥은 설산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거기에 연주자가 아닌 관객 한 사람씩만 들어가게 하자고 했다. 그 안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컨셉을 잡았다. 뛰거나 달리고, 점프를 해도 되고 과자를 먹거나 시끄럽게 떠들어도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게 말도 안 되지. 단 하나의 조건, 공연의 실제성을 반영한 것은 공연장이 매일밤 10시부터 12시까지만 열리도록 한 것이다. 나머지 시간에는 공연장은 닫혔다. 한편, 공연장 안에서 떠들 수 있다는 컨셉을 확장시켜, 인스타그램 필터를 만들기도 했다. 목소리에 리버브를 넣어서, 공연장 안에서 소리가 울리게 하는…


재민 최대한 크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크게 만드는 것에 어떤 기술적 어려움이 있었나?


크게 만들면 아무래도 디테일이 많아지지 않겠나.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아 컴퓨터에 설치하는 게 아니라 웹상에 띄우는 거라 한계점이 분명히 있었다. 공연장이 닫힌 시간에는 공연장 바깥 설산을 돌아다니게 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었는데, 서버와 프로그램이 무거워지는 문제 때문에 그렇게까지는 실현하지 못했다. 세 명이서 이 정도를 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팀워크가 좋았다.


재민 《Quarantine Études》이 구현한 3D 공간은 무척 흥미로웠다.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전형적인 오페라 극장이었지만, 무대에는 피아노가 산산조각 난 채 떠있고 참여자는 극장 이곳 저곳을 직접 돌아다니며 음악을 찾아 들어야만 했다. 이처럼 무대와 객석이 뒤바뀐 구조에선 전형적이고 형식적인 음악 공간에 대한 애정과 혐오가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 공간 구성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디지털 공간이라는 특성은 어느 정도나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나?


(이미지5) 《Quarantine Études》(2020)

디지털 공간이니까 가능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모든 게 말도 안 됐다. 공연 시간이 정해져있다는 한 가지 조건만 뺴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공연장스러운 느낌을 위해 비어 있던 무대 위에 악기를 하나 올리기로 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피아노를 떠올리고 그것을 부숴줄 수 있냐고 물었다(을지로김은 놀라지도 않았다). 그가 몇 가지 부숨 옵션을 나에게 제시했고, 나의 추상적인 의견을 더해 최종 버전이 나왔다. 음악 공간에 대한 애정과 혐오라기보다는... 공연장에 갈 수 없는 불만을 원없이 터뜨려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 큰 공연장에 혼자 있어보는 경험이 공연장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가능하겠는가? 관계자는 가능한가? 또, 피아노는 어떻게 부서진 채 공중에 떠 있는가? 어떻게 그 지독한 설산 동네에 공연장이 있겠는가? 어떻게 관객석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질 일이 있겠는가? 웹콘텐츠였기 때문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


재민 관객석에 스포트라이트가 나온다는 점도 재미있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게 된 건가?


(음악이 나오는 지점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옵션을 놓고 고민했었다.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비석 형태나 아티스트와 관련된 물건을 3D화해서 놓자는 아이디어도 나왔었지만 가장 클래식하고, 공연장에 있음직한 요소이면서도 텅 빈 느낌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선택하게 됐다.


재민 《Quarantine Études》를 구상하며, 시각과 청각 사이의 중간 지점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꽤 어려웠을 것처럼 느껴진다. 극장 공간을 둘러보다가 음악은 듣지 못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시각과 청각을 고루 사용하는 게임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だいだい 다이다이 vol. 1〉 에서 디제잉과 게임의 조작방식을 사용했다고 말했는데, 《Quarantine Études》는 게임의 방식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가져온 작업이다. 게임은 시각과 청각을 모두 적극적으로 사용해야만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컨텐츠다. 흥미로운 것은 공연도 마찬가지라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시각과 청각 둘 중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바라진 않았다. 웹컨텐츠가 관객에게 중도포기당하는 것은 너무 쉽고 또 흔한 일이 되었다. 요소 하나하나가 포기당할 걱정을 시작하니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민 기획 과정에서 포기 당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나?


의외의 면에서 완전히 있었다. 게임의 조작 방식이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 팀원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작업을 진행해왔던 것이다. 완성 직전, 몇 명의 지인들에게 베타 테스트를 요청, 피드백을 받은 뒤 팀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어느 선까지 도움말과 설명을 보여줄 지 많이 고민했다. 또, 개발 과정에서 사파리에서는 특정 요소들이 기능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발견하기도 했고... 크롬을 권장한다는 안내문을 넣긴 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재민 웹에서 호환성의 문제는 항상 일어나는 것 같다. 혹시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진 않았나?


파일을 다운로드 받고 설치하는 과정을 사람들이 귀찮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내가 그럴 것 같아서 피하고 싶었다. 산뜻하고 아쉬워서 자꾸 들어가보고 싶도록 웹에 띄우고 싶었다.


재민 개인적으로 기획에서 흥미로웠던 장치가 있는데, 바로 악보였다. 기획에 참여한 음악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악보를 제작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 작업에서 어째서 악보가 필요했던 것인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악보는 기획 초기 단계에서부터 머릿속에 있었다. 자가 격리의 시간을 보내는 연습곡을 만든다고 했을 때 음악가들의 생각과 작업 과정을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고, 또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악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음악가를 섭외할 때부터 ‘수기 악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함께 제안했다. 또 한 가지 고려한 점이 있다면, 이미 악보에 익숙한 사람들을 섭외하고자 했다. 따라 연주를 할 수 있는 관념적인 악보보다는, 악보의 규범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공연에서 뮤지션이 자신의 악보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공개하고 싶었던 것도 있다.


재민 2020년 기획한 또 하나의 웹 프로젝트, 《CENTERS(중심들)》는 《Quarantine Études》와 비교할 때 조금 더 공연에 가까웠던 것 같다. 《CENTERS(중심들)》는 어떻게 시작된 기획이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이미지6) 《CENTERS(중심들)》(2020)

(이미지7) 《CENTERS(중심들)》(2020)

《CENTERS(중심들)》는 실제로 공연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 공연을 만든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사업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해준 친구들과 공연을 함께 만들어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CENTERS(중심들)》역시 정말 최고의 팀이었거든. 지금 생각해보니 코로나 상황 속에서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나를 이 프로젝트에 진심으로 임하게끔 만든 것 같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여성/퀴어 뮤지션이 중심이 되는 공연을 만들었다.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유튜브에 떠도는 짧은 옛날 재즈 뮤지션들의 영상처럼, 먼 훗날 알 수 없는 경로로 유출되어 떠도는 유명한 공연 클립 같은 게 되기를 바랐다. 구획을 짜거나 영상을 찍을 때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었고, 실제로 공연 영상을 흑백으로 편집하기도 했다.


재민 미리 공연을 촬영하고 스트리밍을 했다고 알고 있다. 왜 라이브 스트리밍이 아니라 녹화를 했는지 궁금하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때만 해도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기술적인 사고가 정말 많았다. 렉이 걸리거나 소리가 이상하게 나오거나 아예 안 나오거나. 그래서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재민 《Quarantine Études》와 《CENTERS(중심들)》는 둘 다 음악, 혹은 청각적인 것을 매체 삼았던 웹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프로젝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Quarantine Etude》가 관객에게 움직일 것을 요구하며 음악은 같은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면, 《CENTERS(중심들)》는 반대로 관객이 가만히 있을 것을(최소한 스크린을 볼 수 있을 정도로는 멈춰 있을 것을) 요구하며 음악가는 움직인다. 그렇기에, 만일 둘 중 하나를 골라 발전시켜야 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선택할지 궁금하다.


첫째 딸이 예쁜가 둘째 아들이 예쁜가 같은 질문 아닌가. 둘 다 너무 아끼는 작업이다. 어떤 작업에 관해서든 관객은 관객이 즐기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다만 나는 최근에 코로나 때문에 공연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CENTERS(중심들)》처럼 음악가가 움직이는 공연을 많이 하고 싶다. 그런데 《Quarantine Études》처럼 관객도 같이 움직여주면 더 즐거울 것 같고.


(사진8) 《CENTERS(중심들)》(2020)

재민 그런데 온라인에서 기획을 하게 되면, 온라인 환경이 기획의 구성 자체에도 영향을 많이 미쳤을 것 같다. 그런 만큼 온라인에서도 의미 있는 기획으로 만들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모든 것은 온라인 환경에 맞추어 기획되었다. 예상 사용자군 컴퓨터 환경의 중간값을 찾는 데에도 고민을 했을 정도이니. 하지만 모든 것이 온라인에 맞추어져서는 재미도, 의미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Quarantine Études》에서 공연장이 열리는 시각과 닫히는 시각을 설정한 것이 그 적절한 예다. 공연의 실제 성질을 적절히 반영하려는 시도는 유의미했다고 본다.


재민 혹시 기회가 있다면 미술 공간에서 개인전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는지? 만약 하게 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하게 될 것 같은가?


넓은 공간을 쓰고 싶다. 외국 어드메에 꾸린 작업실이라는 컨셉으로, 내가 작업에 사용하고 있거나 사용했었거나 앞으로 사용할 것들을 모조리 다 가져다 놓고… 마치 죽은 사람의 개인전이나 죽은 사람의 작업실처럼, 나만 쏙 빠져 있는 그런 전시를 하고 싶다. 여러가지 방면으로 활동하다 보니, 실제로 작업실을 갖게 된다면 굉장히 볼만한 그림이 나올 것 같거든. 전시 제목은 그 공간의 주소로 하는 것이 어떨지.


재민 영 님이 abs에게 질문을 주신 게 있는데, 이 질문에 우리가 대답하고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섭외를 했는지 궁금하다는 내용이었다.


얼터 인터뷰 섭외를 제안한 것은 나다. 《Quarantine Études》와 《CENTERS(중심들)》를 모두 봤다. 원래 공연이나 음악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요즘 점점 사운드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운드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서 직업적으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와중에 인상 깊게 보았다. 두 개 모두를 관람하면서 기획자에게 관심이 갔다. 결과물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질지 하는 문제를 신경 쓴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었고, 오프라인 공연과 온라인 공연 사이에 있는 차이를 아주 의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Quarantine Études》에서 악보가 있다는 점이 좋았다. 악보와 음악의 관계는 코드와 최종 웹 페이지의 관계와 공명하는 측면이 있다. 웹 페이지의 경우, 코딩을 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소스 보기를 누르면 내가 보고 있는 인터페이스와는 전혀 다른 웹 페이지의 소스 코드가 나온다. 그게 웹 페이지의 스코어라고 생각하는데, 악보라는, 음악이 만들어진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소스와 웹 페이지라는 구조와 비슷한다. 또 요즘 진행 중인 컴퓨터 뮤직 클럽(Computer Music Club)에 대해서도 설명을 듣고 싶었고.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영 님이 인상깊게 본 온라인 실천은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컴퓨터 뮤직 클럽은 《Quarantine Études》 등의 기금 사업들이 마무리 되고, 정산을 하며 지쳐있던 무렵에 결성됐다. 듀오 살라만다(Salamanda)와 친분이 있는데, 우리는 파티와 공연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황과 세태에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뭔가 해보자, 그런데 좀 신나는 걸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일단 이름부터 대국적으로 지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우리를 괴롭혀보자 싶어서 매달 한 곡씩 발표, 마스터링과 커버까지 직접 소화하며 활동을 시작했지. 지금은 잠시 휴식기에 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고, 관심도 많이 받아서 다가올 6월에도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정리하자면... 씬의 침체를 뚫어보자는 의미의 파이팅해보자는 프로젝트다. 다들 너무 재미있게 임하고 있어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는 하지 않을까 싶다. 각자 자기들의 ‘본진’과 다른 음악을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인상 깊게 봤던 작업은... 사실 내 작업을 다시 보고 싶다. 《Quarantine Études》도 서버에서 내려 버렸고, 《CENTERS(중심들)》 영상도 하이라이트 영상만 올려둔 채로 풀 영상은 내린 상황이다. 그 당시엔 몇 개월 동안 작업을 계속하며 반복적으로 본 상황이라, 막상 오픈 후에는 많이 들어가보지 못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공연장을 열어보고 싶다.


얼터 《Quarantine Études》, 《CENTERS(중심들)》, 컴퓨터 뮤직 클럽 등, 세 가지 프로젝트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기획을 진행하면서 오프라인과의 차이점을 많이 느꼈을 것 같은데, 오프라인 기획과 온라인 기획 사이에서 느낀 차이점이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사실 나를 기획자라고 소개하기는 정말 부끄럽다. 오프라인에서 무언가를 기획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다만 상황과 조건에 맞추어 최소한 내 성에는 차도록 노력한다. 개인적으로 온, 오프라인 기획의 차이점이라면, 중도 하차하는 관객에 대한 부분 아닐까. 온라인 콘텐츠는 중도하차가 너무 쉬워서...


얼터 최근 온라인 기획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지만, 온라인 기획이 오프라인 기획의 대체재로만 소비되는 것처럼 보여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기획을 하면서 느낀 온라인 만의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한데, 대답해줄 수 있을까?


상상력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즐거웠다고 답할 수 있겠다. 유망한 작업자들과 함께 망상의 구덩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힘들고도 즐거운 일이다. 다만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는 수정본의 수정본의 수정본의 수정본... 온라인 콘텐츠 기획은 그런 일 같다.


재민 영 님이 주신 또 다른 질문은, 각자가 생각하는 가장 탁월한 작업이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하다는 내용이었다. 간단히 대답하자면, 나는 〈だいだい 다이다이〉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여러 맥락을 고려했을 때 나에겐 가장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앞에서 DIY 디제잉 장치라는 말을 했었는데, 레디메이드 기계를 사다가 해킹해서 음악을 혼선시키는 장치를 만들었다는 점도 재미있는 것 같고, 디제잉을 디제잉한다는 느낌도 있는 동시에, 큐레이터로서의 디제이와 같은 모델을 상기시키는 지점도 있어서 되게 재미있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시각 공간에서 청각적인 것이 작동할 때, 흔히 그들의 지지체로 기계를 갖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맥락과도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듯해, 〈だいだい 다이다이〉 시리즈를 꼽고 싶다.


〈だいだい 다이다이〉를 짚어주시다니 기쁘다.


재민 혹시 영 님이 보기에 음악적인 것과 다른 것을 결합시키거나 확장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이 있다면 꼽아줄 수 있을까?


바로 생각나는 건 업체(eobchae)다.


재민 마지막으로 홍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다.


올해 예정된 릴리즈가 많다. 일단 6월 4일 열리는 김민희 작가의 개인전에 음악으로 참여한다. 전시를 위한 40분짜리 앨범을 만들었고, 테이프로 발매된다. 그리고 정규앨범과 EP가 연달아 나올 것 같다. 컴퓨터 뮤직 클럽도 여름쯤 복귀를 하지 않을까...


재민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 권태현
대답하는 사람: 권태현, 질문하는 사람: 김호원, 기록하는 사람: 유진영

🥠는 ‘까 봐야 안다’를 슬로건으로 하는 인터뷰 코너다. 인터뷰의 형식을 경유하지만 특별한 목적지는 없기 때문에, 대화의 방향은 그때그때의 포춘(fortune)에 맡긴다.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합니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합니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물질과 비물질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기획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하는 중입니다.


호원 혹시 잘 모를 독자들을 위해, 최근 태현 님의 큐레토리얼 실천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태현 큐레이터이고, 미술에 대한 글을 쓴다. 호원 님의 말씀처럼 나는 전시를 만든다기보다는 ‘큐레토리얼 실천’이라는 것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고, 그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최근 온라인 프로젝트를 몇 개 진행했다. 작년에 코로나19 관련해서 온라인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들이 마련되기 시작했고, 그것들로 온라인 기반의 실천들을 펼쳐낼 기회를 얻었다. 최황 작가와 함께 준비한 《광장/조각/내기》로는 공공미술에 대한 비판을, 또 양은혜, 박이선 기획자와 함께한 《Nothing Theater》로는 안무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거기에 지난 몇 년간 지속해온 모빌리티와 관련된 고민을 풀어냈던 《IGMO: Ignorant Mobility》(이하 《IGMO》로 표기)까지.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IGMO》는 관람성이라는 것이 물리적 전시 공간뿐만이 아니라, 내가 만지고 경험하는 디지털 디바이스와의 관계, 또는 지금 우리가 줌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런 모바일 상황을 통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실험해 본 거였다. 일련의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기획 과정에서 소위 유저 경험(User Experience)이라고 불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때 유저 경험은 단순히 인터넷 화면의 그래픽적 구성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유저 경험이라고 할 때, 웹페이지의 화면을 구성하는 UX 디자인 같은 걸 떠올리지 않나. 그러나 UX는 당연히 신체적이고 건축적인, 혹은 공간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한다. 최근에는 거기에 모바일, 혹은 모빌리티의 맥락까지 더해진다. 유저 경험이라는 말이 컴퓨터 그래픽이나 웹 디자인에서 주로 쓰이던 말을 가져와서 그렇지, 사실 이런 고민은 큐레토리얼 담론에서 계속 이야기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결국, 온라인 기반의 큐레토리얼 실천은 꼭 온라인으로 무엇을 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기보다는, 그냥 관객들이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지를 고민하는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관람성의 문제는 애초에 온-오프라인을 가로지른다. 단지 작년에 코로나19로 인해 시기적으로 온라인 관람성에 대해 성찰해야 하는 조건이 갖추어졌고, 그 조건 속에서 온라인 관람성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내게 온라인으로 뭔가 한다는 것 자체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호원 동의하는 내용이다. 질문을 좀 더 좁혀 보자면, 온라인 기반 실천이 고려해야 하는 관람성의 차원에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질문해야 할 것 같다. 오프라인에서의 지지대나 조명과 같은 조건은 온라인의 요소들, 특히 웹 특정적인 요소들과 다르게 작용할 텐데. 이쪽에서는 가능한 것이 저쪽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느껴진 것, 그러니까 물리적 공간과 비물리적 공간에서의 전시 기획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감각의 낙차나 온라인 전시 기획에서 특히 어렵다고 생각했던 지점에 관해 말해 보면 좋겠다.


태현 일단, 그 둘의 감각의 낙차란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그 둘이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 전시는 물리적인 반면, 온라인 전시는 비물리적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나는 그런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객이 온라인 전시를 관람하는 것도 일정 부분 물리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저의 경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네모난 이 맥북 화면 안, 다시 말해 가상의 화면 안을 구성하는 것들뿐만 아니라, 맥북 앞에 앉아 있는 나와의 물리적인 거리를 가늠하는 것과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고 움직이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고, 그 모든 것은 아주 물질적인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을 다루는 게 온라인 큐레토리얼 실천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전통적인 미학, 물론 전통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소격효과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있지 않나. 평이한 내러티브 전개를 깨뜨리고, 어떤 조건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것을, 나아가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 말이다. 그것은 어떠한 대상을 대상으로만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술사에서도 미니멀리즘, 포스트미니멀리즘 같은 국면에서 비슷한 실천들이 있었고. 그렇게 몰입이 깨지게 되는 과정, 물리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손가락이 키보드 자판과 핸드폰 스크린과 만나는 순간을 감각하는 것, 혹은 스크린이 갑자기 블랙 미러가 되어버려 내 얼굴이 비치게 되는 상황들을 온라인 큐레토리얼 실천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일반적이고 상업적인 유저 경험이라는 것은 이음매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최대한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디자인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스러움을 깨뜨리는 감각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돌아와 정리하면, 화이트 큐브나 다른 건축적인 공간에서 미학적인 실천을 하는 것과 온라인에서의 미학적인 실천이 물론 다를 수는 있으나, 그게 물질-비물질의 이분법, 혹은 전혀 다른 관객의 위상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호원 온-오프라인을 가로지르는 물리적인 유저 경험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모바일 스크린으로 디지털 영상이나 이미지를 마주할 때 설령 그것이 알고리즘과 데이터로 치환된 무형의 것이라 하더라도, 태현 님의 말씀처럼, 조작 과정에서 물질적으로 감각되는 지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에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 예술 작품들은 디지털 스크린으로 접할 때, 그들이 물질적 기반을 토대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비물질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는 것 같다. 태현 님께서는 온라인 실천에서 어떻게 매개할 수 있을지 혹은 매개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다면 회화나 조각과 같은 조형 매체들이 온라인 전시에서 인지되거나 감각되는 방식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신 것이 있는지 여쭙고 싶다. 조형 매체들은 태생적으로 비물질적인 다른 디지털 매체들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촉각적인 부분에서.


(이미지1) Google Arts & Culture: Vincent Van Gogh, 〈The Starry Night〉(1889).

태현 고전적인 회화나 조각은 고유의 경험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일정 부분 신화적이기도 한 회화나 조각에 대한 관념들 같은 것들, 예를 들어 ‘이건 실제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뭐 그런 게 있어.’라는 식의 관념. 고전적 회화는 특히나 그렇다. 마띠에르에 관련된 신화들도 그렇고. 나는 그것을 온라인으로 옮기거나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온라인으로 옮겨올 때는 아예 다른 경험과 관람을 만드는 차원을 고려한다. 예를 들어 구글 아트 앤 컬처(Google Arts & Culture)에 들어가면 메가픽셀로 찍은 회화 작업들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보는 것이 실제 내 눈으로 실견하는 것보다 더 높은 해상도로 이미지를 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호원 실제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태현 그렇다. 물론 굉장히 플랫하게 보이고 또 마띠에르를 느낄 수 없긴 하지만,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오프라인에서의 고전적인 회화를 온라인으로 매개할 때, 그것을 보는 원래의 감각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옮길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그것을 원본에 가깝게 번역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온라인으로 매개하거나 디지털화했을 때 어떻게 다른 감각이 발생하는가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열을 따지는 대신,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이미지2) 《Nothing Theater》: 허윤경, 〈미니어처 공간극장: 오픈 베타〉(2020)

호원 고전적인 회화나 조각에서 매체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자. 태현 님께서 앞에서 소개해주신 전시들에는 오디오, 퍼포먼스 그리고 웹까지 다양한 매체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몰입감이나 관념성이 크게 작용하는 조각이나 회화와 비교하여, 오디오나 퍼포먼스와 같은 비교적 최근의 매체들은 온라인 전시에서 어떻게 다르게 작용할까? 예를 들어 《Nothing Theater》도 퍼포먼스 자체를 가상 공간에 있는 온라인 극장으로 끌고 온 것인데. 그렇게 퍼포먼스 작업을 온라인으로 매개할 때, 고전 회화나 조각을 매개할 때와 특히 다르다고 느껴진 지점들이 있었는지.


태현 물론 있다. 그전에 사실 나는 고전 회화를 관람하는 경험도 굉장히 퍼포머티브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마띠에르가 중요하기도 하고, 또 회화라는 것 자체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물질이니까. 그래서 나는 우리가 조각을 보는 경험과 회화를 보는 경험이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회화가 벽에 걸려 있는 경우도 굉장히 많지만, 그걸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가까이 갔다가 멀리 떨어져 보거나, 눈에 가득 담았다가 한 발짝 떨어져서 그것이 걸려 있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할 때도 있고, 옆면을 봐야 할 때도 있고. 대부분의 경우 회화 작품을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촉각적인 부분이 실제로 중요할 때도 있고. 또 물감이 어느 정도 입체적으로 올라와 있는지, 붓질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그리고 그것이 바인더에 얼마나 개어져 있는지에 따라서 물감의 물질성이라는 것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회화 관람은 물질을 다차원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살펴야 하는 굉장히 퍼포머티브한 상황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가만 앉아서 보는 고전적인 연극보다도 회화를 보는 경험이 더 퍼포머티브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Nothing Theater》에서 발견했던 것도 사실 그런 것이다.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해당 작업은 작가들의 기존 퍼포먼스 작업들을 유니티(Unity)라는 게임 엔진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유니티 엔지니어랑 게임 기획자, 그리고 큐레이터랑 작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었다. 처음에는 극장이라는 건축적인 맥락을 어떻게 온라인으로 옮겨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탐구 주제였다. 그런데 작업하다 보니 관객들의 퍼포머티브함이 더 흥미롭게 여겨졌다. 그 작업이 유니티 엔진을 사용하다 보니까, 1인칭 FPS 게임처럼 W-A-S-D로 움직이고 마우스로 시점을 조정하는 전형적인 게임적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사용했다. 실제로 컴퓨터 게임을 잘하시는 분들은 그런 방식의 움직임이 편하시지 않나. 그런데 이것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 W-A-S-D와 마우스를 움직이는 신체성이 그리고 그 이동의 감각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재미있게도 실제 자기 몸을 더 크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W-A-S-D가 왜 방향키인지 이해를 못 하는 분들도 많았다. 여기 화살표가 있는데 왜 이걸 눌러야 하냐고 물어보면서. 그런 식으로 《Nothing Theater》에서는 인터페이스에서의 신체의 불화라던가 혹은 관객들의 퍼포머티브한 지점들이 더 드러나는 게 가장 재미있었다.


호원 정리해보자면, 고전적인 매체도 그렇고 비교적 최근의 매체도 그렇고 관람 과정에서 퍼포머티브한 성격은 동일하나, 최근의 매체들에서 그러한 성격을 인터페이스적으로 더 볼 게 많았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되겠는지.


태현 그것도 맞는 말인데, 그보다는 퍼포먼스가 발생하는 장소가 대상 쪽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관객 쪽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퍼포먼스는 움직이는 대상을 관람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상과 관객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거고, 그래서 그 퍼포머티브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Nothing Theater》에서도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그게 온라인 퍼포먼스를 하면서 더욱 잘 드러나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소급해서 생각해보면 아까 이야기한 고전적인 회화를 보는 경험에서의 관객들의 퍼포먼스 문제 같은 것을 《Nothing Theater》를 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호원 태현 님의 온라인 기반의 실천들은 결국은 관객에게 방점이 찍혀있는 것 같은데. 《광장/조각/내기》도 그렇고 《IGMO》도 그렇고 특정 설치 작업들은 웹에서 이미지나 동영상으로 볼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설치되어 있는 공간에 직접 보러 갈 것을 유도하기도 하셨다. 그것 자체도 관객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퍼포먼스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미지3) 《광장/조각/내기》 웹

(이미지4) 《IGMO》 웹

태현 완전 그렇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관객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 앞에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어 어딘가 움직이게 만드는 그 상황 자체말이다. ‘아, 결국 다 보려면 움직여야 하네?’라고 깨닫게 되는. 물론, ‘이거 다 보려면 여기 가야 되는 거구나?’ 하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관객도 있긴 했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걸 다 보려면 내가 몸을 일으켜서 지금 당장 감각할 수 없는 어딘가 다른 공간에 가야 하는구나!’라고 느끼는 그 관람성이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


호원 아까 《Nothing Theater》의 인터페이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한다. 나도 게임을 자주 하는데, 그래서 허윤경 작가의 작업을 관람할 때 W-A-S-D로 움직이고 마우스로 시점을 조정하는 방식이 익숙하고 편했다. 《IGMO》도 스마트폰 앱의 인터페이스를 차용하지 않았나. 이동성, 모빌리티에 초점을 맞춰서. 그래서 그런지 《IGMO》 웹을 둘러보면서 구글맵이나 카카오 지도를 사용할 때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앞서 우리가 언급한 전시들에서 인터페이스가 중요한 요소인 것 같은데, 앞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 인터페이스가 불평등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게임에서 이동하는 방식이나 스마트폰에서 모빌리티 앱을 조작하는 방식에 익숙할 수 있지만, 또 누군가는 그런 인터페이스와 친숙하지 않아서 또 신체적인 제약이 있어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으니까. 이와 관련하여, 《Nothing Theater》나 《IGMO》를 비롯한 일련의 온라인 전시 기획 과정에서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할 때 어떤 것들을 고려했나.


(이미지5) 《IGMO》 웹의 페이지 전환 로딩 화면

태현 일단 첫 번째로 고려했던 것은 말씀해 주신 것처럼 기존의 인터페이스 경험을 차용하는 것이었다. 차용이나 전유가 모두 appropriation의 번역어이지 않나. 그래서 디자이너나 개발자, 다른 작가분들과 항상 기존의 것들을 전유-재전유한다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존 모빌리티 애플리케이션의 UX를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그것을 재전유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강조한 것이다. 그런 차용-전유의 과정을 통해 인터페이스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비슷함 속에서 불편함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경험을 고민했다. 그래서 《IGMO》의 “Ignorant Mobility”라는 컨셉은 스마트 모빌리티라고 통상 상업적으로 쓰이는 담론과 그것의 인터페이스가 제공하는 자연스러운 유저 경험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 척하면서, 실은 그것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개발자님이랑도 이야기했던 것인데, 《IGMO》의 작동 속도가 굉장히 느리다. 심지어 작품 중간중간에 로딩 페이지가 있을 정도이다. 그게 절반은 의도해서, 나머지 절반은 실제로 서버가 좀 안 좋아서 그런 것이다. 디자이너님이랑 개발자님과 계속 커뮤니케이션하면서 ‘불편한 유저 경험을 주어야 한다, 즉각즉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눌렀을 때 바로 움직이지 않는, 그 딜레이를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이 아무리 빨라도 그런 경험들을 은연중에 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일부러 느려지게끔 의도했는데, 서버까지 상태가 안 좋은 바람에 진짜 너무 느려지게 되었다(웃음). 어찌 되었든, 이런 불편함을 모양은 똑같을지 몰라도 내용물은 다른, 혹은 비틀어져 있는 방식, 재전유의 방법론, 일종의 전략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호원 나도 《IGMO》 웹을 둘러보다가 로딩 시간이 길어질 때면 딴짓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 딴짓과 관련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전시는 웹을 사용하기 때문에 화이트 큐브 등의 공간을 점유하는 기존 전시보다 산만한 관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방금 얘기했던 것처럼 나 역시 《IGMO》에서 로딩이 걸릴 때마다 다른 탭을 오가며 딴짓을 했고, 비디오 작업을 볼 때 PC 메신저로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보고, 또 집이라는 안락한 공간에 있다 보니까 누워서도 보고 그랬다. 정리해 보면 되게 산만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이 엇나가고 비틀리는 관람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태현 말씀해주신 문제를 고민했던 것이 맞다. 화이트 큐브보다 온라인 경험이 조금 더 산만하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았나. 관람성에서의 산만함이라는 게 온라인 경험뿐만 아니라, 사실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과거에 미니멀리즘이 리터럴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나왔던 논의들, 모더니스트들이 연극성이라는 규정으로 가했던 비판 지점과도 맞닿는다고 생각한다. 연극성이라는 것이 비판으로 사용된 맥락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같은 모더니스트의 입장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들에게 예술 작품은 완전히 몰입해서 관람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미니멀리스트들(모더니스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리터럴리스트)은, 작품을 숭고한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물처럼 놓았기 때문에, 모더니스트들로부터 작품이 순수하게 내재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뒤섞이며 의미를 만드는 연극처럼 되어버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그러한 비판이 오히려 미니멀리즘이 가지는 힘을 설명하는 것이 되었다. 관람성에서의 산만함은 지금의 상황이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매개되어있는지를 관객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너무 몰입감을 주지 못한다면, 뭐랄까. 제대로 된 경험이 되어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그럼에도 상황을 지우고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작업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작업과 그것이 매개되어 있는 환경 자체가 전경-후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복잡하고 또 산만해지는 상태, 그런 경험 자체가 오히려 더 미학적인 관람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호원 어떤 관람객은 온라인 전시에서도 굉장히 집중하고 싶고 또 몰입하는 경험을 원하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디바이스나 네트워크의 한계로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지 않나.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전시는 어디가 되었든 간에 하나의 합의된 물리적 공간에 모이니까 작가도, 기획자도 또 관람자도 모두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의 경험을 하게 되지만, 그것에 비해 온라인 공간에서의 전시는 가상 공간에서의 한 지점에 도달하기는 하나 거기까지의 도달 과정이 디바이스와 네트워크에 따라 차이가 클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


태현 그런 문제를 메타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동시대 큐레이터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그게 온라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리적인 공간에서도 눈이 안 보이는 사람,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 귀가 안 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커먼 센스라고 이야기하는 상식/공통 감각이라는 것이 결코 공통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동시대 큐레이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조건들을 전시 형식에 잘 포함시키는 것이 언제나 너무 중요하다. 그래서 방금 하셨던 질문에서 ‘그래도 물리적 공간에서는 조금 더 공통적인 경험을 조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제 자체에 나는 비판적이다. 물리적인 환경에서도 공통 경험이라는 것은 없다. 이를테면 나와 호원 님이 같은 공간을 방문한다고 해도, 신체적인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경험이 만들어진다. 혹은 그날 내가 아픈지 안 아픈지의 여부, 또 내가 휠체어를 타는지 안 타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관람 경험은 천차만별이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디지털 디바이스에서의 네트워크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그런 조건은 계급적인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예를 들어 최신형의 아이패드를 갖고 있는 사람과 5년 된 구식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 심지어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이 경험하는 온라인 전시의 관람성은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 오히려 디바이스의 퀄리티 문제는 그것이 상품이기 때문에 계급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무수한 맥락들을 다 가지고 있다. 물론 스마트폰을 가지지 않은 계급과 문화가 있고, 지금 우리처럼 초고속 인터넷 네트워크에 공기처럼 접속할 수 없는 조건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런 조건까지 고려한 온라인 전시 경험을 만드는 게 이상적이긴 하겠으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디바이스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을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불편함을 아예 전시 형식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관객들이 기존과 다른 감각으로 전시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는 온-오프라인을 가르지 않는다.


(이미지6) 《Nothing Theater》: 차지량,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2012. 12. 20 - 2020. 12. 20>(2012-2020)

호원 산만함은 단순히 성향, 성격이나 매체의 차이뿐 아니라 사회적 계급이나 지위에서도 기인하는 문제인 것 같다. 이 산만함과 관련된 질문을 하나 더 드리고 싶다. 어떤 전시는 전시 기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웹이나 작품에 접근할 수 있었던 반면, 《Nothing Theater》 같은 경우에는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 기간 이후에는 더 이상 작품을 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시간적 제약의 부여가 온라인 공간에서의 산만함과 관련이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이 시간적 제약은 비단 온라인 전시에서뿐만이 아니라 오프라인 전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그렇다면 온-오프라인에서 시간성은 어떻게 다르게 전시에 영향을 미칠까.


태현 일단 《Nothing Theater》에 전시된 작업들은 안무 쪽 분들이랑 같이 만들었다. 양은혜 안무가님이 기획하신 프로젝트였고, 참여 작가 중에도 허윤경 안무가님이 계셨다. 물론 차지량 작가님은 시각 예술 베이스에 가깝긴 하지만, 그 역시 음악과 공연에 대한 이해가 높은 분이다. 그런 분들과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공연의 일시성 문제가 복잡하게 거론이 됐었다. 그분들이 원래 딛고 있는 전통을 온라인으로 옮겨 올 때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다루는 것이 그 프로젝트의 목표였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일정 시간만 열려있고, 그래서 관객들이 모여들고, 그로 인해서 잠깐 반짝하는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이 공연 쪽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한 방식의 일시적인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영화에서도 비슷한데, 시네마라는 게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여서 보는 감각이나 건축적, 제도적 틀거리까지 포함하는 문제이니까. 마찬가지로 무용에서도 단지 움직임이 구성되는 것이나 무대와 몸의 관계와 같은 것을 떠나서, 관객들이 한데 모여서 보는 상황 자체가 공연의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게 프로시니엄 극장에서처럼 고전적으로 자리에 앉아서 보는 것이든, 아니면 1980년대 한국의 마당극처럼 관객들이랑 얼쑤 하면서 함께 노는 방식이든, 관객들은 공연이라는 형식 안에 애초에 포함되어 있지 않나. 공연이라는 형식 자체에서 그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그 일시적 시간 안에 관객들을 몰아넣고, 함께 보고, 소셜 미디어에도 공유하면서 트래픽을 통해서도 무언가 함께 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는 환경을 생각했다. 사실 나는 기획팀 안에서는 처음부터 일시적인 공개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아카이브로 남겨야 한다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런 논의들을 통해서 일시적으로만 작업을 공개하는 것으로 결국 협의를 했다.


호원 《Nothing Theater》의 일시성에는 안무, 퍼포먼스라는 장르의 특성 자체가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태현 그렇다. 안무 혹은 코레오그라피를 온라인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가 그 프로젝트의 중점이었으니까. 그래서 퍼포먼스가 원래 갖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 혹은 미학적인 요소들을 온라인 쪽으로 조금 더 적용해보려고 여러모로 노력을 했던 것 같다.


호원 나는 개인적으로 극장이나 영화관뿐 아니라,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그런 일시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도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우연히 전시장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전시 얘기를 나누면서. 또 전시장 방명록에서 아는 이름이 보이면 되게 반갑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 태현 님의 온라인 전시들을 보면서 방명록 같은 게, 댓글 다는 창처럼 일종의 커뮤니티 보드 같은 게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태현 커뮤니티 보드는 나도 못 만들어서 아쉬웠다. 《IGMO》 같은 경우에는 고민을 하다가 일부러 뺀 경우고, 나머지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하는 것이 좋았겠다고 생각을 한다.


호원 이야기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태현 님이 《Nothing Theater》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카이브를 언급하셨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세 전시의 웹사이트를 다시 한번 다 둘러봤는데, 그 과정에서 이 개개의 웹사이트들 자체가 아카이브의 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온라인 전시가 끝난 이후에 이 남겨진 플랫폼들을 다시 다루어보는 것도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웹사이트들을 둘러보면서 올림픽이 끝난 이후의 올림픽 경기장을 바라볼 때의 딱 그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쓸쓸하면서, 기능적으로 계속 작동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또 공간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하는. 전시 기간 이후에 남겨진 온라인 전시 웹사이트와 플랫폼을 다루어 보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태현 경기가 끝난 이후의 올림픽 경기장 같다는 표현이 너무 좋다. 사실 나도 아카이브에 대해 늘 고민을 하기는 한다. 실제로 나와 전시에 참여했던 다른 작가님들에게 그 웹사이트들이 실용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도메인이 살아 있으니까, 그걸 쉽게 다른 사람한테 공유하거나 포트폴리오에 첨부할 수 있어서. 그게 좋다는 피드백을 참여 작가들한테 여러모로 받아서, ‘아, 내가 도메인 유지 비용을 계속 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웃음). 그걸 떠나서 미학적으로 고민을 하자면, 전시라는 것이 시의성이라는 문제도 있지 않나. 아무리 시간의 텀이 짧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시기나 맥락 같은 것이 있는 거고, 그 시간을 떠나면 다른 맥락을 만나게 되는. 그래서 원래의 시간을 떠났을 때 그걸 다시 보는 것은 어긋나기 마련이고, 시대착오도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항상 변증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의적절하게 봤던 것과 그걸 어긋난 시간에서 다시 보는 것은 당연히 다른 관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포트폴리오에 넣는다는 건 우스갯소리인 거고, 서버 비용을 계속 내면서 웹사이트를 유지하려는 이유는 그런 관람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관객일지라도 나중에 다시 들어가 봤을 때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맥락 속에서, 다른 정치적 성좌 속에서 그 전시를 다시 관람했을 때 어떤 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변증법적 순간에 대한 기대 때문인 것이다. 한 명이라도 그렇게 봤으면 좋겠다는 기대 속에서 서버 비용을 꾸준히 낸다(웃음).


호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식당 주인 같다(웃음). 언젠가 다시 돌아올 단골손님이나 또 새롭게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는.


태현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서버비를 계속 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웃음).


호원 그런 식당을 계속 지키려면 자금이 필요하듯이, 온라인 실천에서 기금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태현 님께서도 인터뷰 초반에 시기적으로 온라인 실천에 대한 기금이 좋은 발판이 되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지원 과정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껴진 부분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거기에서 요구하는 조건이라든가 하는 부분에서.


태현 일단 최근에도 온라인 전용 지원금 공고가 나오지 않았나. 온라인 전용 지원금이 그렇게 따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작년 같은 경우는 코로나19 때문에 특이한 상황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코로나19 피해 구제용으로 추가 예산들이 편성된 것으로 알고 있고,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서 문화재단들에서 온라인 지원 사업들이 만들어진 건데, 이번에도 나온 것을 보니, 결과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여전히 팬데믹 상황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온-오프라인 기금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세한 요건들에 대한 피드백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는 큰 틀에서 온라인 기금과 오프라인 기금, 그것뿐만 아니라, 공간 기금, 전시 기금 이런 식으로 분화되어 있는 기금 시스템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다. 기관이 특정 형식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더 포괄적이고 자유로운 창작 지원 시스템으로 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호원 코로나 이후, 문자 그대로 이후의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하고, 인터뷰를 슬슬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최근에 태현 님이 쓰신 글들도 재미있게 읽었다. 뉴스페이퍼 1호의 〈한눈팔기〉, 아트 인 컬처 3월호의 〈인공 지능, 인간 해방의 가능성?〉 그리고 아트 인 컬처 4월호의 〈얼굴, 정체성 너머〉 등의 글을 통해 시각 예술뿐만 아니라 문학, 게임, 인공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디지털 매체나 동시대의 총체적인 문화에 대한 태현 님의 관심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관심사들은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갈 계획인지 궁금하다. 《IGMO》 소개 글에서 ‘목적 없이, 방황하고, 도달하지 못하고, 표류하는’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다른 글 〈한눈팔기〉에서도 온라인 FPS 게임에서 파쿠르 하듯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사람들에 관해 말했는데.


태현 기본적으로 나는 ‘미술 큐레이터인데 그런 거에도 관심이 많네?’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내게는 애초에 중심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도 않고, 그 중심이 꼭 미술에 있지도 않다. 나는 게임, 문학, 미술, 그리고 영화, 드라마, 유튜브(YouTube)까지 모든 이미지와 시각 문화에 관심이 많다. 나는 정말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같은 철학자의 말부터 유튜브 콘텐츠 ‘머니게임’에 달리는 댓글까지 다 같은 위상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없는 틱톡(TikTok) 영상에서도 어떤 미학적인 국면 같은 것을 항상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먹방이나 게임 방송, 스트리밍 또한 중요한 비평의 대상으로 여긴다. 무엇보다 나는 그걸 모두 미학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동시대 비평가, 혹은 큐레이터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중요한 태도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관심 분야가 다양하다’가 아니라 온 세상의 이미지가 다 같은 위상의 미학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사실 나는 학부 때 문화 연구를 전공해서, 학문적으로도 원래 대중문화 베이스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말씀해주신 것처럼, 글쓰기와 큐레토리얼 실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호원 태현 님이 어떻게 동시대의 것들을 가로지르고 교차하실지가 기대된다. 앞으로도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도록 하겠다. 진짜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행보에 대한 말씀 부탁드린다.


태현 행보라고 하면 좀 웃기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홍보하겠다. 국립현대미술관 저널과 채널을 통해서 이미 약간의 홍보가 나간 거로 알고 있는데, 《재난과 치유》 전시에 이수연 학예사님이 기획하신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위성 프로젝트가 있다. 나와 김신재 큐레이터님 그리고 남선우 큐레이터님까지 총 세 명의 다른 큐레이터가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 혹은 정말 위성처럼 전시의 중력에 있으면서도 독립된 그런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지에 관한 프로그램이다. 다른 분들은 전시에 특정한 관람성을 제공하기 위한 장치 같은 것을 만들거나, 아니면 전시장 한편에 다른 전시를 만들거나 하는 식의 기획을 하셨는데, 나는 재난 상황에서 미술관의 소장품과 관련한 주제로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채널에 올라갈 영상을 준비하고 있다. 일단 가제는 〈영구 소장〉이라고 붙였다. 나는 영구 소장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히 흥미롭게 느꼈다. 영구, 영원, permanent라는 무한히 펼쳐지는 시간성은, 사실 인간이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근데 뮤지엄이라는 제도이자 공간은 전시, 연구, 교육 이런 역할을 수행하긴 하지만, 사실 무엇보다 어떤 작품들을 영원히 보관하기 위한 시설이지 않나? 근대를 통과하면서 박물관과 미술관은 국가가 영원히 소중하게 보관할 물건들을 통해서 그 시대의, 혹은 그 나라의 정체성 자체를 거꾸로 구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큰 맥락이 《재난과 치유》라는 전시이다 보니깐 확장되는 부분도 있었다. 소위 SF에는 아포칼립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런 세계관 설정이 장르화되어 있지 않나. 그런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픽션에서 종종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런 관념, 세상이 다 망한 다음에도 남아 있는 미술관을 그리는 사람들의 상상, 픽션 같은 것이 너무 흥미로워서 그런 관점에 비추어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를 리서치하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의 전쟁이나 재난 프로토콜 같은 것들을 조사하면서 관련된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몽타주 하는 영상 작업을 준비 중이다. 페이크 다큐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유튜브의 스타일에 생각보다 잘 맞는 영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한참 준비 중이고 아마 7월 말-8월 초쯤 전시 막바지에 공개할 수 있을 것 같다.


호원 꼭 챙겨보도록 하겠다. 긴 시간이었지만 유의미한 대화였다. 독자분들에게 잘 정리하여 전달하도록 하겠다.




분자생물학을 통해 분석한 웹의 생태 원리와 코드의 생장 과정
구자명

(lock with ink pen)은 이모지 🔏를 풀어 쓴 코너의 제목처럼, 이미지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텍스트를 게재하는 코너다. 작업이거나, 작업에 관련되었거나, 지금은 작업과 뚜렷한 관계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도 모르는 텍스트를 요청한다.


구자명 구자명은 추계예술대에서 평면회화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에서 입체조형을 공부했습니다. 관심사는 기술 변화의 경험으로 시각예술 창작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있습니다. 최근, 소프트웨어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몸으로 볼만한 형태를 찾기 위해 여러 방법과 연결해 보고 있습니다.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0), 〈PPB(Phoenix Phenotype Breeding)(가변크기, 서울, 2018)에서 작업을 발표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실물 세계가 웹(WWW)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컴퓨터 코드의 변이 과정을 유전자 복제의 화학적 특성 연구 분야인 분자생물학을 경유해 분석해보기 위한 시도입니다. 웹은 인터넷 위에 올린 서비스의 하나로 하이퍼텍스트 구조를 활용해 수많은 정보들을 연결합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 사이에서 신호를 주고받으면 데이터베이스 내부의 코드 정보를 웹 브라우저로 전달, 출력하는 작동 원리를 갖습니다. 이 체계는 여러 개의 재료가 모여 하나로 조립되는 사물의 특성과는 다르게 유기체의 유전 발현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념과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유전정보의 흐름: 복제, 전사, 번역

분자생물학의 중심원리(Central dogma)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DNA, RNA, 단백질, 세 유전물질 사이에서 가능한 전이과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포 단위에서 일어나는 이 과정은 기존 DNA에서 새로운 DNA를 생성하는 ‘복제’, DNA에서 RNA를 생성하는 ‘전사’,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번역’이 있습니다. 복제(Replication)는 DNA를 주형(Template)으로 완전히 동일한 클론(Clone)을 만드는 과정으로 세포분열에 관여합니다. 전사(Transcription)는 DNA의 특정 부분을 RNA로 복사하는 과정이며 생산된 (m)RNA는 그 자체로 기능을 하거나 전달된 유전정보로부터 단백질로 번역(Translation) 되어 생물학적 활성을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유전정보에서 기능적 유전자 산물을 만들어내는 "유전자 발현(Gene expression)" 시스템이 생물의 생장과 같은 형태 형성의 초석을 이룹니다. 흔히 세포를 도서관에 비유해 DNA는 대출되지 않는 책, RNA는 이 책에서 필요한 페이지 일부를 복사한 사본들이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미시세계의 중심원리 개념을 웹이 가진 체계에 대입해보면 각 요소 사이의 관계들을 아래의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미지1) 분자생물학의 중심 원리: 유전 정보의 전달 과정 (참고: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entralDogma-es.png)

(이미지2) 데이터베이스 내부 코드 정보의 전달 과정

유전정보의 변이: 역전사

일반적으로 RNA는 세포핵 안에서 전사되고 이후 밖으로 튀어나와 세포질에서 번역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핵 내부에 유전체를 온전히 보호하기 위한 최적의 운영체제이지만, 견고한 구조에서도 문제적 상황은 발견됩니다.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Retrovirus)에서는 전사의 역방향으로 유전정보가 발현하는 역전사(Reverse transcription) 과정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외부환경에서 자립으로 물질대사를 진행할 수 없는 바이러스(RNA를 유전체로 가진)의 생존에 대비해 기생을 목적으로 설계된 ‘자기복제 프로그래밍’입니다. 이 방식으로 자신의 유전물질인 RNA를 DNA와 동일한 형질로 역전사 시키고 숙주 염색체에 삽입해 중심원리에 따라 새 바이러스를 전사해 번식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숙주에 침투해 들어간 프로바이러스(Provirus)는 숙주 세포의 유전체와 함께 복제되면서 본래의 결과와는 다른 변이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아래 도식은 세포 내 발생한 역전사의 유전자 발현 과정에 대응하는 웹 안에서 코드의 변이 단계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미지3) 레트로바이러스의 유전정보 발현: 역전사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Retrovirus#/media/File:Hiv_gross.png)

(이미지4) 코드의 침범과 변이

감염의 경로와 대안 접합

웹 서비스 등장의 의의는 견고했던 코드의 영역이 무너져 얽히게 되는 데 있습니다. 네트워크를 경로 삼은 서로 다른 코드의 침범엔 대안 접합(Alternative splicing)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대안 접합은 생물이 가지는 유전자의 다종성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유전자 발현 동안 개별 RNA에서 여러 가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단백질들을 만들게 되는 방법으로, 광범위한 대안 접합이 생물에 진화적 이점을 가져다주는 조건을 이룹니다. 선택된 부분을 잘라내고 다른 부분들을 이어 붙이는 이 자연 현상의 특성과 외부에서 밀려들어온 코드가 공유하는 점은 자신의 구조를 분해해 기존의 위계질서를 재조정하고 원본과 상보적 결합을 시도하는 것에 있습니다. 50여 년 전, 체세포 분열하는 세포들의 기원을 연구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SET, serial endosymbiosis theory, 1967)’을 통해 서로 다른 성질의 원핵생물들이 생존을 위해 어떻게 공존을 이뤄냈는지 밝히며 생물의 진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가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지금의 확장된 세계에서 코드 또한 변이를 통해 생명체 혹은 사물(Thing)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움직임 안에서 어떤 모종의 형태들을 발견해 낼 수 있을지 눈여겨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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