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n번째 세계

2020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 사실 그렇지 않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의자가 전부 치워지는 것을 올해 처음 보았고 긴급재난문자를 이토록 꾸준하게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매일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은 낯설었고 크고 작은 폭으로 일상이 바뀌었다. 분명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은 남아있지만 공동의 경험을 형성한 충격은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이 지나치게 길게 늘어졌고… 종말에 대해 다룬 어떤 시문처럼, 가장 하찮은 효과음을 내며 2020년은 2020년이 되었다.

어딘가에서는 2020년을 통째로 삭제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농담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긴 변화하는 일상을 적극적으로 ‘이겨내거나’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묘한 즐거움을 주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2020년이 실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감춰버리는 방법은 어쩌면 이 해를 대하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그때 함께 지워지는 것은 이를 테면 죽음과, 아무튼 그런 것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굳이 써야 한다면, 그것은 아무튼 이렇게 지워지는 것들을 실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듯한 시간, 치밀한 종합과 결산이 무척 어렵게 보이지만, abs는 2020년을 지나며 각자가 보고 겪은 것을 각자가 보고 겪은 방식대로 되새기기로 한다. 이렇게 ‘창간준비호’ 역할의 0호는 끝에서부터 출발하며, 마무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 위해, 김얼터는 2020년에 본 회화에 대해 소개한다. 「필링 스트레인지」라는 제목이 붙은 글은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으로 남는 대신 이상한 것으로 남은 회화에 대한 감상이다. 유진영의 경우 2020년을 서바이벌!로 정리하는데, 이 서바이벌!은 개인적인 것이기에 앞서 미술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서바이벌! OO에서 살아남기」는 미술의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감염병 범유행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글이 된다. 그리고 이지우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그의 글 속 라이터 불꽃을 바라보는 미상의 인물은 다름아닌 전생체험의 프로페셔널로, 전문가의 안전한 지도를 바탕으로 이지우는 자신의 전시 관람 경험을 돌이키며, 「2018, 2019, 2020」의 시간이 재생된다. 황재민은 2020년에 맞닥뜨린 몇 가지 텍스트를 꼽으며 그것들이 위치했던 상황에 대해 말하고 제목은 「2020년의 텍스트: 지연을 위해 종합하기」이다.

(lock with ink pen)과 🥠는 abs의 고정 코너로, 0호에 초대된 사람은 각각 최보련과 임정수다.

최보련은 2020년 개인전 《while true: do /virga》를 열고 책 『K/OS』를 편집, 발간했다. 글 「공(중)전」에서, 최보련은 선택 가능한 현실 속 제한된 경우의 수가 주체의 가창을 ‘돌림노래‘로 환원하는 구속의 순간, 의식에 앞선 ‘틱(Tic)’과 같은 움직임으로 질서를 어긋나게 만들 가능성을 상상한다. “모든 노이즈는 사전에 계획“되지만, 파열의 방법을 쥐어짜는 것은 결국 예술가가 하는 일이기에.

임정수는 2020년 WESS에서 열린 《10 Pictures》와 아트선재센터의 온라인 프로젝트 〈HOMEWORK〉에 참여하며 국내 활동을 지속했다. 국경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한 해, 서울 바깥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과 국경과 상관없이 발표한 작업들을 인터뷰 형식을 경유하여 이야기한다.

서바이벌! 00에서 살아남기
유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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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2020년은 어떤 해였을까? 사실 매년, 한 해의 끝이라는 기로에 서서 그 뒤를 되돌아 봤을 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좋은 해도, 공평하게 나쁜 해도 없다. 그럼에도 2020년의 감상은 조금 유별나게 모두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나쁘지도, 그리 좋지도 않은 비슷한 해였다.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생겨난 새로운 규범들이 그다지 내 삶의 구성과 질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애로 사항은 카페에 앉아 있지 못한다는 점 뿐이었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상황이면 좋겠으나 그럴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미술계 역시 예기치 못한 상황에 우왕좌왕하던 시기를 겪었다. 미술관은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으며 많은 행사들이 취소 혹은 유예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재난 특수의 각종 기금들이 나오면서 원래부터 불안정했던 미술인의 삶은 도리어 약간의 지원금을 통해 몇가지 선택지를 얻기도 했다. 특정 장르나 특정 방식들이 유례 없는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처럼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불가분의 값에서 어떻게 내일을 도모해야 할까. 기존의 방식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직면하게 된 새로운 환경에 의해 재정립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에 적응해 가는 중이다. 물리적 공간에 함께 모이지 않아도 수업이나 업무가 생각보다 잘 굴러간다는 것을 확인한 것처럼 말이다. 상황이 변하더라도 비물리적 만남의 방식은 계속해서 가속화될 것이다. 미술 역시 새로운 문법을 찾아야 할 타이밍에 도달했다. 죽고 사는 게 문제인 상황에서 예술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자조적인 물음은 예술이 노동인 우리에게 의미 없는 질문이다. 생존 플랜은 계속 모색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2020년 미술계에서의 크고 작은 이벤트(주로 전시)를 돌아보며 이들이 새로운 상황에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지 혹은 대처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 감지되었던 새로운 문법을 제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런 것도 있었나 싶을 만큼 수 많은 비엔날레가 매해 열린다. 이들은 각 2년을 주기로 타이트하게 맞물려서 돌아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비엔날레인 광주, 부산,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는 매 짝수 해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일종의 패키지 여행상품처럼 한 묶음으로 구성되어 관객들을 불러들인다. 숨가쁜 그랜드 투어 후 홀수 해가 되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이 이어진다.


그러나 2020년, 광주와 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모두 다음 해인 2021년으로 행사가 연기되었음을 발표했다. 아마도 기간을 달리하기는 하겠으나 홀 짝의 공식은 깨졌고 2년이라는 비엔날레의 주기도 이제는 들쑥날쑥이 되어버렸다. 팬데믹 상황의 종료 시기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행사 연기는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내년이 되어 봐야 답을 알 수 있는 질문이다.


원래 일정대로 진행된 2020부산비엔날레는 전시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주목할 만한 선택이었다.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비엔날레는 부산을 가상의 도시로 상상하며 도시 곳곳에 작품을 설치하고, 동시에 온라인 전시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부산 비엔날레는 어땠을까? 내용보다는 전시 형식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온라인 개막식으로 막을 연 부산비엔날레는 온라인 플랫폼을 베이스로 삼았다. 이제는 모두에게 제법 익숙해졌을 메타 포트를 통해 디지털로 재현된 전시장은 여전히 능숙한 조작은 어렵지만, 실제 전시장을 충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방식에서 전시의 성공 요인은 디지털로 구현된 전시가 실물 전시의 파생물 수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위상을 차지했는가에 있다. 두 경험 중 한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온라인 전시는 실물 전시의 단순 재현 외에 다른 작동 방식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유튜브 컨텐츠 역시 애매했다. 언제 가능할지 모르는(물론 얼마간 오프라인 오픈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실제 전시장의 오픈을 기원하는 것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전시 소개 영상이 관객 유치에 어느 정도의 효용이 있었을까. 현상에 맞지 않는 주제와 이전까지의 작동 방식과 소비 방식을 답습하는 형식은 의도를 무색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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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재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국공립 기관은 어땠을까. 이들은 지난한 개폐의 과정을 반복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기관들은 한 해 동안 총 4차례, 180일이 넘는 기간을 휴관했고 12월 5일에 시작한 네 번째 휴관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경우 2020년 한 해 있었던 총 11개의 전시 중 단 한 개, 박찬경 개인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휴관의 영향을 받았다.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2020.05.22-08.23)의 경우 전체 94일의 기간 중 절반이 넘는 54일을 휴관했고 고작 40일 정도를 열었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2020.09.04-10.25)은 52일의 기간 중 27일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설전을 포함, 몇 가지 기획전을 비교적 오랜 기간 진행하는 편이지만 3-4달의 기간 중 거의 절반을 닫아 두거나, 휴관 도중 전시가 그대로 종료된 전시도 있다.


미술관은 언젠가 올 개관의 날을 기대하며 문이 닫았을 때도 일 년 단위로 미리 정해진 스케줄에 맞게 작품을 설치하고 전시를 오픈한다. ⟪낯선 전쟁⟫(2020.06.25-11.08)이 기념비적 날짜인 6월 25일에 개막하기 위해 별도의 일정 조정 없이 휴관 기간에 전시를 진행한 것처럼 말이다. 공공 미술관에서 정해진 일정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일정 강행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 방식만을 고수하는 일의 당위성은 충분히 검토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미술관은 전시 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기에 전시의 새로운 방법론 뿐 아니라 장소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역시 요구된다. 이는 닫혀 있는 시간이 그저 유예된 시간이 아님을 의미한다. 물리적 공간이 당대적 시간과 맞닿았을 때 발생 가능한 분화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지난 한 해 여러 논의가 이루어진 만큼 새해에는 더 흥미로운 시도들이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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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홍콩을 오가는 크리스티의 라이브 옥션은 마치 옛날 옛적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에서의 이원 생중계 영상을 보는 듯한 낡은 기시감을 주었다.** 비대면 온라인 방식과 오프라인 경매장이 결합된 혼종적 형태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어색해 보일 뿐이다. 한편, 시장의 영역에 옥션과 함께 있는 아트 페어는 대체로 규모를 축소하고 온라인 뷰잉룸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아트 바젤 홍콩을 필두로 시작된 온라인 뷰잉룸 시스템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아트 페어에서 대안으로 선택되었다. 아트 바젤은 약 25만명 이상이 사이트에 방문하며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고, KIAF는 끝까지 오프라인 일정을 고민하다 마지막에 온라인으로 운영을 전환했지만 매출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과가 보여주듯이 온라인 뷰잉룸이라는 시스템이 아트 페어에 적합한 시스템인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볼 일이다. 이 시스템이 갖고 있는 장단점은 분명하다. 장점은 물리적 거리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진 관객 수와 참여 국가 수의 비약적인 증대이다. 그러나 작품을 사고 파는 것에는 언제나 치밀한 시장 논리가 수반된다. 작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단순 취향과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2020년의 아트 페어와 관련된 기사들은 대개 높은 접속자 수와 주요 작가들의 값나가는 작품들이 온라인에서 얼마나 팔렸는지 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처럼 작품의 디지털 이미지와 일련의 정보만을 통해 구매까지 이어져야 하는 온라인 뷰잉룸은 페어에 참여할 수 있는 작가 군의 허들을 높이고 만다. 철옹성 같은 시장의 진입 장벽이 더욱 공고해지는 것이다. 새로운 작가 층의 진입은 엄격한 셀렉션의 기준보다는 저렴한 가격대를 통한 높은 접근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쉬워진다. 거래는 대상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경험, 혹은 부담 없는 가격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충족될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손쉽게 충족 가능한 것은 대체로 가격에 관한 것일 테다. 한 예로, 아부다비 아트페어는 매 회, 비서구권의 동시대 미술을 소개한다. 버츄얼 아트 페어로 2020년 11월 19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지난 해의 행사 역시 우리나라를 포함 다양한 국가의 컨템퍼러리 갤러리들이 참여했다. 어떤 식으로든 국제 무대에 작가와 작품이 소개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웹사이트에 구현된 행사장은 그곳이 비엔날레가 아니라 페어인 만큼 ‘판매’라는 시장의 최고 목적의 달성을 위한 변별 지점이 무엇이었는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현 상황의 대안을 온라인-오프라인이라는 이분법으로 소급할 것이 아니라 각 장의 기존 방법을 딛고, 이로부터 우회로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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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시들은 일련의 상황들이 무색하게 여느 때만큼이나 많았다. 웬만해선 사람이 밀집될 일이 없으니 약간의 절차를 더하는 수고만 감수한다면 별 문제없이 전시들은 문을 열고 닫았다. 오프닝과 뒤풀이가 사라진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도 주지 했듯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한 각종 기금들의 확대가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원 기회의 증가와 지원 규모 확대는 일시적 개선책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생태계에는 큰 균열이 가해진다. 이 문제는 꽤 오랫동안 여러 이슈들로 이야기되어왔지만, 2020년은 이 상황이 더 없이 심화된 해였다.


그럼에도 ‘산업’이라고 부르지도 못 할만큼, 한 장르가 철저히 국가의 지원금과 기금의 형식에 기대서만 생존 가능한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예측 불가함을 예측 가능한 안정성으로 이끄는 것은 위험하지만 중요하다. 나는 미술이 어떤 대단한 가치를 표상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온전한 역할을 부여 받고 여타의 노동과 동일한 위상을 가진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미술의 형태는 가지각색일 수 있지만 그것을 실현 가능하게 만드는 주체가 단일자여서는 안된다. 이는 시장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수요와 공급의 층위를 다채롭게 하는 일, 조직적으로 존속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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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서바이벌의 파이널 라운드까지 생존한 최종 우승자는 누구일까? 2020년에는 모두에게 약간의 관용이 베풀어져야 마땅한 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무(無)승자로써의 자부심을 갖자. 이 모든 것은 누구도 가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익숙한 미래일지 모른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갑작스레 시작된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느슨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연결된 징후들이 있었다. 익숙하지만 다른 것, 다르지만 새롭지만은 않은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내일이다. 긴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모든 것이 같은 색, 같은 장면으로 보인다. 터널의 끝을 상상해보자. 그곳을 무엇이라 완벽히 전제하거나 대비할 수는 없지만 그저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열심히 상상하고 틈새를 비집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회로의 거름망에 남은 것을 건져 올려 지나간 것을 갱신해야 한다. 어쨌든 새해는 밝았고 무엇도 시간을 되돌리거나 지연시킬 수 없으니까.



* 각 기관별로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20.2.25~5.5/ 2020.5.30~7.21/ 2020.8.23~9.28/ 2020.12.5~ ‘로 총 4차례에 걸쳐 휴관이 이루어졌다.

** Christies’, ONE: A Global Sale of the 20th Century, 10 July 2020

*** 경매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29.7% 감소했으며 오프라인 시장 규모가 큰 폭으로 축소된 것에 비해 온라인 시장의 규모는 약 2.6% 증가하는 것에 그쳤다. (출처)

2018, 2019, 2020
이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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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니 고작 일 년 새에 여러 가지 것들이 바뀌었고, 바뀐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영화관이 문을 닫고, 책방이 문을 닫고, 전시장이 문을 닫을 때, 미술계는 팬데믹을 기점으로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또, 그곳을 찾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을까.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곳들이 문을 닫아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간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뉴노멀이라는 단어가 벌써 구닥다리로 느껴질 만큼 ‘새로운 일상’은 더 이상 새롭지가 않다. 그렇다면 그 이전엔 어떠했나. 도시 괴담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브레인 포그(brain fog)가 머릿속을 잠식하여 코로나 이전의 삶을 마치 전생체험과 같이 잠재의식에 의한 상상 속 기억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2018년도로 잠시 다녀와 보자.



"Teac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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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2018년도에, 무엇을 보았나.





게을러터진 나는 서울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는 편이 아니다. 적은 관람수에 대해 구질구질한 변명을 덧붙이자면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들이 많고(전시 서문이 있어야 기억하는 편), 굳이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SNS상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전시라면 과감히 보러 가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눈에 띄는 전시 홍보를 발견하면 날아가듯이 찾아가 여유롭게 감상했다. 가는 김에 옆 블록에서 하는 전시도 겸사겸사 보고 그랬다.


뭐든지 간에 일단 보면 즐거우니까.


비교적 조용한 지금의 서울 모습과는 달리 활발하고 다채로운 것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요나스 메카스 《찰나, 힐긋, 돌아보다》의 비디오 아카이빙, 프란시스 알리스의 《지브롤터 항해일지》를 보며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가도, 《팅커벨의 여정》을 따라 작고 발랄하고 귀여운, 소장하고픈 것들을 볼 수 있었다. 《Swinging》과 《Love Bomb》의 콜라보에서 서로 다른 무게의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었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사람들의 멜랑콜리함 이후 《밤의 괴물들》이 찾아와,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마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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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 파로키의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마르셀 뒤샹》을 시작으로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이렇게 (게으르게) 살면 안 된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그침이 있었다. 전년도와 달리 전시 오픈 소식을 접하면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무조건 갔다. 2019년 역시 전시장 소식을 SNS에서 확인했으며, 전시 소식을 알렸던 기존의 타 페이지들은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닌 이상 살피지 않았다.


전시 서문도 열심히 모았다. 언제 정리하고 언제 다시 들여다보게 될지 모르지만, 그냥 모았다. 모으다 보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기억에 더 잘 남는다. 서문을 챙기지 못했다면 보통 사진으로 남겨 SNS에 올리는데, 이 방법은 그다지 기억력에 좋지는 않은 것 같다.


4월 16일, 《바다는 가라앉지 않는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날을 기억했고, 《색맹의 섬》에서 외로이 노래하는 굴을 발견했다. 《불온한 데이터》에서 다소 뜬금없는 데자뷰를 느꼈는데, 그것은 필시 연초에 미리 인사를 나누었던 《마르셀 뒤샹》 때문일 것이다. 같은 연장 선상 위에서 《나는 너를 중세의 미래 한다 1》를 보고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로봇 청소기에 대한 이유 없는 반감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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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0년.





이젠 상황이 다르다. 이전에는 내가 내키면 가고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았는데, 시간과 체력이 남아돌아도 섣불리 전시장에 찾아가지 못했다. SNS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굳이 팔로우하지 않았던 전시장 및 기관들을 팔로우 했다. 전시 시작을 알리면, 먼저 해당 계정에 작품 사진이 얼마나 올라와 있는지 확인한다. ‘이건 꼭 봐야 해!’라는 생각이 들어도 이틀 정도는 고민한다. 결국 SNS에 올라온 전시 전경과 작품 사진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하고는 직접 찾아가지 않는다.


물론 팬데믹 이전에도 원본(작품)과 재현(작품 사진), 기록물(작품 사진을 SNS에 업로드한 결과) 사이의 관계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장이 가진 어떤 물리적 힘이 약화되는 현상을 갑자기 들이닥친 변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 확인되는 전시장의 모습(또는 작품)과 직접 방문하여 바라본 현실 사이에서 찾아오는 괴리감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반면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직접 찾아가지 못했어도 간접적으로나마 큰 만족을 느낀 전시도 있었다. 이때 감상자는 다시금 원본과 재현, 기록물 사이의 관계에 관한 위의 질문을 복기하게 된다. SNS를 통해 감상한 전시에 대해서, 정말로 내가 그것을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경로는 애초에 온라인의 형태로 진행된 전시의 감상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물론 작품과 직접 마주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어쩌면 만나지 않아 차라리 더 좋을 수도 있겠다.


많은 전시가 열리고 막을 내린다.


직접 마주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연을 위해 종합하기
황재민

2020년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나는 올해 읽은 텍스트를 모아 보기로 했다. 다만 모범적인 형태의 텍스트, 이를테면 책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고, SNS에 발행된 짧은 글이나 전시 공간에 있던 서문, 웹을 통해 읽은 기사 같은 것들, 자연스럽게 마주친 텍스트를 조각 모은다는 생각을 하며 썼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디스크 조각 모음’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체제에 내장된 프로그램으로,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파일을 재정렬해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것이 기능이다. ‘디스크 조각 모음’은 이제 ‘마이크로소프트 드라이브 최적화’라는 새 이름을 얻었는데 이 이름은 프로그램의 기능을 보다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드라이브 최적화가 아직 조각 모음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때, 나는 이게 무언가를 종합하기 위한 작동이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재정렬을 통한 최적화가 낭비를 줄이고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단순한 종합은 지연을 만들 따름으로, 상상은 오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도대체 어째서 최적화를 위한 기능에 조각 모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납득이 잘 되지 않고, 그러므로 어쩌면 둘 사이엔 알 수 없는 연결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최적화를 위해선 종합, 혹은 지연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최적화와 접근 속도를 지연시키는 종합이 원래 서로 잘 구분되지 않는 종류의 기능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결산은 최적화를 위한 것일까, 혹은 종합을 위한 것일까? 결산을 통해 접근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것이 좋을까, 혹은 속도를 지연시키는 게 좋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결산으로 한 해를 여는 기획을 위해 쓰며 나는 최적화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은 지연을 위해 종합하기가 되었다.


1. 《장식전》, 《이미지 인류학, 므네모시네 아틀라스》, 《방법으로서의 출판》의 텍스트


미술 전시에 놓였던 글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장식전》에 있었던 기획자 이상엽의 석사 논문 『동시대 미술과 장식의 새로운 관계성 연구: 미술로서 장식, 장식으로서 미술』이었다. 《장식전》은 ‘미술’을 불러내어 빈 칸으로 만든 다음 그 남는 자리에 ‘장식’을 넣어 발생하는 위상 변화를 조장하고 관찰하는 전시였다. 전시가 진행된 공간 ‘오래된 집’에는 그러므로 여러 종류의 (미술) 작업이 장식으로 제시된 채 있었는데, 그 광경은 ‘오래된 집’이라는, 낡은 가옥 두 채를 미술을 위해 고쳐 만든 공간이 뿜는 비릿한 선량함과도 맞아 떨어지는 바가 있었다. 전시에서 다종의 미술-장식물은 화장실부터 마당까지 공간 곳곳을 은근하게 차지했고, 쪽마루에는 참여 작가의 과거 도록 등 읽을 거리가 놓여 있었으며, 기획자 이상엽은 여기에 장식에 대해 다룬 자신의 글과 논문을 함께 두었는데, 이것은 놀라웠다… 석사논문이라는 것은 모두가 숨기고 싶어하는 금기의 텍스트로 이미 밈(Meme)화 되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 여기서 논문의 기획과 전개에 대하여 따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테지만, 이것은 전시의 기획이 꽤 오랜 시간 이론적 기획과 함께 발전한 결과라는 언질처럼 보여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는 전시 《이미지 인류학,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에서 김상길이 전시한 〈RE – M – OD – E – L SPACER+ REPEAT + SEQUENCE + CURSOR +〉가, 그리고 《방법으로서의 출판》에 전시된 류한길의 〈충격 관리자〉(포스터 디자인: 심규선)가 인상 깊었다. 김상길의 〈RE – M – OD – E – L SPACER+ REPEAT + SEQUENCE + CURSOR +〉은 일반 프린터로 출력된 듯 보이는 260여 장의 A4 사이즈 사무용지로, 미술 공간에서 텍스트를 전시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과 형식을 택한 듯해 오히려 인상적인 작업이었다. 나아가 이것은 주기적으로 갱신되는 텍스트로, 작업엔 전문을 웹 환경에서 다운로드하고 볼 수 있도록 링크가 함께 게시되어 있었다. 김상길의  〈RE – M – OD – E – L〉(하략)은 텍스트를 전시하기 위한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독해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시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더불어 류한길의 〈충격 관리자〉 역시, 목적은 독해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그런 듯 보였다). 작업은 포스터 형태로 제작된 짧은 텍스트였고 자리에 선 채 다 읽을 수 있는 길이였지만, 이 텍스트를 다 보고 나면 이것이 과연 완독이라는 실천을 허용하는 작업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다. 〈충격 관리자〉는 (현실이 아닌) 현실성을 “합법화”하는 “비자연적 회전체”(“비자연적 회전체?”)를 구성하고, 그것에 충격관리자라는 이름을 준다. 이 미상의 관리자는 현실성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구현 가능한 현실의 영역을 좁히는 괴이로 설명되는데, 이(들)에 의해 현실성은 계속해서 좁아질 것이기에 반드시 관리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필요하다. 탈출을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위장된 합법성을 통해 달성 가능한 허구의 기만술”인데, 완전한 비합법이 아니라 위장된 합법성을 상상해내야 하는 것은 완전한 비합법 역시 합법의 영역을 허용했을 때에만 활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충격 관리자〉는 이 기만술의 현실적인 구현 방법을 성공적으로 상상해냈을 때에야 비로소 경험이 가능하다.


김상길과 류한길이 전시한 텍스트는 비슷한 시기, 서로 그렇게 멀지 않은 미술 공간에서 체험할수 있었다. 전시장에서의 텍스트는 언제나 물성과의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들은 몇 가지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회피하거나 무시하면서 예술 텍스트를 독립적 영역에서의 대안 연구 행위 쯤으로 활용하고, 그것은 흥미로웠다.


2. 콘노 유키의 「조선통신사 월간 소식」, 권정현의 「총총레터」


2020년에도 뉴스레터는 계속되었다…. 정기적인 메일링 서비스는 어쩌면 등장했을 때부터 유행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메일 계정과 온라인 신청서 양식만 있다면 누구든 스스로의 편집자이자 발행인이 되어 작은 플랫폼을 가장할 수 있는 뉴스레터는 이미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으나, 차선책의 탐색이 절실했던 2020년엔 특히 눈에 띄는 형식 중 하나가 되었다.


나 또한 올해 몇 개의 뉴스레터를 새로 구독했고, 그 중 미술에 대해 다루는 서비스로 콘노 유키의 「조선통신사 월간 소식」과 권정현의 「총총레터」가 있었다. 콘노 유키는 1년 동안 한국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를 300개 이상 찾아보던 평론가이자 기획자였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세계적 대유행 상황 이후 한국에서 전시 보는 일이 어려워지자 대신 뉴스레터를 시작한다. 그는 2017년부터 2020년에 열린 전시 중 글로 갈음하지 못한 사례를 골라 평론하고 그것으로 시간을 만회한다. 모든 평론과 리뷰는 돌아보는 행위에 속할 테지만, 회고에도 규칙은 존재한다 - 이를테면 3년 전 열린 전시를 한 달 뒤 발행될 지면에서 리뷰하는 것은 어색하다. 하지만 2020년은 특수하게 가능한 종류의 회고를 허용하고, 「조선통신사 월간 소식」은 이에 맞춰 최선의 차선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뉴스레터의 기능은 그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권정현의 「총총레터」는 1주일 중 목요일, 매주 한 편 발행되었고 이 편지의 주된 기능은 (아마도) 전시를 골라 소개하는 일에 있었다. 「총총레터」는 발 빠르게 전시를 보고 인상을 정리해 짧은 리뷰로 소개한다. 리뷰를 이용해 다루지 못한 전시는 메일 하단에 목록으로 제공된다. (다만 오로지 미술 전시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전시는 많다. 그 중 무엇을 볼 것인가? 미술잡지는 늦고 네오룩은 아무도 보지 않고 아트바바엔 정보가 너무 많다. 「총총레터」는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의 문법을 따라 미술을 다루고, 그 결과물은 상수로 존재했던 정보 전달의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고등학생 때 학교 가는 전철에서 누가 무가지를 나눠주면 읽을 것이 생기니까 좋았다. 「총총레터」는 팜플렛처럼 접힌 작은 무가지를 읽는 기분으로, 매주 챙겨 읽게 되는 편지였다.


편지는 사적이고 내밀한 형식이다. 동시에 문자 메시지와 카카오톡 메시지, 그리고 DM의 시대에, 이메일은 그 무엇보다 공적인 형식처럼 보인다. 발행인에게 있어 뉴스레터는 공적인 무엇처럼 다뤄질 테다. 발행인은 신청서 양식을 공개하고 메일 주소를 수집한 뒤 다수에게 전달될 것을 염두에 둔 채 정보를 작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뉴스레터는 수신자의 메일함에 사적인 형태로 도착한다. 인터넷 세상 혹은 인터넷 이후의 세상에서 공적 공간이 온전히 열려 있으며 사적 공간이 온전히 닫혀 있다는 단언은 어렵다. 뉴스레터는 휘발되기 직전의 형태로 흘러가는 SNS의 타임라인과 비교적 단단하게 굳은 무엇으로 보이는 기존 텍스트 매체 사이에서, 그리고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사이에서, 자율적인 글쓰기를 허용하는 내밀한 지면으로 존재한다.


3. 제리 살츠(Jerry Saltz)의 글, 「4개의 미술관이 이 작품이 전시되어선 안 된다고 결정하다. 그들은 옳고 또 틀렸다.(4 Museums Decided This Work Shouldn’t Be Shown. They’re Both Right and Wrong.)」


2020년에는 《지금,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 Now)》이라는 제목으로 화가 필립 거스턴의 회고전이 계획되고 있었다. 《지금, 필립 거스턴》은 워싱턴 국립미술관과 휴스턴 미술관, 보스톤 미술관, 그리고 런던의 테이트 모던까지 포함하는 대형 전시로, 2021년부터 2022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9월, 4개 미술관은 공동 성명을 통해 전시를 2024년으로 연기할 것임을 밝힌다. 성명을 통해 공개된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한 전지구적 건강 위기였고, 하나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 이후 촉발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여파였다. 《지금, 필립 거스턴》을 위한 기획에서 특히 문제가 된 건 KKK를 다룬 25점의 작업으로, 이것은 백인 화가가 그린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연기를 선언한 미술관의 결정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술지 브루클린 레일(The Brooklyn Rail)엔 전시 연기에 대해 항의하는 공개 서한이 발표되었다. 약 2600명에 달하는 예술가들이 서명한 서한은 미술관의 결정이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우며”, 그들은 지난 5년간 활발히 논의된 인종 정의(Racial Justice) 문제에 대해 스스로 교육하고, 준비하지 못한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전시를 연기하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규탄했다. 서한은 필립 거스턴의 딸인 무사 메이어(Musa Mayer)의 입장을 인용, 거스턴이 주류 백인이 아니라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 구성원에 속했다는 점, 그의 작업은 백인주의의 과실(culpability)를 폭로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했고, 진정한 위험은 작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회피하려는 미술관의 결정에 있다고 주장했다.


위키피디아는 ‘캔슬 문화(Cancel Culture)’를 현대적인 형태의 도편 추방제도(Ostracism)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Z 세대의 시대 정신을 보여주는 새롭고 유독한 인터넷 문화로, 종종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인터넷 공론의 해악이자 최선의 경우 양날의 검이 되는 시민 운동으로 이해된다. 아마 공개 서한에 참여한 2600명의 예술가는 필립 거스턴의 전시를 연기한 미술관의 결정을 ‘캔슬 문화’에 굴복한 예로 여겼을지 모른다. 취소는 검열이며, 표현을 향한 억압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논쟁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미술은 자신이 주장한 혐오의 역사를 회피하는 대신 직시해야 한다. 이것 역시 공개 서한을 통해 전개된 주장 중 하나였다.


이슈에 빠르게 반응하는 평론가 제리 살츠 역시 정기 기고하는 문화지 벌처(Vulture)의 지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연기된 미술관의 결정이 옳다는 쪽에 힘을 싣는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그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주요 미술관의 주요 직위는 백인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그렇기에 미술관이 비백인 대중을 바라보며 무엇이 교육적이고 윤리적인 것인지 선보이는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제 미술관은 비백인 대중이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좀 더 귀 기울여야 옳으며, 거스턴의 그림이 전시되는 것은 백인, 더하여 남성으로 채워진 미술관의 주요 직위가 소수자에게 분배된 후여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선택이 ‘캔슬 문화’의 유독한 사례로 규정된 뒤, 그에 대한 대응은 종종 ‘캔슬 문화’ 그 자체의 방식을 모방한다. 한 쪽에서 무언가를 취소하라고 말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취소하는 것을 취소하라고 이야기한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현 관장 케이윈 펠드만(Kaywin Feldman)은 미술지 아트넷(artnet)과의 인터뷰에서 몇 가지 숫자를 짚는다. 그에 따르면, 워싱턴 국립미술관 기획 부서(Curatorial Department)는 구성원의 98%가 백인이다. 그에 반해 보안, 경비 업무를 수행하는 시설관리 노동자 중 83%가 비백인에 해당한다. 미술관은 얼굴 없는 진공의 공간이 아니고 그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검열과는 거리가 좀 있다.


필립 거스턴의 그림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의 그림은 매번 아이러니컬하고 쓰고 맵다.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거슬린다. 그는 1930년대에 보다 고풍스러운 화풍으로, 그리고 1960년대에는 익히 알려진 특유의 화풍으로 KKK단을 다룬 적 있다. 하지만 거스턴은 1930년대에 동료 화가인 루벤 카디쉬(Reuben Kadish) 등과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가 60년대에 남긴 그림은 명백히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혐오와 폭력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종교적 신비에 구멍을 뚫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제리 살츠는 글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상징물인 ‘MAGA 모자’를 쓴 젊은 대안 우파 트럼프주의자들이 KKK단을 다룬 필립 거스턴의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 찍는 장면을 상상하게끔 이끈다. 그렇게 촬영된 사진은 몇 가지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 등 SNS에 업로드될 테고, 그렇게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공유될 것인데, 그때도 그림은 여전히 그 대상에게 공격적일 수 있을까? ‘MAGA 모자’를 쓴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곁에서, 거스턴의 그림은 마치 트럼프주의자들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또 다른 용도를 얻는 것은 아닐까? 제리 살츠의 글은 원본의 맥락을 변형하는 전유의 방법론이 시효를 다했음을, 또는 미술관이 이 역사적 방법론을 보존하고 시연하는 최선의 장소가 아니게 되었음을 알린다.


4. 마테리알(ma-te-ri-al), 『질식자의 편지』, 그리고 정성일의 답장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2020년엔 비평지 마테리알 역시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현재 영화문화는 교수대에 목매달려 생명을 잃어가고 있”으며, “영화문화 옆에서 우리는 목매달린 채로 버둥거리고 있”다고 토로하는 이 편지에서, 6명의 공동 편집인은 13개에 달하는 질문을 내던진다. 질문의 숫자만큼이나 다루는 범위 역시 넓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무척 특정하기도 했다. 이 질문의 목록은 기성의 문화에서 지식과 권력을 생산하는 방법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영화문화라는 공동체를 향해 무엇이든 대답을 요구하는 편지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착한 회신 중 정성일의 글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성일에게 답장을 요구하고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이들이 어렴풋이 알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영화를 보고 골라내는 방법을 찾아 퍼뜨린 사람이자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체온을 조금 높여야 마땅하다는 규칙을 만들어낸 자로, 그에게 답장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규칙을 직접 입안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공동 편집인 함연선이 마테리알 웹페이지에 공개한 글 「수신인: 씨네21」에 따르면 기성의 영화문화 중 일부인 잡지 씨네21은 마테리알의 편지에 회신하는 대신 그들을 격려했고, 그렇게 선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피했는데, 이에 비하면 정성일의 답장은 의미 있는 결과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성일은 그의 글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에서,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마테리알이 송신한 편지 속 문항들에 대해 먼저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테면 “질식자”란 대체 무슨 뜻인가? 영화문화를 교수대에 걸어버린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 형벌 집행에 판결문은 있었는가? 그리고 ‘우리’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데? 그는 답하는 대신 재차 질문한다.


서한을 함께 쓴 편집인 gkd는 회신에 대한 또 다른 답장을 쓰며 정성일에 대해 “하나의 기능으로 작동”하는 “고유명사”라고 말한다. 그가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 문장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정성일에게 정성일은 어디까지나 개인일 테고… 고유명사로 작동하는 자신의 기능에 대해 스스로 해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gkd가 쓴 것처럼) 정성일의 답신은 우회기동이다. 정성일이 마테리알을 향해, ‘선생님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따져 묻는 대목은 특히 그렇다. 편지를 쓴 이들에게 정성일은 다름 아닌 선생님이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정성일은 이 편지가 바로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마테리알은 불균등한 지형 조건을 가늠한다. 정성일은 모든 사람들이 평평한 땅 위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은 절실한 인사로 끝난다.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건강은 내일을 성공적으로 예비하기 위한 다양한 조건 중 하나다. 하지만 죽음 없는 건강은 모든 체제와 질서를 이대로 건강하게 방치하는 요인이 될 지도 모른다. 이 모든 편지의 독자로 남은 나는 그의 안부인사를 오독한다. 그것은 가상의 평지 위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건강을 독려하는 인사말이다.


5. 루이즈 더 우먼(Louise the Women)의 창립문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젊은 여성 예술가들의 모임”인 루이즈 더 우먼은 창립과 함께 2개의 텍스트를 발행한다. '#안전한미술계를요구합니다' 해시태그와 함께 시작된 글「루이즈 더 우먼 Louise the Women의 시작을 알리며」라는 제목이 붙은 글은 1주일의 텀을 두고 발표되었고, 공통적으로 두 가지를 주장했다. 여성을 향한 모든 폭력을 방조하지 않을 것임을, 또 여성 예술가의 안전한 창작이 가능한 미술계 내부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립할 것임을. “우리는 당신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전문을 읽으시길.


6. 긴급재난문자


지난 2020년에 대해 알리는 텍스트적 상황과 사건 중 긴급재난문자를 빼놓을 수 없다. 진동과 소음을 이용, 전지구적 감염병 상황을 국지적으로 중계하는 해당 텍스트는 2020년이 어떻게 지연되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분명한 사례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도 스마트폰은 이 근방에 발생한 확진자의 수와 경로에 대한 링크를 전송하고 있다.

필링 스트레인지
김얼터

한 친구가 선물해 준 책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시와 소설을 좋아하고 있으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처음에 얼마나 지저분했던 걸까요.


2020년에는 몇 번이고 이 문장을 되새겼다. 이런 질문을 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림을 좋아하면 마음은 어떻게 될까. 설렘을 위해 이 사연을 쓴다.


몇 개의 전시를 짚으면서 몇 개의 회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텐데, 이 회화들은 내가 전시장에 직접 가서 본 것이며 좋다기보다 나쁘다기보다 이상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회화들이다. 이상하다는 감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미적인 것에 가장 가깝다.


첫 번째는 정경빈의 《위로가 되는 환상들》(갤러리175, 2020.09.15-09.27)《섀도우》(인스턴트루프, 2020.10.14-10.30)에 걸렸던 그림들이다. 《위로가 되는 환상들》에서는 전시장 입구 근처에 놓인 작업보다는 안쪽에 놓인 작업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색이 드물게 들어갔거나 흰색만을 사용한 이미지들이 마음에 들었다. 이때의 나는 2019-2020년에 유독 흰색을 중요하게 사용한 작업들이 많지 않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어 열린 《섀도우》에도 비슷한 그림들이 걸리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방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초록색을 사용하며 벽을 꽉 채우도록 걸린 네 개의 캔버스를 볼 수 있었다. 앞의 전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사용된 흰색의 작동 방식은 정경빈의 그림이 이상한 원인이다. 그것은 관객에게 복수의 시점을 요구하거나 시점 자체를 하찮게 만든다.


회화 오브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소위 ‘구상’이라고 부르는 회화들에서 특정 부분을 클로즈업하여 따로 보고자 한다면, 해당 회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이미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보기 때문이다. 회화는 가까워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 매체고, 많은 천재 미술가들, 소위 ‘추상’ 미술가들의 걸작은 그러한 특성을 잔인하도록 철저히 이용한 결과다.


정경빈의 그림이 요구하는 그림과 관객 사이의 거리, 혹은 관객의 시점은 최소한 두 개다. 첫 번째는 멀리서, 그림 전체가 보이는 위치이고, 이때 관객은 어떤 풍경을 볼 수 있다. 타오르거나, 흘러내리고 있거나, 쏟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이 풍경을 구성한다. 두 번째는 가까이서, 그림의 부분만 볼 수 있는 위치이고, 이때 관객은 물감과 캔버스를 본다. 마찬가지로 물감은 캔버스의 표면을 흘러내리고 있거나 캔버스 위에 쏟아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두 개의 시점은 하나의 회화가 작동할 수 있는 두 개의 방식을 제공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기존의 회화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것이다. 반드시 시점을 분할하여 두 개의 작동 방식을 마련한 의도로 제작된 회화가 아니어도 멀리서 보면 이미지가, 가까이서 보면 캔버스의 표면이 드러난다. (나는 여기서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의 유명한 영상 작품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정경빈의 그림은 왜 이상할까. 거기에는 ‘헛손질’이 눈처럼 흩어져 있다. 내가 ‘헛손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가 보라고 그려 놓은 게 맞나 싶게 그려졌으면서 동시에 어떤 의도를 띠고 그려진 부분들을 가리킨다. 정경빈의 그림에서 헛손질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보여지는데, 주로 사용되는 방법에 몇 가지가 있는 듯하다. 첫째로는 배경과 같은 색(주로 흰색)이어서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것의 양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다. 이 경우 헛손질은 홀로 있는 상태이며 은근한 색이 들어간 큰 캔버스 몇 개와 작은 캔버스 네 개가 모인 작업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경우에서는 헛손질을 따라 짙은 선이 따라 그려진다. 이 방법을 사용한 그림들은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다. 액체라든지, 물감이라든지, 아무튼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멀리서)이면서 동시에 흘러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면 투명하게 남아 있어야 할 캔버스 화면 위를 흘러내린다(가까이서). 또한 헛손질을 따라 그려진 짙은 선들은 어느 헛손질이 먼저 그려졌는지, 혹은 어느 헛손질의 양감이 더 두터운지 같은 순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순서는 완전히 조작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이 먼저 그려졌는지, 어떻게 그려졌는지 같은 제작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이 감춰지며 신비가 발생한다.


앞의 두 개가 《위로가 되는 환상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면 《섀도우》에서는 마지막 사용법을 볼 수 있다. 가우시안 블러가 적용된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화면에 그려 넣어진 흰색과 짙은 선들은 첫 번째나 두 번째 헛손질을 반전한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에서 흰색은 색조가 있는 화면 때문에 양감이 불어넣어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양감을 불어넣는 대상이며, 동시에 화면에 심도를 부여한다. 나는 줌 기능을 거꾸로 수행하며 그림을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두 번째는 한선우의 개인전 《Wishing Well》(FAS, 2020.06.20-06.26)에 전시된 회화들이다. 한선우 회화의 이상함은 그것의 ‘회화답지 않은’ 질감으로부터 온다. 그 질감은 회화의 능력을 한물간 것으로 만드는, 소위 새로운 매체들과 회화의 경계, 그리고 회화의 앞으로의 임무를 건드리는 한편 인스타그램으로 회화를 보는 행위의 의미를 의문에 부친다. 이 회화들은 타투의 한 장르 ‘스쿨(school)’과 블러, 오패시티, 페더(feather), 선버스트(sunburst) 등 포토샵의 주된 시각성을 조합한 듯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양쪽이 다 특유의 질감을 가진 장르인 점이 특징인데, 한 쪽은 인간의 신체를 캔버스로 삼고, 다른 한 쪽은 디지털 평면을 캔버스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서로 다른 것을 캔버스로 삼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질감에는 묘하게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쪽은 디지털의 질감인데, 특히 한선우의 그림에서는 높은 명암 대비, 흰색을 사용하는 그라데이션 표현에서 그러한 질감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한선우의 전시를 기록한 사진에서는 캔버스가 걸려 있는 벽이 사진 안에 존재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해진다. 촬영 시 화면의 네 모서리가 전부 이미지 안에 들어와 있고 ‘Acrylic on Canvas’라는 캡션이 없다면, 디지털 페인팅이라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질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Wishing Well》의 경우 벽에 붙은 이미지들과 캔버스 속 이미지들 간의 질감 차이가 거의 없어서, 한선우의 회화가 캔버스임을 보증할 수 있는 부분은 캔버스로부터 비스듬히 서서 촬영할 때 드러나는 캔버스 옆면의 두께나 캔버스 아래 붙은 그림자들뿐이다. 즉, 한선우의 그림에서 이상한 부분은 그것의 내용, 예를 들자면 한국 대중문화를 풍미했던 이미지나 특정 타투 장르와 포토샵의 시각성의 재구성 같은 것을 넘어 다른 매체의 질감을 놀랍도록 잘 구사하는 점다. 그런 질감 표현을 더 쉽게, 더 빠르게 할 수 있는 매체는 물을 것도 없이 포토샵이다. 그러나 한선우는 그것을 회화 캔버스에 구현하고 그럼으로써 여러 매체 사이의 경계를 가시화한다. 노련함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문주혜 개인전 《스킨케어 루틴》(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20.09.11-09.27) 또한 장지를 사용해 독특한 질감을 보여 주었다. 전시의 구성을 보면 우선 제목에 ‘집단’이 들어가는 작업이 몇 점, ‘풍경’이 들어가는 작업이 몇 점, 게임 스킨을 모티프로 삼은 그림들, 〈섀도우 게이볼그 +10〉, 〈우로보로스로 자동 이동 555km〉, 〈세라핌의 날개〉 등이 있었다. 앞의 작업들보다는 뒤의 작업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데, 그 그림들에서 ‘스킨’의 의미가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스킨은 무엇보다 효과(effect)다. 깃털, 불, 금사슬, 날개, 왕관, 연기, 반짝임, (주로 만화에서 사용하는) 오라 같은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효과로 가득한 문주혜의 화면에, 이 영광과 신비를 발산하는 근원은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은 효과뿐이다. 스킨은 다른 기능 없이 오직 효과만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매체다. 내용이 없고 메시지도 없는, 비어 있는 매체. 그렇기 때문에 스킨에는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누군가 왜 날개보다 왕관을 선호하냐고 묻는다면 왕관이 더 싸서, 날개는 캐릭터를 가리기 때문에 기능이 별로라서 같은 답변도 가능하지만 종내에는 ‘왕관이 더 멋있어’라거나 ‘그냥’이라는 답변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회화 또한 다른 많은 매체와 장치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효과를 창출한다. 회화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 선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때로는 특정 결과, 특정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화면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체를 장악하는 형태가 되도록 제작되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특성을 없애고 전체와 부분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얇게 함으로써 그 특성이 더욱 현저해지는 작업들도 있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것일수록 화면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규칙은 사진이나 영화, 디자인 등 다른 많은 장르와 매체들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문주혜의 화면 안에 삽입된 프레임, 액자 혹은 액자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스킨들에는 강조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강조하는 도구만 있고 강조되어야 하는 대상은 부재한다. 그럼으로써 강조되는 것은 어떤 매체가 어떤 효과를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장지는 어떤 역할을 수행할까. 앞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다.



마지막은 이동혁 개인전 《공회전》(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2020.05.07-05.28)《침묵이 바위를 깰 때》(에이라운지, 2020.10.06-10.24)다. 두 전시 서문은 모두 그림에 등장하는 종교적 분위기와 모티프, 도상을 언급하는데, 그림 앞에 선 나는 표면 아래에 있는 색의 역할을 고민했다. 우둘투둘한 표면의 색 아래로 언뜻 보이는 다른 색에게는, ‘배경과 형상이 뒤얽혀 있다’보다는 ‘둘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형상과 배경이라는 이분법은 회화가 걸리는 벽을 만나면 쉽게 하나가 된다. 이동혁이 만드는 신비로운 이미지들에서 간혹 천장이나 바닥 부분이 하늘이나 우주, 검정 같은 무한한 뚫림으로 처리된 것은 우리 세계의 많은 이분법들과 편의를 위한 경들이 우주 단위에서 바라보면 단숨에 동질한 것이 되어 버린다는 말을 건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주로 나가지 않고 지구 안에서, 더 좁게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그런 동일화를 손쉽게 해내는 것이 있다. 신앙이다.


신앙이란 세계에 신의 말씀을 덧씌우는 일이다. 여기서는 우연인 게 그다지 없어서 세계는 점점 더 완벽해지고 세계의 정합성은 계속 증가한다. 이는 물론 세계가 선하게 바뀌어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세계를 단일한 실재로 취급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악이 있는 만큼 선이 있고, 죄가 있는 만큼 회개가 있다. 이런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신의 뜻이라는 단어로 거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회화의 일과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어떤 그림들 안에서 세계는 완전한 형태로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처럼 완전한 세계를 상정하는 그림들도 분명히 그려지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시대가 세계를 설명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를 예술로 표현하려는 데서 기인하는 기품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동혁의 그림 안에서 세계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일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사실 정말로 이상한 건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림이라는 사물을 좋아하는 내가 아닐까?

🥠: 임정수
대답하는 사람: 임정수, 질문하는 사람: 김얼터, 기록하는 사람: 이지우

🥠는 ‘까 봐야 안다’를 슬로건으로 하는 인터뷰 코너다. 인터뷰의 형식을 경유하지만 특별한 목적지는 없기 때문에, 대화의 방향은 그때그때의 포춘(fortune)에 맡긴다.

임정수 임정수는
전문적으로 “독립하여, 자유롭게”
그 직무를 행할 수 있는 직업인이다.
체포된 자, 이송한 자,
취득한 자, 공여한 자,
의사 능력은 있으나 행위 능력이 없는 자,
위험을 발생시킨 자,
유가증권,
정을 아는 자,
알아낸 자,
허가 대상, II.
자연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하여,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
사회질서의 유지와 행위의 객체(는)
진실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기 또는 타인의 권리를 실행하기 위한
행위(는) 증거가 필요 없으며,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6) 시, 소설 등의 예술작품,
(8) 모래 위에 쓴 글,
흑판에 백묵으로 쓴 글(은)
위법성 조각 사유의 전제 사실에 대한
착오의 문제인
오상 방위로서 책임 고의가 조각되어

‘기억할 수 없다’ 또는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얼터 그간 먼 곳에서 잘 지내셨는지. 인터뷰에 응해 주어 감사하다. 우선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정수 일반적인 소개를 먼저 하자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을 2019년 8월에 졸업했다. 사용하는 매체는 설치, 퍼포먼스, 영상인데, 3가지를 아우를 수 있는 연결 고리와 순환에 관심이 있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주체의 전복’이다. 이를테면 주체라는 것이 어떤 카테고리 아래에서 이름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처럼 이름이 부여하는 구조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주제이다. 작업에서는 대체로 도시에서 포착된 풍경을 통해서나, 장식적인 물건들을 제시하거나, 혹은 표면을 이용하여 주체가 파편화된 상태를 말하고자 했다.


개인적으로는 성공적인 사생활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다. 사실 2020년이 되면서 정신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도 상황이 많이 바뀐 탓에 아까처럼 나를 일반적으로 소개하는 게 적당한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관심 주제를 어떻게 미술로 구현해낼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얼터 2019년에 있었던 개인전에서 그러한 관심 주제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퍼포먼스가 세팅된 무대 위에서 수행되면서, 카테고리나 이름, 혹은 표면을 바꿔 보는 방식으로 작동했던 것 같은데.


정수 퍼포먼스가 언어를 통해 구조화되지 않기를 원한다. 오히려 화면 안으로 퍼포먼스를 데려오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말씀하신 대로 설치가 퍼포먼스를 위한 무대 미술처럼 작동하는 것에도 일부 동의한다.


얼터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서울을 떠나 있어도 이곳의 소식을 간간히 전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미술 외에 요즘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다.


정수 요즘은 순간순간이 예술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웃음). 우선순위가 바뀌어서... 뭐랄까, 미술이 삶을 잠식시키지 않도록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과거와 비교해 볼 때, 그때의 태도와 지금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현재 뭘 만들고 그러지는 않고, 드로잉만 하는 정도다. 미술 외에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던 분야들을 찾아보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멋있는 말로 바꿔 부르자면 리서치 중이다(웃음). 꼭 작업으로 연결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세계사를 공부하고, 또 동양화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다. 내가 관심을 가져온 주제, 태도와 비슷한 부분을 동양화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동양화의 중요한 가치관, 동양 건축에서의 특징이 내 관심 주제를 다듬는 데에 쓰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또 가끔 동물 다큐를 본다. 주체의 전복은 어떤 기준의 중심점이 바뀌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사회나 무리 안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구획을 어떻게 나누느냐를 인간사회와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 비슷한 부분도 발견되고 다른 부분도 있어서 그런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이 재미있다. 불교도 공부하는데,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라서 불교는 약간 뜬금없긴 하지만, 어머니께서 불교신자이셔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산에 다니고, 절에 다녔던 경험이 있다. 외국에서 살다보니 약간 그립더라. 익숙해서 몰랐는데 살다보니 그 기억이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친 특별한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불교 교리가 정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고... 이를 통해 기존의 카테고리를 분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관심 주제와 연결되어있다고도 느낀다. 아마 (얼터 님도) 알고 계실 텐데, 그 이전부터 19년까지 열심히 달려왔기 때문에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얼터 정말 열심히 달리시다가 요즘에는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것 같다.


정수 우연히 운 좋게(?) 코로나 시기와 맞물렸다.


얼터 ‘코로나’가 나온 김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미술에 집중하는 시간을 줄였다 하더라도 서울의 미술을 아예 접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득 문득 바라본 서울의 풍경은 어땠는가?


정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서울에서는 팬데믹이 오기 전과 거의 비슷하게 큰 규모의 전시들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전시들은 팬데믹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온라인 상 발표를 전제한 기금 공모를 봤는데 한 사람당 주어지는 돈이 크더라. 그 돈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했다. 공간과 물질이 빠졌는데 거기서 어떻게 더 일을 벌이나. 일을 키우는 게 더 스트레스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한 팀에게 책정되는 기금의 규모를 줄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얼터 공연 장르 같은 데서 공연을 만들고 영상으로 남기는 과정을 염두하고 만든 기금 같다. 공연은 전시와 다르기 때문에 굳이 비교하자면 더 큰 액수의 인건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전시가 그 금액을 감당하려면 일을 많이 벌려야 했을 것이다.


정수 동의한다. 미술 작업은 온라인 행사를 위한 역할 분배와 재료 사용이 좀 애매하지 않나. 전시장에서 구현되는 상황과 온라인 상황의 차이가 다른 예술장르보다 큰 것 같다. 나는 팬데믹 상황이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시스템에 많은 조율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얼터 맞는 말이다. 오프라인 전시는 코로나 현황에 따라서 상황이 계속 바뀌었다. 국현미는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하면 바로 폐쇄했는데, 그래도 작은 공간들은 전시를 계속 열었다. 방역규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정수 다른 공간들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나?


얼터 예를 들면 일민이나 하이트컬렉션, 송은 등의 전시 공간은 금요일을 걸친 주말에 개방했고, 작은 공간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운영한 것 같다.


정수 내가 몸이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그건 좀 신기하다. 물론 한국에 있었다면 당연하게 생각했겠지만, 멀리서 보니 좀 인상적으로 보인다.


얼터 처음에는 약간 우왕좌왕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다들 고민에 고민을 거쳐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전시가 아예 없고 모든 전시 공간이 문을 다 닫았다거나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와중에 정말 좋은 전시도 많았고, 대규모의 전시도 있었다. 그래도 전시장에 갈 때는 마스크를 항상 두 개씩 썼다(웃음). 전시가 계속 열리니까 안 갈 수도 없고.


정수 나는 이것이 (쉴 새 없이 전시가 열리는 현상이) 또 하나의 기금 시스템 문제라고 본다. 포트폴리오 경력 기간 제한이 문제 중에 하나다. 대체로 창작분야는 최소 3년간의 이력을 제출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이 뭘 하다가도 3년 정도는 쉬거나 다른 것을 할 수 있지도 않나. 서울 밖으로 나오고 보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얼터 나도 그 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경쟁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작가를 비롯한 기획자들도 고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생각과 관심 주제 정리를 1년에 한 번씩 해야 하는 거니까. 그나마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예술인 경력을 인증하고 특정 소득 수준을 충족하면 300만 원을 정산 없이 지원하는 창작준비금 제도를 격년 시행한다.


정수 ‘돈이 있는데 왜 못했지’와 같은 질문을, 일종의 자기검열처럼 의식하는 습관이 있던 것 같다.


얼터 잘하든 못하든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지원하고 작가가 긴 호흡으로 관심 주제를 다듬어 나가게 하려면 격년제나 3년제도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어쩌다 보니 기금 욕을 많이 한 것 같은데(웃음).


정수 전체적으로 바라보다 보니까 기금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마음 속에서 미술이 약간 잠자는 중인지라... 시스템 문제가 더 보였던 듯하다.


얼터 그렇지만 놀랍게도 올해 적지 않은 수의 전시에 참여하고 발표한 결과물들이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정수 2020년에 운좋게도 몇개의 전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중간지점은 코로나를 상상도 못할 시기에 준비를 시작했다. 19년 말에 준비가 시작되었다.


오픈 며칠 전에 갑자기 한국에서 코로나가 터졌다.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던 순간이었다. 결국 오픈 못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미술관은 열어도 된다고 해서 열긴 열었고... 그리고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몰랐다. 나는 당시 이미 해외에 있었으니까, 보따리를 싸서 20년 초에 전시장으로 작품을 보냈다. 독일에서 먼저 발표한 작업들이어서 한국에서도 그 작업들로 전시를 한번 하고 싶었다.


아트선재 HOMEWORK와 시청각에서 발표한 것들은 텍스트가 주된 작업이었다. 팬데믹 후 어떻게 전시가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덕분에 미술 문법에 맞는 미술 작업이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만 발표될 수 있는 작업들을 발표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브런치>(2019)라는 작업이 있는데, 이 영상은 매일 새가 모이를 먹는 장면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이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박새에게 밥을 주는 행위를 매일 지속하기 위해 어떤 제스처가 계속되어야 하는, 그런 상황적인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발표하는 동시에 일상과 연관된 어떤 작업을 생각하자, 이 작업이 떠올랐고 그때 마침 태풍이 온 시점이라 <브런치> 작업의 연장선이자 태풍과 관련된 작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몸으로 직접 느끼는 것과 뉴스가 전달하는 것 정보 사이의 거리가 크게 느껴져, 내가 사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헷갈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눈앞에 있는 나무는 바람에 휘날리고… 내 신체는 (일단) 멀쩡한데 한국 뉴스에서는 태풍으로 피해가 크다고 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정보와 피부에 맞닿는 경험의 갭에서 내가 소화할 수 없을 만큼 컸었다.



(그림 1) 브런치, 싱글채널비디오, 54‘44", 2019.

(그림 2) 노 노데미지, 싱글채널비디오, 46", 2020.


계간 시청각 4호와 WESS의 일정은 2020년 초반에 시작했다. 이전 작업에서는 물성과 몸이 전시된 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이 중요했는데, 이때는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까 작품 스스로가 완결될 수 있는 작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환경적 여건 때문에 전시 《10 Pictures》에서는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견고한 작업으로 참여했다.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자면, 설치 전날까지 작품 하나가 도착을 안 했다. 작품 박스 세 개 중 한 개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웃음). 007에 버금가는 긴박함을 느꼈다. 긴급 작전에 투입된 기분이었다. 신기한 것은 설치날 아침 일찍 도착 문자가 오고, 다행히 잘 해결되었다. 한 달 전에 보낸 택배였는데. 사실 19년에도 몇 개의 전시를 준비 중인 상태에서 해외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기획자님들이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다. 거의 가족의 마음으로 돌봐주셔야 진행이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전시는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다.


얼터 그런데 그렇게 원격으로 전시에 참여하는 일이 단순히 팬데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어서 큰 방황을 하진 않았을 것 같다.


정수 맞다. 일찍이 정해져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얼터 《10 Pictures》에 놓인 작업들은 개인적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돌처럼 보였는데, 이전에 정수 님이 많이 썼던 재료 혹은 질감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서 재밌었다. 정수 님의 이전 작업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계열의 색을 사용하는 포장지들을 모아 투명한 봉투에 넣은 <유동적 균등 배분>(2017) 같은 작업이 떠오르는데, 그것을 무겁게 바꿔 만든 버전처럼 보였다.



(그림 3) 유동적 균등 배분, 종이, 테이프, 210*297cm*20개, 2017.


정수 덧붙이자면, 《10 Pictures》에서 발표한 작업 <1/30>(2020)은 재료의 범주에 크게 집중해서 작업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인테리어의 재료 중에 돌, 나무, 물 같은 자연물을 흉내 낸 그런 재료들을 자주 사용했었는데, 이전 설치나 영상 작업 안에 텍스트, 퍼포먼스, 공간 같은 다른 부분들이 더 부각되어 재료적 관심사가 덜 드러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13년도에 했던 페인팅 설치작업 <80개의 나무>(2013)가 있는데 그 페인팅 작업을 《10 Pictures》의 기획자님이 오랫동안 기억해 주셨다. 종종 그 작업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었는데 이번에 일종의 2020년 버전을 만든 것이다. 내 작업의 회화적 요소를 재미있게 봐주신 것 같다. 그래서 재료, 텍스트, 회화적 요소에 집중을 하는 동시에 조각으로 명명될 수 있는 작업을 생각하다 보니 바닥에 놓인 그림이자 납작한 조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시장 안에 있는 큰 창문이 인상적이었고 그 창문에 상응하는 그림자로 불릴 수 있는 바닥을 만들고 싶었다. 그림자이지만 돌처럼 보이고, 근데 또 돌은 아니고, 밤이 돼도 그림자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림이기도하고 그런.



(그림 4) 80개의 나무, 장지에 분채, 26*30cm*80개, 2013.

(그림 5) 1/30, 혼합재료, 191*354cm, 2020.


얼터 공간 안에 내 몸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만 알 수 있는 게 있지 않나. 이게 원격으로 가능할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특히 설치미술가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 예민하지 않나. 재밌는 경험이었을 것 같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HOMEWORK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자면, 태풍 이야기로 시작해서 쥐 이야기로 끝난 텍스트 작업이다. 처음에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작업을 온라인으로 발표하는 경험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런데 이 인터뷰를 하면서 두 번째 포인트가 생긴 것 같다. 정수 님이 <브런치>에 대해서 이게 작업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인 적이 있다. 이 말이 앱스의 콘셉트와 상응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려는 비평이 기존에 비평으로 여겨지는 텍스트들과 꼭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슈가 쌓이고 호수가 누적되면 비평의 한 방법론으로 세워질 수도 있겠지만.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직 작업이 되지 못한 생산물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다.


정수 온라인 작업 방식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자. 그런데 내 답변이 적절할지 확신은 없다. 개인적으로 팬데믹이 굉장히 오래갈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받아들여야 할 건 빨리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때문에 온라인의 발표와 실물 발표 사이에서 어떤 것이 다른가 논의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런 논의가 무용해질 만큼 빠르게 온라인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러나 <브런치>를 만들던 당시는 팬데믹이 오기 전이었다. 내가 매일 새에게 모이를 주면서 퍼포밍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앞두고 있던 전시들과 대비했을 때는 ‘이게 작업이 될 수 있을까’란 고민을 했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퍼포먼스와 가장 근접한 작업일 수도 있는 것 같다. 현재로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어쨌든 온라인을 통한 작업 발표는 오프닝도 없고 판매 절차도 없으니까 개인적인 성향만 따지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 꽤 편안한 환경이다(웃음).


얼터 HOMEWORK 같은 경우, 사실 굉장히 간단하지 않나. 간단한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묶는 프로젝트인데, 기존의 아트페어나 대량의 작가가 동원되는 메가 이벤트들을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2020년에는 기존에 메가 이벤트라고 불렀던 행사의 상당수가 개최되지 않았거나 기존 방식으로부터 크게 개편되어서 진행되었다. 아트페어나 아트마켓 같은 것들이 미술계 전체를 위한 포트폴리오로 기능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로 먹고 산다는 개념이 아니라, ‘나라는 작가가 있다’고 알릴 수 있는 자리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HOMEWORK 같은 방식을 통해서 웹 형태의 공용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품이 많이 들지 않고, 동시에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니까. 가벼운 만남의 광장의 느낌. 전시는 항상 복수로 존재하니, 모든 전시에 깊이가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수 동의한다. 품이 많이 안 들고, 빨리 모이고, 빨리 해체되고, 많은 사람들이 잠깐 와서 보고, 빨리 훑어보고... 나는 이런 현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으로 초점이 가 버리면 품을 적게 들이고, 빨리 생산되는 결과물들의 비중이 커지지 않을까. 무엇보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의 사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좋다.


얼터 최근에 책을 한 권 내신 걸로 안다. 텍스트로도 가끔 작업을 하시는 것 같은데, 온라인 발표와 출판을 통한 발표 사이에 천지가 개벽할 만큼의 차이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 차이점이 있나?



(그림 6) 배경배경, 온라인 출판물, 2020.


정수 2020년 가요대전을 본 적 있나? 그 무대 영상이 흥미로웠다. 지금 공연장에 관객이 못가는 상황이지 않나. 그래서 관객이 있는 것처럼 무대를 만들고, 함성 소리를 넣고, 카메라 무빙이나 그런 모든 게 관객이 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관객이 그 장소에 없으니 카메라 무빙이 이전에 비해 더욱 디테일해졌고 무대 세트가 크고 화려해졌다. 의상 퀄리티도 더 높아지고. 관객이 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영상의 촬영 기법과 함성 소리가 흥미롭다. 사실 뮤직비디오를 넣어 방송을 대체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뮤직비디오와 관객을 염두한 무대 영상의 퀄리티가 비슷해지는 것 같다. 거기에서 느낀 재밌는 지점은, 관객에게는 방송을 통해 그 무대 위에서 내 가수가 노래를 한다는 익숙한 사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넓은 범주에서 바라보면, 내 작업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았을 때, 홈페이지에 정리하여 기록된 작업과 책으로 낸 작업의 관계도 이와 비슷할 수도 있다. 가수의 실물 무대 연출과 카메라를 통해 본 무대와의 연결이 조금 다른 것처럼. 어쨌든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책으로 만들 수 있는데 만들지 않고 온라인에 게재하는 어떤 것은 조금 다르게 상정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낭만이라고 정의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정의내릴 수도 있겠다. 가수가 무대에 없는데, 무대에 있는 형식들을 만들어내서 낭만을 제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낭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낭만을 비웃거나 풍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도 중요한 작업들을 모아 책의 모습으로 한 번 더 정리했다. 온라인 창작물로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계속 필요하고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얼터 나는 그런 낭만의 장치들을 픽션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요대전 예시와 연결하자면 브이로그가 생각난다. 타인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지 몰랐고, 자기 일상을 소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지 몰랐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일상을 보고 있다고 전제하는 브이로그를 접할 때, ‘나는 저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은데’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픽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브이로그를 만드는 것 같다. 그게 브이로거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본다. 픽션을 진짜로 믿을 수 있는 것. 픽션은 믿어야만 운용할 수 있는 도구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브이로그가 싫다. 싫은데 이미 현실에 잘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게 존재하는 이유를 찾다 보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수 브이로그도 비슷한 전제인 것 같다. 사실 인포그래픽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더 유용할 수도 있는데, 그런 티비쇼 같은 형식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브이로그 찍는 사람들은 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예요~’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하다(웃음).


얼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용했던 것들이 팬데믹 이후에 가시성을 획득하면서 새롭게 생각해 볼만한 일들을 제공하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방송에서 가짜 함성소리를 넣었다면 함성소리가 들어갔다는 안내문구가 화면 하단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젠 누구도 거기에 관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문구가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은?


정수 사실 어떻게 보면 계획이라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상황인 만큼, 지금은 순간이 더 중요하다. 한 치 앞을 어떻게 볼 수 없으니... 이전에 익숙했고 학습했던 것들이 삶에 적용이 안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냥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정신, 몸, 환경의 건강이 계획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지금 상황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지 않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런 과정에서 여러 마찰이 일어날 것 같아 내면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술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화면 안으로 퍼포먼스를 끌어오면서 퍼포먼스의 범주를 넓히는 데에 관심이 있다. 이전 퍼포먼스 영상 작업들은 2020년 가요대전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퍼포밍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이것이 퍼포먼스를 한 건지 작업을 촬영한 건지 그런 고민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사와 동양화, 동물 다큐 이런 것들로부터 작업의 리소스를 찾고자 한다. 사실 2021년에는 어떤 계획이 세워질지 모르겠다. 지원 사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어서 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


얼터 안 하면 스스로가 한심한 것 같아서 싫지 않나.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자존감이 낮아지고, 되면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기쁘지만 해야 되는 일들이 마구 생기고.


정수 그렇다(웃음).


얼터 나도 마찬가지고, 아마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 같다. 좋은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들 들려주어 감사하다.

공(중)전
최보련

(lock with ink pen)은 이모지 🔏를 풀어 쓴 코너의 제목처럼, 이미지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텍스트를 게재하는 코너다. 작업이거나, 작업에 관련되었거나, 지금은 작업과 뚜렷한 관계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도 모르는 텍스트를 요청한다.

최보련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노뉴워크의 동료들과 『재관람차』를 함께 썼고, 개인전 《while True: do /Virga》를 진행했다.

‘나’를 거쳐온,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재 정렬하여 연대기적으로 서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략 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어제와 오늘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이웃들이 나를 구성해왔으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만 우연에 불과했습니다. 직선로나 우회로에 대해 논하는 열띤 토론에 슬쩍 올라타려다가, 텅 빈 테이블의 중앙과 부드러운 가장자리를 응시하게 되었고, 불현듯 테이블에게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서진 도로, 끊긴 도로, 잠긴 도로를 생각합니다. 부서진 나의 경로에서는 개연성이 작동하지 않고 앞에 먼저 간 것이 뒤따라오는 것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적의와 환대는 타당한 이유를 지니기보다는 동형존재자를 판별하는 곤충의 움직임과 비슷한 것으로 전개됩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도로가 전해준 소식>에서, 도로에 접한 오두막에 사는 부부는 어느날 평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줄행랑치는 자동차의 행렬을 목격합니다. 그 행렬의 끝에서 한 청년이 달아오른 라디에이터를 식히기 위해 물을 청하고, 차에 동승하고 있던 여자는 핵전쟁으로 온 세상이 끝장났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있는 경로는 소설 속에서 제공되지 않는데, 끝장났다는 그 ‘온 세상’이 무엇인지 오두막의 부부가 채 물어보기 전에 차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위상에 놓인 시간과 공간을 통과했는지, 그 시공간 속에서 어떤 우연이 양의 피드백 루프 속에서 증폭되었는지, 어떤 음엔트로피 기계가 가스라이팅이든 스포트라이팅이든 동원해 그 증폭을 감쇠시켰는지, 그 와중에 어떤 반딧불 같은 게 잔존했는지, 그 느리고 미약한 잔존은 어떤 형태의 느림으로 하나의 동기 내지는 가속을 만들어냈는지. 내가 작동하는 기계라는 점, 그리고 기계같이 작동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를 선택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자기소개서의 호환되지 않는 여러 판본에 맞춰 나를 다시 씁니다. 끊임없이 창출되는 포스트-나의 주관성 속에서, 부서진 도로라는 조건조차 ‘부서진 도로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극복 서사로 압출됩니다. 쓰레기는 더 외딴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밀려납니다.


인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는 곳을 바꾸거나, 만나는 사람을 바꾸거나, 시간을 달리 써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장소와 사람, 시간은 개별 조정이 가능한 파라메터처럼 제시되지만 기실 분리 불가능한 방식으로 뒤얽혀있습니다. 선택지처럼 제시되는 것들은 사실은 기껏해야 강매품에 불과합니다. 오지선다형 답안의 선택지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학생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까? 혁명의 시간에 개인은 자신의 것이 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삶에 개입하여 세계를 바꿀 것인지에 대답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당신은 싸움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얻을 것인지, 물러남으로써 비천한 평화에 머무를 것인지를 묻는 취조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이때 주어진 것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 의지를 뜻합니까? 혹시 한 마리의 쥐새끼가 되어 어두운 쥐구멍으로 빠져나갈 ‘선택지’는 없습니까?


나는 내가 선택한 것들의 총합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 진부한 우연들의 시시한 총합이자 이 필연적 우연들의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입니다. 이 돌림노래를 벗어나는 유일한 것은 의식으로 제어할 수 없는 틱(tic)으로 그것은 성급한 기대를 못 이기고 언제나 돌림노래보다 약간 더 앞서나갑니다. 틱은 돌림노래의 무한 루프를 중지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약간 어긋나게 만듭니다. 때로 이 어긋남은 육안으로는 분석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빨리 시작되고 끝나서 초당 프레임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분석 결과는 놀랍게도 수십 개의 마이크로 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끊임없이 진동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간접적 실재론자의 말마따나,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침묵처럼 들리는 것은 오버슈팅을 피하고자 지각이 데이터 갱신을 일시 중지하거나, 임의의 데이터를 물려놓은 결과입니다.


그렇게 어긋난, 미처 돌려막지 못한 구멍에서 불길하게 진동하는 저음을 따라가다가 불현듯 입력부에 근접하면 하울링에 연루됩니다. 매 사가 이런 식입니다. 계속해서 신변은 부서져 내립니다. 간신히 연명해온 인식론들, 실천들, 예술들은 건너방의 건반음처럼 뭉개집니다. 반복 녹음으로 평평하게 녹아내린 드론 사운드만이 오직 가능한 청취 경험이 됩니다. 이 부드러운 음향적 불확정성 속에 난폭한 광학적 전자총이 난입하면서, 매체 연합이 결성됩니다. 고해상도의 소음을 난사하는 이 매체 연합은 시한폭탄처럼 째깍대며, 다시금 쓰레기를 파묻을 사회적 뒤뜰을 게걸스럽게 탐색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집 뒤뜰에 혐오 시설을 두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가설적인 주권만을 지니고 있는 예비 입주민까지 합세한 쓰레기장 건립 반대 시위 속에서 사회적 뒤뜰은 더 바깥, 더 외곽의 지역으로 확장됩니다. 모든 것이 한없이 선명해지는 매체 연합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백색 소음은 전자적인 것에서 정서적인 것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시금 선명한 오디오 비주얼 절편들로 산산조각납니다. 모든 노이즈는 사전에 계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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